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지금 직장도 내가 원해서라기보다 당시 선택지가 달리 없었기에 지원해서 들어온 것이었었다. 무엇보다 체력에 자신이 없었다. 어느새 나이는 40을 훌쩍 넘어가는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다 보니 과연 제대로 일을 할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몸상태가 엉망이었었다. 시도때도 없이 허리도 아프고, 고관절도 쑤시고, 심지어 팔꿈치와 무릎마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구인사이트를 뒤지면서도 과연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부터 생각하게 되니 선택지는 크게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상태로도 할 수 있으면서 급여도 적당한 일이 뭐가 있을까? 당시 최저임금 수준으로 그렇지 않아도 고정지출이 많은 내게 맞는 일을 찾기란 역시 쉽지 않았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금 일이었었다.

 

그리고 대략 3년 정도 흐른 모양이다. 지난 3년 동안 열심히 운동도 하고 병원에 다니며 체형교정도 하면서 건강 만큼은 어지간히 젊은 친구들과 비교해서도 자신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젊은 직원들조차 지쳐서 버거워 하는 상황에서도 그래도 비교적 생생하게 맡은 일을 처리하는 자신의 모습에 때로 감탄도 하게 되었다. 지금 상태라면 어지간히 체력을 요구하는 일도 거뜬히 해 낼 수 있겠다. 구인사이트에서 일정 이상의 체력을 요구하는 내용을 보면서도 웃는다. 나름대로 세 자리 수 무게로 운동을 하는 처지이다 보니 그런 정도는 어쩐지 가벼울 듯하다. 여기에 더해 그동안 최저임금도 크게 오르면서 어지간해서는 거의 대부분 내가 필요로 하는 최저 금액은 충족하는 정도가 되고 있었다. 물론 직접 면접까지 보고 나야 결론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이래서야 내가 골라서 지원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래서 내가 최저임금 인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더불어 노동시간 단축도 적극 지지했던 것이었다. 칼퇴근이야 말로 지금 내가 자신하는 체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퇴근하고, 혹은 출근하기 전에 꾸준히 쉬지 않고 운동을 통해 비틀린 최형도 교정하고 체력도 키운다. 그 결과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이 생길 만큼 체력이 만들어졌는데, 더구나 아무 일을 해도 내가 필요로 하는 급여조건에 맞으니 선택지는 더 넓어만진다. 워낙 그렇게 곱게만 살아온 삶이 아니었기에 일을 딱히 가리지 않는다. 오만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다 겪어 봤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일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런 점에서 워낙 사람이 없어서 나이제한도 없는 일자리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일단 사람이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운동도 더욱 열심히 하고, 잠도 더 열심히 자고, 게임도 더 열심히 하고, 책도 더 열심히 읽고, 그동안 일이 편한 만큼 몸도 정신도 피곤하기만 한 지금의 일로 인해 일상에 여유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저 모순을 이해할 정도가 되면 그 삶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 두 어 달 놀려고 마음먹고 있다. 다행히 권고사직의 형식을 취한 터라 실업급여도 당분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제법 되고. 원래 내년의 일조차 쉽게 장담하지 않는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래 할 일도 아니었고, 그만큼 이직도 잦은 곳이었었다. 순리를 따르게 되었다고나 할까.

 

 

건강이 더욱 소중함을 느끼고 지금의 건강에 대해 고마운 마음까지 가지게 된다. 역시 살면서 남는 것은 건강 한 가지 뿐이다. 아마 3년 전에도 건강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했다면 더 나은 조건의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만두고 나서도 어디서 일했다 경력으로 삼을만한 일을. 가장 아쉽게 여기는 부분이다. 항상 후회하던 부분이기도 했고. 지금이야 매년 가슴사이즈 넓어지고 허벅지 둘레 커지는 것이 옷을 새로 사야 하는 걱정으로 돌아올 정도다. 나 자신도 좋아지고 시절 또한 좋아지고. 그래서 또한 투표도 잘해야 하는 것이다. 최저임금이 1만원까지 올라갔으면 알량한 내 자격증도 의미를 가질 텐데. 지금도 급여수준이 업무강도에 비해 너무 낮다. 다만 당시에는 체력적인 문제로 여러가지로 버거웠었다. 다행이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사실 박재동 만화가 정도면 확실하게 현정부에 친화적인 인사라 보기 어렵다. 그냥 유시민이 말한 범진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수구세력만 아니면 그래도 진보로 분류되는 진영 가운데 민주당이든 정의당이든 누구라도 크게 상관치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이 집권하고 그 아래에서 뭔가 한 자리 맡을 가능성도 높다. 잡아 조져야만 한다.

