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공공의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란 시험성적이 좋은 우등생이 아닌 지역의료와 공공의료에 평생을 헌신할 각오와 결심을 가진 이들이란 것이다. 아무리 머리 좋고 실력이 좋아도 지금 잠정적으로 정한 10년의 의무근무기간만 끝나면 바로 민간의료로 떠나갈 이들이라면 공공의대의 설립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공정한 선발기준은 무엇이겠는가. 그냥 다른 의대들처럼 시험으로 줄세우는 것이겠는가? 정성적으로 그 각오와 결심을 확인하는 것이겠는가. 의무근무기간은 의무근무기간이고 이후로도 계속 해당 분야에서 근무할 수 있어야 설립목적에 맞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미 수능 보고 대학 들어가서 졸업까지 마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의과전문대학원이란 것이다. 수시든 정시든 자격이 된다 여겼을 테니 대학도 입학을 허락했을 것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대학생활을 했으니 멀쩡히 기간 안에 졸업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미 있는 의전원들에서도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학생을 선발하면서 성적이며 대학생활 전반에 대해 꼼꼼히 살펴서 평가하고는 한다. 그래서 그 의전원에 지원하며 쓰였다 해서 동양대 봉사표창장 하나가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 아닌가 말이다. 대학시절 성적표가 어땠고, 재학동안 어떤 활동을 해서 어떤 성과들이 있었고, 그런 것들을 증빙할 자료가 무엇이 있는가. 공공의대는 아니라 생각하는가?

 

셋째 교장 명의로 된 상장이라 해서 교장이 직접 발급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 명의의 표창이라 해서 대통령이 직접 대상자를 선발하는 것도 아니다. 시도지사가 후보자를 선발한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을 보면서 잠시 머리를 갸웃거려야 했던 이유였다. 당연히 대학총장도 자기 명의로 나간 표창장에 대해서 일일이 다 알 수 없는 것은 추천도 선발도 발급도 단지 대학총장의 이름만 빌릴 뿐 교칙이 정한 표창시스템에 의해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와 시민단체로 구성된 추천위원회라 하니 시민단체가 다 해먹는 것 아니냐 말한다. 대한민국 엄마부대도 엄연한 시민단체인데 정의연과 엄마부대가 과연 함께 짬짬이로 학생추천을 나눠먹을 수 있을 것인가.

 

넷째 그게 문제인데, 사람들은 시민단체라면 진보시민단체만 떠올린다. 그래서 법세련이 정부와 여당의 누구를 고발하면 의도적으로 법세련이란 이름 대신 시민단체란 표현을 쓰고 하는 것이다. 자유총연맹이 진보단체인가? 자유대한호국단이 586 운동권 단체였는가? 더구나 대부분 지역기반 시민단체들은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이 지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활동하는 단체들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시민단체에서 끼리끼리 나눠서 학생을 추천해봐야 자격 안 되면 심사과정에서 다 탈락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지역의료에서 봉사해야 할 인재인데 심사에서 떨어지면 입학할 기회조차 사라지는 것인데 그 책임은 그러면 과연 누가 져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의대 정원이 고작 49명이다. 한 해 의대정원 3000명에 비하면 2%도 안되는 숫자란 것이다. 의대정원 확대와 마구 섞어서 떠들어대니 늘어난 의대정원이 모두 공공의대로 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공공의대 정원은 폐교된 서남대 의대 정원을 그대로 물려 쓰는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공공의대 설립을 목표로 서남대 의대 정원을 다른 대학에 넘기지 않고 정부에서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머지 확대된 정원은 각 대학 의대로 나뉘게 된다. 즉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정원 확대 반대는 명확히 다른 논리를 가지고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도저히 반대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정책인 것이다. 밥그릇 지키기라 해도 이미 있는 정원 가운데 서남대 의대 정원 만큼을 공공의대로 돌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의사들의 밥그릇을 크게 위협할 정도란 것인가. 더구나 어차피 자기들은 가지도 않을 지역병원과 공공의료분야에서 오래도록 종사할 인재들을 찾아서 가르치기 위한 교육기관이란 것이다. 아무리 시험 잘보고 성적 좋아도 자기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방 내려가면 선도 못 본다면서? 이해할 수 없는 벌레들이다. 사람이 아니다. 의사놈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게 더 답답한 현실이지만. 정말 의사같다.

