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누군가가 사고를 당하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가정인 것이다. 아니 몇 년 전 함께 살던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몇 달을 그런 사고 속에 갇혀 살며 지냈었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때 그렇게 했었다면. 그만큼 그 순간이 절박하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때로 돌아가 모든 것을 돌려 놓고 싶다.

 

하필 사고장소가 버스정류장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차가 멈춰서지 않았더라면. 기자의 발언왜곡이 악의적이라는 것은 정차한 상태에서와 주행중일 때의 엑셀레이터의 기능이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주행 도중 가속하는 것과 정차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을 같이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가정법이 나오는 것이다. 하필 그곳이 정류장이 아니었고 버스가 정차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사고를 인지했을 때 엑셀레이터를 밟든 뭘 하든 버스기사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어떤 행동들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얼마간 피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처음 기사를 보았을 때 뭔 말을 저리 주저리주저리 구구하게 붙이는가 싶었다. 그런데 유가족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하니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사고를 아예 미연에 막을 수 없었다면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그러면서 지자체에 책임을 물을 근거로써 버스정류장을 방치한 부분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다. 다만 말이 좀 정제되지 않은 부분이 없잖아 있는데 그러나 그건 송영길의 스타일이니 이제와 뭐라 하기도 그렇다. 정제해서 말하는 타입이 아니다.

 

아무튼 덕분에 송영길도 깨닫게 된 것이다. 송영길이 당대표 되었을 때 아마 이야기했을 것이다. 송영길은 소인배에 속물이기에 오히려 대중정치인으로서 더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모른다고. 당원과 지지자들의 바람도 그렇고, 당장의 수세에 몰린 국면을 타개하며 당대표로써 입지를 세우기에도 그만인데, 무엇보다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어 전파됨으로써 혹시라도 지워질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역공이 최선인 것이다. 바로 이 문제를 언론개혁과 연계시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이용한다. 그동안 정치를 허투루 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말하자면 언론이 습관처럼 민주당을 공격하기 위해 기사를 도구로 쓰다가 도리어 빌미만 내어 준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언론개혁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던 송영길이 이 기사 때문에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마저 노린 것이었을까?

 

말 그대로 유가족의 심정을 그대로 대신 전달하고자 사용한 표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권한이 있는 해당 구청장에게 책임을 물으려 한다. 선의를 그런 식으로 왜곡당하면 누구나 화가 난다. 더구나 당대표 취임 초기에 그런 식으로 흠집을 내려 하면 소인배일수록 더 크게 화가 난다. 소인배라 다행이다. 대인배라면 대범하게 넘겼을지 모르겠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경기가 열린다. 아니 아마존 밀림을 종단하는 경기라도 상관없다. 매순간 생명의 위험까지 느껴야 하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다른 사람을 이기고 높은 등수 안에 들면 상당한 보상이 따르게 된다. 단, 설사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를테면 1등이 상금 백만원에 금메달을 받는다면 중간에 포기한 사람도 상금 50만원에 같은 금메달을 받게 된다. 과연 자신의 선택으로 경기에 참가하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선택도 아닌 강제로 참가하는 것이라면 그런 경기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겠는가.

 

젊은 세대가 코인이나 부동산 같은 일확천금을 기대할 수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이유인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뛰면서 청년 세대들은 부동산 가격의 안정보다 그렇게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부동산 시장에서 자신도 한 몫 잡기만 바라게 되었다. 청년 세대가 오세훈을 지지한 이유였다. 실제 오세훈이 서울 시장이 되고 부동산 가격은 코인처럼 미친 듯 들썩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현정부와 민주당은 자기들이 살 수 없게 대출을 제한하고 있었다. 코인으로 돈 좀 벌어보려니 규제하겠다 난리치고 있다. 왜 자기들에게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가. 기회를 막으려고만 하는가. 이런 것들이야 말로 자기들에게 남은 유일한 기회인데.