 

박재동 만화가를 미투라는 이름으로 음해한 정황이 녹취록의 형태로 경향일보를 통해 보도된 바 있었다. 잠시 경향일보가 미쳤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후배기자들의 반발을 이유로 기사 자체를 내리고 말았다. 2차 가해를 우려한다. 하지만 그 녹취록의 내용은 박재동 만화가가 자칫 음해할 목적으로 조작한 미투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혹시라도 녹취록의 내용이 사실이고 적확하게 정황을 가리키고 있다면 오히려 피해자는 고발인이 아닌 박재동 만화가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용납지 못하겠다.

 

그러고보면 미투와 관련해서 여성계나 언론이 미쳐 날뛰던 대상은 하나같이 현정부와 가깝다 여겨지던 인사들이었었다. 그밖의 대상들에 대해서는 언론이든 여성계든 크게 관심조차 없었다. 다른 미투는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미투라는 흐름에 편승해서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문재인 정부를 단죄하자. 원래 자칭 진보의 주류가 이렇게까지 여성주의에 치우쳐 있지는 않았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여성주의가 곧 진보를 가리키게 된 이유일지 모르겠다. 여성주의는 박근혜를 통해 수구와도 이어져 있다. 수구란 다른 말로 이 사회의 기득권이고 주류다.

 

몇 번이고 말했다. 자칭 여성주의자 가운데 좋은 집안 출신 아닌 경우가 거의 없고 좋은 대학 출신이 아닌 경우는 더욱 드물다. 배우자까지 포함하면 그들이야 말로 이 사회의 천룡인 가운데 천룡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연대하려 할 때 누구와 연대하려 하겠는가. 여성주의든 언론이든 결국 여성주의와 성폭력 피해자들의 마지막 하소연일 미투마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 뿐이다.

 

명백히 피해자라 주장한 여성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박재동 만화가를 음해한 정황이 담긴 당사자의 메신저였을 텐데도 2차 가해를 우려해서 기사를 삭제한다. 과연 그들이 진정 우려한 것은 2차 가해였을까? 아니면 박재동이라는 이름이 현정부의 아군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는 모습이었을까? 그게 바로 자칭 진보란 것이다. 자칭 여성주의와 연대한 순간 숙명이라 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를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 절박하기까지 하다. 눈물겹다.

자신이 성추행 피해자라면 다른 사람의 피해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것이 옳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충분한 근거가 제시된 것도 아닌데 단지 그런 주장을 한다고 무작정 믿고 그를 지지하는 행동과 발언을 해야 하는가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이 내세운 근거가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하다면 판단을 미루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선택의 영역이란 것이다. 오롯이 개인의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자신이 옳다고 맞다고 여기는 바를 지지하는 것도 전적으로 개인이 누려야 할 권리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가?

 

서지현 검사에 대한 언론과 여성주의자들의 공격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보다 더 고약스럽다는 이유인 것이다.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피해자다움이기 때문이다. 성추행 피해자이기에 같은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실에 대한 판단마저 거른 채 전적으로 지지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성추행 피해자로써 미투를 선도했던 당사자이기에 다른 사람의 미투에 대해서도 무조건 지지부터 해야만 한다. 서지현이라는 개인은 없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엄한 인격으로서의 서지현은 없고 오로지 성추행의 피해자 서지현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여성주의란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서지현 검사는 오로지 성추행 피해자로서만 행동해야 한다. 아니면 성추행 피해자면서 미투폭로자였던 자신을 의심받고 부정당하게 될 지 모른다. 이 무슨 야만이고 폭력인 것인가.

 

그야말로 광기다. 과거 일본에서 기독교를 탄압하며 성상을 바닥에 깔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한 적이 있었다. 죄인이 있으면 함께 돌로 내리쳐야 한다. 죄인을 향해 매를 들지 않으면 자신 역시 한 패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인민재판에서의 자아비판이란 것이다. 전근대 왕조에서도 왕이 누군가를 죽이려 하면 그 순간 그와 비슷한 광기의 현장이 조정에서 벌어지고는 했었다. 그래서 류성룡마저도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 하니 그를 욕하며 죽여야 한다 주장했던 것이었다. 아니면 자칫 자신까지 이순신의 죄에 연루되어 처벌받게 될 지 모른다. 그러니까 욕하라. 그러니까 돌로 내려 찍으라. 몽둥이로 내리치라. 침묵하는 것조차 2차 가해다. 추모하는 것마저 2차 가해다. 이제는 연좌까지 하려 한다. 가족이고 지인이고 평소 교류하며 서로 많은 도움도 주고받고 한 사이인데 추모조차도 해서는 안된다.

