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 위인전을 보면 그런 내용들이 있었다.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내용인데 주인공이 산속에서 스승을 만나 수련을 하는데 스승이 사냥을 시킨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냥을 나가서 토끼와 꿩 여러 마리를 잡아온다. 스승이 화를 낸다.


"너와 나 둘이면 사슴 한 마리로 며칠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네 솜씨로 사슴을 잡았다면 하나의 생명만 죽이면 되는 것인데 무엇하러 작은 짐승들을 이리 많이 살생하였는가."


하긴 원래 전통사회에서도 새끼를 밴 짐승이나 아직 어린 짐승을 도살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워낙 고기가 귀하던 시절이니 필요하면 어지간하면 잡아서 먹기는 했었다. 그래도 굳이 아쉽거나 급하지 않은데 괜한 살생을 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식은 있었다.


개고기 식용에 반대하는 주장의 요지 역시 이러한 연장에 있을 것이다. 어째서 지구상 수많은 동물 가운데 고래만은 포획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고래만 특별해서? 하긴 특별하다. 다른 야생동물에 대해서도 혹은 멸종위기종이라든가, 혹은 상징성이 있다던가 해서 식용을 금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인간은 같은 생명인데 그렇게 동물을 구분하여 죽이고 말 것을 결정하는가?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것도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난민들이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음에도 자국의 안정을 위해 국경을 닫아야 한다. 고향을 떠난 난민들이 머물 곳이 없어 고초를 겪고 있음에도 그들로 인해 자국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그들을 강제로 추방해야 한다. 분명 이 경우도 같은 인간이지만 자국 국민을 우선하고 있다. 인간도 판단한다. 태어난 곳이나 혹은 피부색이나 혹은 종교나 혹은 다른 기타 이유로 인간 역시 엄밀히 구분되어 판단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 이쪽의 인간들에 대해서만이라도 잘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닌가.


이미 인간은 많은 고기를 먹고 있다. 넘치도록 많은 고기를 먹고 있다. 나 역시 운동한다고 하루에 500그램 이상의 고기를 매일같이 먹고 있다. 그를 위해서 소며 돼지며 닭이며 비참할 정도의 열악한 환경에서 마치 공산품처럼 생산되어지고 있다. 소와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의 권리에 대해서마저 고민하는 이들이 있는 시대에 굳이 여기에 새로운 동물을 더할 필요가 있는가. 굳이 급하지도 아쉽지도 않은 동물을 더해서 살생을 늘릴 필요가 있겠는가.


무엇보다 찬성하는 입장에서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게 할 뿐이지만 반대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아끼는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큰 충격이고 상처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태연히 남이 기르는 동물을 멋대로 끌고가서는 잡아먹기도 한다. 내가 개고기 반대로 돌아서게 된 이유였다. 개고기 식용을 방치하니 엄연히 주인이 있는 개들마저 임의로 가져다 잡아먹고 식당에 팔기도 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종을 넘어서 그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그럼에도 어차피 동물인데 잡아먹는 것이 문제가 안되는 것일까?


굳이 개고기가 없으면 쇠고기를 먹으면 된다.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 오리고기나 토끼고기로 대체할 수도 있다. 대체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개고기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개와 고양이는 무척 특별하다. 그냥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도 의미를 부여하면 특별해진다. 굳이 그런 개인의 양심과 감정마저 억눌러가며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가치있는 행동인가.


정확히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을 위해서다. 그들의 양심과 감정을 위해서다. 그것이 그들을 불편케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예를 금지하는 이유와 같다. 자기가 원해서 노예가 되었어도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의 양심과 이성을 불편케 만든다.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불편과 개고기로 인해 느끼는 혐오감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다고 사회가 개고기를 아예 금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주장을 해도 되는가,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충분히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 토론할 수 있다. 아예 주장 자체를 막는다. 그것도 되도 않는 궤변을 근거로 한다. 어차피 소나 돼지도 잡아먹을 수 있으니 개나 고양이도 잡아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알면서 그러던가 아니면 몰라서 그러던가.


하나라도 죽이는 동물의 수나 종류가 적어지면 좋은 것이다. 더 적은 동물만을 희생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간은 더 나아지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은 조금 더 진보한다.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 수는 최소한으로. 그것을 차별이라 말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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