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슈가 되었던 친딸성폭행 재판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일단 성폭행으로 고소당하면 무고로 맞고소하는 것이 성폭행 가해자들에게는 상식처럼 공유되는 기술일 것이다. 피해자 역시 무고혐의로 수사받도록 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느끼게 될 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공포를 통해 스스로 고소를 취하하도록 심리적으로 압박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효과가 있기도 하다. 피해자인 자신이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수사받으며 진짜 가해자들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고죄 수사에는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보호고 뭐고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하게 성폭행 사건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무고로 고소한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를 일방적으로 무고의 가해자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가는 중이기도 하다. 무고가 성폭행 가해자들의 전략이며 오히려 그로 인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로 몰려서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니까 무고로 맞고소당했더라도 사실관계를 잘 따지고 헤아려서 그 진실여부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얼마전 재판부에서도 성폭행을 고소한 딸의 탄원서조차도 전후관계를 따져서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단지 성범죄로 고소당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단정지어야 한다? 고소가 근거가 된다는 것인가?

 

고소가 근거가 된다면 마땅히 무고죄로 맞고소하는 것도 역시 판단의 근거로써 타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죽이나 억울했으면 무고죄로 맞고소했을까. 스스로 결백한데 무고하게 성범죄자로 몰리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무고죄로 맞고소도 한 것일 게다. 피해자와 연대해야 한다면 무고죄를 주장하는 사람과도 연대해야겠지. 그런 걸 바라는 것인가? 성범죄를 그냥 성간의 대결로 만들고 말겠다? 그러니까 여성이 성범죄로 고소하면 무조건 피해자고, 따라서 남성 역시 무고죄로 고소하면 무조건 피해자여야 한다. 그리고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써 서로의 피해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이 미친 년들이 지금 주장하는 것이 이따위 논리란 것이다.

 

할 말이 없어진다. 성범죄 무고죄에 대해 수사를 성범죄 수사 이후로 미뤄야 한다는 주장에 십분 공감하던 터였다. 성범죄의 특수성을 알기에 무고죄 수사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또다른 가해일 수 있다. 그런데 여성주의자들이 그런 내 생각이 틀렸다고 확인시켜주었다. 고소했으면 피해자고 고소당했으면 가해자다. 그러니까 무고죄로도 고소당했다면 가해자고 고소했다면 피해자인 것이다. 그런데 둘을 왜 따로 수사해야 하는 것일까? 무고죄의 억울함은 억울함도 아니란 것일까? 남성은 인간이 아니라서?

 

참 할 말 없게 만드는 여성주의자들이란 것이다. 여성주의자들 덕분에 반여성주의자들과의 논쟁이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있다. 여성주의자들의 행동을 근거삼으면 딱히 반박할 말이 없게 된다. 그래서 그런 여성주의자들을 일부로 몰아서 논리를 전개하는데 일부라는 것들이 오히려 더 차고 넘치는 상황이다. 예전에는 여성주의자들의 등쌀에 입을 다물었다면 이제는 여성주의자들 하는 짓거리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니까 왜 무고죄는 고소당했는데 가해자가 아니고 고소했는데도 피해자가 아니냐고. 무고죄 피고소인에게는 어째서 연대하면 안된다는 것인가.

 

아무튼 덕분에 자칭 여성주의자들의 민낯만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여성주의자들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가로세로연구소가 그 기준이 되어 준다. 다르지 않다. 가로세로연구소와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보이는 말과 행동에 전쳐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설득하기 좋아졌다. 이제는 나도 반여성주의 하련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으면 사람대접해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사람으로써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을 지킬 줄 안다는 뜻이다. 여성주의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도 사람이 없으니. 말을 섞기도 싫다. 이제는. 반여성주의가 옳다. 안타깝게도.

요즘 천하통일에 매진하느라 똥걸레가 오보를 낸 것도 모르고 지나갔었다. 역시나 똥걸레였네. 어디 조선일보가 오보낸 줄 알았더니만 결국 똥걸레였다. 바로 이런 것이 저들이 주장하는 여성주의이고 피해자와의 연대인 것인가.

 

박원순 시장이 실종되고 한겨레에서 기사를 하나 냈었다. 박원순 시장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는데 그 직전에 서울시청 차원에서 대책회의를 연 적이 있었다. 실제 이 기사를 근거로 박원순 시장이 실제 성추행을 저질렀고 고소당하자 결국 불행한 선택을 한 것이라 믿는 사람이 상당한 상황이다. 그런데 서울시청에서 바로 반박자료를 냈다. 그런 대책회의는 있지도 않았고 고소사실도 서울시에서는 알지 못했었다. 무슨 뜻이겠는가.

 

달리 그런 정황을 전할만한 사람이 없다. 대책회의가 실제 있었고 그 사실을 알고서 전했다면 박원순 시장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란 뜻이다. 성추행이라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닌데 개나소나 알게 아무나 데려다 회의를 열지는 않았을 테니. 그런데 그만큼 시장으로부터 신뢰받던 인사가 시장이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 그런 내용을 언론에 흘리고 있다? 더구나 추가취재도 안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과연 언제 누가 어떻게 대책회의를 열었는지 더 이상 구체적인 보도가 나오지 않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서울시청 차원에서 그런 회의는 없었다는 확인만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한겨레 기자는 시장이 사라진 그 순간 누구로부터 듣고서 그런 기사를 썼던 것일까?