 

아버지의 살가죽을 벗겨 아들에게 깔고 앉아 재판을 치르게 한다. 아예 한 사람의 기록을 드러내어 사진마저 조작해서는 그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 모두 전근대 독재사회에서나 가능했을 법한 행동들이다. 과거 우익들이 빨갱이를 색출한다며 하던 짓거리이기도 하다. 태영호가 이인영에게 전향여부를 묻는 모습을 보라. 주호영이 박지원의 이념을 따져묻는 장면을 보라. 닮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전원책도 토론프로그램에 나와서 다짜고짜 윽박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정은 개새끼라 불러보라. 박원순 개새끼라 불러보라. 박원순 씨발놈이라 불러보라. 아니면 너는 여성의 적이다. 여성도 아니고, 성추행 피해자도 아니고, 미투 고발자도 아니다. 딱 극우와 극좌가 어울려서 여성주의를 가지고 이념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지현 검사도 여성도 피해자도 고발자도 아니게 된다.

 

서지현 검사로 인해 더욱 저 씨발년들의 정체가 적나라해진다. 저들이 과연 여성을 위하겠다는 쌍년들이었을 것인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했다면 아무리 서지현 검사를 그런 식으로 공격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같은 피해자인데 서지현 검사를 압박하며 그녀의 정체와 존재마저 의심하고 부정하려 한다. 자신들이 부정한다고 부정될 수 있는 일이던가. 의심한다고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일이던가. 그럴 수 있다 여긴다. 그러고보니 최근 박재동 화백에 대한 미투에서도 여성주의자들이 뒤에서 장난한 정황이 드러났다. 단지 이번 기회로 여성주의자들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고 확인해 봐야겠다. 그리고 오랜만에 언론은 가치를 가지고 대상을 재단하고 단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분명 다르다. 서지현 검사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까고 자신의 고발에 대한 모든 반박과 음해들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의 진실과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굴도 이름도 모두 가린 미투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김지은 씨도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과 분위기에서 무슨 일을 당했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수치스러웠을 것임에도 낱낱이 폭로한 바 있었다. 그래서 지지하는 것이다. 얼치기들이 뭐라 하든 그 정도 진술의 합리성과 일관성이라면 충분히 그 주장에 신뢰를 보낼 만 하다. 그런데 어떤가. 

 

참고로 성추행이란 당시 자신이 성추행이라 인지했을 경우에만 성추행으로 인정된다. 다시 말해 어려서 잠지꼬추하며 서로 성기를 만지고 놀았어도 그것이 성추행이란 인식 자체가 없다면 성추행으로 인정되기 어려운 것이다. 성추행을 당하는 당사자가 그로 인해 성적 수치심과 고통을 느꼈을 때 성추행이 되는 것이지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 성추행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좋아서 성관계를 맺은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성폭행이더라. 세계인구 줄어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예 거부의사를 밝힐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시 거부의사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상대는 좋은 분위기에서 관계를 그만둘 수 있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상대가 아무렇지 않아 하기에 그저 친근함의 표현으로 그런 말과 행동들을 했던 것인데 나중에 보니 성인지감수성인지 뭔지에 따라 성추행이더라. 그래서 씨발 - 아니 씹도 못할 년들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진짜 성추행이라 인지하고 거부의사를 밝혔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릴을 인지시켰었는가. 그게 핵심이다. 늬들이 판단하기에 성추행이라 뒤늦게 따져묻는 것이 아니라.

 

아무튼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는 쌍년들이란 것이다. 원래 저 쌍년들이 지지하던 정치인이 바로 감옥에 갇힌 박근혜였었다. 여전히 저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근혜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남성중심 사회에 의해 억울하게 탄압당한 것이라 여긴다. 그런 것들과 연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류호정이 아예 대놓고 미래통합당과 연대하고 있더만. 여성에도 여성은 없다. 여성주의에만 여성이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망했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공산주의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공산주의에만 있다. 씹도 못할 개년들이다. 좀 있다 술 먹을 예정이라 입이 좀 험하다. 써글년들.

작년 조국사태 당시 검찰의 무리한 표적수사와 과잉수사에 대해 누군가 비판하거나 하면 바로 반박이 나왔었다. 그렇게 당당하면 모든 증거 다 내놓고 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면 될 것 아닌가.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으니 검찰의 수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조국 전장관의 경우 법을 벗어난 수사에 대해서조차 한 마디 서운함도 드러내지 못하고 묵묵히 가족이 난도질당하는 상황까지 지켜봐야만 했었다. 컴퓨터에서 하드를 제거한 것까지 찔리는 것이 있는 것이다. 민정수석으로서 핸드폰을 임의제출 않는 것도 켕기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동훈은 어떤가?

