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간단히 사람을 아주 좁은 공간에 촘촘이 우겨놓고 생활하라 하면 어떻게 될까?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밀집된 도시의 평균수명은 형편없이 낮았었다. 건강을 위해서 도시를 벗어나 시골의 자연에서 요양하는 것은 최근의 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보건과 위생이 열악했고 쉽게 전염병에 노출되었다. 지금과 같은 거대화된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동물이라고 다르지 않다. 가둬서 기르는 소는 필연적으로 성인병을 앓게 된다. 근육에까지 촘촘하게 지방이 박혀 있는 상태가 결코 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들판을 뛰어놀라고 진화한 동물인데 좁은 우리에 가둬 기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정상에서 벗어난 환경에 동물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 면역력 등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부분들마저 열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쓰는 것이 항생제다. 그리고 좁은 케이지에 갇힌 채 진딧물 등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닭들을 위해서 살충제가 쓰이기도 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그것이다.


자연상태에서 굳이 닭에게 살충제를 쓸 필요가 없다. 자기가 알아서 다 해결할 수 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으로 기생충 등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 그렇게 진화해 왔다. 하지만 양계장 케이지 안에는 닭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철제 케이지와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먹이 말고는 오히려 사방에 분뇨와 분비물이 그대로 방치된 불결환 환경에 노출되어 있을 뿐이다. 정상적으로 닭이 살아있는 자체가 기적인 조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살충제를 뿌리고, 항생제를 쓰고, 그 모든 것은 사람의 입으로 다시 돌아온다.


벌써 오래되었다. 인간이 무분별하게 바다로 흘려보낸 중금속들이 상어지느러미와 참치 등을 통해 다시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그 사실을 알고 나는 해산물 종류는 어지간하면 거부하게 되었다. 특히 기업친화적인 역대정부로 인해 제대로 환경에 대한 규제와 관리가 안되고 있는 근해의 해산물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무심하게 강으로 흘려보낸 그 물들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이번 살충제 계란 파동도 마찬가지다. 물론 덕분에 계란을 싸게 사먹을 수 있기는 하다. 정상적으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닭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계란을 생산한다면 오래전처럼 계란은 아주 귀한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계란을 아무렇게나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닭들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만큼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닭에게 먹이는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그리고 이번의 살충제까지. 결국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편리와 안락을 위해서 그나마 덜 해로운 항생제와 성장촉진제, 살충제를 개발하려 할 것이다. 자본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돈이 된다. 이익이 된다. 그렇게 인간의 사회는 첨단화 고도화된다.


살충제 계란이 유통되는 현실보다 살충제를 독하게 쓰지 않으면 안되는 양계장 계사의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 그곳에서 평생 햇빛도 못보고 알만 낳다가 노계가 되어 다시 고기로 팔려나가는 닭들의 운명 또한. 그런 편리를 누리며 사는 인간이기도 하기에 현실의 모순에 대한 자괴감마저 느끼게 된다. 역시 인간이 너무 많은 탓일까. 이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지구의 체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대안이 없으니 비판도 함부로 못하겠다. 더 건강하고 더 비싼 계란과 덜 건강하지만 그래도 값싼 계란 사이의 선택은 너무나 분명하다. 계란이 비싸서 아예 사먹지 않은지가 꽤 되었다. 운동을 할 때면 계란을 삶아서 하루에 몇 개 씩 먹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차라리 단백질보충제로 그것을 대신한다. 그래서 말하지 못한다. 비싼 계란을 사먹지 못하는 흔한 주제일 것이므로. 인간이 잔인한 것은 삶이 잔인한 때문이다. 항상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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