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한겨레가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기자 이름도 낯익다. 배지현. 몇 번 본 이름이기도 하다. 역시나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기 위해서 정의연을 버리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기사가 참 재미있다. 정작 건물을 판 당사자는 기사 안에서 원래 9억에 팔려던 것을 7억 5천에 팔았다 증언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결론은 너무 비싸게 샀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웃기지 않은가. 건물을 지은 당사자가 고가형으로 비싸게 지어서 비싸게 팔았다는데 그게 왜 의혹일까?

 

그러고보면 언론이 한 목소리로 쏟아내고 있는 안성 쉼터 고가 구매의혹이라는 것도 대개 이런 식이다. 당장 판매자가 지인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시세보다 비싸게 산 것이 어째서 의혹까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나도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친척이 한다는 컴퓨터매장에서 시세보다 거의 두 배 비싸게 주고 조립컴퓨터를 샀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 내가 그 친척에게 특혜를 주었던 것일까. 기자들 주변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냥 지인의, 그것도 지인의 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조건도 대가도 없이 그냥 막 몇 억 씩 이익을 안겨주고 그러는지. 그러나 그동안 밝혀진 대부분 특혜들은 그만한 대가를 동반하고 있었다. 자선사업도 아니고 대가도 없이 그냥 이익만 안겨주고 하는 경우란 현실에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의혹이 되기 위해서는 비싸게 샀다는 것 말고 다른 정황이 나와야만 한다. 판매자로부터 정의연 관계자에게 뭐라도 대가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전해진 정황과 같은 것이다. 아니라면 비싸게 샀다는 자체만으로 의혹을 제기하기엔 무리가 있다. 더구나 시세보다 비싸게 산 건물이라면서 나중에 싸게 팔았다고 의혹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냥 자기들이 내린 결론에 나머지를 끼워맞추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만 해야 한다. 비싸게 산 것인가. 아니면 싸게 판 것인가. 참고로 아파트조차 신축이 구축보다 비싼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건축 이슈라도 없으면 투자목적이 아닌 이상 시간이 흐를수록 건물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웃기는 것이다. 물론 서울에도 그 가격에 살 수 있는 그만한 평수의 주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연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정의연에서 목적한 용도에 맞는 구조와 조건이 있다. 그래서 안성 쉼터도 문제가 된 것 아닌가. 애매하게 거리가 멀어서 사실상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쉼터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당시 정의연 관계자들에게 있어 주어진 예산 안에서 자신들이 애초 의도한 용도에 맞는 조건을 갖춘 최적의 건물이라 여겨졌기에 구매결정을 내렸다면 서울에 비슷한 가격대의 주택이 몇 채가 있었든 더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나같은 소시민들도 단지 가격만으로 살 집을 구하거나 하지는 않는데 하물며 억 단위가 넘어가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기준으로 삼는 건물의 적정가격이라는 것도 실제 현장을 찾아가서 꼼꼼히 살피고 내린, 말 그대로 감정가가 아닌 기자가 제공한 정보에 의거한 추정가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확인한 구체적인 정보에 의해 내려진 결론이 아닌 정황과 추측만으로 판단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건물을 지었던 판매자도 할 말이 생기는 것이다. 언론이 인용한 전문가들의 추정가보다 더 비싼 자재로 지어서 비용도 더 들었고 따라서 원래는 더 비싼 가격에 팔았어야 했다. 건물의 가격이 원가만으로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원가라는 것도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가면 변수가 얼마나 많은데, 어디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용에서 매매가격까지 모두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오만이며 성급함인가. 그래서 기자들도 인용한 전문가들도 직접 확인하고 내린 결론이 아닌데 비싸게 산 것조차 사실이기는 한 것인가.

 

결국은 인상을 강제하기 위한 기사인 것이다. 사실은 상관없다. 그동안 회계부실에 대한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사 안에 그에 대한 모든 반박과 해명까지 다 담고 있음에도 그저 정의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도를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배지현이라면 검찰까지 움직인 것일까. 아무튼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정의연까지도 기꺼이 자신들이 먼저 내던져 버릴 수 있다. 단호하게 오물구덩이에 쳐박아 버릴 수 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정의연과 연대하던 자칭 진보언론임에도.

 

물론 이해는 한다. 감히 윤석열 검찰을 건드리려는 청와대와 여당을 가만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눈물겨운 충정에 더해 조중동이 앞장서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 없다는 조바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조중동에 감히 한겨레따위가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중에 이직할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조중동의 논조를 쫓아가는 쪽이 자신들에게도 좋다. 자칭 진보의 갈 길은 조중동의 인정을 받는 것이지 조중동을 거스르며 싸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용수 할머니의 인터뷰를 빌어서 피해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정의연의 활동과 존립 그 자체를 문제삼았으면 뭐라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거야 말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정의연의 존립을 위한 첫째 전제였을 테니까. 하지만 의혹이 너무 부실하다. 처음 다른 언론에서 의혹을 제기했을 때도 그래서 지켜보는 입장이었었다. 언론의 보도는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이 허튼 함정에 빠지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래봐야 최악이 사기를 당했겠거니.

