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었다. 서울시장이며 경기도지사며 대구시장을 제외하고 책임있는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든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대통령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메시지를 내는 것은 이들 지자체장들이었다. 중앙정부가 더 큰 책임만큼 더 주의를 기울여 행동해야 하는 사이 더 민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먼저 실행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대통령이 되든 코로나 방역이 지금보다 더 나빠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쩌면 더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보고 만 것이다. 유력 지자체장 가운데 서울과 부산의 장이 야당의 인물로 교체되면서 어쩔 수 없이 보고야 만 것이다. 코로나19의 4차 확산으로 온통 난리인 상황에 시장이 현장에 없었다. 이미 4차 확산이 시작된다고 확진자가 매주 수 백 명 씩 나오는 상황에서도 시장은 전혀 상관없는 일들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도대체 4차확산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 미국 하원의원들과 만나 한반도 정세를 논의한다는 게 서울시장으로서의 업무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고서는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며 정부에 방역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지금껏 성공적으로 방역을 수행해 온 정부에게만 모든 핑계를 돌리고 있었다. 아, 이 새끼들은 진짜 안되는구나.

 

그래서 덕분에 민주당의 지지율까지 폭등한 것이다. 국민의힘 이 새끼들은 안되겠다. 그나마 국민의힘에서 인물이라고 내세울만한 게 오세훈 정도일 텐데 시장이 되어 하는 짓거리가 이 꼬라지다. 윤석열 또한 방역에 대해서는 전혀 엉뚱한 소리나 하며 그 심각성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 방역에 있어서만큼은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원래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날수록 정부에 대한 책임여론도 높아지며 지지율도 떨어져야 당연한 것인데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는데 정부의 지지율은 높아진다. 야당 하는 꼬라지 보니 전혀 대안이 없다. 아마 이낙연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차라리 정은경처럼 대중 앞에 나와 내가 잘못했다 인정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판단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열심히 하느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진쩌 정부의 잘못으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고 말았다. 동정여론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이가 대중 앞에 나와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며 책임을 떠넘기기만 하면 저 새끼가 지금 자기 책임도 모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차마 박원순을 칭찬할 수는 없으니 자칭 진보들은 오세훈을 한 마디 비판조차 할 수 없을 테지만.

 

아무튼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오세훈이 진짜 생각이 있는 정치인이었으면 코로나19의 4차확산과 맞닥뜨린 상황에 대규모집회를 열었던 민주노총을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추적해서 검사를 받도록 했어야 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통해 현정부를 비판할 건수를 찾을 수도 있었으니 정치적으로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관심했다. 민주노총이 오히려 코로나19를 확산시키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민주노총도 그에 호응하듯 정부의 만류에도 집회를 강행하고 정의당까지 나서서 한 소리 거들고 있었다. 그런 민주노총에 대한 국민의힘의 태도 또한 전과 달랐다. 어째서?

 

말했잖은가. 민주노총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불의한 권력이라고. 오히려 자신들이 마음껏 투쟁할 수 있도록 열어두고 있기에 현정부가 불편하다고 직접 인터뷰를 통해 토로한 바 있었다. 이명박근혜 시절이 투쟁하기 더 나았었다. 자칭 진보가 분노하는 이유다. 홍세화가 어디 가서 강연을 하고 세미나를 열어도 전처럼 시민들이 호응해주지 않는다. 진중권이 뭔 소리를 지껄인다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나 있는가. 김규항은 이미 잊힌 지 오래는 퇴물이다. 아무튼 덕분이다. 오세훈은 멍청하고 그 협력자들은 무능하다. 대통령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다. 슬픈 현실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어떻게든 한사군의 존재를 한국의 역사에서 지우고 싶어 하는 것과 달리 유럽에서는 오히려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문명화의 시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마저 존재한다. 당연한 것이 고대, 아니 중세까지도 유럽인들에게 문명이란 곧 로마였고, 유럽의 문명화란 바로 이 로마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당시에도 아직 식민지화되지 않은 당시 갈리아의 유력자들 가운데는 로마로부터 이름뿐인 관직과 작위를 받고 그것을 앞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바로 거기서 중세 유럽의 작위들도 유래되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 아닌가?

