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다름아닌 토지에 대한 예속의 정도와 강도에 있다 할 수 있다. 봉건사회 이전에는 농업의 생산성 자체가 그다지 높은 편이 못되었었다. 어차피 농사에 불리한 지역이라면 죽어라 땅만 파기보다 다른 일을 해서라도 식량을 사들일 재화를 만드는 편이 유리했다. 아니면 무기를 들고 남의 것을 빼앗던가. 당연히 근대 이후에는 공업의 생산성이 농업의 생산성을 한참 앞지르고 있었다. 더이상 토지에 집착하기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면 그같은 생산수단의 차이가 어떤 식으로 사회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일단 모든 사고와 행동이 토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단 땅만 지키면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 농사만 제대로 지을 수 있으면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불확실한 다른 수단에 기댈 필요 없이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땅을 지키며 어김없이 농사만 잘 지으면 된다. 새벽같이 일어나 들로 나가 해가 저물 때까지 밭을 갈고 김을 맨다. 봄이면 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이면 김을 매고 벌레를 잡고, 가을에는 익은 열매를 수확해서 저장한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대로 물꼬를 내고, 배가 내리지 않으면 개울이며 저수지를 찾아서 물을 퍼다 나른다. 자신의 삶이 아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다. 토지가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이 토지를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이 시기 아이를 많이 낳는 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한 노동력확보의 의미가 더 컸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임신해서 낳았던 자신의 소유인 자신의 아이여야 했다.


즉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이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았었다. 목적으로서의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았었다. 목적은 오로지 토지였다. 나를 먹여살리고 집단을 먹여살린 토지를 위해 모든 것은 존재해야만 했다. 그러면 그 토지를 위해 존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농경사회에서 일찌감치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나타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그저 농민들이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농민이 자신을 수단으로 삼아 토지라고 하는 신을 마음껏 경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면 되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어느 농민은 격양가를 부르며 왕을 능멸했던 것이었다. 정확히 농민이 격양가를 부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고대 군주들의 역할이었다. 일일이 농사 이외의 일에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끔 역할을 지정하여 토지와 함께 세습케 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였으므로 다수인 농민들이 그 토지를 세습하고, 정확히 토지에 예속되어 세습되고 그 농민들을 위해 정치와 군사등의 역할을 맡을 특권계급이 생겨났다. 사회만이 아닌 가정내에서도 모든 구성원들은 남성인 가장을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 아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되어야만 했었다. 바로 엄격한 사회적 위계 - 다시 말해 신분제의 출현이었다.


시민사회는 봉건사회와 반대라 보면 되었다. 시민사회의 시작은 오히려 봉건사회보다 일렀다. 첫문단에서 말한 어차피 농사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나서야 했던 탓이었다. 생산에 불리한 지역에서는 일찌감치 물물교환의 필요성에 눈뜨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토지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후 공업의 생산성이 농업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은 뒤에는 굳이 토지가 아니라도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한 수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역량으로 얼마든지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공업자로써 자기가 더 나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고, 상인으로써 더 나은 거래처를 찾아서 더 비싸게 많이 팔 수 있다면 굳이 토지에 예속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더 많은 부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중요하다. 더이상 자신이란 다른 무엇에 예속된 존재가 아닌 주체이며 목적인 존재로써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시민계급이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을 존재케 하는 것은 정부도 권력도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근대의 시작이 곧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의 근대적 사고의 등장과 발전, 확산과 비례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곧 시민들 자신이 공동체의 주체이고 주인임을 선언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제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억압하고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없다. 시민의 성장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자본주의의 새로운 생산양식이란 이전의 봉건적 생산양식과 그만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가.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니 이미 인클로저를 통해 지주들 자신이 더이상 농민을 토지에 예속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토지의 주인이었던 농민들이 신분을 바꾼 지주들에 의해 토지로부터 내쫓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도시의 공장들은 더 심각했다. 그래도 봉건적 농경사회에서는 토지를 경작할 수단으로써 농민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보장해주고 있었다. 농민이 하나 죽는 것은 노동력을 하나 상실하는 것이었다. 농민이 자식을 하나 더 낳고 못낳고는 노동력 하나가 더 늘고 주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더 많은 생산을 위해서도 농민들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고 후손을 번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지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말하는 도덕적 지배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통사회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유기적 연결이 자본가에 의해 강제로 단절되고 있었다. 농민은 토지에서 쫓겨나고 공장노동자 역시 사용자의 변덕에 의해 얼마든지 일자리를 잃을 수 있었다. 결국 달라진 환경은 이전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와 농민 자신도 자신의 노동력을 수단삼아 도시의 부르주아들과 대등해지거나, 아니면 이전의 봉건주의로 회귀하거나.