 

정의연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전제에는 동의한다. 윤미향 당선인도 비례대표를 사퇴해야 한다. 그와는 별개다. 과연 의혹이 될만한 것을 의혹이라고 보도하는가. 과연 진짜 문제가 되는 것들을 문제라고 보도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바로 그 부분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30년 동안 한결같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해 온 단체를 몰아가는데 과연 기사들의 근거가 확실하고 타당한가. 기자새끼들에 대해 기대하는 자체가 실례인 것이다. 욕하기도 싫다.

예전 돈 없다고 월급 깎아서 입사한 적이 있었다. 욕 무지 먹었다. 니가 그렇게 받으면 다른 사람은 어쩌냐고.

 

그래서 최저임금제가 있는 것이다. 아니면 조금 없이 아껴쓰면 된다고 얼토당토 않은 돈에도 일하겠다는 놈들이 넘쳐나며 다른 사람 월급까지 함께 깎이고 만다. 내가 100만원 받으며 일하겠다는데 옆에서 자기 80만원이면 된다고 나서면 어찌해야겠는가. 일 할 곳은 뻔하고 일은 해야겠고 노숙하며 일하는 수밖에.

 

가난할수록 오히려 보수적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쉼터 같은 집에서 살게 해 주면 120만원 받고도 얼마든지 일하겠다. 상상을 뛰어넘는다. 지금 기준이 아니라 2014년 기준으로도 그 돈 받고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시켜주지도 않는다. 원래 자주 왕래할 수 없는 곳에 관리할 건물이 있을 때 돈을 많이 주거나 아니면 그만큼 믿을만한 사람을 골라서 일을 맡긴다. 아니면 돌아보지 않는 사이에 뭔 짓을 할 줄 알고.

 

관리비 포함 120만원 받으면서 사고치지 않을 사람이면 솔직히 못 구한다. 싸면 믿을 수 없고, 믿을만 하면 싸지 않다. 사람 구할 때도 거의 법칙처럼 통하는 상식이다. 진짜 숙식제공 120만원도 기꺼이 할 놈들이면 그런 일 절대 맡기지 않는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줄 수 있는 돈은 뻔한데 그러면 누구에게 관리를 맡겨야 하는가. 조금만 사정을 알아도 오해 자체가 불가능한 사안이라니까.

 

그냥 관리가 아니다. 가끔 둘러보고, 필요하면 아무때고 시설도 이용해 보고 하는 그런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안 시켜주는 것이다. 당장 아무때고 필요해서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불편함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항상 관리하고 준비해 두어야 하는데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가할 리 없다. 오히려 번거롭다. 아무일없어도 매번 한 번 씩 돌아보고 혹시라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살펴보고 필요하면 직접 수리까지 해야 한다. 외부인의 침입은 항상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하물며 시설을 직접 이용하며 관리한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이런 일 안 시킨다는 것이다.

 

돈같은 것 받지 않으면서도 시켜주면 할 사람 널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받는 돈이야 얼마든 일단 시켜 준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는 것이다. 당시 그 돈 받고 그 일을 해 줄 수 있는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120만원이 그렇게 많은 돈인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보다 훨씬 많이 받으면서도 항상 적다고 당장 일을 그만두네 마네 하는 사람들만 거의 주위에 있다 보니. 당장 나부터 숙식제공이고 뭐고 120만원이면 다른 일 알아본다. 한 번 직접 구해보기 바란다. 시설관리며 정비도 하면서 경비도 설 관리린을 월 120만원에. 마지막 2년은 월 50만원에. 

 

세상엔 첨 거지새끼들이 많기도 하다. 저런 놈들 때문에라도 최저임금은 지켜져야 한다. 최저임금 사라지면 당장 내 월급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더구나 월급 120만원이 아닌 관리비 포함 120만원이다.

 

그냥 상식에만 비추어 생각해 봐도 분명해질 것이다.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 어이없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선의는 선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선의 역시 선의일 수 없다.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선의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상대가 바라는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선의만을 강요하지도 않겠다. 결국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인 때문이다.

 

어제까지는 동의했지만 오늘부터 더이상 동의하지 않겠다. 어제까지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방관했지만 오늘부터는 그조차도 용납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원하는대로 방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바꿀 수 있다면 상대가 동의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오늘부터 해나가면 되는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그때는 가만 손떼고 상대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대신해서 그를 돕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자기가 지금까지 최선이라 여겨왔던 것이 정작 당사자에 의하 부정당하고 거부당한다면 그때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벌써 몇 번 째 반복해서 떠들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정의연의 선의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동안 피해자들로부터도 충분히 인정받아 왔음도 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정의연의 해체를 말하기 전에는 나 역시 정의연이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계속 활동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 자신이 정의연이라는 존재 자체를, 그동안의 활동까지 모두 부정한 순간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동안 피해자 가운데 정의연의 활동에 동의하며 함께 연대했던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더라도 더이상 피해자들이 그러기를 거부한 이상 그들의 활동은 피해자들과 분리되지 않으면 안된다. 더이상 정의연의 활동은 피해자들의 동의 없는, 피해자들과의 연대도 없는 그들만의 활동이 되어야 한다. 그럴만한 근거와 정당성이 정의연에 있는 것인가.