지난 정의연 논란 당시 한겨레가 낸 기사였었다. 안성 쉼터를 구입하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의혹이 있다며 조선일보가 보도한 이래 관련한 기사들이 쏟아지던 무렵이었었다. 그러나 판매자는 스스로 원가로 따지면 판매가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팔았어야 하는 건물이었고 오히려 선의로 좋은 일 한다는 마음에 싸게 판 것이라 밝힌 바 있었다. 바로 한겨레가 그같은 판매자와의 인터뷰를 실어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다만 판매자는 그렇게 주장하지만 조선일보가 이미 의혹을 제기했으니 정의연은 해명해야 한다는 결론과 함께.

 

직접 인터뷰를 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매체의 인터뷰를 인용한 것이든 당시 이미 한겨레는 당사자의 주장을 들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판매한 당사자가 그리 주장하고 정의연 측에서도 안성 쉼터 매매에 부정 같은 건 없었다며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한겨레는 오로지 조선일보가 의혹을 제기했다는 부분만을 들어 그같은 주장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정의연측의 해명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취재를 통해 확인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조선일보의 보도에 더 무게를 두고서 그 주장들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 조선일보의 보도가 더 가치있고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지난 조국사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겨레가 뒤늦게 끼어들어서는 더 과격한 기사를 내려다가 편집국이 뒤집어진 이유도 조금이라도 빨리 조선일보를 쫓아가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었다. 조선일보가 정부를 까고 있다. 조선일보가 정부의 주요 인사를 까고 있다. 조선일보가 비판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에 뒤지지 않게 위해서라도 더 과격한 기사로 보조를 맞춰야 한다. 익성 실소유주설을 먼저 취재하고도 묻어버린 것이 한겨레 아니었던가 말이다.

 

저널리즘 토크쇼J에 기자가 나와서 기자협회의 설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이 의미없다 여기는 이유인 것이다. 지난 조국 논란, 정의연 논란, 박원순 논란을 통해서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조선일보가 쓰면 한겨레든 경향이든 자칭 진보언론들도 그대로 따라간다. 심지어 자신들이 주장하던 최저임금인상과 근로시간단축마저 조선일보가 비판하기 시작하면 자신들 역시 다른 방향에서 따라 비판해야만 한다. 박근혜 국정농단 보도 역시 조선일보가 받아주고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터뜨릴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한겨레든 경향이든 언론은 조선일보의 꼬붕이란 소리다.

 

KBS가 검찰과 경쟁하듯 유착해서 인터뷰를 왜곡하고 취재내용을 조작해서 검찰을 위한 보도를 내보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에 뒤쳐져서는 안된다. 즉 KBS와 JTBC에게도 조선일보는 따라야 할 모범인 것이다. 여론조사라고 해봐야 전체 5천만 국민 가운데 고작 1천 명 남짓한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해 통계를 내는 것이다. 전체 기자의 수가 몇 명이든 결국은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하는 것은 실제 설문에 참여한 대표들인 것이다. 기사가 말해주는데 변명이야 뭐라 하든 달라지는 건 없는 것이다. 결론은 기자란 뭐다? 조선일보 따까리다. 자칭 진보든 공중파든 상관없이. 

아마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도 나온 적 있을 것이다. 서울 사람들은 대개 자기 사는 구만 넘어가도 전국구급 핫플레이스가 아니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나처럼 멀리 나가는 자체를 귀찮아하는 사람이면 한강 건너는 그냥 다른 세계라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지방도시 사는 사람들은 자기 도시는 물론 인근 도시들에 대해서까지 훤하게 꿰고 있는 경우를 흔하게 보게 된다. 당연하다. 생활권이 그렇게 묶여 있으니까.

