원래 사과에는 조건을 붙이는 것이 아니다. 어찌되었어거나 자기가 잘못했으니 상대로부터 용서를 구해야 한다. 어떻게든 상대가 아량과 관용을 베풀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과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잘못했으면 그 앞에 납죽 엎드리는 것이다. 잘못한 것도 잊고 오히려 동정심이 생길 정도로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내던지는 것이다. 사과를 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기도 하다.


내가 이만큼 반성하고 있다. 내가 이만큼 스스로 잘못한 것을 알고 반성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나도 아팠다. 나도 힘들었다. 나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잘못했으니 사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인정하고 용서해주어야 한다. 방점은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과가 아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노력할테니 아량과 관용을 베풀어달라는 좋게 말해 구걸이고 나쁘게 말해서 강요다.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개인의 관계에서 이따위로 사과했다가는 그냥 다시 보지 말자는 뜻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누가 사과하고 누가 그것을 용서하는 것인가?


아마 전에도 쓴 적 있을 것이다. 이 블로그였던가, 아니면 다른 커뮤니티였던가. 안철수는 대등한 인간관계에 대해 극단적으로 경험이 없다. 한 번도 실패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좌절이라는 것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대등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에 거의 무지하다시피하다. 정치에 입문해서도 자기에 대한 사소한 공격에 대해서조차 민감하게 반응하며 몇 년이나 지나서까지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대개는 정치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비난에 더 가까운 말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비난들에 대해 개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어떻게 그런 비난들을 현명하게 감정을 남기지 않으며 받아넘길 수 있을 것인가. 아직까지도 그 일로 문재인에 대해 개인적인 앙심까지 품고 있는 듯하다.


사과를 하면서 문재인과 문준용이라는 실명이 아닌 '당사자'라는 모호한 말로 뭉뚱그린 이유인 것이다. 차마 사과에서도 그 이름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꺼려한다. 문재인과 그 아들 문준용의 이름을 말하는 것마저 참을 수 없는 수치와 굴욕을 느끼게 만든다. 대상이 없는 사과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자신이 몸담은 정당 국민의당이 제보조작으로 가장 일차적으로 피해를 준 대상이 누구였는가. 자기까지 부화뇌동해서 적극적으로 그 사실을 미디어 등을 통해 문재인과 그 아들을 공격하는데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같은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없이 자기와 자기의 정당 국민의당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니 용서를 구한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반성하고 국민의당이 용서를 구하고 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세계는 오로지 안철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분명 최근까지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었다.


입으로는 사과하면서 정작 국민의당은 검찰수사에 불복하며 정부와 여당에 책임을 돌리는데 급급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들이 조작된 제보를 근거로 -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상관없이 - 정치적 공격에 이용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문준용씨의 이름으로 의혹을 밝히자며 특검까지 주장하며 나서고 있었다. 조작된 제보의 일차 대상이 피해자인 문준용씨였는데 그 책임을 회피해보자고 다시 문준용씨를 희생양삼아 걸고넘어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개인, 혹은 정당의 자세인가. 마치 선언하는 듯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문재인도, 문준용도, 민주당도, 그리고 국민들도 이쯤에서 용서하고 끝내야 한다.


하긴 언론들부터 그렇게 떠들고 있는 중이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정한 사실과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보다 강한 메시지였었다. 국민의당이 더이상 자신의 잘못을 가리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경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더이상 경색된 정국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된다. 여당인 민주당의 대표가 그런 식으로 국민의당의 상처를 헤집어서는 안된다. 누가 입힌 상처였는가? 도대체 누구로 인해 비롯된 상처인 것인가? 그래서 국민의당이 피해자인가?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정부와 여당에 책임을 돌리고 피해자에게 다시 상처가 될 수 있는 특검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어째서 일방적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가? 방송출연 열심히 하더니 진중권도 이제 주위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다. 청와대가 선언한다. 그런 식으로 부당하게 야당과 타협하느니 그냥 경색된 정국을 안고 추경도 포기하겠다. 추경이 당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야당과의 타협이 정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정치의 정은 바를 정이다. 먼저 잘잘못을 가리고 분명한 책임을 묻고 난 다음에 용서도 관용도 가능하다.


더 짜증나는 것이다. 분명히 잘못한 놈이 있고, 아직 자기의 잘못에 대해 전혀 인정도 반성도 않고 있는데, 정작 주위에서 용서하고 화해하라며 착한 척 난리를 치고 있다. 어째서 하필 그놈에게만 그리 관대한 것일까? 그리 정부에 날선 비판을 가하던 한겨레와 경향 등 자칭 진보언론들의 민낯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그들의 정의는 오로지 문재인과 민주당에만 적용되는 정의다. 그들의 진보는 문재인과 민주당을 비판할 때만 필요한 진보다. 잘잘못도 안가리고 책임도 묻지 않고 그러나 함께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하니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어쨌거나 이렇게까지 알맹이없는 사과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다. 아무리 막나가는 정치권이라도 이런 식으로 자기변명에 심지어 용서를 강요하는 식의 사과문은, 아 떠올랐다. 지금은 숫자로 불리는 그분이 꼭 이런 식으로 사과를 했었다. 하지만 정부차원의 사과란 개인의 사과와 그 무게가 다른 법이다.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기의 위치에서는 이정도 사과로도 정말 그 이상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새삼 깨닫는다. 일단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식인부터 되어야 한다. 세상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식과 정서에 대해 알아야 한다. 토론에서 보여준 모습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주위와의 관계를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적절히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좋은 집안에 공부도 잘하고 성공의 길만 걸었던 엘리트의 모습이다. 끔찍한 괴물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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