 

지금 이용수 할머니는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더 잘하라는 것이 아니다. 해체하라는 것이다. 사퇴하라는 것이다. 이제 그만두라는 것이다. 더이상 정의연도 윤미향 당선인도 자신은 용납할 수 없다. 더이상 자신들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버틴다. 그런데 악착같이 버티며 해명을 한다. 오해를 풀겠다며 수많은 이유들을 대고 있다. 그 모습도 구차하기만 한데, 더구나 그로 인해 자칫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인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정작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를 적대하며 비난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 고약한 것은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인이 버티고 있으니 이용수 할머니를 편들겠다며 조금이라도 정의연을 지지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협박하는 이들까지 늘어나고 있다. 결국 그렇게 같은 사안을 가지고 서로 죽일 듯 적대하면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그래서 잘 안 된다면 그때 다시 나서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면 그와 별개로 따로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피해자들을 지우는 것이다. 정의연에서 피해자들을 없애는 것이다. 더이상 정의연은 피해자들과 상관없는 단체다. 그러므로 더이상 정의연은 존재할 의미를 잃었다. 정의연이 사라진다고 정의연이 추구하던 가치와 목표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활동가들이 남아 있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또한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까지와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연의 존립근거가 피해자들의 동의와 지지였다면 이제는 피해자들 없이 자신들만의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그 전에 이용수 할머니가 요구한대로 지금까지의 정대협으로부터 이어진 30년 동안의 시간은 끝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며 도리다.

 

더이상 반론조차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해를 풀겠다고 내놓는 변명들조차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판단하고 결론을 내렸다. 어찌되었거나 정의연은 잘못했고 더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확인까지 해 주었다. 정의연이 존재하는 이유가 피해자들 때문이라면 그로부터 이토록 철저히 부정당한 지금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언론의 보도 가운데 말도 안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반론해도 정의연의 해체주장에 대해서는 반박조차 않는 것이다. 그러는 것이 옳으니까. 이용수 할머니가 그리 주장했고 그에 동의하는 또다른 피해자가 있는 이상, 굳이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피해자들조차 한 명도 없는 지금의 현실에서 정의연에 다른 선택은 없는 것이다. 

 