 

보상이 별 볼 일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막을 횡단해도, 밀림을 종단해도 결국 손에 들어오는 것은 본전도 안되는 100만 원의 상금 뿐이다. 그렇다고 경기를 포기할 수 없으니 지름길을 찾아야 하고 그 안에서 이익을 챙겨야만 한다. 그마저도 안되면 마음의 위안이라도 찾아야 한다. 내가 경기를 완주하고도 얻는 이익이 별 것 아니라면 완주하지 못할 경우 돌아갈 보상은 그보다 가혹한 것이어야 한다. 벌을 주어야 한다. 자기보다 못한, 완주했어도 순위가 한참 떨어지는 이들에게는 더 큰 고통과 불이익이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마저 빼앗아서 자기에게 달라. 왜? 그만큼 경기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위험하기까지 했으니까.

 

누군가 그러더라. 청년세대와 장년이상의 세대를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 바로 공정에 대한 것이라고. 그런데 근본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청년 세대의 공정 역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룰 위에 존재하고 있다. 형편이 되지 않으면 자식도 낳지 말라. 2000년대 초반 노무현을 지지하던 당시 청년세대 가운데 누군가 했던 말이었다. 비정규직 파업에 대해서도 역시 당시 다수 청년들은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했으면 비정규직은 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지금 40대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번 돈으로 의료보험료 내서 다른 사람이 혜택보는 건 부당하다. 결론은 승자는 보상을 받아야 하고, 패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것이다. 더구나 그 경쟁이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더욱. 그러니까 끝까지 버티며 경쟁할 동력이 생기는 것 아니던가.

 

청년 세대가 말하는 공정이란 바로 그런 공정인 것이다. 너무 힘드니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래서 당장에라도 놓아 버리고 싶을 테니까. 그런데 그러지도 못하니 요구하는 것이다. 더 큰 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결국 경쟁에서 승리해서 대기업 정규직 되어봐야 미래란 뻔한 것이다.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대기업 임원 자신들과 상관없는 이야기임을 안다. 그러니까 벌을 주라. 그래서 자기들처럼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승자도 되지 못한 이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 달라. 기성세대가 말하는 사회적 안전망이란, 사회적 평등이란 그래서 그들에겐 반칙이나 다름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경쟁에서 졌는데. 심지어 포기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벌을 주지 않으면 자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성에게도 벌을 주라. 그래서 반페미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홀대는 당연한 것이다. 성적이 안되어 비정규직이 되고 차별과 홀대를 받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 정의로운 것이다. 아니면 자기들이 지금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승자는 상을 받고 패자는 벌을 받는다. 버티면 버틴 만큼 보상을 받고 포기하면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자기들이 이 힘겨운 경쟁을 이어나가는 이유가 설명이 될 테니까. 뭐가 문제인가? 그만큼 경쟁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모든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그 고통을 덜 힘들고 덜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나마 장년세대와 청년세대를 나누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면 될까? 그래서 이준석이 마치 청년세대의 대변인처럼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 뜬구름잡는 소리 말고 실질적으로 패자와 낙오자들에게 더 가혹한 벌을 내리는 현실을 선택하자.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국민의힘의 정체성과도 이어지는 것이었다. 국민의힘의 범죄나 부정, 비리에 관대한 이유이며, 그들의 차별적 발언들에 무감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승자는 상을 받고 패자는 벌을 받는다. 너무나 슬픈 이유라 더 붙일 말도 없어 보인다.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역시 말했을 것이다. 그나마 자칭 진보에서 정신이 멀쩡한 인간이 진중권이라고. 김용민이 한겨레가 이준석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지랄발광했던데, 가만 따져보자. 그래서 한겨레가 단 한 줄이라도 이준석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거나 했던가? 그동안 이준석이 했던 말이나 행동들에 대해 비판하는 단 하나의 기사라도 내거나 한 적이 있었는가 묻는 것이다. 워낙 페미니즘에 적대적이기에 차마 데려다 출연은 못 시켜도, 혹은 대놓고 빨아주지는 못해도, 그러나 이준석이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로 민주당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신나서 기사를 써제끼고 있었다. 