 

당장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까지 왕들은 묘비 등에 왕호와 더불어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관직을 앞세워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중국의 영토도 아니었고 중국 황제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닌 명실상부 독립국이었지만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그러면서 가장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있던 중국의 황제로부터 받은 관직이 가지는 의미가 그만큼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왕으로 지배하는 나라 안에서야 당연히 자기가 최고일 테지만 나라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도 마찬가지로 자기 나라에서 최고인 왕들이 널리고 널린 것이다. 그 가운데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더불어 나라 안에서도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근거로써도 필요한 것이다. 중국의 황제로부터 지배를 인정받고 관직까지 받았다. 그래서 심지어 이웃 나라 왕보다 높은 관직을 받기 위한 외교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었다. 중국의 황제로부터 이만큼 인정받았으니 내가 더 낫다.

 

실제 들은 이야기다. 아마 여기서도 몇 번이나 반복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자기들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선진국 일본의 국민으로서 그 모든 것을 함께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벌써 수 십 년 전에 미국에 의해 이식된 앞선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사회분위기, 그로부터 비롯된 높은 경제력과 문화수준에 더해 우리와는 많은 부분에서 비교가 되는 일본의 역사와 전통까지 모두 우리들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당시 제법 이름이 알려졌던 자칭 진보 필진이었다. 지금 어디서 뭘하는가는 모르겠는데 당연히 서울대 나왔고 시민사회활동도 왕성히 하던 진보정당의 당원이었었다. 대한민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된지도 벌써 70년이 넘어가는 지금 어째서 사회 곳곳에 친일이 기승을 부리는가 설명해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사실 일본만이 아니다. 어째서 보수적인 시민들이 모여서 시위를 할 때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앞세우는가? 드라마 '송곳'에서도 나왔을 것이다. 평생 자기가 만나 본 사람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이 군대에서 대대장이었기에 틈만 나면 그를 앞세우는 아마 미화노동자였을 것이다. 고작해야 대대장이다. 나중에 얼마나 어디까지 진급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의 계급이라고 해봐야 널리고 널린 무궁화 두 개 짜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대대장이란 존재에 수 십 년이나 지나서까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가장 비천한 노비들이 주인을 위해 자식까지 바쳐가며 충성하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 노비에서 풀려나고도 주인의 성씨를 따라 자기 성씨를 정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 오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도 프랑스 국민으로써 프랑스 국왕이 화려한 차림을 하고 호사스럽게 파리 시내를 행진하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저 프랑스 국왕의 백성이다.

 

몸은 조선에 있으면서 정신은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들이 일제강점기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었다. 대표적으로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인간은 일본식 집에서 평소에도 일본식 기모노를 입고는 일본어만 쓰고 살았었다 한다. 어디 이효석 뿐이겠는가. 해방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일본은 선진국으로 경제적으로도 미국을 위협하며 최고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아직 가난하고 미개한 수준의 개발도상국 한국과 비교하는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한참 저 멀리 앞서고 있었다. 그런 일본의 정신적 시민과 충실한 한국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특히 자기가 잘났다 여기는 이들의 자존감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오죽하면 대한민국이 해방되지 않았으면 바라는 말들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랬다면 자신은 이 한심한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닌 선진국 일본의 시민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조국일가에 대한 언론의 사냥이 시작되었던 것도 일본과의 무역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였었다. 어딜 일본에 감히. 조국이 자신의 SNS에 올렸던 '죽창가'를 지금까지도 자칭 보수와 자칭 진보를 막론하고 한일관계를 상징하는 어떤 매개로써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어딜 한국따위가 감히! 어딜 조국 따위가 감히! 어딜 문재인 따위가 감히! 아마 당시 아베가 한국을 제재하겠다며 무역전쟁을 걸어오지 않았고 한국정부가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조국일가에 대한 사냥이 당시 그렇게 일방적으로 흘러갔을까? 지금도 윤석열의 입에서 '죽창가'가 나오고 언론이 그를 중요하게 받아쓰고 있는 현실이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일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 언론인을 포함한 한국사회 주류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 이번 코로나 정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보도태도일 것이다. 차라리 일본이 본국이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방역을 한 걸음 떨어져 보는 듯한 기사가 주를 이룬다. 심지어 경쟁관계에서 어떻게든 한국의 방역을 훼방놓고 격을 떨어뜨리려는 의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보수와 진보가 따로없다. 방송과 신문이 따로 없었다. 주류와 비주류가 따로 없었다. 그 결과 중앙일보에서는 '조센징'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조센징'이라는 역사적인 맥락까지 포함한 단어가 데스킹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것은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일상에서 그 단어를 써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인을 비하하는 멸칭이야 당연히 다양할 것이다. 가장 흔하게 일반적으로 쓰이던 것이 엽전이네, 짚신이네, 저고리네, 혹은 그냥 직접적으로 조선놈, 한국놈, 어글리코리안 등이 일상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역사적 맥락을 무시할 수 없는 조센징이나 반도인 같은 멸칭은 특정 계층에서나 주로 쓰일 뿐이었다. 바로 일본에 자신을 동화한 스스로 일본인이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의외로 학벌 좋고 집안도 좋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인간들이 주로 자주 쓰고 있었을 것이다. 하필 굳이 조센징이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 자신도, 그 기사를 걸러야 했을 데스크 역시 그 단어에 전혀 아무런 문제점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친근하고 익숙했다.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새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독립국이 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현실에 얼마나 많은 것인가. 대한민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과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차라리 한스러워하는 이들이 한국사회 주류에 얼마나 널려 있는 것인가.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어느새 한국의 저력이 일본을 넘보는 상황에 와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일본이 정체되다시피 한 세월 동안 열심히 달려 온 결과 이제는 일본마저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러 있다.