해체해야 한다. 해체만이 답이다. 윤미향 당선인도 사퇴해야 한다. 정의연의 활동은 실패했다. 안성 쉼터를 손해보고 판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피해자들의 믿음을 잃고 반감까지 사고 말았다. 정작 피해자들을 위한다면서 피해자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모든 활동의 정당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과연 피해자들의 지지 없이 얼마나 정의연은 지금까지의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국민적인 지지아래 힘있게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모든 것을 일단락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현실론이면서 명분론이다. 더이상 정의연에 출구란 없다. 이용수 할머니가 저리 강경하게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이상 정의연에게 어떤 명분도 정당성도 최소한의 설 자리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고집하는 것은 너무 추하다. 벌써 안쓰러운 것을 넘어 구차하고 비루하게 보일 정도다. 그래서 언론의 의혹들마다 모두 반박하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일 것인가. 정작 피해자들이 정의연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정의연이 이용수 할머니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 앞에 있을 수도 없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정의연은 실패했다. 존재할 명분도 정당성도 모두 잃었다. 할머니들의 지지를 잃은 것은 정의연 입장에서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윤미향 한 사람 비례대표가 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 것인가. 아무리 자신들이 선의라고 생각해도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냥 고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단이 필요하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전쟁 중 군을 따라다니며 병사들을 상대로 몸을 팔던 성매매 여성들의 존재는 거의 전쟁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역사가 유구할 것이다. 아예 거의 남성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의 사기관리를 위해 지휘부나 혹은 정부에서 직접 그런 여성들을 배치하고 관리하며 운용한 경우 역시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2차세계대전 당시 구일본제국의 군부가 자국의 여성 가운데 자원자를 받아서 위안소를 운영한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운영하기로 결심한 것은 러시아혁명 직후 벌어진 적벽내전에 참전했다가 겪은 어떤 사건 때문이었었다. 당시 공산주의혁명에 반대하던 다른 열강들처럼 일본 역시 백군을 지원하려 연해주에 직접 파병까지 했었는데, 바로 여기서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현지 여성들을 강간하다가 성병에 걸린 병사 다수가 전력에서 이탈하는 상황을 직접 겪은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병사들이 현지 여성을 강간하도록 내버려두기보다 군이 엄격하게 통제하고 관리하는 위안소를 통해 검증된 대상을 통해 성욕을 해소하도록 하는 편이 군의 전력유지에 더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을 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진짜 일본군이 전쟁 도중 강간을 안했느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위안소는 위안소대로 운용하고 강간은 또 강간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단지 애초 계획은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위에 쓴대로 일본 자국 내에서 주로 성매매 여성들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받아서 위안소에 배치될 여성들을 모집했었다. 말 그대로 군 위안부였었다. 위안이라는 말 자체는 위로하여 편안케 한다는 뜻이지만 그 대상이 성욕이 되면 의미는 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대부분 남성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의 욕망을 위로하여 편안케 함으로써 사기를 높이고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목적에서 위안소는 설치되었고 위안부란 곧 그런 위안부에서 병사들을 위해 봉사하는 성매매여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황폐하의 군대를 위해서 봉사할 여성을 모은다 하면 주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 가운데 돈 때문에라도 자원하는 이들이 아주 없지 않았고, 덕분에 아직 전황이 좋을 때는 기간을 채우고 상당한 대가까지 챙겨서 고향으로 들어간 이들이 제법 되었다 한다. 문제는 전선이 확장되며 동원된 병력까지 늘어나면서 언제까지고 그런 방식으로 자원만 받아서는 필요한 수효를 모두 채우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속여서 유인하거나, 강제로 납치해서 강간하고 감금하거나, 혹은 인신매매로 사들이거나. 그래서 이후 위안소와 관련한 전쟁범죄들이 저질러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마 여기서 눈치챈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일본의 극우나 한국의 보수가 위안부라는 표현에 저토록 집착하는 것인가. 위안부란 가치중립적 표현이다. 더욱 자원하여 돈까지 벌고 돌아온 이들이 없지 않았던 일본에서는 위안부란 전쟁범죄와는 거리가 먼 그냥 군에서 운용한 위안소에 있었던 군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여성을 가리키는 말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종군위안부란 자체가 1970년대 종군기자나 종군간호사처럼 자발성을 전제로 군이 공식적으로 운용한 공창으로서 위안소를 정의하여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당시까지 아직 일본군 위안소에서 벌어진 반인륜적인 전쟁범죄가 공식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종군위안부란 말 자체에도 어떤 강제성이나 범죄의 이미지는 들어가 있지 않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일본인 가운데 자원해서 종군위안부가 되었던 이가 있다면 그 또한 피해자라 불러도 좋은 것인가. 그냥 종군위안부가 되었다는 자체만으로 피해자로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군위안부 자체는 피해자가 아니다. 바로 일본 극우와 한국 보수가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일본군 성노예인가. 성노예라는 말은 사실 현실에서도 의외로 매우 흔하게 쓰이는 단어다. 이를테면 누군가 다른 사람을 납치해서 감금한 뒤 위력을 사용해서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저질러 왔다면 그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성노예라는 말에는 이 모든 과정들이 다 담겨 있다. 속여서 유인했든, 위력을 사용해 무력화시키고 강제로 옮겨 왔든, 결국 납치한 것이고, 인신을 구속하여 감금한 것이고, 자신의 욕망을 강제하여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극우나 한국의 보수가 질색을 하는 것이다. 성노예와 위안부는 그 발생과 원인에 대한 이해와 해결의 방식 역시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일본의 극우든 한국의 보수든 결국 금전적인 해결만이 전부인 양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 본질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그리고 그런 주장이 어느새 대세가 되어 버렸다. 다른 것 필요 없고 그저 피해자들을 위해서 경제적 지원만 다했으면 되는 것이다.

 

어째서 정의연이 이 문제만이 아닌 전반적인 여성의 인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가며 활동해 왔던 것인가. 그래서 이용수 할머니도 스스로를 여성인권운동가라 정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조금 더 논의를 확장하면 종군위안부 자체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범죄로 정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성매매 자체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범죄로 여기는 사고라면 가능하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여성이 다수의 남성들을 상대로 자신의 성을 도구화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그 자체를 문제삼는다. 과연 실제로도 그러한가. 종군위안부를 실제로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저들 역시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을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안에 의도가 담겨 있다. 그래서 정의연에서도 보다 직접적인 다른 표현을 공식화하려 노력해 왔던 것이고. 결국 실패했지만.

 

그러나 결국은 당사자들이 싫다면 그만인 거니까. 솔직히 일본 극우와 한국 보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정의연은 피해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했고, 일본 극우와 한국 보수는 피해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일본인 종군위안부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물론 아시아와 유럽의 수많은 피해자들 역시 단지 종군위안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그래서 결국 돈이다. 얼마나 피해자들을 위해 쓰였는가. 피해자들을 위해 얼마나 되는 돈이 돌아갔는가. 씁쓸하다.

