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위에서 두 사람이 다투고 있다. 한 사람은 99계단이라 말한다. 한 사람은 100계단이라 말한다. 그러자 누군가 끼어들어 그러면 정확히 그 중간인 99.5계단으로 하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한다. 그래서 과연 세번째 사람은 극단을 배제하는 중용인 것인가.


워낙 좁은 땅덩이에 갇혀 산 탓인지 모른다. 결국 집 문만 나가면 죄다 친척이고, 친구이고, 아니면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이다. 살벌하게 괜히 얼굴 붉혀가며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렵다. 내일 또 볼 사람인데 작정하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곤란하다. 그래서 적당적당히. 싸우지 말고. 더구나 절대권력 앞에서 나머지란 거기서 거기라. 자기 놔두고 싸우는 것이 전혀 곱게 보이지 않는다. 싸우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


하지만 정치란 원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가린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가를 따진다. 무엇이 적당하고 무엇이 부적당한가를 다툰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가장 나은 최선을 찾아간다. 논쟁하다 갑자기 상대를 사문난적이라며 몰아 죽이려 해서 문제지 싸우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간에 계단이 몇 계단인지 알려면 먼저 자기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르 밝힐 수 있어야 다음으로 진행이 가능하다. 싸우지도 않고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건 나쁘니까. 국민들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그러므로 싸우는 건 무조건 나쁘다. 싸우지 않는 자신들만 옳다. 99계단도 100계단도 모두 극단이니 99.5게단이면 딱 중용이고 중립이다. 가장 합리적이다. 그래서 그 99.5계단이라는 것이 현실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명확한 대안이 없다. 지향도 노선도 없다. 그냥 구호 뿐이다. 딱 듣기 좋은 말들만 가득하다. 그러면서 양극단을 비난한다. 정치에 관심없는 국민들 듣기에는 좋다. 어차피 정치인이란 그 놈이 그 놈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만을 키운다. 어떻게 해도 안철수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다.


싸우는 건 당연하다. 내가 옳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듣는다. 상대의 의견을 듣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지적한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오게 된다. 중용은 그 과정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기계적인 한가운데가 아니라.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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