 

자칭 보수만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자칭 진보도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서울대 자체가 문제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경성제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서울대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주류들의 인식수준이 이렇다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과 다른 수준에 있는 선택된 엘리트들이기에 그 정체성마저 일반 한국인들과 달라야 한다. 그러고보면 정의당이 반민주당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선언한 것도 그와 아주 무관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자칭 진보가 정의연을 공격한 이유이기도 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그늘일 것이다. 앞으로 없기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아주 오래전이다. 무척이나 고결하고 합리적인 척 하는 자칭 진보 하나가 내게 시비를 건 적이 있었다. 전쟁이나 무기에 관심을 가지는 자체도 결국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전쟁에 관심을 가지고 환상을 가지다 보니 전쟁을 긍정하고 미화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밀덕질 좀 그만해!

 

여성주의자들이 어째서 토론에만 나서면 개박살나는가 문득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전부터 느껴온 것이다. 자칭 진보들은 대개 무식하다. 자기가 아는 분야 말고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도 아는 척 하다가 개박살나는 게 거의 패턴처럼 되어 있다. 그런 건 몰라도 된다. 아는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장이 옳다면 그것만 드립다 반복하면 된다.

 

모르긴 몰라도 여성주의자 상당수가 남성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 자체가 없을 것이다. 되도 않는 것으로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문제삼는 것을 넘어 성인지감수성이란 해괴한 단어를 만들어 아예 남성들을 세뇌하려 시도하는 바로 그것일 터다. 원래 조선시대 여성들이 그랬었다. 남성들이 굳이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으니 여성이 알아서 남성을 받들어 모시라.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거든. 여성을 너무 잘 아는 것도 남자로서 그리 바람직한 처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성에게 남성을 가르친다. 숭배하고 복종할 대상으로서의 남성만을.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남성을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주체인 것이다. 남성이란 존재 없이 여성만의 여성주의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성주의에서 남성은 불필요하다. 불필요한 것을 넘어 혐오스런 존재다. 그래서 알 필요가 없으니 모른 채 여성만을 주장하려 한다. 그러다가 정작 현실의 남성과 토론을 하면 개박살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오히려 여성주의 논쟁은 여성이 아닌 남성 페미니스트가 패널로 나서는 쪽이 훨씬 승률이 높지 않을까.

 

장혜영이 무식한 이유인 것이다. 장혜영 뿐만 아니라 극단적일수록 여성주의자 대부분의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저전혀 무지한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그래서 현실의 보편적 가치와도 거리를 둔다. 마지막까지 박근혜를 옹호한 것이 여성주의자들이었단 사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성이니까 불쌍하고 억울하다. 부당하게 탄압당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가자미년놈들인 것이다. 진보를 주장한다고 진보의 가치와 이해와 입장만을 고집하니 항상 현실과 동떨어진 그럴듯한 소리만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민주당과 자칭진보의 차이인 것이고. 왜 자칭진보는 안되는가 여기서 그 이유가 나오고 있을 것이다. 자기만 옳다 여기는 청맹과니들이 제대로 세상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당연한 사실이다.

감원이라고 바로 '너 그만둬!'하고 내쫓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흔히 쓰이는 것 가운데 자연감원이라는 방법도 있다. 한 마디로 줄어드는대로 내버려두고 더이상 늘리지는 않는 것이다.

 

지금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도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앞으로 업무와 관련한 변경사항들로 인해 필요인력이 줄어들지 모른다. 추가채용계획을 백지화하고, 정년 등 감원요소를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감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 근무시간이 줄어들면 급여도 줄어들어 퇴사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또한 활용할 수 있다.

