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률이란 이를테면 벽이다. 계급간에 벽을 쌓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있지만 너는 해서는 안된다. 나는 해서는 안되지만 너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도덕적으로 너보다 더 우월하며 따라서 계급적으로도 너보다 더 우월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도덕률을 앞세우는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이거나 아니면 그에 도전하는 새로운 계급이기 쉬웠다. 부르주아들이 귀족들과 싸울 때, 그리고 노동자들이 부르주아들과 싸울 때 각각 자신들만의 도덕적인 규준으로 단결을 도모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보라, 귀족은, 그리고 부르주아들은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했다. 우리들이야 말로 진정 도덕적이고 존귀한 존재다.


그렇게 새로운 계급은 항상 새로운 자신들만의 도덕률로 무장하고 기존의 지배계급이 도전하고 투쟁해 왔었다. 때로 승리하기도 했고 때로 패배하기도 했다. 새로운 계급이 승리하면 지배계급은 교체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과연 기존의 지배계급은 새로운 계급의 도전에 대해 그저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었겠는가. 안타깝게도 도덕률이란 자체는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에 나중에 나타난 새로운 계급에 더 유리하게 적용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지배계급이 보이는 행태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여기고 있기에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덕률을 앞세운 것이었다. 이른바 말하는 적폐라는 것이다. 더이상 저들이 그동안 해온대로 계속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번 기회에 모조리 뜯어고쳐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된다면 기존의 지배계급은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그동안 누려온 특권들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된다. 지켜야 한다. 막아내야 한다.


그래서 역사상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기존의 지배계급은 대개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첫째는 그냥 뻔뻔스럽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잘 해 왔다. 아직까지 크게 문제가 없었고 앞으로도 전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다고 새로운 저들의 도덕률이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란 보장이 있는가. 무엇보다 지금 자신들의 도덕률이 진짜 정의가 될 수 있도록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는 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기성세대를 젊은 세대가 비판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너희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런다."


세상을 잘 알아서 뇌물을 주고받고 하는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너무나 잘 알아서 불법과 탈법을 일삼고 협잡과 일탈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보아라. 그래서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지 않았는가. 정의로운 너희들이 그래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부정이 현실이고 비리가 지혜이며 부패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실제의 정의다.


두번째 반응은 자기는 지키지도 못한 보다 엄격한 도덕률을 앞세워 새로운 계급을 비판하고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계급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률의 모순 때문이니 역으로 새로운 계급이 가진 도덕률의 모순을 파헤쳐 그들을 누르려는 것이다. 문제는 시작은 그럴듯해도 결국 그 본색까지 모두 감추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 앞에서 떠드는 소리와 뒤에서 실제 보이는 행동들이 전혀 달라지고 만다. 단기적으로는 새로운 계급을 힘으로 누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내부적으로 그 모순과 괴리로 인한 파탄이 일어나고 만다. 기성의 지배계급이 그동안 자신들을 지탱해 오던 명분과 권위를 결정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조선시대 양반들도 그랬었다. 일본 에도시대 사무라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향신들은 달랐을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예학을 통해 다시 양반의 권위를 끌어올리려 했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양반이 양반으로서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조건들을 우스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이만하니까 양반이구나. 그런데 모든 양반이 그 모든 자격을 다 갖추며 살아가는가. 처음에는 속을지 몰라도 지나고 나면 저것들이 겨우 야바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에도말 사무라이들이 만들어낸 부시도의 실화를 가장 잘 실현한 것은 정작 쵸닌계급이 주를 이루던 신센구미였었다. 쵸닌계급이 오히려 사무라이보다 더 사무라이답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라는 신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중국의 향신들은 그보다는 프랑스의 앙시앵레짐과 마찬가지로 뻔뻔스러운 경우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늬들 하찮은 민중이 자신들을 향해 무엇을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부러우면 너희들도 우리처럼 향신이 되라.


문득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생각이다. 어찌보면 새로운 도전자들이다. 새로운 세대이고, 새로운 집단이고, 새로운 이념이다. 그래서 보다 엄격한 도덕률을 부여한다. 자신들 스스로도 그러고자 노력했고 기득권 역시 그렇게 굴레를 씌웠다. 유독 새로운 도전자들에게만 항상 더 엄격한 규준들이 적용되고는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가하는 비판에 대해 자신들은 항상 충실했는가? 최소한 납득할 수 있는 모습을 보였는가? 과거의 방식은 이제 전혀 통하지 않고, 새로운 규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한계가 결국 방향을 잃고 좌충우돌하며 자신마저 부정하는 혼란으로 이어지고 만다. 단지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 예정된 결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된다. 야당과 그 지지세력이 지리멸렬해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모순의 결과가 결국 대중을 각성시키고 말았다.


어차피 저들 자신도 지키지 못할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냥 입으로만 떠드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 비판이 비판으로서 의미를 잃게 된다. 그들이 그동안 해온 일들은 이제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한 줌 조금 넘는 지지자들만이 악에 받쳐 놓치 못하고 있을 뿐 현실의 지형은 급속히 한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노무현이 너무 빨랐다. 하지만 노무현으로부터 시작된 변화가 비로소 저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문재인에게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예정된 운명처럼. 그냥 드는 생각이다. 의미없는. 느리지만 역사는 확실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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