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어렵게 설명할 필요 없다. 그냥 딸이 있다. 아니면 여동생도 좋다. 알고 지내는 여사친도 괜찮다. 밤늦게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러면 과연 남성인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많은 남성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그냥 걸어가고 있는데 어째서 여자들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걸음을 재촉하는 것인가. 하긴 언젠가 자기 여자친구가 딸을 낳으면 남자를 조심하라 가르치겠다 말했단 이유로 헤어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남자를 본 적 있었다. 여자친구가 페미인 것을 몰랐다 하던가. 그러면 그 여자친구가 밤늦게 모르는 남성과 함께 있었다면 무엇이라 말하려는가. 그냥 남자와 여자일 뿐인데 무슨 상관이라 말하겠는가?


많은 남성들이 이른바 곰탕집 사건에 분노한다. 마치 이 사건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리벤지 포르노나 몰카와 동급의 사건인 양 특별히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있다. 청와대가 나서서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검찰의 구형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되었거나 설사 실형이 구형된 피해자가 실제 무고한 피해자라 할지라도 곰탕집 사건은 개별의 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예를 들겠다. 곰탕집이나 지하철이나 혹은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무고를 당할까 두려워서 움츠러든 경험이 있기는 한가.


여성과 함께 있는데 혹시 상대 여성이 자신을 무고하지는 않을까. 증거가 될 감시카메라도 증인이 될 다른 사람도 없는 장소에서 혹시라도 여성이 다른 목적으로 자신을 성범죄로 무고하지는 않을 것인가.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여성을 피해 도망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성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 해서 그 자리를 피하거나 어딘가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 숨는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여성을 대할 때 혹시 실례는 하지 않을까 주의하기는 하는데 굳이 여성의 악의를 두려워해 꺼리거나 피하게 되지는 않는다. 반면 동생은 회사에서 일마치고 밤늦게 돌아올 때면 항상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부터 걸었다. 집까지 거리가 5분도 채 되지 않는데도. 무슨 차이인가.


바로 그것이 남성들이 그리 애타게 절박하게 주장하는데도 전혀 정치권은 물론 사회마저도 그다지 귀기울이는 것 같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한 해에만 수많은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절도나 강도사건도 일어난다. 폭력사건도 사기사건도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하지만 이들 사건을 예방하겠다고 가해자를 특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개인에게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 당장 무고죄만 하더라도 여성만 무고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성범죄와 관련해서만 무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여성의, 그것도 성범죄에 대한 무고만을 특정하여 관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모든 무고죄 가운데 유독 성범죄에 대해서만 여성의 수치심을 이용해서 혐의를 모면할 목적으로 무고죄를 활용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기까지 하다. 예방이라는 관점에서 과연 어떤 경우를 특정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범죄에 대해서는 대상을 특정하여 강력한 예방정책을 펴는 것도 가능하다. 


한 마디로 분노와 공포의 차이인 것이다. 분노는 대상을 특정한다. 따라서 분노의 원인이 사라지면 분노 또한 사그라든다. 반면 공포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공포란 감정은 계속 유지된다. 남성들은 성범죄 무고에 대해 분노하지만 여성들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공포를 느낀다. 대부분 남성들은 자기가 무고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 자체를 말과는 달리 크게 느끼지 않기에 단지 그 부당함에 분노하고 마는 정도지만 대부분 여성들은 자신도 언제 같은 피해자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부터 느끼게 된다. 많은 남성들이 지적하는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행동력에서 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성들은 굳이 여성과 함께 있으면서 무고의 피해자가 될 걱정에 몸을 피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여성들은 어떻게든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궁리하며 발버둥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 정치권은 물론 사회 일반에서도 받아들여지는 강도가 다르다.


하긴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 역시 여성들의 공포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냈다. 남성들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개별사건에 대한 분노만으로는 여성들의 공포와 대등하게 맞설 수 없다. 공포와 유일하게 대등해질 수 있는 감정이 바로 증오란 것이다. 공포가 대상이 없듯 증오도 대상이 없다. 공포가 한정이 없듯 증오도 한정이 없다. 메갈이니 워마드같은 것들은 그를 위한 훌륭한 근거가 되어 준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다른 남성들의 존재는 자신의 증오가 옳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공포가 공포를 낳듯 증오가 증오를 낳는다. 그런데 그 증오는 여성들의 공포처럼 커뮤니티를 벗어나서까지 생명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한 감정을 가진 남성들끼리 자가발전하며 키운 증오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신들의 증오를 정당해 줄 수 있는 사건이 이번 곰탕집 사건이었다. 불과 얼마전까지 구하라 남친 폭행사건이었다. 보아라. 여성들이란 얼마나 음험하고 흉악한 존재인가. 남성들이란 얼마나 가련한 피해자들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적으로도 크게 공감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뭐라 말만 하면 메갈, 워마드. 무슨 말만 꺼냈다 하면 바로 페미. 논리가 없다. 논거도 없다. 그냥 쟤들은 나쁘다. 쟤들은 문제다. 굳이 왜 그런지 따져 볼 생각도 않고 자신들과 다른 모든 주장과 근거들을 무시하고 부정한다. 그에 동의해주는 동류들만을 근거로 자신의 정의만을 고집한다. 떼로 몰려들어 폭력까지 휘두른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인터넷에서 집단의 비난처럼 효과적인 폭력은 없다. 아예 자신들의 커뮤니티로부터 추방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이 하는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다만 그런 이들의 수가 많아지는 것은 우려할만한 부분이다. 그래도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자기 역시 같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여성들의 공포는 당위성을 갖는다. 실제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 성범죄와 관련해서 남성들이 하는 말을 보더라도 설사 아는 사이라도 남성과 단둘이 있다는 것은 귀책사유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남성과 한 공간에 있는다는 것은 성범죄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공감하기보다 단지 그 가해자일지 모르는 대상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분노를 드러낸다. 증오를 공유한다. 인터넷이 문제다. 익명의 공간에서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서로 쏟아내며 공유하는 가운데 스스로 증폭된다. 과거 타진요 사태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증인이 되고 증거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담보하고 보증하여 정당화한다. 더구나 그들의 여성에 대한 혐오는 이전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크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의 경우처럼 이것도 한국에서 사회문제로 발전하지는 않을까. 아직은 그렇게 우려할 정도가 아니기는 하지만.


일부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그를 근거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쏟아내는 다수 남성들에 대한 우려 역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집단에 휩쓸려 그것이 혐오이고 증오라는 사실마저 잊는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혐오범죄, 증오범죄로 이어진다. 벌써 현실에서 일어났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힘이 있다는 것이 더 걱정할 부분이다.


그냥 한심할 뿐이다. 모두가 옳다니 옳다. 모두가 옳다고 떠들어대니 그것은 옳다. 인터넷의 폐해다. 비슷한 인간들끼리 모이는 사회의 폐단이다. 쉴드라는 말을 싫어한다. 어떤 주장도 서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당연한 원리마저 망각한다. 위험하다. 무지한 자가 신념까지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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