 

물론 대놓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역학조사관이 부족하지 않은가. 아니 아직 감염자가 폭증하기 전인 지난달부터도 역학조사관은 부족한 상태였었다. 역학조사관이 부족해서 역학조사가 신속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 확진자 폭증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서울시에서 역학조사관을 운용했을 때 정부로부터 돈 지원받아 운용하고 있었는가?

 

서울시 정무부시장의 한 마디가 지금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을 것이다. 서울시에서 확진자 폭증하니 문재인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난으로 몰아간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아니었었는가.

 

아무튼 별 개소리를 다 듣겠다. 감원한 적이 없다는데 실제 감원이 이루어졌다. 정년과 자진퇴사 등 요인이 있었는데 추가 인원보충이 없었다. 그래서 실제 현장에서 인력이 부족했다. 이게 오세훈의 방식이다. 어이없다.

이재명의 단점은 당연히 그가 또라이라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과신이 거침없는 언행으로 나타난다. 재고 따지는 것 없이 자기가 옳다고 바르다고 유리하다 판단하는 그 방향으로 일단 내딛고 만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래서 불편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편으로 시원하기도 하다. 그래서 거꾸로 그것은 이재명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거기에 더해 이재명은 유능하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이레귤러인 것이다. 정치권은 물론 일상에서 당연하다 여겨 온 상식들을 너무 거침없이 무시하고 깨부숴 버린다. 어차피 안 될 것이라 여기던 것들을 되게 만들고, 과연 되겠나 싶은 것들을 현실로 옮기려 한다. 하지만 그런 만큼 성급한 말과 행동으로 구설도 많다. 적도 너무 많이 만들었다. 대통령이 되려는 지금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사이다로 남아 이미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의 더 큰 호응을 이끌어낼 것인가, 아니면 탄산을 좀 줄여서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것인가. 선거에서는 지지층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토층도 중요하다. 아무리 지지율이 높아도 비토층이 일정 이상이면 경선은 통과할 수 있어도 본선에서는 이기지 못한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부분일 것이다. 너무 자기 주장만 앞세우느라 자기에 대한 비토감정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었다. 지금도 민주당 내부에 강고한 이재명에 대한 강한 비토정서는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이 너무 무리한 결과인 것이다. 아마 그런 점에서 이재명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자칭 진보 일부는 꽤 당황스러워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재명의 여러 정책들이 자칭 진보의 그것과 겹친다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선을 앞두고 그 가운데 상당부분을 포기하거나 후퇴시키고 있었다. 민주당이 보수화되는 이유다. 현실정치에서 자기만 옳다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건 망상이다. 전제군주도 그런 걸 시도했다가는 바로 목이 잘리고 만다.

 

이재명이 몸조심하는 이유인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본바탕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때때로 그 거침없는 언행이 구설수에 오르고는 한다. 그래서 더 말조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생각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가 어떤 역풍이 불어올지 모른다. 차라리 글로써 토론에서 다하지 못한 내용을 보충하게 되는 이유다. 말로는 위험하다. 이재명의 한계인 동시에 그가 성장했다는 증거다. 비로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기기도 했다.

 

아무튼 나쁘지 않다. 이재명이 이낙연의 안정감을 노리는 사이 이번에는 거꾸로 이낙연이 이재명의 가볍고 재빠른 이슈잡이를 따라하고 있는 중이다. 말과 행동이 전에 없이 거침없다. 뭔가 이슈가 있다 싶으면 미루는 법 없이 바로 물고 자기 입장을 내놓는다. 원래 이재명이 잘하던 것이었다. 반면 이재명은 이낙연이 잘하던 '엄중'을 흉내내고 있는 중이다. 절차탁마다. 추미애가 아쉽다면 차라리 윤석열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경선에 나섰다면 지지율이 제법 올랐을지 모르겠다.

 

결국에 민주당 경선이란 것이다. 최소한 서로를 완전히 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 서로를 이기기 위해서라도 서로에게서 배울 것을 찾고 그대로 따라하는 중이다. 이재명이 이낙연이 되고 이낙연은 이재명이 된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이다. 그래서 결국 둘 중 선택되는 것은 누구인가.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이낙연도 아주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대표시절이 워낙 개판이어서 그렇지. 아무튼 좋다. 신난다.