 

오세훈 때와 같다. 박형준 때와 같다. 아니 그동안 자칭 진보들이 지겹도록 보여 온 모습들일 것이다. 국민의힘 잘못에는 눈감고 아예 이슈로도 삼지 않다가 민주당의 아주 사소한 잘못이 드러나면 그것만을 물어뜯는다. 국민의힘 잘못은 잘못이 아니다. 국민의힘이 저지른 죄는 죄가 아니다. 검찰이 국민의힘에 붙어서인지, 아니면 국민의힘이 검찰과 붙어먹어서인지 저들의 정의는 항상 선택적이었다. 이준석이 국민의힘 당대표가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해고를 보다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자칭 진보 누구도 단 한 마디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이었으면 온통 난리가 났을 텐데. 그러면 그나마 이준석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있는 진중권이란 그런 자칭 진보 가운데 얼마나 독보적인 인물인가.

 

자칭 진보들이 박근혜에 대해 침묵할 때 혼자서 열심히 욕하던 것이 바로 진중권이었었다. 지금 정부 비판하고 나서는 자칭 진보들이 과거 박근혜 시절 어디서 무얼했는가 곰곰히 떠올려 보라. 홍세화 강준만 김규항 나부랭이들이 어디서 뭔 소리를 지껄이고 다녔었는지. 그런 자칭 진보와 비교하면 확실히 두드러지지 않는가. 그래도 아예 국민의힘과 붙어먹는 나머지 자칭진보들과는 수준이 다른 것이다. 그래도 이준석은 인정 못하겠다. 오히려 이준석에 편승하려는 정의당과 비교해도 너무나 돋보인다. 이러니 인정하지 않을 수 있나.

 

김용민은 그놈의 감정을 좀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스피커 노릇 하기 전에 제 감정을 먼저 다스릴 수 있어야 판단도 제대로 한다. 그래서 한겨레나 자칭 진보들이 당시 이준석을 욕했는가 하는 것이다. 신지예도 차라리 김용민이나 민주당과 지지자를 욕했지 대놓고 이준석이나 국민의힘을 욕하지는 못했었다. 한겨레는 달라진 적이 없다. 정의당도 바뀐 것이 없다. 진중권은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자칭 진보논객인 것이다. 그나마 이준석에 비판적일 수 있는 진중권이 자칭 진보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이유다. 벌레는 벌레다. 똥구더기다.

여성 기업가가 있다. 남성 노동자가 있다. 과연 이 가운데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일까? 누가 기득권이고 누가 소외되어 있을까? 그러면 여성주의는 이 가운데 누구를 위한 이념일까?

 

류호정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류호정에 대한 자칭 진보의 태도가 심지어 같은 여성 노동자에 대해서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성주의는 다름아닌 부르주아 - 지식인이면서 전문가이면서 자본가인 여성들을 위한 이념인 것이다. 그래서 김학의는 무고하다. 차라리 김학의의 부인을 동정하지 김학의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겪은 여성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여성주의의 상징인 박근혜를 위해 김학의는 무죄가 되어야 한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자칭 진보가 오세훈과 박형준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이유였다. 심지어 한겨레는 오세훈을 향한 논란을 희석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인 의도된 오보까지 내고 있었다. 인터뷰를 왜곡하여 공격할 빌미를 만듦으로써 다른 언론이 그를 이용케 한다. 오세훈이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자의 감원을 추진한다는 소식에도 자칭 진보가 침묵하는 이유인 것이다. 오세훈이 여성주의 정책을 펴는 이상 오세훈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당연하고 따라서 다수 남성노동자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이준석이 해고를 보다 쉽게 만들어야 한다 주장하는데도 침묵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

 

법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 더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인권과 노동권만을 보호한다. 작년 박원순 논란 당시 단지 여성주의자들과 다른 주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해고당해야 했던 계약직 여성아나운서가 그 증거가 되어 주고 있을 것이다. 같은 여성이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약자인 계약직 언론인이었다. 하긴 지방지 기자들에 대한 성희롱과 성추행에도 자칭 진보는 입다물고 있었다. 국민의힘과 관련한 성추문들에도 철저히 침묵하며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피해자를 공격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바로 류호정에게 부당해고당했던 보좌관에 그랬던 것처럼.

