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주장한 착취론의 핵심은 한 마디로 자본의 이익은 노동자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데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생산이란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 이루어지는데 정작 노동자가 누려야 할 대가까지 모두 자본이 가져가게 되니 자본이 더 부유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의 주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이윤율저하의 법칙마저 그래서 노동자를 더 착취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낮춤으로써 상당기간 늦출 수 있다고 보았었다. 물론 이 밖에 불변자본의 가격하락과 식민지에 대한 약탈 역시 이윤율저하를 막는 요소로 지적하고 있었다. 


자본이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유지되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더이상 노동자를 착취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이윤율저하의 법칙이 자본주의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도 거기서 비롯된다. 더이상 노동자를 쥐어짤 수 없는 상황에 여러 이유로 인해 비대해진 자본이 생산을 늘리기 위해 불변자본에 과잉투자될 때 이윤율의 하락으로 더이상 자본의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이 아마 정규교육과정에서 모두가 배우는 기술발전에 따른 생산성과 이익의 상승일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그를 통해 여전히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다.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해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이익을 자본은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된다.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그것은 사실인 것처럼 여겨진다. 기업이 많은 이익을 낼수록 기업이 성장하며 노동자에 대한 고용과 임금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과연 노동자가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과연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말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자신이 받는 임금으로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을 통한 생산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가치에 비례한다. 노동자 자신의 가치에 비례한다. 노동자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노동자의 기회를 사는 것이다. 일정 기간 동안 노동자는 오로지 자신을 고용한 사용자를 위해서만 일을 해야 한다. 그만큼 다른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래서 자신이 받는 대가라 충분치 못하다 여겼을 때 노동자는 쉽게 이직을 결정하기도 한다. 지금 고용된 곳에서 일하기보다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 쪽이 자기에게 더 이익이다. 노동자의 임금 역시 필요한 인력을 자기 회사에 붙잡아둘 수 있는 최소한으로 결정되게 된다.


문제는 그래서 결국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임금을 받고 있는데도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경우다. 일을 해서 받는 임금으로 당장 먹고 자는 일상적인 문제마저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남들처럼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가끔 여행도 가는 여유란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은 곤궁해지고 일상은 피폐해진다. 아니 어찌되었든 많은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지금의 삶을 유지할수만 있어도 큰 불만은 없을 테지만 현실적으로 무척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도 굳이 힘들게 자신의 시간과 기회를 허비해가며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당장 큰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있는 청년실업만 하더라도 일자리가 있는데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기에 거부한 경우 또한 적지 않다는것이다. 그에 대해 어떤 이들은 배가 불러서 그렇다지만 이미 한국사회는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배부른 사회라는 것이다. 배부른 사회에는 그에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 있다.


어째서 사람들이 가상화폐시장으로 몰리는가. 유독 한국에서 가상화폐의 가치가 폭등한 이른바 김치프리미엄이라는 것도 노동을 통해 만족스런 삶을 누릴 수 없는 다수가 다른 가능성과 기회를 찾아 눈돌리게 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기에 차라리 도박일지라도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서게 된다. 너도나도 돈을 벌어보겠다고 부동산투기에 뛰어들고, 프로토며 여러 도박에도 손을 대고. 그런 것이 모두 사회적 비용이 된다. 사회적 불안의 원인이 된다. 무엇보다 어찌되었거나 노동임금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가계에서도 굳이 빚을 져가며 돈을 빌리기도 한다. 가계부채가 천정부지로 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가계의 지출을 소득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택담보대출조차 결국 자기 집이 필요한데 필요한 돈이 부족하니 대충을 받아 메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도 최저임금을 늘려서는 안된다. 한국사회에서 최저임금은 보편임금이다. 심지어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사업장이나 업주가 아직도 채일 정도로 많이 있다. 경제에 해가 된다. 사용자의 이익에 해가 된다. 사용자의 이익이란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경제사정이다. 국가경제란 곧 노동자가 감수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마르크스의 착취론으로 돌아간다. 기술의 혁신이 아니다. 사고의 혁명이 아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그저 경제가 어렵다고 노동자의 임금부터 줄이거나 깎으려 한다. 노동자의 근로시간마저 추가임금의 지급 없이 늘리려 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이윤율이 하락하는데도 그 하락을 막을 수단으로 노동자를 더 쥐어짜고 그들의 몫을 빼앗아 메우려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 경제는 유지된다. 그렇게 해야지만 유지되는 경제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누구의 책임일까. 역시 이미 위에 쓴 내용 가운데 그 해답이 있다. 부가가치를 그만큼 늘리면 된다. 노동자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 상승하는 만큼 기업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으면 된다. 아니 경제가 성장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기업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면 그만큼 기업도 성장하고 국가경제도 성장한다. 그에 따라 고용도 늘고 노동자가 받는 임금도 늘어난다. 어느 순간 그것이 멈춰 버렸다. 그러니까 노동생산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노동생산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량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생산한 가치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그런데도 그 책임을 오로지 노동자에게 돌리는 것은 나태이고 방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에 의한 기업살리기란 그런 의미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 경쟁을 통한 성장과 발전을 말하던 역대정부들이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이 만족한 삶을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무엇인가. 당연히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남들만큼 아쉬운대로 누리며 살 수 있는 최저한의 조건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그러니까 지금의 최저임금으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받고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란 어느 정도인가.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경제와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그런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정상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의 최저임금 논란이 우습게 여겨지는 이유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사람이다. 초기자본주의시대를 살았던 구시대의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는 허점이 많다. 모순도 많다. 사실상 현대경제학에서 마르크스의 주장은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 하물며 이름이 비슷하다고 막스 베버마저 경기를 일으키며 거부하는 사회에서 그 마르크스를 닮아가려 하고 있다. 하긴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이 처음 미국에 소개되었을 때 돈버는 방법에 대해 쓴 책이라 선전되고 있었다. 국가의 경제도 기업도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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