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처음부터 노동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그 누군가에 일방적으로 기대어 이루어져 온 한국 노동운동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 자신들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부터가 부족하다. 누군가 대신 다 해결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노동자가 아니었던 이들이 자신들을 노동자와 다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노동자들을 구원한다.


어른의 방식이란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때로 포기할 줄도 아는 협상과 거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00을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상대가 100을 내놓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를 위해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대가는 무엇인가. 지불해야 할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래도 도저히 안된다면 과연 어디까지 상대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반드시 가능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만에 하나 다른 가능성을 찾고자 일단 먼저 흥정부터 하고 본다. 거기서부터도 자신을 얼마나 더 양보하고 포기하며 어떤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아이는 그런 것 없다. 떼쓰면 된다. 어차피 자기 주머니에서 돈나가는 것 아니다. 자기의 실력으로 오로지 자기가 노력해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나온다. 부모의 수고로부터 주어진다. 아이는 그냥 떼쓰기만 하면 된다. 협상도 필요없다. 타협도 필요없다. 사주지 않으면 부모만 나쁜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울고 떼쓰는데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더 서럽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 아무리 자식이 떼를 써도 도저히 사 줄 수 없는 부모의 사정 따위 전혀 아랑곳않는다.


시작은 전태일이었지만 그 전태일의 뜻을 이어받은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더구나 안간힘을 쓰며 그것에 매달려 있는 노동자와는 출발선부터 다르다. 책에서 읽은 이상을 위한 것이었다. 선배나 교수들로부터 귀로 듣고 몸으로 겪으며 배운 추상의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 노동자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자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정작 노동자의 사정은 아랑곳않는 무리한 투쟁이 그들을 더 곤란케 만드는 경우마저 그래서 적지 않았었다. 자신들이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그같은 자신들의 신념과 이상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앞장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이상이라는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이다. 양보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노동자에게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삶이며 현실이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현실이 허락할 수 있는, 실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는 타협할 수 있지만 이상주의자들은 타협할 수 없다. 정작 노동자를 위해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면서도 기계기름으로 손발이 갈라터진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내 노동자일 수 없었다. 그로부터 노동운동의 리더십은 노동의 현실과 유리된 박제화된 신념으로 흐르고 말았다. 차라리 전부를 얻어낼 수 없다면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실패와 좌절이 더욱 노동계급을 분노케하여 진짜 그날을 더욱 빨리 앞당길 수 있을지 모른다. 실패해도 어차피 자기들 일은 아니다.


문재인이라고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대통령의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재인을 지지한 유권자들 역시 문재인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리라 기대하고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문재인이 추구하는 바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필요했으니까. 그럼에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양보한다. 그래서 희생한다. 여기까지는 내가 허용할 수 있다. 그게 정치다. 그런 유권자의 마음을 알기에 문재인도 대통령이 되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다. 그것이 현실이다. 대화와 타협일라는 것이다. 공존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양보하며 빈 자리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문재인더러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내놓으라. 내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이유라는 것이 없다.


스스로 노동자로써 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투쟁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변절하고 쉽게 자신의 신념과 등을 돌린다. 현실은 수십년간 자신이 몸담아 온 그쪽이 아닌 지금부터 살아갈 이쪽에 있다. 현장의 노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실제 노동현실을 몸으로 겪으며 자신의 삶으로써 느껴야 하는 현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각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민주노총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런 노동자의 삶을 정작 노조들이 전혀 현실로써 삶으로써 느끼며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감하며 함께 고민해주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괴리된다. 노동운동에 삶과 현실은 사라지고 고집스런 이상과 신념만이 남는다.


심지어 정의당마저 문재인 정부를 한 편으로 탓하면서도 민주노총을 타이르는 논평을 내놓고 있었다. 내내 문재인 정부에 적대적이었던 경향신문마저도 이번만큼은 민주노총의 잘못이라며 크게 꾸짖고 있었다. 그래도 민주노총을 우호적으로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민주노총의 미래는 없다. 한국노총은 현실을 받아들여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 하는데 민주노총은 먼 과거에 두고온 환상에만 사로잡혀 있다. 100 가운데 다만 하나라도 내 손에 쥐이면 그것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실망은 없다. 원래 그런 집단이라는 것을 안다. 노무현 정부때도 이명박 정부때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명박 정부하고라도 공존을 꾀했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안됐다면 박근혜 정부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어야 했다. 이길 수 있다면 충분히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먼저 구성원들을 지켜야 한다. 그것을 못했기에 민주노총은 약해지고 있다. 그 민낯을 드러낸다. 조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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