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나의 경우 대북특사에 대해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잘 될 것이다. 북한과도 미국과도 물밑에서 많은 대화가 있었고 대북특사는 단지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요식행위다. 최소한 대북특사단이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은을 만난 것을 보면서 최소한 이번 방북으로 핵동결까지는 이끌어낼 수 있겠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다. 체제보장을 전제한 비핵화라는 것이 김현철 방남 이후 김정은의 즉흥적인 구상에서 나온 제안일까? 핵동결이었다면 촉박하게 임기응변으로 결정할 수 있었겠지만 비핵화는 - 더구나 김일성의 유훈까지 들먹이는 것은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러고보면 김현철이 방남했을 때도 별다른 대화 없이 대통령이 비핵화를 화제에 올리면 북미회담으로 대답하는 요식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비핵화 구상은 훨씬 전에 결정되었고 그리고 한국 정부에도 전달되었었다. 그러면 언제일까?


아마 기억할 것이다. 미국 펜스 부통령이 사실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 김여정과 대화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놓았다가 북한의 거부로 무산되고 말았던 것을. 다들 북한을 욕했다. 저 미친 것들이 뭘 믿고 이제와서 버팅기는가. 도대체 뭘 믿고 겨우 마련한 대화의 자리까지 박차는 것인가. 한 편으로 결국 대화가 무산되고 미국으로 돌아간 펜스는 각계로부터 비판을 들어야 했었다. 그러니까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펜스와 김여정이 만나고 대화의 과정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진전된 논의가 나오게 되었다. 미국의 압박과 더구나 미국 부통령의 협상력에 의해 북한은 비핵화를 전제로 미국과의 공식적인 대화의 자리로 나오게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그림 아닌가. 무엇보다 미국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 큰 선물을 준비했던 북한의 입장에서는 빈정상한다고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을 테고. 만일 사실이라면 괜히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 아베부터 만나고 꼬드김에 넘어갔던 펜스의 모자란 주변머리를 욕해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북한 입장에서도 북미대화는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대화해야 하는데 펜스가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한 차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북한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모양좋게 다시 미국과의 대화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 모양 빠지지 않게 비핵화라는 중대한 결단을 미국에 전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다시 미국에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를 제의하기에는 국내외적으로 북한이 미국에 구걸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중간에서 광대가 되어 연기를 하기로 한다. 아예 펜스와의 대화는 없었던 것처럼 김여정의 뻔한 초청제안에 북미대화를 언급하고, 다시 김현철이 왔을 때는 비핵화를 이야기하여 북미대화에 대한 대답을 듣고, 마침내는 대북특사가 가서 김정은으로부터 모두가 기대하지 않았던 통큰 제안을 듣게 된다. 북한 언론의 보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은 북한이 궁지에 몰려 미국에 사정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계속해서 제안하고 설득하니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 통크게 양보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북한은 남북간의 통일을 민족의 과업으로 중요하게 선전하고 있다. 물론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직전까지도 북한과 미국은 서로를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고보면 트럼프의 트위터나 연설등을 보더라도 북미대화에 대한 기대가 은연중 숨어 있었다. 거의 대화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단지 주도권을 잡으려는 듯한 강경발언들이 이어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 강경한 제재안을 내놓겠다 하고서도 정작 주변만 훑었을 뿐 북한 자체를 직접적으로 압박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괜한 영웅심리로 북한을 자극해서 좋은 기회를 날려버린 펜스만 병신이라는 건데. 그리고 실제 벌써 5일 청와대는 송영길을 단장으로 한 북방경제협력위원회로 하여금 시베리아철도를 거쳐 북한을 방문케 하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었다. 하긴 그동안 북미대화나 남북대화, 북한의 핵문제등에 대해서 전혀 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청와대의 태도부터가 의심스럽기는 했다. 특사를 보내는데도 무슨 마실 보내는 듯 전혀 아무런 긴장이나 불안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특사라면 그만큼 다급한 현안을 다루어야 할 사절일 텐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미국쪽에서도 이미 북한의 제안에 대한 대응은 거의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요식절차다. 어떻게 미국 입장에서도 모양 빠지지 않게 북한의 급진전된 제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타고난 쇼맨인 만큼 트럼프가 어떻게 연출해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까 지켜보는 재미도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공은 미국과 특히 트럼프 자신의 것이다. 우리 정부도 그렇게 여기고 있을 테고.


이렇게 상상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비핵화에 대한, 더구나 왕조국가에서 선대의 유훈이 가지는 의미란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냥 아무 의미없이 휴전선만 오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란 뜻이다. 여러 이야기와 제안들이 벌써부터 중대하게 오가고 있었고 그 사이 미국에서 이미 공개한대로 한 차례 중요한 기회까지 놓치고 있었다. 이번은 어떻게 될까? 망상이 아니라면 트럼프의 반응이 기대해 볼 만할 것이다.


아무튼 추가로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이란 무엇인가. 일부에서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같은 것은 아니다. 아니라는 것은 한미연합훈련에 대해서마저 예년과 같은 수준이면 인정하겠다는 발언이 확인해준다. 그러면 무엇인가. 아니 그 전에 당장 북한의 체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주체는 누구인가. 어째서 김정은은 집권하고 아예 한 번도 해외로 나가지 않는, 아니 못하고 있는 것인가. 중국과 혈맹이어서 든든한 것도 있지만 그만큼 중국과 북한 사이에서 서로 이해가 교차하는 것도 적지 않다. 그동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 외교적으로 중국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북한 내부에도 이른바 중국통들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언제 중국이 김정은을 몰아내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 할 지 모른다. 그러니까 김정은이 아무때라도 국가정상으로서 해외에 나갔을 때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여전히 김정은을 지지하며 체제를 보호해 줄 새로운 보호자가 필요한 것이다. 미국은 아무래도 아직 북한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다. 자신의 안위만 보장해주면 미국을 위해 많은 것을 해 줄 용의가 김정은과 북한 정권에게는 있다.


아무튼 그래도 눈치가 있었으니 바른미래당은 그토록 정부와 특사를 비판하다가 정작 특사가 출발하고는 입을 닫았고, 그나마 눈치도 없는 한국당만 끝까지 물어뜯으려 할 뿐이었다. 그나마 바른미래당은 비평을 해도 명분은 세웠지만 자유한국당은 누가 봐도 코웃음나는 우기기밖에 없다. 그래도 저렇게 무능한 당은 아니었는데. 박근혜의 공이 크다. 상상이든 추측이든 망상이든 아니면 사실이든. 하룻밤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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