 

한동훈 만이 아니다. 이동재는 아예 자신의 핸드폰과 노트북까지 모두 포맷해 버린 바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검찰이 압수해 간 것이 부당하다며 준항소까지 했을 것이다. 한동훈 역시 핸드폰을 압수수색당했는데 비밀번호도 가르쳐주지 않고 여전히 수사에 대해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조국 전장관에게 들이댄 잣대 대로라면 마땅히 한동훈과 이동재에게도 언론은 주문했어야 한다. 그렇게 결백하다면 증거들을 내놓고 당당히 수사를 받으라. 검찰에 출석해서 검찰이 묻는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라. 조국 전장관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고 그리 난리치던 언론이었을 텐데.

 

수사중단이라지만 사실 한동훈에 대해서는 수사가 제대로 시작된 적도 없었다. 압수수색이나 한 번 했을 뿐 직접 소환해서 한 마디 궁금한 것을 묻지조차 못한 상태다. 그런데 언론에 대고만 열심히 억울하다며 투사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 당당하면 수사를 제대로 받던가. 자기가 한 논리 그대로. 아니라면 그냥 침묵하며 저항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다. 하긴 한동훈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 한동훈을 심지어 영웅화시키는 언론 버러지들이 더 문제일 것이다. 한동훈이 저럴 수 있는 것도 다 언론 버러지들 때문이다.

 

물론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동훈의 핸드폰에서 나와서는 안되는 이름들이 있다. 알려져서는 안되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KBS도 한동훈을 지키려 의도적으로 오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자 했던 것일 터다. 오보를 내는 것이 한동훈의 진실을 알려지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 이해공동체다. 그런 정도를 넘어 이미 공동운명체인 것이다. 윤석열 검찰과 언론은. 그래서 즉 윤석열 검찰에 대한 개혁은 언론에 대한 개혁이고, 언론에 대한 개혁은 윤석열 검찰에 대한 개혁이다. 조국 전장관이 진짜 검찰과 싸우고 있는 상황이다. 언론은 버러지다. 진리고 진실이다.

업무관계로 충돌이 있었다. 글에서 드러난 그대로 성격이 고지식하고 까칠하다. 원리원칙을 중요시여긴다. 그래서 그만한 책임도 있는 위치이고 해서 여러가지로 규정에서 벗어난 행동들에 대해 경고하고 제재를 가하려 했었다. 선공을 맞았다. 오히려 내가 자기들을 괴롭혔다며 위에다 진정을 했더라. 정당한 업무지시는 괴롭힘으로, 그 과정에서 야단치거나 했으면 폭력과 강요로, 심지어 지나가며 한 농담까지 업무지시로 바꿔 놓는데 어이없어 웃음만 나왔다. 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먹이는 거구나. 나는 그래도 우리들끼리 안에서 해결을 보려 했는데 한 번 선빵을 맞으니 방법이 없다. 더구나 그래도 신뢰하며 이것저것 챙겨주려 애쓰던 동료들이었다.

 

더욱 박원순 시장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오늘이었다.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이런 허탈함과 배신감이었겠구나. 다행인 건 이미 오래전에 오만정이 다 떨어진 터라 더이상의 상처같은 건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자기가 내린 업무지시조차 망각하고 다수의 편을 드는 상사를 보니 더 이상 이 일을 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모함하고 함정에 빠뜨리는가. 얼마나 그런 음해와 모함들을 사람들은 쉽게 믿고 받아들이는가. 그래서 피해자라 주장하는 고소인의 주장 가운데 그런 식으로 왜곡되거나 과장된 내용은 없을 것인가. 하지만 그런 의문들을 제기하는 자체도 2차 가해라 하니 진실은 그저 박원순 시장이 유죄라는 것 하나 뿐인 듯하다.

 

입장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식으로 나도 한 번 당하고 나니 더욱 박원순 시장의 처지가 이해가 된다. 선의로 한 행동을 그런 식으로 악의로 비틀어서 상대를 곤란에 빠뜨릴 수도 있구나. 그런 허술한 거짓말에 진짜 넘어가는 멍청이들도 있구나. 물론 멍청한 건 아니다. 전부터 나를 어떻게 해 보려 벼르고 있던 걸 내가 모르지 않으니까. 누군가의 명예를 중대하게 훼손할 수 있는 주장이라면 더욱 구체적인 근거를 먼저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증거가 없는 증언은 단지 또다른 악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증거 없이 피해자라 주장하는 고소인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아주 엿같은 오늘이다. 그냥 푹 자야겠다.

