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둘이면 개인의 문제다. 그런데 셋이 되고 넷이 되면 그때는 구조의 문제가 된다.


분명 모르지 않았다. 피해자 가운데도 그동안 자신이 당한 일들을 주위에 알리고 도움을 받으려 했던 사실까지 모두 함께 털어놓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로부터 들었을 것이고, 아니면 바로 가까이서 직접 보고 겪었던 이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설사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걸맞는 책임을 졌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왜?


길 한가운데 사과가 놓여 있다. 아니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이가 사과를 들고 있는데 아무도 아이를 돌아보지 않고 있다. 간수와 죄수의 실험이 있다. 참가자들을 간수와 죄수로 나누고 역할극을 하도록 했더니 어느새 단지 실험참가자에 불과했던 이들이 진짜 간수와 죄수가 되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사과를 훔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아이의 손에서 사과를 빼앗아 먹어도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 칭찬하는 사람마저 있다.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것도 능력이다. 그런 상황에 사람들은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될까?


사람과 짐승을 나누는 기준은 하나다. 바로 사회성이다. 다른 사람의 눈이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본능인지도 모른다. 인정받는다. 비난받지 않는다. 무리 속에서 선량하고 성실한 보편에서 벗어나지 않는 존재로써 안전하게 인정받고 자리잡고 싶다. 그래서 만에 하나 주위의 감시가 사라지면 인간은 쉽게 사회화된 모습 이면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그런 때 마지막 보루가 유일하게 자신을 감시하는 또 하나의 자신, 자아일 것이다. 그것을 흔히 양심이라 부른다.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다. 하지만 그조차 주위에서 그런 자신마저 부정한다면 더이상 그를 지탱할 것은 남아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도 된다. 그렇게 해도 전혀 상관없다.


단지 성기의 문제라 생각하니까. 성기를 가진 남성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욕망이고 충동일 것이라 여기고 있으니까. 남성이 가지는 당연한 본능이라 생각한다. 남자니까 그럴 수 있다. 남자니까 그래도 된다. 여기에 개인이 가지는 명성과 지위, 권력, 결국은 권위가 더해진다. 그것도 능력이다. 그쯤 되는 사람이면 그런 정도는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는 범위다. 한국사회에서 유독 성범죄에 대해 법과 사회가 관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차피 남성이란 그런 존재이고 그래도 되는 주체이기에 모든 책임은 여성의 과실로 돌아가게 된다. 남성이 자신의 본능대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틈을 보인 여성의 잘못이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을 떠나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행위의 문제인 것이다.


어차피 자기가 그렇게 해도 자기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그렇게 해도 누구 하나 자기를 거스르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실제 아무도 자기를 비판하거나 책임을 물으려 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자기가 가진 권위 앞에 납죽 엎드려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도 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후배인 남성들마저 보고 배우게 된다. 자기 역시 그렇게 행동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관행이라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관습이라는 표현이 적확한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모두가 나서서 가해자의 행위를 묵인하고 은폐했으며 심지어 피해자가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고립시키고 내쫓기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그래도 된다.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과연 가해자가 얼마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할 수 있을 것인지. 


이윤택이 대본을 썼다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내가 상당히 인상깊게 봤던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그런 모순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다. 최소한 이윤택에게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그같은 대본을 썼던 자신의 양심과 배치되는 행위가 아니었다. 아예 양심이 마비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그렇게 되어야 했던 이유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남자가 그럴 수 있다. 남자니까 그럴 수 있다. 그만한 위치에 있으니까. 그만한 성공을 이루었으니까. 여성은 수단이다. 단지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이룬 성공에 대한 보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을 누리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다.


그냥 씁쓸하다. 이런 와중에도 남성이 무슨 잘못이며 여성이 일방적인 피해자이기만 한가 성별의 문제로 몰고가려는 이들이 있다. 분명히 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문제다. 단지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인 수단이자 도구로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같은 참담한 사태들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을 뿐. 그러니까 남성에게 여성은 인간인가.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지기 이외의 인간이란 단지 도구이고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여성들이 어째서 여성의 성을 도구화 상품화하는 것에 민감한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오죽 그에 대해 문제삼는 사람이 그리 없었으면. 하다못해 다만 몇 사람이라도 그런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따지고 바로잡으려는 이가 주위에 몇 명은 있었어야 했다. 그를 응원할 수 있는 용기와 양심이 있었어야 했다. 다른 일에는 얼마든지 자신의 용기와 양심을 과시할 수 있지만 여성을 도구와 수단화하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비겁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혹한 것이다. 이 사회의 인간이란. 양심이란. 이성과 지성과 용기와 의지란 것은. 그나마 그래도 그동안 많이 나아진 것이 지금 이런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엇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날뛰는 이들이 한 뭉테기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단지 그들이 악해서? 그들 자신의 문제라서? 그러면 나머지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일까? 단지 손가락질하며 비난만 하는 자신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는 것일까?


미투 운동의 본질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근본원인인가? 조금 더 조심할 수 있기를. 항상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임을 잊지 않는다.


비난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너머에 진짜 답을 찾기란 항상 너무 어렵다. 궁리가 없이 답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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