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논거가 확실하고 논리가 훌륭하다고 그 주장이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편전쟁 역시 영국 의회에서 오랜 토론과 표결까지 거친 끝에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결정된 것이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 역시 선거에 의한 합법적인 것이었고 최소한 독일안에서 다수 독일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아니 독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에서까지 히틀러를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경우 히틀러의 집권과 이어진 전쟁과 전쟁범죄는 인간의 이성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례로 여겨지고 있다.


토론이라는 것은 누가 더 옳은가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공론이라는 것은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틀렸는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승자가 더 옳은 것도 아니고 패자가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 정해진 룰 안에서 그 결과에 따라 승자가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기로 약속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서로 토론하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논거와 논리들 가운데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들은 취합하여 드러난 문제나 아직 알지 못하는 단점들을 보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완벽한 것도 없다. 그런 만큼 더 주의를 기울이고 항상 의심하며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처칠도 히틀러에 뒤지지 않는 문제 많은 정치인이었지만 최소한 처칠은 그런 것들이 되었고 히틀러는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영국과 독일 양국의 운명이 갈렸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 말했는가?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사과하라. 이런 논쟁을 하게 된 자체에 책임을 지고 반성하라. 그래서 객관식 시험이 위험하다 말하는 것이다. 정답 외에는 틀린 것이다. 하나의 정답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틀린 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승자와 패자를 통해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 승자는 옳고 패자는 틀렸다. 승자는 옳고 패자는 틀렸으므로 패자가 처음부터 그같은 주장을 한 자체도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사람들은 옳은 한 가지 주장만을 했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절대 틀리지 않는 한 가지 주장만을 모두는 해야만 한다. 그것이 파시즘이다. 최소한 결과가 아닌 미래에 대한 예측에 있어 완전히 옳은 주장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때로 갈등하며 투쟁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이 끊임없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하며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며 단점이다.


사실 체제의 효율만 놓고 본다면 민주주의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은 제도다. 하나의 결정을 내리는데도 어쩌면 불필요해 보이는 많은 과정과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저 결정권자가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직접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참여시켜 수도 없이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고 표결까지 해야만 한다. 그러고서도 다시 정해진 절차를 밟으며 유예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혹시나 모를 독단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사회 전체가 나눌 수 있다. 아마 이번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과 관련한 공론에 참여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원전과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너무 등한히 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태한 이들의 민주주의는 중우정치가 되지만 적극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뒷받침된다면 집단지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그다지 설득력 없고 그래서 틀린 것으로 여겨지는 주장이라도 언젠가 다시 재발견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지금은 단지 막연한 우려이고 불확실한 예측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미 일어나고 난 뒤에는 늦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대립하는 의견과 주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것까지 충분히 고려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공론이 가지는 의미다. 수많은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 오류를 최소화하고 만에 하나 있을 문제들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안들을 찾는다. 그러고서도 혹시 모를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해서도 수많은 대비들을 세워 놓는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틀린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틀린 것처럼 보이는 의견이라도 상황이 바뀌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의견은 옳다. 다만 지금 현재 기준에서 더 나은 주장이 있고 더 괜찮은 의견이 있을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경우 어떤 변수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결론을 합의 아래 도출할 수 있다. 절차에 따라 합의된 결론은 권위를 가지고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이런 주장도 있었다. 이런 우려도 있었다. 그러니까 설득해 보라. 설득하지 못하면 설득당해야 한다.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그냥 원전이 좋다니까 건설하자면 건설하던 시대는 끝났다.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시민 자신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를 위한 보다 철저한 준비와 논의가 필요하다. 고려와 대비들이 필요하다. 벌써 언론을 통해 몇 번이나 보도되었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원전사고가 일어났음에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었다. 더이상 그런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그것을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들과 다른, 그들과 배치될 수 있는 주장들이 아무때고 그로인해 힘을 얻을 수 있다. 더이상 자신들은 단 하나의 정의이고 선택이 될 수 없다. 위기감이다. 그토록 보수정치인과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승자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승자일 수는 없다. 그 다양한 가능성에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여튼 객관식으로 세상을 배우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옳은 정답만을 강요하며 나머지를 배제하던 문화에서 자란 탓일 것이다. 하나가 옳다면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 하나의 옳은 주장이 있다면 모두는 그 옳은 주장을 따라야 한다. 옳은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마저 틀린 것이 된다. 하기는 인터넷에서 논쟁이라는 것이 게임과 같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진다. 누가 더 대세고 누가 더 소수다. 거기서 만족감을 얻는다. 심지어 자존감마저 얻는다. 그러니까 자신은 그만큼 옳고 대단한 존재다. 그러니 너희들을 찌그러지라. 무릎꿇고 하자는대로 따르라. 다만 네티즌만 그러고 있으면. 심지어 한 나라의 국회의원들마저 자기들이 이겼다고 기세등등 사과까지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그 사고와 논리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이미 늦은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원전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는 필요했었다. 후쿠시마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고, 더구나 한국도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 시점에서 한 번 쯤 원전건설을 멈추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가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전건설을 거부당할까봐 지금껏 회피해 온 결과가 이번의 공론회였던 것이다. 결과는 그들의 우려와 달리 탈원전은 추진하되 당장은 원전을 건설하자는 절충적인 것이었다. 급하지 않게 완만하게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무엇을 걱정했던 것일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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