 

자칭 진보가 노동보다 여성을 선택했다는 건 그런 의미인 것이다. 여성주의가 진보와 동일시되는 경향을 이용해서 기득권 여성들에 편승해서 기득권에 빌붙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실제 여성주의에 경도된 이후 자칭 진보나 심지어 중립을 자처하던 언론이나 지식인마저 대부분 국민의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을 위한 주장만을 하게 된 이유였다. 실제 여성주의에 경도된 이후 자칭 진보들이 국민의힘에, 심지어 탄핵당한 박근혜와 이명박을 재평가하려는 경향마저 강해지고 있는 중이다. 여성주의는 친기득권이다.

 

한 편으로 당연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빌딩을 청소하는 미화노동자에게 여성주의란 것이 무슨 의미일 것인가. 하루종일 남성들과 어울려 그들과 같은 일을 하며 때로 독한 농담까지 주고받으면서 부대껴야 하는 여성들에게 성인지감수성이란 대체 어떤 의미일 것인가. 화이트칼라를 위한 것이다. 이것저것 여유가 많은 여성들의 그에 어울리는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부르주아다. 여성주의란 그런 부르주아의 이념인 것이다. 최소한 지금 자칭 진보들이 주장하는 여성주의란 그렇다. 그러니까 민주당의 노동정책에는 반대하면서 국민의힘 노동정책은 노동존중이라며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란 국민의힘이 추구하는 친기득권의 이념일 테니까.

 

류호정이 보여주고 이준석과 오세훈을 통해 스스로 입증해 보인 것이다. 김학의도 그 한 증거가 되어 준다. 주호영의 성추행 논란은 아예 증거 동영상까지 있었음에도 무시하고 넘어갔다. 신분과 자격을 나눈다. 원래도 그런 놈들이었다.

일본이 한국보다 오히려 실업률이 낮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서라면 한국인은 하지 않았을 일까지 일본에서는 일본인이 스스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먹고 살 수는 있고 가정을 꾸릴 정도는 되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는 일도 힘들고 사회적인 시선도 좋지 못한데 정작 일해서 먹고살기가 불가능하다. 일찌감치 결혼하고 가족부양 때문에 이리저리 일을 찾아 헤매던 젊은 친구와 잠시 같이 일했던 적이 있었다. 직장을 구하는 기준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급여였었다. 그래도 아이를 낳으면 아내가 집에서 아이만 돌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당장은 맞벌이를 하더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외벌이로 벌 수 있을 만한 일을 찾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나와 함께 했던 그 일은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당장 돈이 급해 하기는 하지만 결국 수입이 안되어 얼마 안가 그만두고 말았으니까.

 