예전 자칭 진보들이나 노빠들과 어울리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가 바로 무식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선의도 인정하고 그 선의를 현실로 이루고자 하는 열정도 인정하는데, 그러나 개별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너무 결여되었다. 사실 활동가라 부르는 그룹들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정의연 논란을 보면서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긴 정의연, 이전의 정대협 활동가들이 조직의 운영과 관리에 대해 대단하게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거나 경력을 쌓았을 것 같지는 않다. 회계라는 게 상당히 전문성을 요구하는 작업이고, 돈이 움직이는 과정에는 당연하게 다양한 욕망과 이해가 뒤따르게 된다. 그래도 활동의 취지가 좋으니 선의로 도우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선의만 가지고 운영하기에 조직이란 자체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지금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결국 정의연이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치밀하고 체계적인 '조직'으로 간주하고 평가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냥 선의로 열심히 활동해 왔을 뿐 그런 분야에 대해 오히려 문외한일 수 있다 생각하면 오히려 다른 방향에서 이해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냥 좋은 뜻으로 열심히 활동하다 보면 그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지. 그리고 그런 허술함을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파고들면 온갖 의혹투성이의 악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정의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가슴만 뜨거운 활동가들로 가득한 대부분 시민단체들의 사정이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고 활동이라도 전문적인가면 그래서 주위에서 전문가그룹의 자발적인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전문가들을 고용하기에는 안성 쉼터 논란에서 보듯 건물 관리를 맡기면서 관리비 포함 120만원 주는 게 고작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2018년부터 50만원으로 줄었다. 가끔 들러서 조언이나 하는 정도면 모를까 상주하며 항상 도움을 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조건이다. 누가 그런 일을 하려 하겠는가.

 

처음부터 전제가 달랐다는 것이다. 회계장부를 한 점 오류없이 철저하게 치밀하게 작성하려면 그만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전문인력을 고용하거나 외주를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 그 돈까지 아껴서 뭔가 해보려 했을 테지만 지금으로서 오히려 독이 되었다. 소녀상을 세우지 않더라도 회계장부는 외부에 맡겼어야 옳았다.

 

사실 책임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 자체로 죄악일 수 있는 것이다. 책임에 비례해서 무능조차도 죄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연은 자신들이 짊어지고자 하는 책임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가. 그런데 정작 그만한 실력을 가진 이들은 아무도 정의연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았다.

 

시민단체들의 딜레마다. 자신들은 아마추어에 열의만 높은데, 그러나 정작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갖춘 이들은 자신들 만큼 열악한 조건에서 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 시민단체들이 그래서 아직도 자신들의 선의에만 기댄 주먹구구의 아마추어 집단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마저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비로소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의연을 대신하고자 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아졌다. 정의연이 아니더라도 피해자들을 위해 행동하려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 그래서 나도 입 다물려고. 정의연도 이쯤에서 그냥 자기 살 길 찾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나마 이번 논란의 긍정적인 부분이랄까. 좋게 받아들이려 한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용수 할머니로 인해 이후로 정의연의 그동안의 활동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 입장에서 종군위안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정의연과 같은 입장에서 어떤 말도 더이상 해서는 안된다.

 

벌써 여기까지 찾아왔다. 고발장 접수하겠다 협박까지 하더라. 그러니까 입 다물라. 입 닥치고 아예 떠들지도 마라. 그래서 안하려고. 워낙 소시민이라 고발당하고 어쩌고 하면 도저히 감당이 안되다 보니.

 

윤미향 하나 잡는 것도 아니고, 정의연 하나 해체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예 정의연과 입장을 같이하던 모든 이들의 입을 막는다. 그를 위해 벌써 앞장서는 이들을 위한 논리까지 제공한다.

 

그래서 내가 정의연 해체하라 주장하는 것이다. 대신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 그리고 이미 종군위안부 문제의 해법은 대중과 언론에 의해 결론지어졌다. 돈만 주면 된다. 돈만 받게 하면 된다. 나머지 모든 활동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시대의 변화를 깨닫고 나도 입 다물려고. 내가 그렇게 성격 좋은 사람이 못된다니까.

 

그동안 앞장서서 열심히 활동한 이들은 죄인이 되고, 그동안 방관했거나 오히려 모욕하고 비난하던 이들이 열사가 되고 의사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침묵을 강요당한다. 다행히 나는 열사도 투사도 의사도 아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의도가 이것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내 생각과 내 말과 내 행동까지 통제하려 한다면 그냥 아무것도 않는 것을 선택한다. 정의연도 선택 잘 하기를 바란다. 이제 정의연의 시간은 끝났다.

2014년 최저임금이 5210원이었다. 한 달이면 209시간 기준 108만 8천원, 226시간 기준 117만원이다. 여기에 야간근무가 있는 격일제 경비노동자의 경우 휴게시간과 야간수당까지 포함해서 대략 140만 원 정도 받았던 모양이다. 평소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건물의 특성상 외부인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야간경비가 없을 수 없으므로 고려하는 것이 옳다. 더구나 건물 밖 컨테이너에서 근무를 했었다 하지 않는가.

