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부가 불교의 행사에 참석한다. 개신교 목사가 불교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불교 승려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참 보기 좋다. 배타적이어야 할 정교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래서 과연 상대의 종교가 진정 옳다 여겨 인정해주는 것인가.


종교는 하나다. 오로지 진실하고 위대한 진리는 단 하나다. 나머지는 오류이고 거짓이다. 모든 종교의 전제다. 신앙이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그런 어중간한 것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옳아야 한다.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감히 어쩔 수 없는 절대의 무엇이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종교도 옳을 수 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


그냥 불교의 교리에도 찾아보면 신의 말씀에 가까운 것이 한둘은 있더라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것이 틀리고 잘못되었지만 그래도 찾아보니 아주 틀린 말들은 아니더라. 그 말들만 잘 지켜도 굳이 신에게서 크게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안의 수준이지 대등한 무엇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그런 서로의 종교를 새삼 인정할 수 있고 존경도 할 수 있게 만드는가. 간단하다.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나는 옳다. 왜냐면 것이 진리이고 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운좋게 진리를 접할 수 있었다. 진실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운이 좋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죽일까? 틀린 선택을 했다고 밀어낼까? 결정적으로 사회와 사람에 해악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좋다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다양성의 전제다. 다원주의의 중심이다. 서로 옳은 여럿이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옳아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옳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틀린 가운데서도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인정할만한 부분이 있다. 존중해 줄 만한 부분이 있다. 전부가 아닌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결정적으로 자신에, 그리고 주위에, 세상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니까. 틀렸지만 옳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대로 지켜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틀렸다. 무엇이 잘못되었다. 내가 페미니스트들을 싫어하는 이유다. 진보주의자들을 아주 끔찍이도 싫어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게 바로 여기서 나오는 말이다. 오히려 보수는 가치중심이 아니다. 현실중심이다. 현실의 이해가 중심이 되기에 타협도 쉽다. 하지만 진보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가치를 앞세우기 쉽다. 특히 제도권에 들어오지 못한 경우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날을 세운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다. 명확히 논리와 이성의 칼로 경계를 지어 구분하고자 한다. 너는 틀렸으니 비켜 있어. 이것이 옳으니 일방적으로 따라야 한다. 자신들과 다른 페미니즘이, 진보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확히 자신과 다른 이념과 주장을 배척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전체주의이고 권위주의다. 보수가 솔선해서 진보와 공존하는 예도 세계정치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어떻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공존하며 살아갈 것인가. 인간은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굳이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옳다고 굳게 믿고 고집을 굽히지 않아도 된다. 한 가지만 인정하면 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이 설사 문제있고 그래서 틀렸다 할지라도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할 인간의 불완전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하나라도 옳은 주장이 있고 다만 하나라도 인정할만한 부분이 있다면, 그래서 그로 인해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도 상관없다.


그래서 관용일지 모르겠다. 옳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용이 아니다. 좋고 크고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만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관용이라 할 수 없다. 더럽고 추하고 조잡하고 형편없는 것들마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관용이라 부른다.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들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 관용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기에 인정해주고 존중해준다. 오만이다.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차없이 배척하고 그것을 정의라 여긴다. 세상에 모든 불관용은 바로 그런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된다.


확실히 학교교육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아흔아홉가지를 잘해도 한 가지만 못하면 못하는 것이다. 아흔아홉가지가 옳아도 한 가지만 틀리면 틀린 것이다. 시험에서도 맞은 개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틀린 개수를 따진다. 얼마나 잘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못했는가. 얼마나 다양한 개성과 강점들을 가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단점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가. 학교만이 아니다 부모들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니까 얼마나 틀렸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부터 먼저 판별한다. 그러므로 이건 되고, 이건 안되고. 대개는 안되고.


인터넷에서도 흔히 획일화된 전체주의를 경험하게 된다. 너무 선하고 너무 정의롭다. 그래서 아주 작은 실수나 잘못조차 용납되지 못할 때가 많다.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고 담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다.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틀렸다. 위험하다 여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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