그래서 말했던 것이다. 송영길 아주 잘하고 있다고. 송영길이 당대표가 되고 민주당이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고고한 선비가 아니다. 진리만 쫓는 학자도 아니고 이상만 쫓는 사상가도 아니다. 정치인이다. 그것도 자기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며 적응해가는 현실정치인인 것이다. 역시 그래서 말했던 것이다. 속물이라고. 소인배라고. 하지만 그래서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제도 아래서 더 유용할 수 있다고.

 

현재 민주당의 지지자 가운데 다수가 재난지원금의 전국민지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낙연 대표체제에서 철저히 외면당해 왔던 만큼 자신이 그것을 현실로 이루어낼 수 있다면 온전히 자신의 성과가 되는 것이다. 이재명이나 추미애가 전국민지급을 주장했었다는 사실은 그 순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대표로써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추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난지원금의 전국민지급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렇더라도 결국 이준석의 동의를 받아 실행하게 된다면 그 모든 공은 이준석에게 돌아갈 것 아닌가. 그러면 지금 이준석이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민주당이 받아서 실제 폐지하게 된다면 그 모든 공이 민주당에게로 돌아갈까? 재난지원금의 전국민지급 여부를 두고 논쟁한 것은 지금까지 민주당 혼자였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행정부를 통해서 내부적으로 논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민일괄지급도 선별지급도 결국 민주당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 가운데 존재하는 선택지인 것이다. 이런 것을 아젠다 선점이라 부른다. 먼저 아젠다를 선점하고 나면 뒤따라 어떤 주장을 해도 단지 최초 아젠다에 더해지는 여러 주장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여당 내부에서의 전국민지급 논쟁에 대해 야당인 국민의힘이 전국민지급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과적으로 선별지급을 채택하는 것도, 실제 지급을 집행하는 것도 모두 정부와 여당의 소관이란 것이다. 

 

그래서 국민의힘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난 것이다. 전국민지급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힘이 민주당 내부의 논쟁에 끼어들어 민주당 좋은 일만 해주고 말았다. 문제는 그렇다고 중간에 번복하고 철회하면 그때는 전국민지급이 아닌 선별지급에 대한 책임이 온전히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에게로 쏠리게 된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합의하고 전국민지급에 반대하는 바람에 선별지급으로 다시 확정되고 말았다. 원래는 국민의힘의 잘못이 아닌데 괜히 끼어들었다가 덤터기만 쓰고 만 것이다. 송영길이 그럴 의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공은 민주당이 독차지하고 책임은 국민의힘에 떠넘기는 일석이조의 묘수를 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송영길의 계산은 단순하다. 당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그에 따라 기재부를 설득하는데 아무래도 힘이 딸린다면 같은 입법부에서 야당의 동의를 얻어 그 힘을 빌리는 것도 하나의 묘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의회가 합의했으니 행정부로서도 마냥 지금까지처럼 버틸 수만은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민의힘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며 동의못하겠다 어깃장을 놓는다면 그를 빌미로 책임을 그쪽에 돌릴 궁리도 어느 정도 머리속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멍청하게 합의로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고는 번복으로 책임만 가져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더할나위 없는 상황이다. 이준석 덕분에 재난지원금에 있어 민주당의 책임이 많이 가벼워졌다.

 

어제 쓴 글의 연장이다. 젊다는 건 그만큼 아직 지식도 경험도 기술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국회의원이 되어 본 적이 없다. 거대정당에서 정당운영에 간접적으로라도 참여해 본 바가 있다. 그래서 어설프다. 섣부르다. 그런데 자신감만 넘친다. 언론이 띄워주고 지지자들이 띄워주니 진짜 자기가 잘난 줄 안다. 여성부 폐지로 이슈를 선점했다 싶으니 통일부 폐지까지 말했다가 오히려 역풍만 맞고 만 상황이 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송영길의 제안에 대해서도 재난지원금의 전국민지원의 성과를 자기가 온전히 가져갈 수 있으리라 어설프게 판단했을 것이다. 재주는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부리고 돈은 국민의힘과 이준석 자신이 챙긴다. 아니라는 걸 깨닫기 위해서는 그래도 선배정치인의 준엄한 깨우침이 필요했을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보니 이건 너무 멍청한 짓이었다.

