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김정은이 벌써부터 비핵화를 결심하고 준비했다고 대한민국 정부의 역할이 아주 없었는가. 아주 간단한 예다. 지난 20년을 돌이켜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두 정부가 있다. 한 정부는 북한에 유화적인 대신 미국과 그다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 한 정부는 북한에 적대적인데 대신 미국과 친해서 이야기도 잘 통하는 것 같다. 그러면 북한 입장에서 어느 정부에 더 믿음이 가겠는가. 전자? 아니면 후자?


문재인 대통령도 몇 번이나 강조한 바 있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해 온 바이기도 했다. 북한 핵문제는 남북문제라기보다 북미문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자체가 대한민국이 아닌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협상의 수단으로 삼든, 아니면 혹시 모를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한 것이든. 어찌되었거나 미국이 나서야 북한 핵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동안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것도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미국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었다. 미국이 충분한 대가를 약속해야 북한도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해결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누가 결심하고 나서야 진정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는가. 대한민국 정부 혼자서는 안된다. 그나마 김대중과 클린턴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평화적인 해결에 협력했을 때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기도 했었다. 문제는 서로 성향이 전혀 달랐던 김대중과 부시, 그리고 노무현과 부시의 조합이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 말기 마치 한나라당의 집권을 지원하기라도 하듯 때맞춰 미사일 발사실험을 하던 정황도 이해하게 된다. 실제 이명박은 노무현과 달리 처음부터 미국 대통령 부시와 매우 친밀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만일 이명박이 부시를 설득해서 북한 핵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도록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땠을까?


문제는 부시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의 사이는 전보다 더 좋아졌지만 반대로 북한과의 사이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전 노무현 정부에서 했던 모든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아예 무시당하고 있었다. 북한의 잘못도 책임도 물론 컸었지만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 것이 도저히 북한이 믿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마 박근혜는 북한을 적대하는 것은 같으면서 미국과의 사이까지 안좋았다. 어차피 친해질 수도 없고 친해져봐야 좋아지는 것도 없다. 입으로는 통일은 대박이라 외쳤지만 사실상 남북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던 것이 바로 지난 박근혜 정권이었다. 그러면 지금 문재인 정부는 어떠한가.


그래서 정의당 김종대 의원도 문재인 대통령을 일컬어 트럼프의 푸들이라 불렀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한신이 부랑배의 가랑이를 기어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긴 굳이 그런 꼬이고 맺힌 생각 따위 없이 그 순간 오로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의 열쇠는 오로지 미국에게 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오로지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트럼프를 설득해야 한다. 트럼프의 호감과 신뢰를 얻어야 한다. 미국의 동맹이며 나아가 친구임을 확인시켜야 한다. 미국의 지지와 동의 없이 대한민국 정부 혼자 앞장서 봐야 고작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동의와 지지가 없어서 결과를 내지 못한 것 뿐이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행보는 대통령 당선 이전 문재인의 발언이나 행보에 비추어 파격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친미 일변도를 보이고 있었다. 친미라기보다는 친트럼프였다. 그래서 신뢰를 얻었고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런 대한민국 정부의 모습은 그렇지 않아도 핵개발로 인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북한에 중요한 신호가 되어 주었다. 지금이라면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을 설득해서 대화의 장으로 이끌 수 있다. 평화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북한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마치 누가 들으라는 듯이 미국과의, 특히 트럼프와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행동은 미국 정부의 동의와 지지 아래 시도되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면 북한의 요구 또한 대한민국 정부를 통해 미국에 전해질 수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 보낸 메시지의 정체였다. 평창동계올림픽은 체면을 중시여기는 북한정권을 위한 명분이기도 했다. 세계인의 축제이자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을 명분삼아 대한민국과 대화의 물꼬를 트고, 여러 나라의 정상들이 모이는 것을 기회로 자연스럽게 미국과도 접촉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오늘 낮에 쓴 소설로 이어지는 것이다. 만일 개회식장에서 실제 펜스와 김여정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비핵화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면 얼마나 쉽고 간결하고 보기 좋았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의 신뢰와 지지를 잃지 않았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동의 아래 북한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대한민국 정부가 파견한 특사단은 귀국하자마자 미국으로 김정은이 전한 진짜 조건을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가 굳이 평양으로 특사단을 보낸 진짜 이유였다.


주성하 기자와 생각이 약간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집권 초기는 그만큼 권력기반도 불안해서 독단적으로 비핵화까지 밀어붙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거치며 나름대로 상당한 기반을 가진 실력자들도 적지 않았고, 그 가운데는 중국을 배후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던 이들까지 없지 않았다. 김정은이 굳이 자신의 이복형 김정남을 무리해가며 타국에서 암살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위협이 될 수 있는 경쟁자를 먼저 제거하고 권력기반을 공고히하고 난 다음에야 자기가 원하는 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어쩌면 이 또한 때가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김정남도 죽고, 어느 정도 내부단속도 이루어지고,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사정도 나아지면서 국민적 지지 또한 높다. 핵무기 개발이 상당한 궤도에 올랐다는 것도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미국과의 관계에 나설 수 있게 한다. 그런 때 적절한 상황에 적절한 대처로 마침 필요했던 북한의 대응을 이끌어냈다. 어쩌면 김정은이 받았다는 친서에도 김정은이 그토록 바라던 속내가 그대로 들어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모두 뒤늦게 추측한 것 뿐이다. 이런 모든 것을 미리 알았다면 내가 대통령 했다. 지나고 보니 이랬더라. 지난 참여정부에서 문재인이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던가.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그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무심한 가운데 과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그 대안을 궁리하고 있었다. 정말 천운이 대한민국을 돌봤다고 말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탄핵이 없었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더라도 조금만 늦었으면 지금 남북문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핵문제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을까?


정세현 전통일부장관의 인터뷰를 들으며 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다. 남북미 당사자들은 모두 그 결론을 알고 있었다. 원래 외교란 그런 것이다. 외교란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기술이다. 예술의 경지다. 외교도 이렇게 예술같이 아름다울 수 있다.


미국의 반응은 걱정하지 않는다. 미국이 내놓을 조건 역시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다만 역시 요식절차다. 겨우 물꼬를 텄다. 돌고 돌아 하늘의 때와 사람이 만나 다시 한 번 기회가 돌아왔다. 정말 다행이다. 겨우 숨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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