 

오래전 잠시 강원도에서 산 적이 있었다. 지금은 제법 그럴싸해진 것 같은데 당시만 해도 변변한 것이 없던 작은 도시라 뭐 하나 하려 하면 도시는 물론 변두리의 농가들에서조차 한 곳으로 모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극장도 그곳에 있었고, 서점이며 화방도 죄다 그곳에 있었고, 뭐라도 먹으려면 거기는 나가야 식당들이 보였다. 반면 서울의 경우는 그냥 동단위 안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해결할 수 있다. 책 한 권 사려 지방도시 살며 이동한 시간이 대략 1시간, 서울에서는 걸어서 대략 10분에서 15분. 이해가 되는가?

 

심지어 지역에 따라서는 영화 한 편 보려면 이웃 도시까지 원정을 가야 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래서 이웃 도시까지 훤하게 꿰고 있는 것이다. 생활권이 서울처럼 동단위 구단위가 아니라 시단위를 넘어 광역단위가 되는 것이다. 간단한 상식이다. 피자 한 판 먹으려 해도 한참을 나가야 하는 지방도시와 그냥 문열고 나가면 바로 아무 피자집이나 보이는 서울 가운데 과연 어디서 살고 싶은가. 당장 바로 인접한 안양이나 의왕만 하더라도 뭐 좀 하려 하면 이동거리가 장난이 아닌 경우가 많다. 고용지원센터 가려면 거의 버스로만 40분이라 그래서 지금 실업급여 신청도 미루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머리 상처 꿰매겠다고 바로 그 앞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으니.

 

인프라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 몫 하는 것이 그런 지방으로 내려가기 싫은 의사들인 것이고. 오죽하면 공무원이며 공기업 직원들마저 지방으로 이전하면 지방에서 살기 싫다고 아예 그만두거나 가족은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가서 기러기생활을 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서울공화국에서 서울 이외의 지역이 놓인 현실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차라리 서울에서 덜 받고 일하지 지방에서는 일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니면 잠깐 바짝 지방에서 돈 더 받고 일한 뒤 돈 모아서 서울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이들도 생겨나고는 한다. 그런데 고작 돈 얼마 더 준다고 의사들이 지방으로 내려갈 것인가.

 

그야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들인 것이다. 아니 그보다 당장 수가 올려주면 지방 내려갈 것이라는 의사들 자신들조차 그런다고 지방으로 내려갈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란 것이다. 그렇다 보니 몇 배의 연봉을 준다고 해도 오겠다는 의사가 없어서 지방의 공공의료기관은 더욱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보건복지부의 문건에서도 의대정원만 늘려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돈으로 유인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나는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고, 하나는 지방에서 계속 있을 것 같은 사람을 골라서 의사를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대해 반발하는 것이 의사들의 입장인 것이고.

 

당장 아무 의사나 붙잡고 물어보라. 월급 30% 더 줄테니 지방에서 일하겠는가. 서울과 인접한 수도권이 아닌 강원도나 경상도 전라도 저쪽 끝에서 한 번 일 해 보겠는가. 수가를 얼마나 올려달라고. 지방에서 의사 구하려면 연봉을 두 배도 거절한다 하는데 의료수가 두 배 이상 올리면 건강보험료는? 그래서 지방 병원들만 수가 올려주면 서울 병원이나 서울서 일하는 의사들은 반발이 없을 것인가.

 

내가 멀리 나가는 것을 귀찮아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원래 서울 살았는데 그냥 걸어서 10분만 나가도 어지간한 것은 다 있던 환경에서 경기도로 이사오니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경기도인데도 그렇다. 그러다 오래전 강원도서 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응답하라1994에서 인근 도시들에 대해서까지 줄줄 꿰고 있던 지방 유학생들의 모습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서울공화국이로구나. 고용지원센터 가는 게 그래서 죽도록 싫다. 현실이란 것이다.