 

궁리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이낙연이 가장 못한 일이었다. 이해찬과 추미애가 이낙연과 확연하게 비교되는 부분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도 스타일이 다르다. 이런 전형적인 정치스런 행동은 문재인 대통령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능구렁이랄까. 정치를 그냥 꽁으로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야말로 송영길이 우직한 정수에 이준석이 묘수를 부리겠다 헛발질로 자멸하고 만 상황인 것이다. 그런 것까지 예상했으면 송영길은 대통령감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만든 것부터 정치인으로서 최선의 수를 실천하려 했던 송영길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보다 괜찮은 인물이다. 이낙연과 비교되어서 그런가? 너무 잘하고 있다. 

시험이야 말로 공정 그 자체라 주장하는 시험지상주의자들에게 시험이란 그래도 되는 선을 정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시험을 잘봐 합격했으면 남들보다 특권을 누릴 자격이 되는 것이고, 시험을 못봐서 불합격했으면 대신 모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위치로 떨어지는 것이다. 노력 안해서 시험 못본 것이니 그에 대한 징벌로써 고통과 차별은 정당하다. 어째서 서울대는 청소노동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려 한 것일까?

 

청소노동자에게 시험을 치르게 한다고 따로 시험공부할 시간을 주었을 리도 만무였다. 무엇보다 제대로 근무시간을 할애해서 필요한 내용이라고 따로 교육을 받게 한 것 같지도 않다. 한 마디로 일은 일대로 하면서 시험을 치르기 위해 업무외 시간에 공부를 하게 만든다.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이다. 다음 근무를 위해 휴식을 하고 재충전을 해야 하는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도 부당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역치 어쩌고 떠드는 내용들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그래서 꼬우면 때려치고 나가라. 남았으면 시험결과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라.

 

아마 청소노동자가 우스웠을 것이다. 하찮게 여겨졌으며 그래서 차별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았을 것이다. 시험을 치르게 만들고 그 결과로써 청소노동자들을 홀대하고 차별할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시험을 치르게 만든 인간이나, 그를 감싸는 서울대 안의 교수와 학생들의 주장이 그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준다. 저들은 그래도 된다. 그래도 되는 대상이기에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인간의 가치다.

 

이준석이 당대표가 되고 새삼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인 것이다. 기자들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일베와 기자가 둘이 아니다. 시험지상주의자들이란 결국 무한경쟁 속에서 나름의 룰을 찾고자 하는 그 카테고리 안의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차별하고 그래서 그들은 그래도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래도 된다.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시험을 치르게 하고 그 결과로써 지위와 대우를 결정한다. 너무 공정하고 정의롭다. 역겹게도.

추미애가 판사가 아닌 경찰에 뜻을 두었다면 어땠을까? 경찰이 되고 싶어 시험을 치르고 순경부터 시작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 있었을까?

 

바로 강민진과 추미애의 차이인 것이다. 지금 여성주의의 주류들과 굳이 여성주의를 말하지 않아도 여성에 대한 인식을 실제로 바꿔 놓은 당사자인 추미애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아마 추미애였다면 오히려 여성의 체력시험 기준이 낮은 것에 분노하며 남성의 기준에 맞춰 준비하려 했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못하지 않다. 체력적으로도 충분히 남성과 경쟁할 수 있다.

 

여경이라고 내근으로 발령하려 하면 오히려 화를 냈을 테고, 여성이라고 안전한 곳에 있게 하면 아무리 상사고 선배라도 당당히 따져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성 경찰들에 뒤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현장에서도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 아마 현직경찰 가운데 그렇게 여성임을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경찰로써 남성들과 대등해지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저 공무원이라니까 안정적인 직장을 바라고 지원하는 것이 아닌 사명감을 가지고 민중의 지팡이가 되고자 지망한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강민진류가 바라는 여성상이 아니다.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 여성이 굳이 근력을 키울 필요도 없고,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한 격투능력을 갖출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은 남성들을 위한 것이고 여성은 그저 여성으로서 여성답게 지금 모습 그대로 여성에게 주어지는 특혜만 누리면 되는 것이다. 그를 위해 할당제가 필요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남성과 굳이 동등해지려 하지 않으면서도 남성과 숫적으로 같은 기회를 누리기 위해서. 그를 위해서는 여성으로서 남성과 대등해지려는 여성들은 방해가 되는 것이다. 강민진류가 추미애를 공격한 이유다.