 

조선일보 잘하는 짓거리 있지 않던가 말이다. 성추행으로 고소한 사람이 있다. 피고소인인 박원순 시장이 행방을 감춘 상태다.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것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중간에 아무 일 없이 바로 고소부터 이루어졌겠는가. 그동안 고소인이 문제제기를 하고 박원순 시장이 그에 대한 대책회의도 하지 않았을까. 소설이다. 물론 나 역시 블로그에서 자주 하는 짓거리다. 다만 나와 기자가 다른 이유는 내 블로그를 누가 무슨 대단한 공신력을 기대하고 찾아와 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자기 이름 걸고 회사의 이름 아래 기사를 낸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도 상관없다. 피해자와 연대하는 것은 사실을 조작해서 기사를 내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피고소인인 박원순 시장을 가해자로 만들어야 한다. 고소인인 여성을 피해자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사실도 조작한다. 거짓으로 기사를 쓴다. 양심의 가책따위 없다. 박원순 시장은 이미 가해자일 테니까. 고소인인 여성은 반드시 피해자일 테니까. 그를 위해 기사 정도 조작하고 왜곡한다고 무슨 큰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한겨레가 조선일보를 동경하며 따라가려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겨레 기자들의 미래 직장이 바로 조선일보 경력직인 이유다. 어째서 한겨레가 그토록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반대하고 나서는 것인가.

 

하루빨리 입법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한겨레나 경향 같은 악질적인 언론들부터 폐간시키고 봐야 한다. 조중동은 덩치가 있으니 힘들어도 한겨레 경향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사실을 조작해서라도 고소인을 피해자로 만들어 연대하고, 사실관계가 명확치 않은데도 피고소인을 가해자로 만들어 비난하고 조롱한다. 저것들이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알려진 순간 하던 짓거리들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래서 저놈들은 망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저런 놈들부터 망하게 만들어야 뒤라도 깨끗해진다.

 

새삼 어이없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다. 그냥 똥걸레가 똥걸레한 것이다. 받아쓴 놈들이야 똥걸레가 총대 매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반드시 망하게 만들어야 한다.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 증오도 아깝다. 벌레새끼들.

나도 프레임에 넘어갈 뻔했네. 그러니까 고소인은 전날부터 밤샘조사를 받았고, 박원순 시장은 아침까지 조사받은 그 날 산을 올랐다는 거지. 경찰이 박원순 시장에게 고소사실을 통보했다는 정황이나 증거도 없고.

 

결론은 정의당이 정의당하고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주의하고 가세연이 가세연하고 수구들이 수구짓한 거였네. 언론은 그냥 상수고. 그러고보니 밤샘조사 받고 나서 SBS와 바로 인터뷰한 부분도 흥미롭기는 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저들 모두가 그 순간 박원순 시장이 죽기만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과연 시신이 발견되기도 전부터 쏟아진 사망속보는 오보였을까? 언론들의 간절한 바람이었을까?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예단은 피해야겠다. 그래서 자칭 진보와 여성주의 년들은 죄다 버러지들이라는 것.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서 벌써 판결까지 끝내 놓았다.

 

아무튼 분명해진 것이 하나 있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 누가 누구와 연대하고 있는 중인가. 극우유튜버와 여성주의자들과 자칭 진보들이 분명하게 수구세력과 연대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우연이겠는가. 이동재가 이철더러 그저 한 마디만 하면 자기들이 다 끝내겠다고 한 것은 누구를 가리킨 것이었겠는가.

 

모르면 모르는대로 일단 지켜보기부터 할 일이다. 새삼 악취나는 쓰레기들을 분리할 수 있었으니 소득이 없었다 할 수는 없겠다. 세상에는 참 사람 꼬라지를 한 버러지들이 많기도 하다. 알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물론 다른 나라라고 언론플레이가 없는 것은 아닐 게다. 그래도 정상적인 사회라면 기자가 취재도 할 것이고, 언론사 데스크에서 취재한 내용에 대한 판단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어떤 주장을 했다고 있는 그대로 사실처럼 보도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그러니 최소한 지금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내용은 데스크의 판단을 거친 것일 게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기자 개인의 일방적인 의심조차 마치 사실처럼 보도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작년 조국 사태에서도 그런 경우를 헤아릴 수 없이 보아 왔었다. KBS 사회부장은 정경심 교수가 코링크PE의 실소유주라는 확신까지 가지고 인터뷰내용까지 조작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SBS 역시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위조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아직 찾지도 못한 직인파일을 발견했다며 단독까지 달고 내보내고 있었다. 정의연 사태의 경우는 어떨까? 순차적으로 다섯 채의 집을 사고 판 것을 마치 한 번에 소유한 것처럼. 한 달에 120만원 받고 상주하며 관리한 것이 대단한 특혜이기라도 한 것처럼. 안성 쉼터를 팔았던 당사자의 인터뷰까지 따고서도 마치 대단한 의혹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용해서 사적으로 이익을 편취하려는 이들이 언론을 이용해서 마치 의인이고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정의연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받아주니까.

 

확실히 하루가 지나니 이제는 아예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여기저기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언제부터 기자가 판사였을까? 언제부터 기자가 검사고 형사였을까? 여성주의자들은 신이다. 왕이고 황제다. 내가 성추행이라면 성추행이다. 내가 성범죄자라면 성범죄자다. 성추행은 학살보다 그 어떤 인권유린보다 중대한 범죄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부정할 만큼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형법에 기록된 형량을 보자. 실제 재판에서 나온 양형들을 보라. 하긴 십 몇 년 전 쓴 글 몇 줄 가지고도 아직도 지랄하는 게 여성주의자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여성주의자를 비난하던 것들이 이번에는 다시 여성주의자들과 한 편이란 것이다. 언제부터 성추행이 그렇게 중대한 범죄였어요?