그래도 성인들인데 직장생활도 한 번 안 해 본 것인가. 인수인계란 말 그대로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업무내용의 전달이다. 아예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단지 잠시 업무를 대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잠시 출근하지 못하게 된 경우에도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떤 일들을 해왔고, 지금 어떤 일들이 진행중에 있으며, 그러므로 대리하는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업무와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인수인계의 경우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이 개입될 여지란 없다고 보면 된다.

 

어찌되었거나 현직 시장에고 서울시청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보좌하는 일이니 자부심까지는 이해하더라도 과연 '인품도 능력도 훌륭하신 분이니 배울 것이 많다'는 내용이 공식문서인 인수인계서에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는 내용인가 하는 것이다. 그만큼 서울시장 비서란 중요한 자리다. 서울시장 비서로써 충실히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격과 마음가짐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 서울시장 개인에 대한 인상평가까지 포함된다. 자기를 수 년 간이나 성추행한 사람인데 인품이 훌륭하다? 반복적으로 성추행을 저지르며 전출신청까지 묵살했던 당사자에게 배울 점이 많다? 공식문서이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걸 말이라 지껄이는 것인가?

 

그냥 아무 회사나 들어가서 인수인계 해보면 바로 알 것이다. 전혀 쓸데없는 말인 것이다. 서울시장의 비서로서 자부심을 가지라는 말까지는 몰라도 서울시장 개인의 인품과 능력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가 굳이 공식문서에 들어가 있을 이유란 달리 없는 것이다. 없어도 되는 내용을 굳이 사족처럼 추가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을 진짜 뇌도 없는 병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런 것이 기자놈들의 속성이기는 하다. 기자는 대중을 우습게 여기고, 변호사는 그런 기자들을 우습게 여긴다. 똥걸레와 똥향과 똥의당은 그런 점에서 얼마나 우습게 여겨지고 있는 것인가.

 

아무튼 진짜 개똥같은 상황이란 것이다. 아직 유죄로 확정난 것도 아닌데, 더구나 설사 실제 성추행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말고는 추모하는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기념하고 말고 역시 기념하는 주체들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살인죄도 죽어서까지 처벌하지 않는데 여성에 대한 범죄는 시효도 한도도 없는 모양이다. 박정희 죽였다고 가족까지 고통받았던 김재규를 떠올리게 된다. 개똥은 그나마 잘 썩히면 거름은 된다. 저것들을 잘 썩혀도 거름은 될 수 있을까? 페미는 없다. 여성주의도 없다. 그냥 똥을 만드는 쓰레기들 뿐이다. 더러운 벌레들.

처지가 꽤나 곤란하게 되었다. 윤석열 편을 들어 수사심의위를 따르라 하려니 이재용에 대한 수사까지 중단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재용을 기소해서 처벌받게 하려면 윤석열의 측근 한동훈에 대한 수사까지 인정해야만 한다. 어째 그 말 많던 김경률이 엉뚱한 것 잡고 떠들고 있더라. 그래서 진중권은 안된다는 것이다. 경향일보도 속내를 드러냈다.

 

아마 전부터 삼성과 이재용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주장해 왔을 터였다. 수사심의위의 불기소결정마저 문재인 정부의 탓으로 돌리려 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수사심의위의 결정을 문제삼으려니 한동훈이 걸리고 만다. 삼성을 잡을 것인가? 한동훈을 지킬 것인가? 삼성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한동훈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차라리 보수언론은 편하다. 둘 다 하지 마라. 그런데 자칭 진보들은 헷갈린다. 이게 되면 이건 안되고, 이게 안되면 이건 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한다는 것인가?

 

원래 가치에 대한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닌 이해에 대한 계량에 근거한 주장인 때문인 것이다. 가치란 불변한다. 바뀌더라도 그렇게 급하게 한 순간에 바뀌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이해란 것은 시시때때로 바뀌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 정의당이 말 한 마디 않고 입 꾹 다물고 있는 것 아니던가. 검찰을 지키자니 삼성도 지켜야 하고, 삼성을 잡자니 검찰도 잡아야 하고, 에라 모르겠다 박원순 무덤이나 조지자. 화풀이다. 사실 아마 속내는 삼성과 이재용까지 지키고 싶을 테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당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좀 주제를 아는 놈들은 아예 침묵하고, 진짜 주제도 모르는 놈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일단 지르고 만다. 김경률과 진중권의 차이이고 한겨레와 경향일보의 차이다. 그래서 내가 요즘 한겨레를 집중해서 욕하고 있는 것이다. 경향일보는 이제 욕할 가치도 없다. 그냥 병신들인데 조국네 강남빌딩 사는데 벽돌이나 몇 개 더 보태라 그러면 된다.

