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정작 로마사회의 주류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나름대로 유력종파이기는 했지만 로마의 국교가 될 정도의 세력까지는 아직 없었다. 심지어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아예 기독교 교단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타격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콘스탄티누스는 그런 기독교를 공인하고 자신의 종교로 삼았을까?


당시 지중해세계에 유행하던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주교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상명하복적 구조였다는 것이었다. 유대교의 유산이랄 수 있는 강한 율법주의적 경향이 복음서를 중심으로 주교의 해석과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었다. 만일 누군가 이들 주교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신자들까지 함께 자신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다. 실제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화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의 보호자로서 모든 주교의 위에 군림하며 기독교의 교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도들이 주교들에 복종하는 이상 따라서 당연히 주교를 지배하는 로마 황제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의 황제들은 그를 통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된 황제로서의 지고한 권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거꾸로이야기하면 그렇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분열로부터 중세유럽의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기독교는 로마교회의 지배 아래 있었고 교황의 지지를 받는 군주들이 합법적으로 그 권위를 빌어 제후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로마교회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정작 그 배경이 되어주었던 로마교회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전부터 로마교회의 권위가 의심받기 시작하고 있었기에 그같은 주장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은 로마 교회가 아닌 각자가 성서 안에서 찾아야 한다. 성서만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로마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독일의 제후들은 당연히 그같은 루터의 주장을 지지하여 그를 보호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치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영지 아래에서 신앙은 영주인 자신이 정한다. 아예 영국의 핸리 8세처럼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자기가 수장이 되어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또라이도 있기는 했었다. 이제 유럽사회는 로마교회의 정신적 지배를 받는 단일한 세계가 아니다. 로마로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질서가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할 수 있다.


로마 교회에 복음서가 있었다면 불교에는 각종 경전이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은 선학에 의해 후학에게로 위계를 가지고 전해지고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을 독점함으로써 불교의 사원과 승려들은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중은 알지 못하는 깊고 오묘한 말씀을 전하는 승려들이야 말로 부처님의 대신이었다. 당연히 부처와 같은 권위를 갖는 승려들은 대중들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불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위계의 구조를 틀어쥘 수 있다면 세속의 권력이 종교의 힘을 빌어 대중을 지배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했었다. 선종이 주로 주류불교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계층을 중심으로 출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북송대에는 당말의 불교탄압과 오대십국의 혼란까지 더해지면서 불교의 중요한 경전 다수가 소실된 배경까지 더해지며 선종이 교종을 누르고 성세를 이루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경전의 가르침이 없어도, 즉 선사의 가르침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불성으로 오로지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북송연간 구법당과 신법당이 각각 교종과 선종과 손잡고 서로 대립한 것도 그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고 사마광의 구법은 그로부터 사대부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고려의 의천이 천태종을 세우고 지눌이 거꾸로 조계종을 세운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천은 왕족이었고 지눌은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의천의 불교개혁은 개경의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지눌의 종교운동은 지방에서 일반 백성과 향리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권력과 결탁한 불교가 타락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권력과 분리된 새로운 불교를 주장한 결과 지눌의 조계종은 조선건국 이후 숭유억불의 분위기 속에 마침내 불교의 주류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조계종이 지눌이 그토록 강조하던 권력과 분리되어 대중속에서 직접 실천하며 수행하는 본질을 지키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내가 불교도이기를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근세까지도 유럽사회에서 개인이 성서를 소지하고 읽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말했듯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성직자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은 그저 성직자들이 해석한 가르침만을 듣고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루터가 성서로 다시 돌아가자 주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활발하게 성경의 번역작업이 이루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전까지는 자기말도 된 성서조차 없었다. 모든 성서는 일반 대중은 물론 어지간한 귀족들도 읽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쓰여 있었다. 그러니 기독교의 가르침이란 오로지 그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로마교회에 독점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교황이 옳다면 옳다. 로마 교황이 이단이라면 이단이다. 그러니까 진짜 이단인가 성서를 가지고 따져보자. 그런데 거꾸로 하나의 보편적인(가톨릭이라는 자체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해석이 사라지자 오만 놈들이 중구난방으로 자기 해석을 떠들어대며 기독교는 사분오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로마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만의 해석을 교조화하여 신도들에게 강제하는 이들도 나타나게 된다. 예전 어느 기독교 성직자의 말이 떠오른다. 신자들더러 멋대로 성서을 읽게 하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으니 성서를 읽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상당히 중의적이다.


어째서 로마는, 그리고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각각 기독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공인하고 국교로까지 삼았는가. 교리야 거기서 거기다. 중요한 건 그 종교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유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상당수 지배층이 스스로 성직자가 되어 성스러운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확히 종교가 가지는 유용한 지배구조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더 유력한 가문의 출신들은 더 높은 지위에서 종교 그 자체를 지배하기도 했었다. 무속이야 하나로 모으기도 조직화하기도 아직 원시적인 상태였다. 당시 지중해의 여러 종교들도 상당히 느슨하게 기존의 지중해의 관습 속에 녹아 있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국가를 하나로 만들고 왕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대안이. 종교는 매우 정치적이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현실에서 잠시 돌아보게 된다. 종교와 정치의 거리를. 종교와 정치가 갖는 관계를. 종교가 가진 표를 의식해서 정치인들이 종교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종교적 이슈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세속화된 21세기에 종교는 이전보다 더한 권위를 갖는다. 대개는 성경이 아닌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다. 목사가 신의 대리인이 된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역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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