 

여성주의자들 떠드는 소리 들어주는 것 그만두기로 했다. 물론 당사자 입장에서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체에 대한 강제적인 접촉이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작 성추행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과 생명까지 좌우할 문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늬들은 늬들대로 그렇게 주장하라.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으니까.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당당하면 한 번 외쳐보라. 성추행범을 모두 사형에 처하자고. 다시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끔 만들어 버리자고. 그렇게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고작 나서서 떠드는 소리가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고, 피해자를 위해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인생마저 부정하고 죽음을 모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분노하는 이유다.

 

과연 진짜 성추행이 있었는가. 아니 그보다 먼저 박원순 시장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의 고소 때문이었는가. 아직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제 사실로 드러난 것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의심하니까. 내가 주장하니까. 내가 가리키면 말도 사슴이 되고, 묵도 은어가 되었다 다시 도루묵이 된다. 재판도 필요없다. 수사조차 더이상 필요치 않다. 주장하면 사실이고 주장하면 진실이 된다. 벌레들은 그냥 벌레일 뿐. 그러나 그런 벌레들과 배를 맞춘 벌레들 덕분에 그런 일방적인 주장들이 사실처럼 퍼지고 만다.

 

정의당의 전략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의석도 없으니 언론을 등에 업어야겠다. 그동안 자신들을 동정보다는 차라리 무시하며 오로지 민주당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던 그대로 언론의 필요를 위해서만 움직이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모습을 보여야겠다. 요즘 정의당 하는 짓거리를 보면 딱 언론이 좋아할만한 것이다. 민주당의 당적을 버린 이유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지지해도 인간적으로 혐오감을 느끼면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저들이 인간이기는 한가. 여성주의에 인간이란 존재하는가. 정의당의 진보에는 인간이 있는가.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괴물이 되어 간다. 

지금 사람이 죽은 와중에까지 단지 고소사실만 가지고 범죄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고인을 모독하고 있는 중이란 것이다. 누가? 언론이! 정치권이! 자칭 지식인들이! 무엇보다 여성주의자들이!

 

피해자라고 말하는데 누가 피해자인가? 그러면 지금 내가 심상정이 나 때렸다고 고소하면 내가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 장혜영이 내 돈 훔쳐갔다고 고발하면 바로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나마 류호정의 표현이 가장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다. 어찌되었거나 그런 불미스런 일로 고소당한 사람이고 고소한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런 자리까지 찾아가서 조문하지는 못하겠다. 그에 비해 다른 정의당 정치인들의 말은 어떠한가.

 

박원순이 그동안 인권변호사로서 해 온 일들만 해도 감히 그의 죽음 앞에서 저토록 오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를 위해서 그동안 기여해 온 일들만 생각해도 그런 식으로 감히 죽은 이를 마음대로 모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작 성추행이 그동안의 모든 삶까지 부정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범죄인가. 고작이라 말하겠다. 한 인간의 목숨 앞에서 성추행이란 고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기들은 얼마나 대단한 인간들이기에.

 

아무튼 아예 기정사실로 만들고는 마음껏 박원순의 인격과 삶까지 난도질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살았으면 달랐을까? 살아서 뭐라도 변명을 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재판을 통해 무고함이 드러났으면 조금은 태도들도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동안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박원순 같은 이들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고. 평생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이 깡그리 부정당하는 상황을 어찌 사람이 견딜 수 있겠는가.

 

박원순 자신도 여성주의와 깊은 유대가 있기에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성주의란 어떤 것인지. 여성주의와 손잡은 언론이란 어떤 존재인지. 정치권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과연 출구란 있을까?

 

그게 바로 지금 여성주의의 현실이란 것이다. 마땅히 타도해야 할 적이며 악이다. 다만 그럼에도 표 때문에라도 여성주의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게 민주당의 어려움일 듯. 하지만 난 당원도 아니니까. 쓰레기들. 다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이며 정치권이며 여성주의자들이며 아예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을 기정사실로 놓고 온갖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나도 단지 가정만 했을 뿐 죽음의 원인이 반드시 그것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니다. 더구나 사람이 반드시 죄가 있어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어쩔 수 없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최숙현 선수는 무슨 죄가 있어서? 성폭행을 당하고도 오히려 자신이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어떤 여성과 그녀의 자매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더구나 실제 죄가 있더라도 성추행이 죽음보다 더 무거운 죄일 것인가? 만일 성추행이 죽어서도 씻지 못할 죄라 여긴다면 더이상 여성주의자들과 할 말이 없다. 이미 사람이 죽었는데 이 위에 도대체 무슨 죄를 더 묻겠다는 것인가. 죽음을 추모하지 않는다는 것과 죽음을 모욕하는 것과의 차이를 진정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래서 여성주의자인 것이다. 인간이란 여성이란 주의에 종속된 수단이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이 밝혀진 것도 아니다. 아니 아예 수사조차 시작되지 않은 사건이다. 설사 유죄라 할지라도 그 형벌이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죽음조차 부족하다고 모욕과 조롱과 비난을 퍼부어대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머릿속인가.

 

만일 실제 그 고소 자체가 원인이 되어 불행한 선택을 했다면 아마 지금 상황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언론에 의해 자신은 난도질되고 그동안의 모든 삶까지 부정되고야 말 것이다. 더욱 자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혐의로 가장 추악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냥 성추행으로 끝나고 말까? 지금도 이렇게 범죄를 예단하고 그의 삶까지 부정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상황인데. 과연 얼마나 박원순 시장의 진심이 전해져서 최소한 진실을 다투어 볼 수라도 있는 것인가. 원래 무고하다면 더욱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강요당하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서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예단하는가.