 

웃기는 것이다. 수사심의위의 결정이 그렇게 절대적이면 이재용은 기소하지 않는 게 옳다. 그렇지 않다면 한동훈도 계속 수사하는 게 마땅하다. 굳이 진보코스프레까지는 않았던 언론들이 더 편해진 상황이다. 그러게 왜 속에도 없는 진보를 앞세워 떠들고 있었는지. 그래서 자칭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다. 저놈들이 진보면 조중동이 보수다.

여성 사용자와 남성 노동자가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며 충돌한다. 더구나 여성 사용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오너이고, 남성 노동자는 최저임금이나 겨우 받는 비정규 계약직이다. 그러면 과연 여성주의자들은 이들 가운데 누구의 편에 서게 될 것인가. 당연하지 않은가. 초유의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이 탄핵되는 와중에도 다수의 여성주의자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가 부당하게 탄압당하고 있다 주장하고 있었다. 여성이 우선이다.

 

노동자라는 계급 안에도 다양한 정체성과 층위가 있듯 여성이라는 정체성 안에도 다양한 계급과 신분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잘나가는 변호사일 수 있고, 누군가는 몇 선이나 한 국회의원이기도 하며, 누군가는 대기업 사모님이거나 아니면 아예 자신이 대기업 오너이기도 하다. 당연히 겨우 최저임금도 못받는 빈곤한 처지의 여성들도 존재하며,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여성들 또한 적지 않다. 그러니까 여성주의라 해서 과연 이 가운데 어떤 여성의 편에 설 것인가. 그러니까 여성주의자들이 편들고자 하는 그들이 과연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일 것인가.

 

어째서 그토록 보편적인 인권을 중요시 여기는 진보주의자들이 타인의 권리를 아무렇지 않게 침해하고 유린한 흉악한 범죄자들의 인권에마저 민감하게 관심을 가지고 하는 것인가. 당연하다. 국가라는 절대의 폭력 앞에서 모든 개인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시장 상인들에게는 사신과도 같은 조직폭력배조차 경찰이 나서서 체포하려 하면 도망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떤 범죄조직도 국가보다 거대할 수 없으며 어떤 개인도 국가보다 강력할 수는 없다. 저 유명한 알카포네조차 체포되어 재판받고 감옥에 갇힌 순간 그저 무력한 수형자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가 부당하게 위력을 행사해서 정도를 넘어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죄를 지은 만큼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지은 죄를 넘어서 그 이상의 책임까지 물으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칫 억울할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라도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묻고 싶다. 과연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가운데 누가 더 강자인 것인가. 살아있는 여성과 죽은 남성 가운데 누가 더 사회적으로 강자인 것이다. 한 사람은 자기주장도 할 수 있고 한 사람은 변명조차 한 마디 자기 입으로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더구나 살아있는 사람의 곁에는 수많은 언론들이 함께 있고, 죽은 사람의 곁에는 그저 죽은 이를 추모하려 남겨진 이들 뿐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에게 더 연민을 가지고 온정을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진실을 가릴 때는 가리더라도 최소한 떠난 이가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할 수 있기를 배려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이 되는 상식이란 것이다. 하지만 자칭 진보 가운데 누구도 그같은 최소한의 배려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아있는 이들에게 죄인을 난도질하기를 언론이라는 힘을 빌어 강요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위증도 죄가 되지 않는다. 가까운 지인을 고발하도록 위력을 사용해 강요하는 것은 야만사회에서나 하는 일이다. 부모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식의 편을 들 수밖에 없고, 오랜 친구였기에 잘못을 알면서도 차마 입밖에 내어 비판하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결백을 증명하려면 부모라도, 형제라도, 친구라도, 오랜 동지였어도 마땅히 그 시신에 침을 뱉고 채찍질을 해야 한다. 무덤을 파헤쳐 오물을 뿌리고 시신까지 난도질해야 한다. 안 그러면 너도 공범이다. 너도 2차 가해자다. 가까운 이를 졸지에 잃고 겨우 떠나보내려는 이들이 어느새 강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어 단죄의 대상이 된다. 어째서? 자신들이 내린 결론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과연 이런 것이 자신들이 편들고자 하는 약자들의 논리라는 것인가. 언론이 뒤에 없고, 검찰이 옆에 없고, 보수정당이 앞장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과연 당당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을 과연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

