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무림의 협객이다. 길을 가는데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이 보인다. 한 사람은 체구도 작은 여자고, 다른 한 사람은 덩치가 큰 남자다. 당장 누구의 편에서 싸움을 말려야만 할까? 물론 협객이 아닌 평범한 행인이라면 굳이 남의 싸움에 간여할 필요가 없다.


아마 진중권도 말했을 것이다. 사실 일개 블로거에 불과한 나도 글 하나를 쓸 때마다 그런 두려움을 느끼고는 한다. 내가 옳은 것일까? 나의 판단이 맞는 것일까?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지난 대선으로 돌아가서 혹시 모르지 않은가? 문재인이 사실은 가면을 쓴 위선자고 안철수가 진짜 순진할 뿐 올곧은 정치인일지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자신이 보고 듣고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설사 틀렸더라도, 잘못되었더라도, 그마저 감수할 수 없을 것이라면 블로그질도 해서는 안된다.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이명박 정부는 싫었지만 아무래도 반대집회하는 쪽의 주장 가운데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아 나의 경우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결국 당시 주장 가운데 상당수가 잘못된 것으로 결론내려졌으니 거리로 나가서 시위에 동참한 사람들보다 내가 더 옳았고 더 현명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주장과 근거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었다. 실제 가장 중요했던 목표였던 쇠고기수입협상의 조정이 국민적인 분노에 힘입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잘못된 주장에 동조해서 그것을 외치고 전파했던 시민들이 져야 할 책임이란 과연 무엇인가.


앞서 협객의 비유로 돌아가서 실제 작고 여린 여성은 무공도 약했을 수 있다. 그래서 우락부락한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하고 있는 여성이 살인과 강도를 일삼던 범죄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정확한 내막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성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어야만 하겠는가. 분명 약자라고 모두 선한 것은 아니다. 약자라고 모두 피해자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선의는 그럼에도 아직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찌되었든 약자의 편에 서고 싶은 것이 본능에 가까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라면. 자기와 계급이 같거나, 자기와 처지가 같거나, 그래서 자기가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느끼게 되었다면. 


뉴스룸에서 말한 '무고죄'가 아니라는 것은 그런 의미인 것이다. 타인을 돕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단지 도우려 했던 사람이 거짓으로 세상을 속이려 했던 것이 문제일 뿐. 사소한 디테일의 차이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매번 누군가를 도우려 했던 행동의 책임을 모두 자기가 져야 한다면 사실 사회운동이라는 것은 전혀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환경운동이 항상 옳을 수 있을까? 노동운동은 항상 정의로울 수 있을까? 장애인을 돕는 것은 어떨까? 그럼에도 아직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도 전에 판단부터 하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급하고 필요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본의아니게 다른 사람의 악의에 놀아났다 할지라도 그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다.


물론 다른 판단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런 것 무서워서 누군가 비판하는 글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 쓰더라도 남들보다 몇 걸음 늦게서야 어느 정도 사실관계가 파악되고 그를 근거로 쓰게 된다.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자기가 성폭행당했다고 도움을 요청해와도 쉽게 도와주지 않는다. 모르니까. 알지 못하니까. 따라서 아직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런 때 나서주는 사람에 대한 판단이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해하는 것은 그럼에도 남자인 나 자신조차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의 편에 서고픈 충동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거나 성범죄 관련이라면 피해자는 여성일 것이다.


결국 남성 다수가 주장하던 성범죄 무고죄 40%라는 주장은 허위인 것이 드러났다. 어쩌면 그래서 더 난리인지 모르겠다. 성범죄를 저지르고 오히려 그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해서 재산을 뜯어나고 성폭행까지 반복할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라는 것이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성범죄가 알려지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차라리 재산을 뺐기고 다시 그 끔찍한 성폭행을 반복해 당하는 것을 선택할 정도로 피해자에게 그것은 절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되는 끔찍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역시 피해자인 여성의 선의를 믿어주고 싶다. 당연히 남성이 더 약자이고 더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성범죄보다 성범죄 무고가 더 많다. 성범죄 피해자보다 성범죄 무고 피해자가 더 많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


아무튼 나름대로 여성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상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동안 보고 듣고 겪어온 것들이 있으니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실제 성과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책임의 범위와 한계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같은 상황에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인가. 거기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지랖 넓고 낄 데 안 낄 데 안 가리고,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일단 편부터 들어주고 보는. 미투의 진짜 뜻이다.  당신 혼자가 아니다. 당신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 그 쉬운 말이 그동안 너무 어려웠었다.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제대로 들어주는 이조차 거의 없었다. 전에도 말했던 경향성이다. 하나의 실패가 두려워서 아흔아홉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바로 보수고 수구다. 개인의 범죄를 밝히는 운동이 아니다. 이 사회의 구조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위한 계기여야 한다. 오달수를 옹호하고 있다. 성추행도 아닐 수 있다. 사과문까지 냈는데도.


어차피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실 매우 조심스럽다. 그냥 내가 보고 듣고 아는 범위 안에서밖에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나 자신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그럼에도 끄적여야 하는 것은 그동안 떠들어댄 것들에 대한 책임이라 해야겠다. 알량하지만 외면할 수 없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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