 

남성과 대등해지기위해 노력한다. 더 독하게 더 악착같이 남성들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러면 여성이 아니지 않은가. 여성은 약한 존재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능에 있어서도 남성에 비해 훨씬 열등한 존재다. 그러므로 사회가 일방적으로 여성만을 배려해야 한다.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오로지 말도 행동도 조심하면서 그저 기회를 주고 관용만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 책임을 묻는 것도 여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서라고 이런저런 상사 주변의 잡무를 맡기는 것조차 성희롱이네 성추행이네 범죄시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접촉하는 경우도 늘어나게 된다. 그 가운데는 서로 부대끼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여성은 어느 순간에도 조심해야 하는 존재이고 아끼고 살펴주어야 하는 존재다. 마주 음담패설도 주고받고 때로 서로 상처가 될만한 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오갈 수 있는 동료란 여성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최근 여성임을 앞세워 국회의원이 된 대부분 정치인들이 추미애와 구분되는 지점일 것이다. 구태정치의 악다구니 속에서도 추미애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여성임을 앞세우지 않았었다. 한 번이라도 자신이 여성임을 앞세우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던가.

 

여성이라고 훨씬 낮은 기준의 시험을 통과해 경찰이 되었더라도 자존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남성이 하는 일을 자신도 할 수 있게끔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독려하는 것이 여성주의였어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여성이지만 남성의 체력기준을 충족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던 이들에 비난부터 쏟아붓고 있었다. 여성도 할 수 있다는데 오히려 비난을 퍼부으며 여성주의의 적이라 선언했었다. 내가 여성주의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버린 순간이었다. 어째서 여성이 남성만큼 강하면 안되는 것인가.

 

탈코르셋이란 지방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마음껏 지방을 늘리는 것만이 탈코르셋이 아닌 것이다. 지방을 늘리는 것에는 호의적이면서 근육을 늘리는 것은 적대적이다. 미용을 위한 몸가꾸기가 아닌 실제 근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들에는 아예 무관심하기만 하다. 그냥 속편하게 먹고 싶은대로 쳐먹고 그런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것인가. 여성도 노력하면 100kg 바벨도 얼마든지 들어올릴 수 있다. 생물학적인 차이는 어쩔 수 없더라도 생물학적 한계에 크게 못미치는 최소한의 체력기준 정도는 남성과 동등하게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귀찮다. 힘들다. 그래서 편하게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할당한 자리에 자신을 우겨 넣으려 한다.

 

일본에서 한 여경이 칼을 든 남성을 제압하는 장면이 우리나라에서만 화제가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식이다. 여성도 남성과 다르지 않다. 여성 또한 남성과 모든 면에서 동등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 주장하는 것은 오로지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일 뿐이다. 온실의 화초처럼 그저 여성을 우대하며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추미애가 떠오른 이유다. 90년대 사람들이 멋지다 생각했던 여성들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일 것이다. 여성은 약하지 않다.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주장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여성은 퇴보하는 것일까? 시대가 씁쓸해지는 이유다.

기억을 떠올려보자. 코로나와 이전 메르스 사태에서 박원순 시장의 행보가 어떠했었는가. 아니 바로 이웃한 경기도의 이재명 지사 또한 반농담삼아 형님아우 할 정도로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정부에 무언가를 해달라 요청하기 전에 먼저 자기들이 해야 할 일들을 찾아 할 수 있는 만큼 선제적으로 실행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고 경기도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은 그야말로 작은 대한민국이라 해도 좋을 만큼 예산과 인력과 행정력이 막강하다.

 

역학조사관이 더 필요하면 박원순 시장의 경우 알아서 시의 예산으로 필요한 만큼 인력을 확충해서 투입하고 있었다. 백신이 더 필요하다 생각되면 이재명 지사의 경우도 오히려 정부더러 경기도의 예산으로 백신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달라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않고 정부의 예산과 인력 가운데서 역학조사관을 보내달라. 가능하다니까? 서울시의 예산과 인력과 행정력만으로 그동안 정부에 기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역학조사관의 확보와 운용이 가능했었다. 그런데 시장이 바뀌고 갑자기 서울시의 능력만으로 역학조사관을 투입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당장 박원순과 오세훈의 시장으로서의 역량이 드러나는 부분일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한다. 해야 할 일들부터 먼저 알아서 처리한다. 아무것도 않는다. 전혀 상관없는 일들에만 정신을 쏟느라 정작 필요한 어떤 것도 스스로 해내지 못한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떤 언론도 그런 오세훈 시장의 무능을 비판하려 하지 않으니까. 박원순 시장과 너무나 확연히 비교되는 그 무능에 대해 보도하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당연하다. 자기들이 만든 시장이다.