 

오로지 여성 뿐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에서도, 권력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래서 어느새 자칭 진보들의 담론에 사회적인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진지 오래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관련해서 과연 어느 자칭 진보가 정부와 여당의 편에서 기꺼이 비정규직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과 싸우려 했었는가. 지금 단지 자신이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10분의 1만이라도 나서 주었다면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기 위해 이토록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왜? 그들은 여성이 아니니까. 자신들의 정의란 오로지 전통적인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편에 서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차별금지법도 통과시키려는 것이다. 군가산점 위헌판결을 받아내던 당시와 같다.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2차가해라며 진실에 대한 어떤 의문도 가지지 못하게 틀어막고 있는 그대로 여성들에 대한 어떤 비판조차 듣지 않으려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을 앞장세우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권력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여성주의이며 여성주의야 말로 시작이며 끝인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업 가진 좋은 배우자까지 있는 여성주의자들의 권력을 위해 자칭 진보가 부역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자신도 역시 그렇게 되고 싶어서 여성들은 여성주의자를 흉내내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지금 자칭 진보들에게 여성 이외의 다른 사회적 약자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그랬다면 이미 죽은 사람을 모욕주고, 남겨진 이들마저 억압하며, 자신들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겨진 이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떠난 이의 죽음마저 조롱하고 모욕하며 철저히 짓밟는다. 최소한의 측은지심조차 없다. 인지상정조차 없다. 그런데 다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동정심이라.

 

실제 저들 자칭 진보들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주장이라는 것은 실천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언론과 논쟁을 통해 여론을 끌어가려 하기보다 정부와 여당을 꾸짖고 상처입히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다. 그래야 여성들에게 권력이 주어질 테니까. 자신들에게도 그 권력의 끝자락이 주어질 테니까. 진보의 사망이랄까? 멸망의 순간이랄까? 오래전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웃기는 꼬라지인 것이다.

경향일보의 칼럼인지 사설인지에서 이번 검언유착과 관련한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물론 경향일보야 윤석열의 똥이나 빠는 개똥신문이기는 하다. 윤석열의 똥을 얼마나 잘 빠는가로 세상을 재단하는 언론인 것이다. 당연히 윤석열의 측근인 한동훈이라면 겨드랑이도 사타구니도 열심히 잘 빨아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재용의 경우도 그렇게 수사심의위를 통해 불기소 권고가 내려진 바 있었다. 강제성도 없는 수사심의위의 권고이기에 사실상 수사기관에서 무시하고 계속 수사하고 기소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수사심의위의 권고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경향일보 기자들이 뭣 때문에 사장을 몰아냈었지? 그런데 과연 그것이 단지 사장이 기사를 가지고 거래를 하려 했기 때문이라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경향일보에서 기사쓰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양심이나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증거인 것이다. 다만 나 아닌 다른 놈이 뒷돈 챙기는 꼴이 보기 싫었고, 싫은 놈이 하는 짓이니 똑같이 하던 짓거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왕 빨아주려면 삼성 정도는 빨아야 가오가 사는 것이다.

 

첫째는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이고, 둘째는 이재용 구하기인 것이다. 단지 남들처럼 보수일변도이기만 해서는 주목받지 못할 테니 블루오션이라고 진보인 양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좋지 않은가. 다른 언론들이 보수 입장에서 정부를 깔 때 자기들은 진보 입장에서 정부를 깔 수 있다. 거기에 경향일보와 한겨레일보의 희소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윤석열의 똥을 빨고 이재용의 때를 핥는다. 그냥 버러지들이다.

 

너무 적나라한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은 아닌 척 숨기기라도 하더니 이제는 알 테면 알아라 대놓고 빨아주고 핥아주는 짓거리를 한다. 너무 속내를 드러내 버린 때문이다. 이제 뇌가 우동사리가 아니면 경향일보를 진보언론이라 여기는 사람도 거의 얼마 남지 않았다. 자기도 역시 자칭 진보가 아닌 이상은 경향일보는 그냥 국문세와 같은 수준의 언론인 것이다. 한동훈도 구하고, 이재용도 구하고, 진짜 필사적이다. 눈물까지 나려 한다. 대단하다.

원래 검찰이라는 조직 자체가 적에게도 아량을 베푸는 인정과 관용이 넘치는 조직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윤석열에게 검찰이란 자신을 따르는 특수부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었다. 오죽하면 자기가 총장이 되고 첫인사에서 형사부나 공안부 등 다른 부서의 요직까지 특수부인 자기 사람으로만 채우고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언론이 좋아하는 관례의 파괴였었다.