이를테면 산업화된 사회에서 더이상 노동자의 노동력은 중요한 생산수단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임금노동자가 아니더라도 기계가 더 많은 생산을 가능케 해준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토지 대신 공장의 기계에 예속되어 불안정한 고용 아래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현실이 펼쳐진 것이다. 결국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공장 등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을 때 노동자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거 봉건사회에서처럼 더이상 내쫓기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대를 이어가며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더라도 여전히 계속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용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더 확장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회 상층부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운명도 이익도 결정된다. 그들 결정권자들에게 잘보임으로써만, 그들이 베풀 자비에 기대해서만 그들은 자신의 현재와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 기술의 발달로 인해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돈을 버는데 노동자들은 여전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입만을 얻고 있다. 그나마 일자리도 줄어들고 갈수록 불안해진다. 자신이 가진 노동력만 믿고 자본가들과 경쟁하기에는 현실의 조건이 너무 열악하다.


중세에도 봉건적인 장원과 자유로운 도시가 공존하고 있었다. 토지에 예속된 농노와 자유로운 시민이 같은 시간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진보란 결국 사회의 엄격한 위계를 부정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더 합리적으로 더 자유롭게 하라. 그 전제는 오로지 인간으로서 개인의 존엄이며 이성이고 양심일 터였다. 그에 비하면 보수는 이제까지의 엄격한 사회적 위계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역시 언제나처럼 전과 같은 곳에서 같은 지위와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같은 삶을 보장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일 없을 것이다. 원래 봉건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일 역시 지금처럼 영원할 것이라 여겼었다. 현실을 불변하고 결정된 것이다. 개인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가장 오랫동안 봉건적인 인습 아래 살아왔던 일본과 독일에서 장인정신이 크게 발달한 것도 의미심장하게 볼 필요가 있다.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그 밖의 것은 자신이 신경쓸 일도 관심을 가질 일도 아니다. 그것이 현대라고 하는 공간에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얼마든지 자기 실력으로 자기 한 몸, 혹은 자기 가족 먹여살리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라 여기는 자신감과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진보와 보수로, 특히 진보가 더 계급적 이익과 일치하는 이들에게 보수를 강요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냥 유럽 근세사를 뒤적이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다. 바로 막 떠오른 아이디어라 두서없고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다만 근대 유럽에서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그를 통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등의 사상적 변화가 일어난 과정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생산양식의 변화가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바뀌게 한다. 어째서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보다 더 보수적인가. 나도 사장한데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이제 잘리면 갈 데도 없다. 사장이 하는 말과 행동은 무조건 옳다. 어쩌면 진실은 단순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어째서 블로그 글쓰기버튼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로그인도 일부러 티스토리 홈페이지로 우회해서 해야만 한다. 글쓰기 역시 홈페이지로 우회해서 관리화면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할 수 있다. 어지간히 쓰고 싶지 않으면 그다지 감수하고 싶지 않은 귀찮음이다. 이유와 해결법을 아시는 분은 도움을 좀 주시길. 어차피 요즘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글 쓸 시간이 없기는 하다. 책은 많이 읽고 있다. 생각만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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