 

박원순 시장 때는 굳이 필요가 없었던 역학조사관 지원요청을 마치 정부의 중대한 책임인 것처럼 공영방송인 KBS마저 떠들어대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오세훈은 무능해도 된다. 전대통령들인 이명박과 박근혜가 무능해도 상관없었던 이유다. 탐욕스러워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다. 누구도 그 무능과 탐욕을 보도하지도 비판하려고도 않는다. 이준석이 개소리를 늘어놔도 그대로 긍정하며 받아써주니 이준석도 생각 같은 건 할 필요가 없다.

 

돌아보라는 것이다. 아니 당장 서울의 영향으로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는 경기도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경기도보다 재정도 인력도 행정력도 더 막강한 서울시에서 경기도에서도 이미 충분히 확보한 역학조사관도 검사키트도 부족해서 지원을 요청한 상황이다. 이재명이 유능한 것일까? 아니면 오세훈이 무능한 것일까? 그나마 국민의힘에서 가장 유능해 보이는 인물이 오세훈이란 것이다. 한심한 꼬라지들이란 이유다.

전에 말한 계약종료를 통보받고 더이상 출근하지 않게 된 젊은 친구들 이야기다. 통보받고 그러더라.

 

"일하는 것으로 시험이라도 봐서 누가 잘려야 하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으면 좋겠다."

 

여기서도 시험인가? 정말 시험 좋아한다. 시험이야 말로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공정한 평가수단이다.

 

아마 자신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일을 잘한다.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차마 그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는 못했다.

 

"뭔 일을 그따위로 하지?"

 

항상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선배인 나이많은 직원들을 험담하기 바쁘다. 뭐가 어떻고 뭐가 저떻고 그러니 저들보다 자기들이 훨씬 낫다. 하지만 정작 내가 주위로부터 들은 평가는 일도 더럽게 못하면서 남의 말 죽어라 안듣더라는 것이다. 즉 자기들이 아직 모르고 부족한 부분이 더 많은데도 자기들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만 하느라 정작 자기들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과연 20대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그토록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자신들만의 정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많이 아는 줄 알았다. 지금은 내가 얼마나 모자른 인간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0대의 순수한 정의를 인정하되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옳다고만 인정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자기들 기준이 보편의 표준이 되기에는 아직 너무 어설프다.

 

아마 많은 직장에서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드라마 '미생'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었던 것 같다.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 여겨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료들을 정리해 놓았는데, 정작 그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기존의 방식이야 말로 그동안 직장 내에서 공유되어 온 표준이고 규준이었던 것이다. 한 개인의 합리와 효율보다 집단의 합리와 효율이 더 중요한 순간이 있다. 그런 것을 흔히 일을 잘한다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개인이 잘나도 주위와의 조화가 깨지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일을 배우는 과정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 그래서 사람은 더 용감해지고 단호해지고 과감해진다.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공정과 정의가 진짜 공동체를 위한 공정이고 정의일 것인가. 그런 점에서 20대를 설득하기 위해 정치권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감정이 아닌, 직관이 아닌, 본능이 아닌, 사유와 고찰과 고민의 결과로써 진짜 공정과 정의를 들려주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는데도 진심을 알아줄 수 있는 건 가족이나 연인 뿐인 것이다. 유권자들이 그러기를 바라는 것일까.

 

80년대 그토록 뜨겁고 순수했던 586이 뻔한 기성세대로 타락해 버린 이유인 것이다. 현실을 알아가며 진정한 자신에 대해서도 일깨우게 된다. 사실 지금 40대들도 20대 시절에는 지금 20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들을 펴고는 했었다는 것이다. 자식 부양할 능력이 안되면 결혼도 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던 자칭 노빠도 겪어 봤었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더 강력하게 개발정책을 펴야 한다는 자칭 노빠의 주장도 들어 봤었다. 그래서 결국 국민의힘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자칭 진보 정의당 아니던가. 그게 원래의 자리인 것이다. 아직 젊었던 시절이 무지와 미숙함에 의한 오류였던 것이고.

 

20대 청년 어쩌고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이준석 나부랭이가 떠드는 소리와 20대 남성의 주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준석이 옳단 것인가. 이준석이 하듯 민주당도 따라가야 하는가. 그런 건 어른의 태도가 아니다. 마냥 부정해서도 안되지만 무작정 따라갈 수도 없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도 이 말 만큼은 그 친구들에게 하지 못하고 있단 것이다. 차마 너희들 일 못해서 잘렸단 소리를 못하겠다. 시험 봐서 잘랐으면 자기들은 남았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니. 세상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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