 

아무튼 고소한 전비서에게도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다. 지금 상황을 바랐었느냐고. 죽어서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이제 속이 시원하냐고. 그래서 아직 더 부족한 것이 남아 있느냐고. 당연히 아니라 말할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이고 감성일 테니까. 오히려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오히려 자신이 더 충격받고 상처받지 않았을까 걱정까지 된다. 그러면 당사자도 아닌데 저리 미쳐 날뛰는 놈들은 도대체 어디의 누구인가. 그러니까 묻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분노는 진정 피해자만을 위한 것인가. 

 

당연히 김지은 씨도 안희정 전지사로부터 당한 일들이 너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서 끝내 법과 여론의 심판대에 그를 세웠던 것일 게다. 박원순 시장을 고소한 전비서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뒤늦게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한 것일 터다. 그런 사정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안희정 전지사는 재판 결과 성폭행 사실이 인정되었으니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는 중이다. 그런 때 피해자가 더이상의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고 들어주라고 미투가 시작되었던 것은 아닌가. 여론재판을 하자는 것일까. 여성주의자가 수사관과 판사가 되어서? 과연 누구를 위해서?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무고한 일을 당하는 이가 있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더욱 엄정하게 수사기관의 수사와 재판의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다만 피해자들에게 그동안 너무 가혹했던 사회분위기 만큼 피해자의 편에서 최대한 지켜주며 살필 필요는 있는 것이다. 딱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것을 넘어가면 오히려 또다른 억울한 피해자만 만들고 말 수 있다. 나는 수사관도 재판관도 아니고 모든 사실관계를 다 꿰뚫고 있지도 못하다. 하지만 그동안 그랬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든, 언론이든, 당연히 정치권이 그럴 리는 없다. 그래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난다면. 그것이 과연 피해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일 것인가. 그런 불신이 쌓이고 쌓여 언제부터인가 미투란 말도 의미를 잃기 시작한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 책임을 묻는 방식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20년을 감옥에 산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남의 물건을 훔쳤다고 팔을 자르고 목을 매다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형벌일 것인가. 오로지 여성에 대해서만 근대 이후 성립된 이같은 대전제들이 너무나 쉽게 무시되고 만다. 절대 타협이 불가능한 지점이다. 그것을 고집하는 한 여성주의와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묻는 것이다. 지금 당신들이 분노하는 것은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여성주의란 신앙과 권력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이성과 합리와 정의라는 엄정한 근거 위에 성립하는 것인가? 인간은 대상인가? 목적인가?

 

과연 박원순 시장은 무고한가? 아니면 실제 혐의와 연루되어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죽었다고 예단하는 것도 불가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모두가 유죄라면 억울해서 다시 일어나고 싶을 이들이 꽤 적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단지 죽음일 뿐.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도 아님에도 예단을 가지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기정사실로 여기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도외시한다. 누가 빈소를 찾아가 엉엉 울며 통곡이라도 하라던가. 나도 않고 있는 짓거리를. 그래서 여성주의는 안되는 것이다. 여성조차 없는 그들만의 신앙이란. 추악하다.

 

오늘 경향일보 조간 1면 타이틀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박원순 시장의 실종 소식이었다. 물론 한 발 늦은 기사다. 벌써 몇 시간 전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속보가 떴으니. 종이매체의 한계다. 일단 인쇄해서 배포까지 끝난 신문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튼 경향일보의 1면과 박원순 시장의 시신발견 소식에 바로 떠오른 인물이 안희정 전지사였었다. 성인지감수성을 앞세워 법원의 판결까지 압박하고, 심지어는 모친상에 조문하는 것까지 날세워 비난을 쏟아낸다. 비판이 아니다. 비난이다. 이미 형이 확정되어 처벌까지 받고 있는 사람인데 뭘 더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인가.

탁현민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여성주의자에게는 시효나 한도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글 몇 줄이다. 남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성적 판타지에 대해 잡담처럼 적은 글 몇 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려 십 년을 넘어서 여전히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몇 번이나 사죄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 이상의 징벌을 가하고자 한다. 도대체 글 몇 줄 적은 것에 대해 얼마나 더 뭘 어떻게 해야 더이상 책임을 묻지 않게 되는 것일까? 그냥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심지어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 저들은 비로소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성범죄로 처벌받고 있으니 평소 안면도 있고 친분도 있어도 조문도 해서는 안되고 조화도 보내서는 안된다. 조선시대인가? 아니면 빨갱이 때려잡던 군사독재시절로 돌아가려는 것인가?

그래서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이다. 단순히 사전적 의미에서의 이념이 아닌 그를 넘어선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목적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 기준에 반하면, 아니 단순히 충족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단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념이란 종교다. 종교가 곧 이념이다. 종교적 열정과 이념에 대한 열정은 그래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국민을 단지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어디에도 인간이 없다. 인간이란 단지 자신들의 이념을 찬양하고 숭배하고 정당화하는 도구이자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하나라도 빌미가 생기면 그래서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경계토록 하기 위해 이른바 일벌백계란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도 일벌백계 백 사람도 일벌백계다. 로베스피에르가 말했었다. 공포야 말로 가장 순수한 감정이다.