야간 경비 뿐만 아니라 언제든 사람들이 와서 건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며 유지보수까지 하게 되면 단가는 더 비싸진다. 지금 당장 구인사이트 들어가서 확인해 보라.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으면 건물이란 언제든 황폐해질 수 있는 것이다. 휴양시설로 쓰기 위해 구입한 건물인데 평소 유지보수에 소홀하다면 정작 필요한 때 적절하게 쓰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평소 수도며 전기며 건물까지 최소한의 기본적인 점검과 보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일반 경비와 같은 돈을 주고 쓸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받은 돈이 얼마라고? 6년 동안 7천만 원에, 한 달에 120? 그나마도 관리비 포함에 2018년 6월부터는 50만원이었다고 한다.


물론 얼마전 아파트 경비원의 불행한 선택에서도 보았듯 이 정도 돈조차 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기는 한다. 어딜 감히 경비따위가 한 달에 120만원씩이나 받는단 말인가. 관리비 포함이라지만 경비라면 당연히 자기 월급으로 그런 비용까지 기꺼이 모두 지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마저도 특혜다. 그보다도 더 적게 받아야 한다. 그래서 무려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오른 2018년 6월에는 그나마 돈도 50만원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마저도 특혜라면 도대체 얼마를 받아야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설마 관계자 가족이니 공짜로 부려먹었어야 한다는 뜻인가. 공짜로 쓰지 않았으니 특혜다. 부정이다. 비리다. 그래서 딱 오해하기 좋도록 한 달이나 1년이 아닌 6년 치를 한꺼번에 계산해서 7500만원이라는 액수를 말한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아무리 가족을 데려다 일을 시키더라도 공짜로 부려먹으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더구나 자기 가족도 아닌 남의 가족에게 공짜로 일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을 넘은 것이다. 그래서 과연 2014년 당시 한 달에 관리비 포함 120만원 받고 쉼터 관리를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기꺼이 그러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최저임금도 이후로도 계속해서 올랐는데 심지어 2018년 6월부터는 겨우 50만원 정도나 받고 있었다. 윤미향 대표의 아버지라서 문제가 아니라 그나마 대표의 아버지나 되니까 그 돈 받고 그 일을 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라도 못한다. 그런데도 가족이니까 문제가 된다. 당신들 가족이나 데려다 그 돈 받고 일하게 하라.

그야말로 논란이 되지 않을 일로 논란을 삼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설사 윤미향 당선자의 아버지가 관리인으로 있으며 사적으로 시설을 이용해서 말하는 것처럼 삼겹살 파티를 벌렸다 하더라도 받는 돈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양해할만한 정도였다는 것이다. 아니 50만원 관리비 포함해서 겨우 받고 일하는데 그 정도도 사정을 봐주지 못하는 것인가. 나같으면 오래전에 때려쳤다. 그조차도 단지 전하는 말 뿐이니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언론이라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 아닌 실제 사실을 취재했어야 하는데, 하긴 SBS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50만원 받고 건물 유지보수까지 다 해달라 맡기는 것이 낫지.

과연 기왕에 구입한 건물을 놀릴 수 없으니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 것인가. 더구나 끝도 모르고 오르던 아파트값 때문에 착각들 하는 모양인데 건물이란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건물 자체에 대한 수요가 없으면 나중에는 땅값만 겨우 받고 파는 경우도 현실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는 하는 것이다. 건물이 사놓으면 항상 오르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디에 무슨 특혜와 부정과 비리가 있다는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문제인 것을.

다시 말하지만 월급이 아닌 관리비 포함해서 120만원이었다는 것이다. 2014년 야간근무 하는 격일제 경비원의 월급이 140만원 이상이었었다. 2018년에는 최저임금이 무려 7530원이나 하고 있었다. 오히려 2018년 6월부터는 한 달에 50만원만 관리비 포함 겨우 받고 있었다. 그래서 6년 동안 7500만원이다. 그 돈 받겠다고 컨테이너에서 6년 동안 건물관리일 하겠는가. 내가 배가 불러서인지 모르겠다. 참 현실감각들이 없다. 웃긴다.

아무래도 기자들은 검찰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아니 검찰드라마라고 항상 올바르고 정의로운 검사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강압수사에 증거조작까지 해가며 사건을 만들거나 묻는 부정하고 부패한 검사들도 상당수 나온다. 아, 기자들에게는 윤석열에 맞서는 다른 검사들이 그렇게 보이고 있는 것일까?