그러면 더 힘들고 더 어려운 대신 급여도 많은 일을 해보면 어떻겠는가? 당장 최근 여러 사건들에서도 보지 않았는가. 그런 작업장에서 노동자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급여가 많다고 해봐야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에 수당 이것저것 붙여 주는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그 최저임금만으로 생활이 가능할 것인가. 아마 작년에도 썼을 것이다. 4년 전 백수가 되었을 때는 도대체 뭐 해서 먹고사는가 했었는데, 작년 백수가 되었을 때는 뭘 해도 먹고 사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가족까지 부양하려면 더 고려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 이미 있는 일자리 가운데 한국인 노동자들이 가지 않으려는 일자리까지 한국인 노동자로 채우기 위해서는, 그래서 전체 고용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해당 사업장의 환경과 노동자의 처우와 지위, 무엇보다 급여의 개선이 필수란 것이다. 하긴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다 쓰는 것이기도 하다. 급여도 올리지 않고, 환경도 처우도 지위도 개선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비용만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싼값에 쓸 수 있는 외국인노동자가 필수적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적개감을 가지는 이른바 청년세대를 위한 제안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보다 급여수준을 더 올리고, 현실의 여건과 환경을 보다 극적으로 개선한다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외국인 노동자의 설 자리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다만 그런 개소리 늘어놓는 자칭 청년들은 그런 일을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자기들더러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라는 것이냐며 분개하던 것이 바로 그들 청년들이었을 테니.

 

아무튼 아직도 급여가 충분치 못해 외면하는 일자리가 적지 않더라는 것만으로도 아직 한국사회의 최저임금수준이 충분치 못하다는 가장 큰 근거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야간일에 연장근무하며 수당 덕지덕지 - 기본급의 거의 배가 넘어가는 수당을 받아 챙겨야 겨우 가족 한 사람 부양할 정도의 수입이 생긴다. 법정 근로시간 지켜가며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하며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그 정도 수입이 보장되는 것은 대기업 생산직 정도인 것이다. 대기업 생산직도 힘들다고 외면하는 이들이 태반인데 과연 누가 그런 일을 하려 할 것인가.

 

당장은 급여도 처우도 환경도 좋지 못해 기피하던 일들까지 최소한 돈을 바라보고 하게 될 정도는 되어야 최저임금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러면 얼마까지 올라야 할까? 나도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 주말에는 그냥 편하게 집에서 쉬고 싶다. 그럴 정도는 되어야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아직 최저임금의 수준이 부족하다는 이유인 것이다. 최저임금 1만원으로도 아직 많이 아쉬울 정도다. 물론 대부분 편안한 환경에 있는 놈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기는 하다.

한국 페미니즘에서 친일과 친독재를 빼면 거의 껍대기만 남는다 할 수 있다. 한국 페미니즘의 시조가 누구인가. 바로 김활란이다. 박마리아다. 그들은 과연 어떤 인물들이었는가.

 

페미니즘이 지배하는 자칭 진보를 포함한 언론들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한일관계를 언급하는 이유인 것이다. G7에서 수많은 현안의제들이 있었을 텐데도 오로지 일본과의 관계만으로 그 성과를 평가하려 한다. 무엇 때문일까?

 

당연히 수구는 이승만과 박정희 이래로 친일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을 것이다. 진보의 경우 70년대 이후 민족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여성주의는 달랐다. 여성주의는 일제강점기 이래로 친일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여성주의자들이 하나가 되어 정의연을 공격한 이유였다. 조선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팔아넘긴 것이 어디의 누구인가? 그래서 굳이 일제를 지우고, 친일파를 지우고, 조선의 남성들에게 혐의를 덮어 씌운다. 위안부문제는 한국 남성들에 의한 국내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박근혜의 위안부협상은 피해자들을 위해서도 최선의 선택이었다.

 

KBS의 현재 스탠스는 김경록pb의 인터뷰왜곡과 박원순의 자살마저 2차가해라 단정짓는 부분에서 다른 변명의 여지 없이 분명해진 상태일 것이다. 다른 어떤 외교적 성과에도 일본과의 회담이 없었으므로 G7은 실패다. 김학의를 무고하다 여기며 박원순에 대해서는 자살조차 2차가해라던 그 입장의 연장에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뿌리는 일본에 있다. 자신들의 정체성은 일본에 가깝다. 정권 말기라 정권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지니 그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다. 미국과 관계가 끝장나더라도 일본과의 관계는 개선되어야 한다. 그 비슷한 주장을 하던 놈들을 대부분 알고 있다.