원래 약자들이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다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란 것이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약자이기에 더 엄격하게 대가를 요구하고, 그마저도 잠시만 마음을 놓으면 대가만 빼앗아가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겪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회적 약자들은 과도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불공정한 거래에 익숙하다.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한 가지를 얻으려 해도 내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한다. 바로 노동자들이 파업을 파며 자신의 직업과 신분까지 걸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노동자가 파업을 하다가 정부가 보낸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나가던 것이 불과 한 세기 전의 일이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거우 한 세대나 지났는가 싶다. 아니 김대중 정부에서도 심지어 임산부들마저 파업을 진압하는 경찰에 의해 개처럼 얻어맞고 끌려나가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던 용산의 철거민들이 몇 명이나 목숨을 잃어야 했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시위에 나섰던 백남기 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식을 잃고 후송되었다가 끝내 세상을 떠난 바 있었다. 굳이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김대중 정부 이래 아예 돈줄을 말려 노조를 죽이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지금 진료거부중인 의사들이 비웃던 인력확충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간호사들의 투쟁이 결국 막대한 손해배상소송으로 인해 당사자들을 경제적으로 파탄낸 바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노동자들을 파업이라는 극한의 투쟁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말로 해서는 들어주지 않는다. 얌전히 하라는대로 시키는대로 다 지켜가며 요구했다가는 아예 듣는 척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심지어 목숨까지 내걸고 파업이라는 극한의 선택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업에 나섰다가 전경과 구사대에 처참하게 두들겨맞은 다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 아니다. 괜히 파업에 참여했다가 법을 어겼다고 전과자가 되어 재취업도 안되는 경우를 아주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손해배상소송으로 일가친척의 재산까지 모두 날리고, 그래서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누군가는 홧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싸워야 한다. 아니면 지금의 부당한 현실을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할 테니까. 그런 노동자들이 만일 자신의 직급과 월급과 심지어 직업마저 내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는가. 차라리 더이상 내가 이 일을 하지 않겠다. 물론 그런다고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질 만한 직업은 의사와 검사 정도일 것이다. 너 아니어도 사람은 많다. 의사도 많을 텐데?

 

아무튼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의사고시를 거부하겠다. 정부가 지금의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하려 한다면 자신들은 의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겠다. 즉 의사라고 하는 자신이 의대에 입학한 의미 자체를 건 투쟁의 방법인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너무 부당하고 결국 국가와 국민에 피해가 돌아갈 것이기에 의사라고 하는 자신의 미래까지 걸고 투쟁에 나서겠다. 그런데 의사고시를 미뤄달란다. 구제할 방법을 마련해 달란다. 그러니까 이번 의사고시만 거부할 뿐 의사라는 미래까지 포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의사는 될 것이다. 단 이번 시험만 거부하는 것 뿐이다.

 

정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현장으로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 전임의들을 고발하고 불이익을 주겠다 하니까 그것도 하지 말란다. 그게 준법투쟁이다. 역대 다른 노조위원장들도 파업이 끝나고 검경이 체포에 나서면 도망치고 숨어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예 파업중단의 조건으로 관련자의 처벌면제를 요구하는 경우도 상당했었다. 그러나 대부분 노조원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파업에 불법적인 요소가 있으면 누군가는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누가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것인가도 사전에 미리 정하고는 한다. 만일 그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물론 그 과정에서 법정에서 처벌이 정당한가를 다투는 과정이 있기는 하다. 중요한 것은 법을 어기고 투쟁하는 만큼 법을 어긴 데 따른 책임은 당연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을 어기고 정부를 거스르면서 그러나 그에 대한 책임만은 면제해달라.

 

즉 지금 의사들은 법을 어기고 정부의 정책에 맞서 환자를 인질로 삼는 극한의 선택을 하면서도 그에 대한 어떤 각오도 다짐도 없이 어느것도 걸지 않은 상태란 것이다. 의사고시도 포기 못한다. 처벌이나 징계 등 불이익도 받지 않겠다. 그러나 환자에 대한 진료도 거부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마음대로 하겠다. 왜? 그래도 되니까. 그래도 되는 존재니까. 기자들이 의사들이 이런 방식에 대해 우호적으로 기사를 쏟아내는 이유일 것이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의사들이 하는 짓과 기자들이 하는 짓이 너무 닮았다. 공부 열심히 잘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남들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만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째서 한겨레와 경향은 부르주아 여성들의 여성주의에는 그토록 집착하면서 진짜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 노동자들의 문제에는 냉정하기만 한 것인가.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가운데 대졸자가 몇 명인 것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

 

