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을 채택한 이유는 다수결이 반드시 옳아서가 아니다. 다수를 쫓는 것이 옳기 때문도 아니다. 그쪽이 더 싸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더 적은 비용으로 큰 혼란없이 책임까지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열없는 사회적 통합과 단합도 유도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자. 사실 다수결은 봉건시대에도 있었다. 봉건영주들이 모여서 왕위계승 등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는 제도가 있었다. 하긴 신라에서도 화백이라는 합의체 제도가 있기는 했었다. 그리고 역사가 진행되면서 차츰 부유한 상공인과 중소상공인, 도시임노동자와 농민, 마침내는 여성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되고 있었다. 원리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단지 주체가 더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어째서?


간단히 각 주체들이 실력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유한 상공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중소상공인은 근대유럽의 혁명사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름일 테고, 도시임노동자와 농민들 역시 파업과 쟁의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었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가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는가는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실력으로 너희들을 성가시게 만들 것이다.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감시하고 체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하기보다 제도권 안에서 정치의 지분을 나눠주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


오히려 역사상 내전은 매우 일반적인 흔한 일이었다. 별 사소한 일로도 갈등하고 충돌한 끝에 끝내 피를 부르는 전쟁을 시작하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명분이 있고 누구를 돕는 것이 내게 더 이익일 것인가.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아군을 만들고 그들의 힘을 빌어 싸움을 승리로 끝맺을 것인가. 그러다가 아예 싸움을 시작하기 전 서로의 세력을 확인함으로써 굳이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으려 한다. 이쪽이 더 많고 강하니까 어차피 싸우면 이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쯤에서 양보하라. 소수의 편에 섰다가 다수의 반발을 사서 아예 본전은 커녕 뿌리까지 뽑히고 마는 경우를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다수의 결정을 따른다면 소수는 다수의 결정을 뒤집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세력과 세력끼리, 그리고 그 세력이 세분화되고, 그 세력 안에서도 계층이 나뉘고, 중요한 것은 그들 각각의 주체들이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가지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현실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면 불편해지고 성가셔진다. 심지어 자칫 지금의 구조와 체계까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구조와 체제의 연장에서 그들을 통합하게 된다. 모두가 대화와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 복종한다는 약속을 한다. 민주주의의 마지막은 그래서 승복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자신의 주장과 전혀 반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절차를 거친 것이라면 기꺼이 인정하고 따르며 복종한다. 


당장은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한 논거와 설득력있는 논리를 제시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에 밀렸지만 다음에 더 확실한 논거와 논리를 개발해서 다시 겨룬다면 그때는 자신이 승리자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자신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 승자의 주장에도 기꺼이 인정하고 복종하듯 그때는 상대도 역시 자신의 주장에 대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굳이 힘으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아도. 적잖은 상처와 피해를 입어가며 서로 부딪히지 않아도. 지금보다도 더 충실한 준비와 노력을 갖춘다면 다음에는 자신이 승리자가 되어 자신이 뜻한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이번 공론화 직전까지 탈원전은 물론 신고리5.6호기의 건설에 강력하게 반대하던 시민단체들마저 공론화의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겠다 나서고 있는 것은 그래서다. 차라리 공론화를 비판할지언정 공론화의 결과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이의제기를 하지 못한다. 건설재개를 주장하는 쪽의 논거와 논리가 더 타당하고 설득력있었다. 건설중단을 주장하는 쪽의 논거와 논리는 그만큼 대중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를 위한 충분한 논리와 논거를 개발하는데 게을렀거나 혹은 무능했던 자신들의 탓이다. 그러나 다음에는. 중요한 것은 역시 앞서 말한 전제다. 다음에 자신들이 공론화를 통해 승리를 거둔다면 그때는 자신들이 의도한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할 시간에 보다 현실적으로 실질적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논거와 논리부터 더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를 위한 비용이다.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찬성의 논리에 정당성을 더해주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신고리원전 자체에 대해서는 이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최소한 이 문제로 더이상 사회가 분열하고 갈등하고 충동을 빚을 염려는 없다. 하물며 그 당사자들이 수백만이나 한꺼번에 모여서 대통령까지 탄핵시킨 국민들이고 보면. 그런 국민들의 동의를 구한다.


민주주의란 효율이라는 한 가지만 놓고 봤을 때 그다지 썩 훌륭한 제도라 보기 힘들이다. 너무 복잡하고 지루하다. 그냥 말 몇 마디면 되는 일 가지고 토론을 한다 투표를 한다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더구나 그 주체란 것도 전문가도 아닌 시민 개인이거나 그 가운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기 쉽다. 그런데도 어째서 민주주의만 살아남고 다른 체제는 거의 현대사회에서 도태되어 있는가. 민주주의라면 빠르지는 못하더라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 한 번 쯤 검토하고 넘어갔을 것을 빠르고 효과적인 독재는 그 과정 자체를 건너뛰기 때문이다. 부정의 결론은 현실에 닥쳐야 비로소 겪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리고 급박한 상황에서 그것은 너무 늦다. 느리지만 확실한 길로 가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3개월이라는 기간동안 공사가 중단되며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했었다. 하지만 그대로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면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어떤 충돌이 빚어졌을지 모른다. 이후 내내 그와 관련한 논란이 불거질 것이다. 사람이 상할수도 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지워야 할까? 그를 위한 비용으로써 공론화과정에서 지불된 비용이 과연 지나치게 비싼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이같은 갈등상황은 이 사회에 적잖이 있을 것이다.


돈만 이야기한다. 공사중단으로 낭비된 돈만을 이야기한다. 그 대가로 그토록 반대하던 공사에 대해 기꺼이 양보하고 동의해주는 시민사회단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과의 충돌로 빚어질 사회적 비용과 손실에 대해서도. 그래서 독재를 옹호한다. 까라면 깐다. 권력은 언제나 옳다.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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