 

원래 수구야 친일파의 후신이고, 그럼에도 자칭 진보가 친일로 돌아선 이유가 그렇게 설명되는 것이다. 지금 자칭 진보에게 남은 진보적 가치란 여성주의 뿐이다. 그리고 여성주의는 친일과 친독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권인숙이 전두환 찾아가 무릎꿇고 사죄하는 장면이 그냥 상상만은 아닐 것이란 이유다. 이미 자칭 진보는 박근혜를 통해 여성주의를 매개로 과거의 군사독재에 투항한 지 오래였다. 강준만이나 서민, 김규항 등이 박근혜에 대해 썼던 글을 돌이켜 볼까?

 

일본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외교는 없는 것이다. 외교란 일본과 회담하여 그 호의에 기대는 것이다. 자칭 보수와 자칭 수구가 그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다. 조봉암이 웃을 일이다. 그런데도 자칭 진보란 것은.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정의다. 민주당이 반대하는 것이 진보다. 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전두환과도 화해할 수 있는 것이다. 518 특별법에 반대한 인사를 단지 광주에 근거가 있단 이유로 띄워주는 이유일 터다. 벌레는 벌레인 것이다.

지금 차기 대권주자로서 윤석열에게 모이는 높은 대중적 지지는 그가 무언가를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당연히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기대로 인한 것도 아니다. 아, 하나 있다. 문재인을 잡아 죽이자. 민주당을 아예 짓밟아 없애 버리자. 이준석이 당대표가 되고 했던 수락연설의 내용도 대부분 그것이었다. 문재인을 타도해야 한다.

 

한겨레가 조선일보를 추종하는 이유다. 정의당이 국민의힘에 종속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칭 진보들이 그토록 이전 이명박근혜 정권과 현정부를 비교하며 그때가 더 나았다 주장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실제 한겨레 기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박근혜 시절이 지금보다 더 나았었다. 심지어 노동운동을 한다는 놈들조차 노동자의 지위와 권리가 비교할 수 없이 더 나아진 지금보다 노조가 탄압받고 노조위원장이 지명수배를 당하던 당시가 더 나았다는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다. 언론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통제당했음에도 단지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시절의 언론환경을 더 그리워한다.

 

그렇게 진보와 수구가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페미와 반페미가 손을 잡는다. 검찰을 중심으로 법원과 정치권과 언론이 오로지 하나가 되여 민주정부에 대적한다. 민주정부를 거꾸러뜨린 다음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가는 나중에 따져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노동관이나 경제관, 국제관, 정치관 등 정치인으로서 아무것도 보여 준 것이 없는 윤석열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윤석열과 검찰이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와 비리등에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눈감고 귀막고 입다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를 위해서라면 김학의의 범죄조차 무죄로 여길 수 있다. 지금 김학의의 범죄와 그를 수사한 수사관들의 행위 가운데 저들은 무엇을 더 심각하게 여기고 있을까? 그래서 이준석의 평소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한 편에서 마치 혁신의 상징인 양 그를 띄워주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 바로 반문재인, 반민주당을 위해서.

 

이준석이라고 당대표가 되어 국민의힘을 어떻게 바꾸고 대한민국에 어떤 정책을 펼칠 것인가 아무 생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지금의 굳건한 연대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즉 윤석열처럼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할 뿐 구체적인 어떤 비전도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상태여야만 서로 성향이 다른 주체들이 연대하여 반민주당 반문재인의 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러기로 약속받았기에 자칭 진보 역시 그런 윤석열과 이준석을 거부하지 못한다. 오로지 목적은 하나 문재인을 죽이고 민주당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아마 민주당 내부의 친진보 인사들 역시 어느 정도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인영이 이미 선언한 바 있었다. 정의당과의 연대는 똥통을 구르는 것이다.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저들의 연대를 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들로부터 정부와 당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다시 반복되고 있다. 민주당에서 가장 국민의힘과 가까운 것은 가장 진보성향에 가까운 박용진일 것이다. 원래 진보정당 출신인데 행보는 국민의힘의 그것에 매우 가깝다. 본능인 것이다. 저들의 본질이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옳다. 진보란 곧 수구다. 그래서 자칭이다. 잊지 말았으면 한다.