국민들도 아는 것이다. 심지어 의사들의 파업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질극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최소한 자기 의사면허라도 내걸던가. 의사로서 자신의 미래라도 걸어 보던가. 당당히 징계든 처벌이든 받겠다고 나서는 모습이라도 보이던가. 그러면 의사로서 자신을 내건 것이라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진료거부로 위태로워진 환자들의 생명과 안전만을 이유로 내세운다.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환자가, 나아가 국민이 더 위험해질 것이다. 이런 걸 뭐라 이해해야 할까?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켜봐 온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처절하게 사용자와 정부와 맞서 싸워 왔는지 그 역사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그 파업을 위해 무엇을 걸었고 어디까지 희생해야 했는지 그래서 상당히 알고 있는 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파업이라? 투쟁이라? 그깟 가운 하나 밟는게 그리 대단하게 떠들어야 하는 일이던가. 너무 귀하신 몸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기자같은 것이기도 하다. 언론같고 교회같다. 의사란 것들이.

 

의사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 의사들 자신이 보이는 모습이 그리 한심하다는 것이다. 당당하지도 못하고 단호하지도 못하고 처절하지도 간절하지도 못하다. 어린애 칭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과자 사달라고 땅바닥을 뒹굴며 떼쓰는 꼬라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정도로도 그리 비장해질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영혼까지 찌들어 있다는 것인가. 벌레는 답이 없다. 이런 놈들이 이 사회 엘리트라 불리는 놈들이다. 유은혜부터 때려잡아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한심한 꼬라지들이다.

중국문화권에서 과거가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서 천 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충분한 학식을 갖춘 이들만이 바르게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상을 잘 두었다는 이유로 권력을 독점하던 귀족들이 아닌, 당연히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 백성들도 아닌 충분한 학식과 교양을 쌓은 자신들 선비들만이 제대로 나라를 바르게 책임지고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되었던가.

 

물론 유교가 추구한 것은 보편의 가치와 규범이었을 것이다. 유교가 추구한 대동사회란 왕이든 관리든 선비든 일개 무지렁이 백성들이든 각자 자신의 역할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바에 최선을 다하며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회였을 것이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렇게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를 충실히 다한다면 반드시 사회는 좋아질 것이다. 그런 유교의 가르침을 실제 행동에 옮긴 이들이 바로 우리가 아는 역사상 뛰어난 군주들과 대신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몸에 익힌 선비들인데 정치를 제대로 못할 리 있겠는가.

 

그러나 아다시피 사대부란 대부분 지주들이었다. 처음에는 지주가 아니었어도 결국 관직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장원을 소유한 대지주가 되어 있었다. 신분적으로도 관직에 나가 권력을 쥔 이상 일반 백성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경우는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노비를 소유해야 하는 노비주의 입장이었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아무리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 선비라고 맹자가 떠들어봐야 선비들 역시 대부분 그냥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장 내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싶은 것이 사람의 당연한 욕심인 것이다. 땅이 있으면 넓히고 싶고, 노비가 있으면 늘리고 싶고, 신분이 있으면 강화하고 싶다. 그리고 실제 그럴 수 있는 힘이 자신들 손에 쥐어진다.

 

세상의 범죄 가운데 가장 악랄하고 지독한 것이 직접 법을 만들어 강제하는 것이다. 법을 자신들이 정할 수 있으니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철저히 이익에 충실하게 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 강제한다. 그 결과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중국문화권의 전근대의 역사인 것이다. 중국문화권만이 아니다. 영국에서도 무역과 관련한 대부분 법률은 실제 무역에 종사하는 대자본가들의 영향력 아래 제정되고 있었다. 왕과 국회는 단지 국부를 늘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그들이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돕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었다. 귀족이 귀족을 위한 법을 만들고, 군인이 군인을 위한 제도를 만들고, 상인이 상인을 위한 정책들을 세운다. 얼핏 합리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군인들에 의해 세워진 고려의 무신정권은 그러나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정권을 지키기 위해 그 군사력을 아껴두고만 있었다.

