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유럽과 일본에서는 아직 중앙집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었다. 하나의 의지가 사회의 말단까지 지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만의 성을 쌓을 수 있었다. 지배신분들에게 유용한 수단이 자신에게는 있었다. 그것은 돈이기도 했고,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이기도 했었다. 아무튼 서로 나뉘어진 지배신분의 의지는 그들이 자유롭고자 해도 그것을 강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곧 자신이 가진 부와 지식과 기술이 곧 신분이 되고 권력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너무 오랫동안 그것도 가장 강력하고 완성도 높은 중앙집권 아래에서 살아온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복수의 의지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자기만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었다. 왕이 마음먹으면 당장 죽는 것이고, 왕을 등에 업은 권력자가 그러고자 하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구한말 조선을 찾았던 많은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부분이었다. 하도 관리들에게 빼앗기니 아예 백성들이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조선사회를 지배하는 엄격한 신분질서는 몇몇 개인의 의지와 실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고 가치였었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에도 조선의 반상제도는 살아남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어 주고 있었다. 개인은 결코 사회의 구조로부터,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나마 개인들이 자유롭게 기회를 노릴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이후 군사독재가 시작되기까지의 짧은 기간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을 자신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이땅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권력과 가까울수록 그들은 더 많은 부와 지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법마저 무시한 채 독재권력은 마음대로 개인의 삶을 침해하며 기업의 운명마저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여전히 개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엄격한 수직적 질서 아래 예속된 존재였었다. 자기가 가진 기술과 지식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단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남들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 허락하고 권력이 뒤를 봐주면 돈을 버는 것이고 아니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권력과 얼마나 가까운가는 자기가 얼마나 상대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를 뜻하는 것이 되기도 했었다. 원리는 같다. 아직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은 독립적이지도 서로 대등하지도 못하다.


과연 지난 50년 동안 오로지 자기가 가진 기술과 식견만으로 사회 상층부로 진입한 이가 몇이나 되던가. 사람들이 사법시험을 두고 신분상승의 사다리라며 아직까지도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자기가 가진 실력만으로도 얼마든지 부를 쌓고 사회 상층부에 진입할 수 있다면. 신분의 역전까지 얼마든지 가능하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그나마 실력으로 이미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이들과 같은 줄에 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들에 집착하게 된다. 의대에 가면 선생님이 될 수 있고,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영감님이 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직업 뒤에 '사'짜가 붙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사실상 그것 말고 아직 사회의 비주류에 머문 개인이 주류에 합류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 결국은 포기선언이다. 사법시험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고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검찰과 사법부의 부패란 어쩌면 구조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한국사회에서 이토록 갑을관계가 심할 정도로 나타나는가. 고작해야 손님이다. 자기가 상대보다 나은 것은 상대가 자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엄원이라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그렇게까지 두 사람의 인격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정받아야 하니까. 어쩌면 절박함이다. 그렇게라도 상대에게 아직은 자신이 사회의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나지 않은 존재임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욕구 가운데 자존의 욕구에 해당한다. 아직 한국사회가 엄격한 수직적 질서 아래 있기에 자신이 완전히 사회의 밑바닥에 내몰려 있음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혹은 자기가 상대보다 아직은 우위에 있음을 계속해서 확인하려 한다. 그것이 곧 이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이며 가치다. 상대가 가진 능력이 무어고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무언가가 아닌 오로지 상대와 자신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서 모든 답을 내리려는 관성이 그런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결국은 구조적인 것이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강한 수직적 질서 아래 존재하고 있다. 개인의 의지나 역량보다 엄격한 수직적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아직까지도 대통령을 나랏님이라 부른다. 국회의원들은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해 심지어 유권자들더러 아예 아무 관심도 가지지 말라고 당연하게 윽박지른다. 대통령이 시키면 한다. 정부에서 마음먹으면 그렇게 된다. 국회의원이 합의로 결정했으면 당연히 복종해야 하는 사회의 규범이 되고 질서가 된다.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이성적 판단 이전에 이미 있는 정부의 명령을 어긴다는 자체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동인 것이다. 그 안에 개인이란 어디에 있을까? 자신을 주장할 개인이란 어디쯤 존재하는 것일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근세 유럽에서 평등이라는 개념이 다시 재발견된 이유는 도시의 시민들이 귀족들이 만든 신분질서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수단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가진 돈이었다. 자기가 가진 지식과 기술이었다. 자기가 가진 돈과 실력으로 귀족이 누리는 특권보다 더 사회에 기여할 수 있었다. 엄격한 봉건질서 아래서도 강력한 군주들로부터 그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어떤 실력을 갖추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처음엔 부르주아들이 귀족들을 상대로 덤벼들었고 부르주아들의 승리가 확정되기도 전에 이번엔 노동자와 농민들이 부르주아들을 상대로 덤벼들었다. 그러므로 자신은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다. 그것을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 한다.


수직사회가 아닌 수평사회다. 사회 안에서 자기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 즉 사회에 자기가 기여하는 바를 찾는다. 자본주의의 미덕이라는 것도 개인의 이익추구가 결과적으로 사회에 미치게 될 긍정적인 역할과 기여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전기기술자가 되고, 환경미화원이 되고, 건물 경비원이 된다. 그런데 과연 일용직 노동자 없이도 이 사회는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파업도 하는 것이다. 어디 한 번 내가 없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나 보자. 내가 아무것도 않는데 과연 사회가 아무일없이 돌아갈 수 있는지 모두 두고보자. 미화원들이 아예 청소를 하지 않으면 거리는 어떻게 될까? 경비원들이 아예 출근하지 않으면 공장이나, 빌딩, 아파트들은 어떻게 될까? 당장 편의점들도 아르바이트 구하지 못하면 사장이 직접 밤을 새거나 문을 닫아야 한다. 


개인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직업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개인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대체불가능한 인력은 없다. 대통령도 누군가로 대체가 가능하다. 기존의 국회의원이 낙선했다고 새로운 국회의원이 반드시 그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개인의 문제가 또다른 개인의 문제로 옮겨졌을 뿐이다. 사람이 바뀌었으니 문제들까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에 기여하는 만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가 배려하며 존중해야만 한다. 


그래서 역직사회다. 수직적 질서 아래 존재하는 사회가 아닌 각자의 사회적 역할에 따른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회를 뜻한다. 상대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나보다 신분이 낮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이 시간에 필요한 물건을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감사함이다. 무심코 아이스크림 포장이를 길에 버리려다가 미화원과 마주치면 머쓱하게 주머니에 집어넣고 마는 미안함이다. 이 사회는 그만큼 다양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유지되고 있다. 그 전에 먼저 여전한 사회의 권위주의가 해체되어야겠지만.


물론 더 가치있는 일은 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역할이란 것이 있다. 능력이 되니까 하는 것이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하는 것이다. 굳이 질투할 이유가 없다. 그는 그에 걸맞는 실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 뿐이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모든 개인은 능력도 다르고 적성도 다르다. 타고난 환경도 모두 다르다. 각자 주어진 조건에 따라 최선의 일을 찾고 최선의 역할을 다한다. 아마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웠을지 모르겠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 아직까지 너무 멀기만 하다. 헬조선의 이유다. 어쩌면 너무나 쉽고 당연할지 모르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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