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을 보는데 운수회사 상무 용석이 어린 수안에게 노숙자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한다.


"너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사실 용석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흔하게 자주 듣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일가친척, 하다못해 알고 지내는 동네 어른들까지. 


공부 잘해야 잘산다. 공부 열심히 해야 나중에 귀하게 된다. 공부만 잘하면 해달라는대로 뭐든 다 해줄 수 있다. 공부 잘해서 대학에만 가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다 해도 괜찮다. 그러나 공부를 못하면 사람들 앞에 나서서도 안된다. 무언가 바라거나 요구해서도 안된다. 어차피 공부도 못하는 놈들 미래는 뻔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내일은, 아니 지금은 과거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고 대가다.


본전생각이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인생에 가장 소중한 시절들을 밤잠까지 줄여가며 자신을 다그쳐 왔었는가.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나 못하면서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공부만 했었던 것인가.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부자가 되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을 떠올린다. 과연 너희들은 나만큼 고생하며 노력한 적이 있는가. 사회적 지위는, 상대와 자신의 위치는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은 노력을 했던 자신은 상대에게 무엇이든 함부로 할 권리가 있다.


믿기지 않을 테지만 실제로 그렇다. 비정규직이니 파견직이니 파업을 하거나 일인시위라도 하면 항상 따라붙는 말이 '그러길래 학교 다닐 때 남들처럼 열심히 했어야지'다. 자신이든 부모든 학교 다닐 때 열심히 하지 않은 탓에 그 수모 그 고생을 겪는 것이 아닌가.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현실의 부당함과 불공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젊어서 그리 노력을 했는데 나이 먹어 아직 경비원일까? 학교 다닐 때 그리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고작 택배배달원일까? 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갔다면 이런 몸이나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까? 그러므로 그래도 된다. 나는 노력했으니까.


공직자의 부정과 비리에 대해 오히려 관대한 것도 그래서다. 오히려 연에인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것도 연예인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돈을 잘 버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저 타고난 매력과 재능만으로 쉽게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부를 손에 넣는다. 그러므로 비판한다. 노력하지 않는 그들에 대한 공격은 정의다. 반면 공직자는 그만큼 노력해 왔고 결과로써 자신의 노력을 증명한 이들이다.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해서 지금의 위치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만한 비리 쯤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지위도 높기에 더 엄격한 책임을 요구하기보다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부러움과 질시를 보낸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실력주의 경쟁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그렇다고 경쟁의 결과가 오로지 실력과 노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진실은 보려 하지 않는다. 노력해야 성공하는 정의로운 사회여야지만 지금 자신의 노력은 의미를 갖는다. 어찌되었거나 지금 자신이 노력하는 보답을 기대할 수 있다. 당장은 우울하고 힘들더라도 내일의 희망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주위의 환경이야 어쨌든 노력했으니 성공한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처음의 조건이야 어떻든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으니 지금의 처지가 된 것이다. 믿음을 현시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더 밀어붙이기도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의 부당하고 불합리한 핍박에도 한 마디 변명조차 못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자신이 믿는 정의의 증거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단지 강자가 현실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약자가 자신보다 열위에 있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정의여야 한다. 가치판단이 개입한다. 강한 것은 옳다. 약한 것은 그르다. 남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은 항상 옳다. 남들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은 항상 그르다. 노력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노력은 선이다. 노력은 정의다.


어째서 헬조선인가. 그것을 알아버렸으니까.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간 젊은이들이기에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어른들이 말한 정의는 없다. 노력만 하면 잘사는 공정한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최소한 이 나라에는 없다. 노력해도 못살고, 실력이 있어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노력 이전에 타고난 환경과 조건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 과도기다. 비로소 현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천정과 바닥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같은 사회에 살고 있지만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저들이 사는 세계와 자신이 사는 세계가.


그러면서도 결국 굳이 누군가를 차별하려는 것은 그들이 배운 것이 그런 것들인 때문이다. 혹은 외국인이라서, 혹은 여성이라서, 혹은 연예인이라서, 그리고 당연히 그들이 차별받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도 있어야만 한다. 여성은 노력하지 않는다. 여성은 성실하지 않다. 외국인은 한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연예인은 놀고 먹는 족속들이다. 그들의 헬조선은 타인을 증오하고 경멸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인세의 지옥이다.


어째서 유독 한국사회에서 갑질문화가 이토록 지독히 뿌리내리고 있는가. 차라리 중세의 신분사회와도 같다. 그런데 정작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행세할만한 집안인 경우는 그리 없다. 그들이 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도덕적 당위다. 갑질은 정의롭다. 갑질은 당연하다.


뿌리뽑히지 않는 이유다. 이미 한국인의 삶 그 자체다. 갑질 없이는 경쟁한국도 존재할 수 없다. 잘사는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다. 못사는 나라들은 게을러서 못사는 것이다. 우리는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보다 더 잘살아야만 한다.


우울한 초상이다. 비참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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