그래서 처음 이성윤 중앙지검장이 임명되었을 때부터, 아니 당시 추미애 장관에 의해 자기 사람을 대신해서 임명된 거의 모든 간부급 인사들에 대해 윤석열은 언론까지 동원해서 망신주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었다. 너희를 검찰로 인정하지 못하겠다. 더욱 너희들이 앉은 그 자리 역시 인정하지 못하겠다. 오죽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당신이 검사냐는 말이 그것도 윤석열 측근인 후배검사 입에서 나오고 했었겠는가. 그런데 과연 지금와서 윤석열 시키는대로 수사를 중단한다고 상황이 달라지겠는가.

지난 1월의 인사에서도 보았듯 이제 검찰인사는 검찰총장이 아닌 법무부장관의 권한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굳이 검찰총장 눈치 볼 필요 없이 법무부장관의 눈에만 들면 얼마든지 승진도 할 수 있고 요직에도 임명될 수 있다. 그래도 이성윤 지검장 쯤 되었는데 자기를 따르는 사람 하나 없을 것인가. 인사권도 없는 검찰총장과 인사권을 틀어쥔 법무부장관 사이에서 누구의 줄을 타야 하는가는 너무나 명확한 것이다. 검찰총장의 편에 서봐야 그 측근들이 당했던 것처럼 좌천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테지만, 법무부장관의 편에 서면 측근들의 승진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검찰총장의 측근을 넘어 검찰총장 자신까지 쳤을 때 차기 검찰총장은 누가 될 것인가. 중앙지검장이 아무래도 차기 1순위이지 않을까?

아무리 검찰개혁을 힘이 빠진 검찰이라 해도 그 검찰조직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잘만 하면 자기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고 자기는 검찰조직의 정점인 총장의 자리에까지 앉을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한 힘을 가진 검찰조직에서 검찰총장의 눈밖에 나서 한직을 전전하는 것과 힘이 빠진 검찰조직의 수장이 되어 아쉬우나마 권력과 지위와 명예를 누리겠는가. 그래도 검사가 되었으면 검찰총장 자리는 앉아보고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아는가. 검찰총장으로 임기를 마치고 국회의원 배지라도 달게 될 지? 윤석열을 잡으면 돌아올 보상이 그 정도 된다는 것이다. 반면 윤석열을 놓아주면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성윤 휘하의 일선 중앙지검 검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누구의 눈에 들어야 하는가. 어차피 특수부만 편애하는 윤석열 밑에서 승진에서도 밀려야 했던 형사부 검사들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을 봐줘봐야 돌아오는 것이라는 없는데 윤석열을 잡고 나면 더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과연 모든 검사들이 검찰개혁에 반대하고 있을 것인가. 어차피 그동안 검찰의 비대한 권력을 마음껏 누리던 것은 특수부의 일부 검사들이지 모든 검사들이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젊은 검사들이라면 더욱 기존의 경직된 검찰문화에 대한 불만이 있었을 수 있다. 여러 이유에서 윤석열이 뭐라 하든 일선검사들 입장에서 더이상 들을 이유가 없다.

자업자득인 것이다. 처음부터 이성윤 중앙지검장을 적대시하기보다 끌어안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그로 인해 밀려나야 했던 기존의 자기 사람들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의외로 취약하다. 윤석열과 주위의 의리란 것은. 그 결과 특수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검찰들을 적은 아니더라도 남으로 만들고 말았었다. 이제와서 검찰총장의 위세를 앞세워봐야 누가 들어주기나 하겠는가. 기본적인 예우 정도는 하겠지만 지금 권력의 추가 누구에게로 기울었는가를 모두가 알고 있다. 한동훈을 잡으면 윤석열이 나온다. 검찰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윤석열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고 있다는 자체가 그저 우습기만 한 이유인 것이다. 검찰조직 하나 모두 포용하지 못하는 그릇이란 것이다. 특수부를 제외하고 검찰 모두를 끌어안을 그릇도 못되는 인사란 것이다. 이성윤 지검장이 임명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그를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이려 했다면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언론이 사람 보는 눈이 대개 이렇다. 아니 만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심으로 그를 대권후보로 여기는 것은 몇몇 얼치기 자칭진보들 뿐일 것이고. 그런데 지금 와서도 그들을 진보라 분류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아무튼 예정된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메리트가 전혀 없다. 수사자문위원회가 뭐라 결정을 내리든 그래봐야 구성을 결정한 검찰총장 자신의 의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와서 검찰총장이 그러란다고 따라야 할 것인가. 너무 권력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동훈의 녹취록을 보면 그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자기들만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자승자박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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