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몇 년 전엔가 성폭행당한 피해자가 가족이 합의해줘서 가해자가 무죄로 풀려난 것에 항의해서 소송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피해를 입은 것은 자신인데 어째서 상관도 없는 가족이 멋대로 합의하고 그를 이유로 무죄가 되어야 하는가. 타당하다.


만일 모든 범죄가 가해자 개인에 의해 피해자 개인에게 단지 사적인 피해만 입히고 마는 것이라면 어쩌면 형법이라는 자체가 필요없는 것인지 모른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일이다. 오로지 개인과 개인 사이에 발생한 피해다. 그런 경우 가해자의 귀책 여부를 판단하여 피해를 최대한 복구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법이 따로 있다. 바로 민법이다. 국가는 단지 개인과 개인 사이에 발생한 분쟁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조정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헤어지자는 동거녀를 살의가 있었든 없었든간에 폭행해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죽은 피해자의 시신을 암매장해서 그 사실을 은폐하려 시도했었다. 1심에서 나온 5년의 징역조차 사실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약한 처벌이다. 아마 암매장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나 훼손이 심한 상태였을 시신에서 가해자의 고의성여부를 입증할만한 단서를 찾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능한 개인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피고에게 유리하도록 판결내려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리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려 20년이나 떨어져 살았던, 아예 인연을 끊은 상태였던 아버지와의 합의와 탄원서를 이유로 그마저 감형을 하게 되다니. 피해자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것인가?


설사 살인이라는 범죄가 말한대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일어난 개인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살해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인 것이다. 가해자를 용서하든, 합의를 통해 보상을 받든 오로지 피해자 자신에게만 모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가 피해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가해자를 임의로 기소해서 처벌하려는 것은 단지 피해자가 입은 피해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보편의 질서이고 가치다. 공동체 안에서 누구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서로가 서로의 물건을 빼앗는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위해를 가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는 안정적으로 지켜지고 유지될 수 있다.


누군가 합의에 의해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기로 했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고 약속한 대가를 받은 뒤 그 사람의 노예가 되기로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서로 합의한 행위이니 이것은 합법인가. 자기가 원해서 노예가 되기로 한 것이니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용인되는 것인가. 어째서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인데 말리지 않았다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처벌하려 하는가. 엄격히 이같은 범죄의 진짜 피해자는 노예로 부려지거나 자살로 목숨을 끊은 개인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며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훼손된 공동체 자체다. 어쩌면 살릴 수 있었던 한 사람의 구성원을 잃어야 했던 공동체 자체인 것이다. 보편의 양심이고 상식이고 윤리고 가치다. 공동체 구성원 다수가 공통적으로 믿고 따르던 원리이고 원칙이다. 그럼으로써 공동체는 유지된다. 그런데 누군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이를 폭행하고 살해한다. 법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암매장까지 한다. 그런데도 단지 개인의 문제인 것일까?


아직 근대적인 보편사회에 들어선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일은 개인의 일이다. 개인의 책임 역시 개인의 책임이다. 공동체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가치나 기준을 뒤로 물린다.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 자기가 알아서 책임지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제도 개인단위로 자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살인의 처벌도 피해자 개인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니 유가족이 합의해서 가해자의 책임을 정한다. 니가 알아서 살고 죽으라. 그러고보면 꽤나 오랫동안 그런 생각들이 당연한 정의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이번만이 아니었다. 밀양성폭행사건에서도 결국 가해자를 용서하도록 합의한 것은 같이 살지도 않던 이혼한 아버지였다. 합의금조차 나눠주지 않았다. 자기 주위사람들과 나눠쓰다 알콜중독으로 사망하기까지 한 번도 피해자를 찾은 적도 없었다. 단지 가족이기 때문에. 아버지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지금도 떳떳하고 당당하다. 혹시라도 가해자들과 숨이라도 같이 쉴까 그래서 밀양 주위는 얼씬도 않는다. 밀양 출신이고 그 나이 또래면 일단 경계심부터 가지고 본다. 제대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고통과 굴욕을 겪었을 것은 피해자인데 정작 피해자에게는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이 사회의 정의인가.


형량까지는 솔직히 그러려니 했었다. 사법의 원칙이 그렇다. 최대한 피의자에게 유리하게.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인 것이고, 살해의도를 입증할 수 없으면 치사인 것이고, 그래서 나올 수 있는 형량 가운데 최소한의 것을 적용해야 한다. 하지만 설마 그 사이에 피해자의 아버지가 개입되었을 줄이야. 확실한 해명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죄질이 이토록 안좋은데 달라진 것이라고는 아버지와의 합의와 탄원서 뿐이다.


공동체라는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다. 한 번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다. 그런데 불행한 기사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차라리 그런 이름없는 다수의 대중이 핏줄만 이어진 아버지보다 더 가까울지 모른다.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너무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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