성범죄로 고소당하고 고발당하는 순간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기정사실이 되어 들려 올 뿐 가해자로 몰린 사람의 입장 따위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더구나 민주당 당적을 가진 현직 시장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언론지형에 대해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을 당사자이기도 한 것이다.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차라리 미래통합당에 관용을 보이더라도 민주당에는 가차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당장 박원순 시장이 실종되었다는 뉴스에 경향일보가 달아 놓은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소당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법정에서 사실을 다퉈서 무죄판결이 나더라도 절대 저들은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아는 것이다. 바로 고소한 당사자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민주당에 적대적인 SBS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라. 과연 그래도 대통령을 꿈꾸던 정치인으로서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박원순 시장이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 내가 알 방법은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전비서로부터 고소당한 사실이 영향을 미쳤다면 그런 부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없는데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가? 그러면 묻고 싶다. 죄가 없다고 하면 그대로 믿어줄 것인가고. 재판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고 무죄판결이 나면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인가고. 유죄의 예단을 가지고 사회적인 인격살인까지 저지르려는 저들이 버티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재주로 당사자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 역모로 몰리면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형틀에서 죽거나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목이 잘리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란 없었다. 지금 하는 짓거리가 그런 것인데 무슨 결백이고 입증인가?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남은 선택지란 무엇일까? 사회적으로 자신의 인생까지 부정당하고 매장당하는 것과 차라리 몸이 죽더라도 그나마 명예라도 지키는 것 가운데서.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만큼 극성스러웠다. 극성스럽다기보다 오만하고 잔혹했다. 마치 종교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종교를 말살하려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상대의 신전을 더럽히고, 신자들을 학살하며 오로지 자신이 섬기는 신의 영광만을 예찬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신의 영광을 입증하는 또 하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죽여도 아무렇지 않다. 약탈하고 강간하고 파괴해도 누구도 자신들을 말리지 못한다. 당연히 벌하지도 못한다. 그 자체가 신의 위엄이며 은혜의 증명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우월한 것도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할 수 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가 우월한 것 역시 자본가와 지주들을 학살하고 약탈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죽으라. 자신들의 위엄과 공포를 위해 죽어서 제물이 되라. 그리고 어느새 많은 이들이 그런 공포를 체감하기 시작한다. 과연 자신은 저런 광기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더 고약한 것은 이 일련의 상황들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봉주를 미투로 저격할 때 프레시안이 배후에 있었다. 명백히 언론이 개입해서 정치적으로 한 정치인을 저격하려 한 경우였었다. 비단 프레시안 뿐이겠는가. 성범죄가 오로지 민주당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서 미래통합당에서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흘러나오지 않는 것일까. 프레시안도 자칭 진보매체다. 최근 진보의 정체라면 여성주의를 가리키는 경우가 더욱 늘고 있는 중이다. 자칭 진보와 여성주의가 유독 민주당 정치인을 노려 저격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지키려 했던 여성주의자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라 자신할 수 있겠는가. 프레시안이 가담했다면 경향과 한겨레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부추기지 않는다면 유독 민주당 출신의, 더구나 유력인사들에 대해서만 미투가 일어나는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듣보잡 변두리 정치인도 한 번은 이름을 올려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말하자면 진보가 지금 여성주의를 앞세워 민주당에 싸움을 거는 양상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상으로 권력을 가지게 된 여성주의자들은 지금 그 힘에 취해서 미쳐 날뛰고 있는 중인 것이고. 그 와중에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이 해 온 짓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언론이 앞으로 하게 될 짓거리에 대해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는지 모른다. 만일 사실이라면 여성주의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여성주의자라는 완장을 차고 마녀사냥을 일삼던,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생물학적 사회적 생명을 끊어 놓은 만행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살인죄보다도 성추행이 더 큰 범죄인가? 수많은 이를 학살하고 고문한 행위보다 성희롱 몇 마디가 더 큰 죄악인 것인가? 그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의 정의인가?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나는 상당히 늦게까지 미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었다. 여성주의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나갔다. 선을 너무 넘고 말았다. 여성주의는 신앙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절대 추종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 몇 마디가 시효없는 범죄가 되어 버린다. 무제한적인 책임과 응징이 가해져야 하는 죄악으로 여겨져 버린다. 재판조차 필요없다. 시시비비조차 따질 필요가 없다. 그렇게 몇 사람이나 재판이란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이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정의가 남아 있는가? 그나마 남아있던 알량한 정의마저 더이상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미투라고? 진정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서 미투인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힘을,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서 미투인 것인가?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만 깊어지는 요즘이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원래 남자는 여성주의에 대해 절대 이해할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존재라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어차피 공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강요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듯하니. 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과연 그나마 남은 우호적인 남성들의 배려가 사라졌을 때 남은 것은 무엇일 것인가.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알량하게 힘이 주어졌다고 주체하지 못하고 미쳐 날뛴 여성주의자들 스스로가 만든 결과인 것이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파괴는 파괴를 낳는다.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죽고 파괴되는 그 날까지 그것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싸움을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다. 두고보자.

아주 어렸을 적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느 선비가 먼 길을 떠났다가 우연히 외지고 허름한 초가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밤늦게 집주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보니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난다는데 그리 습관적으로 다리를 떨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집주인을 위하는 마음에 선비는 그날 밤 집주인이 습관적으로 떨던 다리를 자르고 냅다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글 중간에 나오지 않았는가. 발을 떨어 복이 달아나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기에 떨던 다리를 잘라준 덕분에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었더라. 당시에도 참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여겼던 기억이 난다.