공수처가 지금 윤석열을 수사해서 면죄부를 주면 공수처의 존재의의는 완전 부정되고 만다. 의미가 부정되는 것을 넘어 자칫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라도 하면 공수처는 말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공수처장은 유일한 공수처장으로 끝나고, 공수처 소속 수사관들은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다시 검찰로 돌아가더라도 몇 년이나 다른 곳에서 공백이 있었는데 과연 전처럼 검찰조직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인가.

 

공수처가 이대로 아무 의미없이 흐지부지 되면 공수처장도 공수처 수사검사들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공수처가 뭔가 의미를 갖는 존재여야 나중에 공수처가 사라지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더라도 공수처를 자신의 이력으로 삼을 수 있다. 하물며 지금 공수처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런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원래 같은 검찰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공수처에 소속되어 있는데 검찰이 자신들을 개무시하고 있다. 못참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검찰과 공수처가 유착한다 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일시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 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아니라 단언했던 이유였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의 공이 크다. 윤석열이 아닌 문무일이었다면 절묘하게 공수처와 주고받으며 공수처를 검찰의 또다른 지청 정도로 만들려 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윤석열은 공수처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처음부터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다. 공수처장이나 수사검사 입장에서도 이대로라면 공수처는 존재의미조차 잃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나 버리고 만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처음에는 검찰과 손잡고 정부와 적대하려는 계획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검찰이 노골적으로 공수처를 무시하는 이상 공수처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검찰을 적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무소불위의 존재였던 검찰과 적대할 수 있다면 공수처의 존재는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공수처 소속 검사들 입장에서도 이대로 공수처가 무력화되면 민주당의 검수완박 법안이 더 큰 명분을 얻게 될 가능성마저 높다. 이래저래 손익계산은 공수처가 윤석열을 잡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검찰을 잡아야 공수처장도 공수처 소속 검사들도 권위가 산다.

 

윤석열은 그런 점에서 확실히 보물이란 것이다.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공수처가 검찰에서 완전히 독립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윤석열의 의도는 너무 노골적이었고 따라서 공수처는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검찰과 적대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대로 검찰이 무시하는대로 당하기만 할 것인가. 검찰을 잡아서 나중에 검찰과 다시 손잡을 때 자기들 몸값을 올리려 할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공수처 사라지고 소속 검사들이 검찰로 돌아간다고 이전과 같은 자리로 돌아갈 가능성은 그리 높지 못하다. 그게 조직사회란 것이다. 그런 공수처의 퇴로를 아예 막고 있는 것이 지금 윤석열의 영향 아래 있는 검찰인 것이고.

 

의외로 공수처가 윤석열을 제대로 수사할지 모르겠다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공수처장이 어지간히 대가리고 돌이거나 욕심이 없거나 신념이 투철하지 않은 이상 이것은 필연이다. 그래도 안 집단의 장인데 남의 밑에서 머리를 숙이고 싶을 것인가. 세상에 김명수 같은 병신은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법부의 수장이 일개 행정부 외청에 법원을 모두 들어다 바치고도 오히려 만족감과 안도감마저 느낀다. 과연 지금 공수처장도 그럴 것인가.

 

정치란 욕망이다. 정치란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공수처장의 권위가 절대 검찰총장만 못하지 않다. 오히려 독립된 기관이기에 행정부 외청인 검찰총장보다 높으면 더 높았다. 다시 말하지만 김명수 같은 병신은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다. 양승태가 흔하지 김명수는 사법부의 자존조차 지키려 하지 않는 병신 중에 상병신이다. 그 기준으로 판단하려면 오류가 생기기 쉽다. 부디 예상대로이기를. 검찰은 공수처가 잡는다. 확실히 보여주기 바란다.