 

증인이 재판정에서 진술조서의 내용과 다른 진술을 한다면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진술조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술한 증인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일 것이다. 후자는 대개 피고인이나 관계자로부터 회유를 당했거나 아니면 다른 신상의 변화로 인해 진술을 바꿔야 하는 사정이 생겼을 수 있다. 아니라면 결국 진술조서 자체의 내용이 부정확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진술조서의 내용의 부정확하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피의자나 참고인으로부터 오로지 사실만을 진술하도록 유도해서 조서에 기록하는 것이 바로 조사를 맡은 검사의 역할인 것이다. 그를 위해서 압수수색까지 해가며 다양한 증거들을 확보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내서 수사에 협조하도록 요청할 권한까지 주어지는 것이다. 주어진 모든 권한과 역량을 활용해서 오로지 사실만을 말하게 하여 조서에 기록한다. 그래서 검찰의 조서는 증거로서 법정에서 상당한 위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검찰의 조서가 법정에서 번복될 만큼 허술하게 작성되었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검찰의 책임부터 묻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어이없는 기사를 하나 보았다.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긴 묻어 버리기엔 이미 너무 알려지고 말았다. 언론의 보도와 다르게 재판정에서 검찰에서 한 진술의 내용을 번복하는 증인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검찰측 증인으로 출석하고서는 변호인 심문에서 바로 진술내용을 번복함으로써 검찰을 곤란케 하는 경우가 그동안도 너무 많았었다. 그래서 원인이 무엇인가. 내용이 없었다. 읽고 나서 기자가 도대체 뭔 소리를 하려고 짧지도 않은 글을 그리 휘갈겨 썼는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건더기 없이 쏟아진 설사똥 같다고나 할까. 검찰의 책임을 피해 진술이 바뀐 이유를 글로 정리하려 하니 문맥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밖에. 

 

머니투데이 이미호 기자인 모양이다. 뭐 이제와서 언론사며 기자 이름을 따로 외워 둘 필요가 있는가 싶다. 아주경제 하나만 거의 유일하다. 마지막까지 재판정에 남아서 변호인 심문까지 다 보고서 세세하게 기사로 쓰는 언론이란. 이러라고 부모가 대학까지 보낸 것이 맞겠지. 기자로서 대단한 사명감 같은 걸 가지고 언론사에 지원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기자질이라도 해야지 먹고는 사니까. 벌레들 먹여살려주는 곳이 언론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검찰은 성역이다. 오죽하면 한겨레며 kbs가 검찰을 위해 자신들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무려 개혁하겠다는 되도 않는 헛소리까지 지껄이고 있을 지경이다. 한겨레와 KBS가 과연 바뀔 수 있을까? KBS 바뀐다고 한 게 벌써 몇 달이다. 지금 KBS 법조팀은 검찰을 위해 동료이자 선배를 조지고 있는 중이고. 기대하는 자체가 우습다.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은 미소년들을 시종으로 거느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총애한 이로 미지하가 있었다. 얼마나 총애가 깊었으면 어머니가 위독하다고 자기 수레를 몰고 나가고, 심지어 먹던 복숭아를 건넸는데도 허허 웃으며 넘어갔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미자하의 미모가 시들해지자 바로 당시의 일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네 놈이 감히 내 수레를 타고 나가고, 먹던 복숭아를 주었었지?"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이전까지 문제가 되지 않던 일들도 큰 죄가 될 수 있다는 유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좋을 때는 백치미고, 싫을 때는 멍청한 거고, 좋을 때는 걸크러쉬였다가, 여자답지 않은 것이다. 평소 옷 잘 입는다고 좋아하다가도 마음이 식으면 옷에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이 거슬린다. 원래 문제가 아니었던 것도 문제삼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정의연이 장학금을 숨어서 준 것도 아니고, 윤미향 이사장이 차명으로 자기 계좌를 올려 홍보했던 것도 아니며, 오히려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지원 이외의 사업들에 대해서도 대중은 크게 지지하고 있었단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장학금을 문제삼고, 이사장 개인계좌로 모금한 것을 트집잡고, 그동안 벌여온 사업들을 비난한다.

 

정의연의 회계장부는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속아넘어가기 딱 좋게 써 놨다. 하지만 말했듯 내가 직원 4명 있는 회사에서 사장과 번갈아 영수증 정리하고 했었단 것이다. 내 일도 바빠죽겠는데 어떻게 영수증이며 장부를 꼼꼼히 점검하고 기재하겠는가. 내가 일 때문에 작성하는 서류에도 오타와 오기가 아주 썩어 넘쳐난다. 듣자니 정의연에서 그 일만 담당하는 직원이 한 명이라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일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일도 하면서 이 일도 하거나, 아니면 이 일 하면서 다른 일도 불려가거나. 대개 결산같은 것 하려면 연말이나 분기별로 몰아서 하는데 바쁘게 몰아서 하다 보면 여기저기 구멍나는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빈 구멍이 다른 곳으로 돈이 새어나간 흔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벌써 그 부분을 문제삼았겠지.

 

당장 조선일보 장부부터 까보면 되는 것이다. 중앙일보와 세계일보 장부부터 까면 더 결론을 명확할 것이다. 웃기는 건 그렇게 시민단체들 회계장부를 문제삼는 언론들이 정작 자기들 회계장부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그런 식으로 회계장부 내역 하나하나를 문제삼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기업이나 법인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그래서 부실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러나 회계의 부실은 범죄조차 되지 못한다. 그냥 무능한 것이다. 그런데 유능하려면 그만한 인력과 노력과 자원이 필요하다. 기림비 사업도 하지 말라는 것들이.