 

사람은 성공해야 하는 존재다.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열심히 공부하며 노력하는 이유는 높은 자리에 올라 큰 권력과 명예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과 명예는 모두가 그를 위해 노력해 온 시간들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같은 성공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그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아니 그런 정도를 넘어서 더 가난하고 더 비천하고 더 비참한 삶을 살아야지만 더욱 노력해서 성공하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인류사에서 거의 보편의 법칙처럼 믿어져 온 이야기일 것이다. 당장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 와중에도 혹시라도 스스로 노력해서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형편이 될까 구휼을 자제한 것이 바로 19세기의 일이란 것이다. 당시의 복지란 것도 그래서 딱 스스로 노력해서 가난한 사람보다 못한 정도로만 그쳐야만 했었다. 그래야 스스로 노력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하긴 지금 당장도 복지에 대한 논의를 하려 하면 바로 나오는 말이 복지가 지나치면 스스로 노력해서 잘 살고자 하는 의지와 동기가 약해질 것이란 경고일 것이다. 가난하다고 그저 나라에서 도와주려고만 하면 열심히 일하려던 사람들까지 그런 것을 보고서 더이상 일해야 할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복지만 바라고 게을러지며 가난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살도록 채찍질한다는 의미에서 가난은 더욱 고통스럽고 비참해야만 하고, 그런 모습을 열심히 노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들이 항상 어렸을 적 자식들에게 그리 말씀하시고는 하셨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데 이른바 취업준비생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하며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기는 공항 보안요원들과 같은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 온 것이었다. 공항 보안요원들처럼 비정규직이 되어 차별받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참아가며 지금껏 열심히 노력해 온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구직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한 탓에 고작 비정규직이나 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벌받는 모습을 자기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껏 노력해 온 그동안의 시간들이 허무해지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벌을 주는 것이 정의란 것이다. 신상필벌이라 한다. 그동안 자신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양보해가며 열심히 노력한 만큼 보상이 있어야 하고, 저들이 그렇지 못한 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정의고 그런 것이 공정이다. 노력도 안했는데 정규직이란 보상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특혜이며 불공정이다. 그저 큰 노력 없이 계약직 보안요원에 만족하며 살아온 그들에게 정규직이란 보상을 누리게 하는 것은 불의이고 죄악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이다. 정규직이란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보상인데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할 대상들에게 그런 특혜를 주려 한다. 그런데 묻고 싶다. 겨우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 너희는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되는 존재라 말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 것인지. 상처주고 괴롭히는 것이 아니란 것인지.

 

어째서 체육계에서는 체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체육계만이 아니다. 군대내 따돌림과 가혹행위로 끔찍한 총기사고가 일어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직장에서도 상사와 동료의 괴롭힘을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그동안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대개 같다. 너무 못해서. 너무 정상에서 벗어나 있어서. 그래서 잘하라고. 모두에게 본보기를 보이려. 선의에서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폭행과 가혹행위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집단의 암묵적 동의와 연대에 의해 이루어지고는 한다. 후회조차 없다.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저가 약하고 저가 무능해서 저가 남들과 달라서 그리 된 것인데 괜히 죽어서 다른 사람 곤란하게 만든다.

 

드라마 '송곳'에서 아주 명대사가 있었는데. 사람이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못사는 건 죄가 아니다. 남들만큼 노력하지 못했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어느 법전에도 그런 내용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성공해야 하는 사회니까. 모두가 성공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하는 사회였으니까. 그러므로 성공은 정의다. 성공하지 못한 삶은 악이다. 성공은 그만한 보상을 누려야 하고 성공하지 못한 삶은 그에 따른 징벌을 받아야만 한다. 인천공항공사 정규직전환 논란과 최숙현 사건의 본질을 같이 보는 것이 비단 나 하나 뿐일까? 당사자가 상처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는 일을 폄하하고, 그동안의 삶을 비하하고, 인간 자신마저 서슴없이 모욕한다. 인천공항공사 보안요원들을 향한 인터넷의 정의로운 여론을 너무 적나라하게 직접적으로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리 다르다 여기는 것일까?

 

그저 고통받지 않고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권리인 것이다. 그저 스스로 비천하다 여기지 않고 비참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존엄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마땅히 이 정도 삶은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매맞지 않고, 모욕당하지 않고, 곤궁하지 않으며, 불안해하거나 위태로워하지도 않는다. 최소한 몇 년 뒤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 대단하게 많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계획을 세워 어떻게 잘만 하면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정도가 생기는 것 뿐이다. 선수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면 결과로써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다. 아니 선수를 그만둔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거기에만 모든 것을 걸고서 온갖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따위는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

 

못하면 못한대로. 아니면 아닌대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목적은 인간 자신이다. 중학교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었을 텐데. 하지만 인간은 수단이다. 인간에게는 더 가치있는 원대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를 이룸으로써 인간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고작 정규직인데. 그냥 평범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운동하며 살고픈 것 분인데. 악의조차 없다는 것이 더 비참하다. 오로지 선의로 정의감에 그리한 것이란 사실이 더 참혹할 것이다. 인간을 벌주어야 한다. 내가 잘되고, 네가 잘되고, 모두가 잘되기 위해서. 그것이 정의고 공정이다.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참 없어 보이는 말이나.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더라.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 그래서 네 생각은? 네 주장은? 네 근거와 네 논리는? 그냥 이름없이 말하는 필부필부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 이름 걸고 말해야 하는 지식인이라면 더 말할 것다. 오죽 못났으면 자기 주장이 아닌 남의 말을 근거로 앞세우는 것인가.