인터넷에서 한창 반페미가 세력을 얻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페미에 착한 페미따위 없다."

 

페미는 시작부터 여성우월주의였다. 폭력적이고 약탈적인 여성지상주의적인 사고였었다. 페미는 그래서 악이다. 그리고 수많은 자칭 젊은 남성들이 그 주장에 열광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국민의힘의 페미는 착한 페미다."

 

반페미를 이유로 이준석을 지지하는 그들이 그래서 오세훈과 배현진의 페미 역시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페미는 나쁜 페미이고, 국민의힘의 페미는 아무 문제가 없는 착한 페미다.

 

그래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페미나 반페미다. 정당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는 이념과 주장 따위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정파적인 목적 말고는.

 

이준석을 지지한 것이 반페미 때문이라면 배현진은 무엇일까. 조수진은. 오세훈의 페미정책은 어떠한가.

 

민주당의 여성주의자들도 혐오인데 저 새끼들도 혐오이긴 마찬가지다. 이준석의 당대표당선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필 상대가 나경원 주호영이었다. 거기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페미가 병이면 반페미도 병이다. 그냥 내린 결론이다. 

"민주주의가 권력연장의 도구로 전락했다."

 

그동안 내가 자칭 진보에 대해 쓴 글들을 읽었다면 전혀 생소한 말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국민의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것은 자칭 진보들이 아닐까.

 

그래서 김학의에 대해 출국금지만 남은 지금 상황이 납득이 간다는 것이다. 김학의가 아무일도 저지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에게 끔찍한 인권유린이 저질러졌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마저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참혹한 일들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끊어야 했던 이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름있는 이들이던가. 아니면 이름있는 누군가의 비호를 받던 이들이던가.

 

고작 대중따위. 고작 이름없는 민중따위. 이미 그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더 넓게 보며 그들은 하지 못하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자신들과 비교하면 -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신들을 알아주지 않는 대중이란 비천하고 무가치한 존재다. 실제 들은 이야기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맥락은 비슷하다. 대중이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자신들이 옳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런 무지하고 어리석은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란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소수 탁월한 엘리트에 의한 독재인 것이다. 정확히 소수 탁월한 엘리트의 합의에 의한 공화제다. 저들이 곧잘 국민의힘과 손을 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6.10 항쟁마저 그래서 부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잘못되었다.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잘못된 제도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들이 주류가 되지 못했으니까. 주류여야 하는데 주류가 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주류로써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주류와 손을 잡는다. 국민의힘과 검찰과 손을 잡게 된다. 손을 잡는다기보다 비굴하게 매달리는 것이다. 검찰이 그동안 저지른 수많은 잘못들에도, 심지어 김학의에 대해서까지 철저히 검찰의 편에서 그를 수사한 이성윤을 부정하는 것을 보라. 검찰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김학의도 검찰이 그렇다고 했으니 무고한 일반인이다. 이 무고한 일반인이란 표현도 한겨레가 직접 자신들 채널에서 쓴 것이었다.

 

류호정의 이해 안되는 행동들도 그렇게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주류라면 그래도 된다. 주류 기득권에 속한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정의다. 국민의힘과 검찰과 유착한 지금이기에 그리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영락했다. 민주주의는 잘못되었다. 6.10항쟁은 실패했다. 남은 건 이제 전두환 찾아가서 무릎꿇고 용서를 비는 것일까? 권인숙도 아마 함께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저놈들의 진짜 속내란 것이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만큼 저들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내린 사고체계인 것이다. 이해하면 저들의 행동을 아주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소수의 엘리트를 위해서. 당파가 달라도 차라리 노론이 더 가까운 것이지 남인에게 백정이 더 가깝지는 않다. 민주당은 기껏해야 중인 나부랭이다. 너무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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