 

그래서 실제 얼마나 되는 돈이 활동가 개인에게로 흘러갔었는가. 얼마나 되는 돈이 회계장부에서 사라져 개인의 이익으로 착복되었는가. 없다. 그냥 회계장부에서 얼마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언론사 회계장부도 한 번 까 보자니까. 영수증단위로 한 번 낱낱이 까보면 뭐가 나올까. 언론탄압? 그래서 시민단체 탄압이다.

 

하여튼 박용진도 자칭 진보의 찌그레기 다운 본능을 결국 숨기지 못한다. 얼마나 보수언론을 두려워하는가. 보수기득권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가. 그들의 편에 서기보다 저들로부터 야단맞지 않기 위해서. 모범답안이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 한다. 역시 이번 논란으로 거둔 소득이다. 시민단체의 진짜 아군은 정의당과 같은 자칭 진보가 아닌 민주당이다. 누가 자신들을 위해 함께 보수언론과 맞서 싸워주는가.

 

평소 그렇게 시민단체를 위하는 듯하던 자칭진보들은 숨거나 아니면 보수언론을 거드는 편에 서고, 오히려 시민단체들이 적대하던 민주진영에서 그들을 위해 기꺼이 비난을 무릅쓰며 응원하고 나선다. 그러니까 민주진영이다. 진보가 아닌 민주시민들의 연대인 것이다. 진보의 시대는 끝났다. 확인사살해준다. 자칭도 이제 필요없을 지 모르겠다.

예를들어 눈앞에 적의 탱크가 있다. 그런데 나는 빈 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튀어서 숨는다. 숨는 게 안되면 항복한다. 괜히 싸워보겠다고 돌이라도 던졌다가는 다진 고기가 되기 십상이다. 살아야 하지 않는가.

 

정의연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명분과 정당성에 기대어 존재하는 기생단체다. 성노예 피해자들이 없으면 정의연도 존재할 의미를 잃는다. 피해자들이 부정한다면 더욱 정의연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피해자 가운데 정의연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해체를 요구하는 주장이 나왔다. 맞서서 이길 수 있을까?

 

적이 아니라면 대화로 해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대화로 풀어낼 여지가 남아 있는 사이라면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진심을 담아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계는 이미 벌써 넘어 버렸다. 윤미향 이사장은 이미 죄를 저지른 범죄자고 정대협은 해체해야 할 단체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뭐라고 말을 더해야 다시금 정의연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없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어차피 되도 않을 일에 자꾸 말만 더하려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적이지만 이길 수 없다. 아버지가 적이라면 항복해야지. 할머니가 적이라면 돌아서서 함께 싸울 뿐이다. 지금껏 자신들을 있게 해 준 할머니가 죽으라고 칼을 휘두르는데 괜히 맞서겠다고 하다못해 솜털이라도 휘둘렀다가는 욕만 먹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연은 이용수 할머니를 이길 수 없다. 아니 이겨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죽어달라니 죽어주는 것.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싸우겠는가, 그렇다고 설득하겠는가.

 

그것이 대적할 수 없는 적을 상대하는 방법인 것이다. 괜히 버텨봐야 자기만 더 상처입고 말 뿐이다. 명분도 저쪽에 있고 힘은 당연히 저쪽이 더 세다. 진보와 보수을 아우른 모든 언론을 등에 업고 전력으로 정의연을 죽이려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압력이 거세질수록 살기 위한 발버둥은 서로를 더욱 상처입히고 만다. 모두를 위해 최선은 이미 죽어주는 것 말고는 없다. 정의연의 명분과 정당성은 어디까지나 성노예 피해자들에게 있는데 그들로부터 거부당하고 과연 존재할 이유가 지금 남아있기나 한 것인가.

 

그래서 결론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사퇴하라. 해체하라. 자기들만 할 수 있다 여기는 것도 오만이다. 그래서 더 분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들보다 더 잘해 줄 사람들이 그 주위에 넘쳐난다. 당장 보라. 평소 관심도 없던 언론들이 보도를 쏟아내고, 오히려 적대하며 무시하던 개인이며 단체들이 편들고 나서준다. 이미 대신할 존재가 있는 이상 더이상 자신만의 선의를 고집하는 것도 폭력일 수 있다. 시대가 바뀐 것을 인정하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실관계를 따져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서와 감정의 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서운하고 억울해도 어떻게 친척들 보는 앞에서 할머니에게 솜털이라도 휘두를 수 있겠는가. 때리면 맞는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래야 풀어질 것 같으면. 

 

이미 명분은 넘어갔다. 명분도 없는데 힘까지 저쪽이 더 세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인정 없이 과연 정의연은 앞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더이상 버티기는 의미없다. 대세는 정해졌다. 안타까운 결론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