 

사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었다. 이른바 전거란 것이다. 과거의 문헌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역사의 인물 가운데 문장력이 어쩌고 하는 내용이 있으면 거의 대부분 그렇게 과거의 문헌을 인용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일 터다. 실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석할 때 가장 막히는 부분이 곳곳에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가 있는 의미도 알 수 없는 글자와 단어와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능력을 보자고 과거시험의 과목에 시작이 들어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냥 글만 아름답게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고전을 인용하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도와 어우러지게 하는가 실력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전제가 있었다. 아무리 많은 고전의 문헌을 인용하더라도 결국 주장하는 바는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말이어야 하고 생각이어야 한다. 그냥 인용만 잘하는 것을 오히려 당대의 지식인들은 비웃고 있었다. 그마저도 권위를 인정할만한 고전도 아닌 아는 누군가의 말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누가 그렇게 말했다더라. 어디에 그렇게 쓰여 있다더라. 그러니까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주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없이 단지 인용만 하는 것이라면 그냥 그 책을 사서 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웃기는 것이다. 기자라는 것들은 남의 말을 따옴표로 받아서 그대로 전달하기에 바쁘고, 지식인이라는 것은 기자가 쓴 기사를 받아서 있는 척 떠벌리느라 정신없다. 아니 아예 검사로부터 들은 말이면 그 자체로 이미 기정사실을 넘어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검사로부터 직접 전해들을 수 있다는 자체가 자랑이고, 그 이야기를 또 기자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것이 자랑이다. 오죽하면 토론에 나와서 내세우는 논리라는 것이 누구와 직접 만나봤느냐는 것이다. 검사가 썼다는 공소장이 근거가 되고 있다. 자기가 직접 발로 뛰어 당사자를 만나고 물어서 들은 내용들은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럴 가치조차 없다. 검사의 말이 논어고 맹자고 기자의 기사는 춘추고 사기다. 진중권이 주희고 김경록이 송자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옳다. 절대 틀릴 리 없다.

 

문제는 전근대사회에서도 저따위로 무작정 고전만 인용하여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는 이들을 선비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가 말에 책임이 없기 때문이란 것이다. 자신의 모든 주장의 책임을 고전의 저자들에게 떠넘긴다. 감히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라면 절대 함부로 여길 수 없는 대상을 빌어 책임까지 함께 떠넘기려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그들이 잘못인 것이지 자기의 잘못은 아니다. 따옴표를 따서 보도했지만 그들이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니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거면 자기 이름까지 달고 기사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이름을 앞세워 인터뷰도 하고 기고도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것인가. 그런데도 틀렸을 경우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남의 이름을 빌어 윽박지르기만 열심이다. 남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모두가 대단하게 여기는 이들이 그리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지금은 네가 틀린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가장 최악이 바로 이런 비겁함인 것이다.

 

남의 말을 인용했어도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다. 남의 주장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폈다면 그 주장 만큼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지식인이라 여기는 이의 자세다. 과거 진중권은 그런 모습을 얼핏 보이고는 했었다. 자칭 진보라 여기는 지식인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의 많은 것들을 내걸고 자기의 책임 아래 글을 쓰고 주장을 하고는 했었다. 기자란 한 때 한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여겨지고는 했었다. 스파이더맨과 슈퍼맨이 괜히 평상시 기자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정의와 지성과 용기를 모두 가진 이들만이 진짜 기자가 될 수 있다. 물론 환상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런 환상을 믿는 이들이 많다.

 

오죽하면 뭔가 주장하기 만만치 않으니 여론조사를 근거랍시고 들고 나오겠는가 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잘하냐? 추미애가 잘하냐? 윤석열과 조숙에 대한 서울대생들의 평가가 어떠한가?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가 되는 기사는 자신들이 쓰고 있다. 자신들이 쓴 기사를 가지고 대중이 판단하면 그를 근거로 인용하는 대단한 순환논법이다. 그러면 항상 대중의 판단과 의사를 그렇게 존중해서 인용해가며 기사를 쓰고 있는가. 그럴 놈들이면 자신의 잘못된 기사에 분노하고 항의하는 대중들에 미안한 감정이라도 가져야 한다. 대중이란 단지 자신의 기사에 선동당하고 이용당해야 할 대상일 뿐 존중되어야 할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만한 당당함이라도 보이던가.

 

사실 나 역시 오래전 한참 비루하던 시절에 뭣만 하면 누가 뭐라 주장했다더라며 앞세우기를 즐겨하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않는다. 일단 귀찮다. 누가 뭐라 떠들었든 상관없이 나는 내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인용한다면 내 주장을 위해 필요해서다. 오히려 퇴보하는 것 같다. 주장에는 기자로서의 자신도, 지식인으로서의 자신도 없고, 그냥 논리없는 인용만이 가득하다. 책임을 돌리면서, 그러나 권위를 빌리면서, 그 권위마저 순환에 의핸 자가생산이다. 그것이 자칭 지식인들과 기자것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하며 권위까지 싣는 방식인 것이다.

 

이제는 차라리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논객이라면 미움은 받더라도 비웃음을 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도 지식인이라면 차라리 모두와 원수가 될 지언정 무시당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레기라고 욕하는 것도 이제는 지쳐가는 느낌이다. 자칭 지식인이라는 것들의 헛소리에 귀기울이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정도다. 내가 왜 그딴 놈들의 허튼 소리를 내 시간 낭비해가며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언론에 대한 관심조차 이제는 아예 시들하다.

 

차라리 자기 이름을 앞세운 만큼 되도 않는 논리라 할지라도 자기 주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이들이 더 괜찮은 기자고 지식인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최소한 그만큼 자기의 주장에 대한 책임 역시 온전히 자신이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마저 감수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차라리 낫다고 여기는 이유다. 그나마 나은 똥이다.

그러고보면 기자것들이 인천국제공항 전규직전환을 일부러 논란으로 키웠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대부분 좋은 대학 나왔고 어려운 언론고시 합격해서 기자까지 되었다. 기자가 되니 만나는 대상이 정치인, 기업임원, 검사, 판사, 경찰간부들이다. 경찰도 일선에 있는 이들은 취급도 안해준다. 그런데 고작 명문대도 나오지 못한 무지렁이들이 정규직이 되겠다 하니 고깝게 보일 밖에.

 

검사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우습게 봤던 이유였다. 강금실 이후 조국 전장관과 지금의 추미애 장관까지 멸시에 가깝게 하극상을 벌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사법고시에는 합격했지만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조국 전장관은 서울대 교수출신이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했으며, 강금실과 추미애 장관은 검사출신이 아니다. 검사 출신만 인정한다. 판사조차 검사 아래에 있다. 그런데 어딜 감히. 그리고 그런 검사들과 어울리는 기자것들이나 진중권, 김경률 등 자칭 지식인들에게도 그런 사고는 전염된다. 어디 검사도 못 된 것들이.

 

그만큼 자기들의 노력과 성취에 대한 확신이 강한 것이다. 남들 놀 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도 갔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좋은 직업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기자씩이나 되었으니 검사님들과 어울릴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울리는 그 검사님들은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판사고 다 우습게 여기는 대단하신 분들이다. 실제 검사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있기도 하다. 자기들처럼 좋은 대학 나오지 못하고, 어려운 사법시험도 합격하지 못한, 검사가 되어 보지도 못한 놈들은 자신들을 상대할 자격조차 없다. 어째서 검사들이 이명박을 그토록 좋아하는가. 박근혜는 그런 검사들을 힘으로 찍어누르려 했지만 이명박은 철저히 대우하며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검사는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란 것이다.

 

그런 맥락인 것이다. 기자것들이 감히 인천국제공항 보안요원들이 정규직이 되려 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검사들과 더불어 감히 검사도 아닌 법무부장관 나부랭이들이 검사들을 지휘하고 개혁까지 하려 한다는 사실에 증오의 감정마저 품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런 검사들을 유희곤은 만나봤고, 유희곤을 진중권은 만나봤다. 김경률 역시 나름대로 어려운 회계사 시험 합격해서 자부심이 남달랐을 테니 검사들과 어울리기 좋았을 것이다. 검사는 법무부로부터도, 심지어 행정부로부터도 독립되어 존재해야 하는 조직이다. 대통령의 인사와 지휘조차 받지 않고 예산도 따로 쓰며 대통령 머리 위에서 그를 감시하고 심판해야 하는 대단한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기자것들에게 윤석열은 대통령과 동격인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감히 대통령이 윤석열에게 지시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추미애 장관이 지휘하려 한다는 사실에 비난을 쏟아낸다.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검사들이 모욕당하는 그 이상으로 검사들과 일체화된 기자것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낸다. 카르텔이다. 명문대 나와서 그래도 남들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업까지 가지게 된 출세의 카르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잘 것 없는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이라는 자신들의 영역을 넘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사회의 공정이며 정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좋은 대학 나와 어려운 시험 합격해서 검사까지 되었으니 고작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을 뿐인 정치권력이 그를 어찌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대중의 욕망이란 그를 지탱하는 이 사회의 구조이기도 한 것이다.

 

어째서 국회는 합의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것인가. 단 한 사람의 반대나 이탈도 없이 모두가 한 목소리로 하나의 방향을 향해서 주장하고 결정도 해야 한다 주장한다. 같은 이유인 것이다. 엘리트라면. 대중의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민주당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인지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적의와 멸시의 감정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 같은 편이었어야 하는데 감히 자신들의 카르텔을 흔들고 부수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 그러니까 왜 기자것들 나부랭이가 공수처에 저리 적대적인가 하는 것이다. 무슨 이해가 얽혀 있어서.

 

명문대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이 신분이 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겨레와 경향을 포함한, 공중파를 아우르는 자칭 언론고시를 통과한 기자것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검사와 하나가 된다. 검사 역시 그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는 특별하고, 심지어 국민이 선출한 권력보다도 우월하다. 대통령조차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우습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냥 행정부 외청이다. 법무부에 의해 인사와 예산이 집행되는 외청이되 산하기관이다. 독립적으로 수사하지만 대신 상관으로서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에 지휘권을 행사할 권한까지 갖는다. 그마저 부정한다. 법무부장관이 검찰에 인사권과 지휘권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예산까지 독립된 조직이어야 한다. 입법, 행정, 사법부 이외에 검찰부를 새로 만들려 한다. 이 얼마나 웃기는 짓거리인가. 고작해야 검사장들 따위가 모여서 회의를 하고 법제상 상사인 법무부장관의 지휘권을 무력화하려 시도한다. 그런 것을 언론이 긍정적으로 받아써주고 있다.

 

그냥 부모들이 교육을 잘못 시킨 것이다. 학교에서 잘못 가르친 탓이다. 엘리트란 그런 것이 아니다.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가지는 것이 그러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부모와 선생들은 그러라고 공부하기 싫은 그들을 억지로 등떠밀고 있었을 것이다.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 가지면 너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실제 그러고 있다. 광고주만 믿고 오히려 독자를 우습게 보는 기자것들의 그 오만한 자부심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진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유독 잔혹하고 냉소적인 언론의 태도와 국민이 위임한 선출된 권력 앞에서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검찰의 모습이란 것이. 검찰을 포함한 관료사회의 모습이란 것들이. 그 가장 앞에서 그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란 것이다. 힘있는 자와 가진 자들을 위해서. 언론의 현주소이기 이전에 이 사회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 사회의 본질이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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