 

민주주의와 문민통제는 그래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영국에서 시작된 초기의 민주주의는 문민통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었다. 투표권도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주어졌으며, 따라서 의원의 선출부터 입법과 정책수립까지 모든 것이 그들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란 나라는 그들 소수의 특권층만이 사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소수가 모든 특권을 독점하는 사이 오히려 영국사회는 더욱 피폐해져갔고 수많은 사회문제까지 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영국이라는 나라를 위한 더 나은 최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상관없는 필부필부의 의견이 정치에 책임과 함께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많은 대수롭지 않은 다수의 참여와 그에 근거한 책임정치만이 사회를 보다 낫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의사는 오진을 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람을 죽여도, 환자를 상대로 강간을 저질러도 잠시 면허가 취소되기는 해도 일정 시간만 지나면 다시 발급받을 수 있다.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한 의대생들에 대해 교수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니 잘 대해주라 말한 것을 떠올려 보라. 그냥 자기들끼리 동의하고 합의하면 그것으로 그들의 기득권은 언제나 유지된다.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검찰이 무고한 이를 죄인으로 몰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했어도 검찰이란 조직의 이익에만 충실하면 불이익을 보는 일따위 거의 없다 보면 된다. 검사 그만두고 나가도 변호사로 개업해서 전관예우까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그래서 판사와 검사는 한 몸이란 것이다. 그에 비하면 대통령은 어떤가.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이야 반발하든 어쩌든 아랑곳않고 진료거부를 계속할 수 있는 의사들에 비해 국민의 생명이 우선이라 정부는 계속해서 양보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판단과 결정의 권한을 주는 것이 옳을 것인가.

 

국민은 의사를 심판할 수 없다. 검사나 판사 역시 심판할 수 없다. 국민이 오로지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정부와 국회 뿐이다. 그런데 그 정부와 국회가 법이란 수단을 통해 의사와 검사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 비전문적인 집단이라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어도 최종적으로 그 책임 역시 정부와 국회가 질 것이며 그에 대한 판단은 결과를 보고 국민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문민통제다. 그렇다고 과연 정부와 국회가 이들 전문가집단들에 비해 비전문적인 아마추어들이기만 한가. 의료정책에 가장 전문가는 누구일까? 사법정책에 있어 가장 전문가는 누구일까? 검경수사권과 관련해서 가장 전문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집단은 또 어디의 누구일까?

 

그런데 그게 싫은 것이다. 말은 교묘히 꼬고 있지만 결국은 정부 위에 있는 국민을 비롯한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엘리트다. 나는 그만한 자격이 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런 현실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과연 정부의 압력을 제거하면 의사들이 오로지 국민만을 위한 공익적 판단을 내리려 할 것인가. 확실히 의협이든 언론이든 보수정당이든 앞으로 최소 10년은 정권교체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보수야당 출신 도지사와 광역시장이 있는 경북과 대구에서 시민단체가 추천해서 선발한다면 현정부와 가까운 이들이겠는가. 아니면 오히려 현정부에 적대적인 이들이겠는가. 부산시장은 국민의 힘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가져갈 것이 뻔하니 그쪽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어째서 현정부와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제도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래야 정부에 인격을 부여하고 개별화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 정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국민이란 사실을 철저히 배제한다.

 

지금 정부가 뭣같이 정치를 하면 바로 다른 정치세력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의회에서도 다수당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정부의 정책으로 인한 결과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에 대해 심판받고 정권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정부의 정책과 환자따위 아랑곳않으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반복하는 의사 가운데 누구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현대민주주의는 전문가가 아닌 철저히 시민에 의해 모든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그리고 심판까지 하는 문민통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게 만들기 위해서? 한 마디로 자기들이 전문가니까 자기들 떠드는대로 정부가 따르게 하기 위해서란 뜻이다. 서민이란 기생충이 저리 미쳐 날뛰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소 않던 권력비판의 사명감에 도취되어 한겨레와 경향을 비롯한 언론들이 지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한 바 있다. 왜 내 말을 안 듣는가. 내가 옳고 내가 바른데.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그것이 시민과 국민을 위한 정치인가. 넘어가는 놈들이 너무 많다는 게 안타깝다. 한심하다.

기호란 드러난 기표와 숨은 기의를 모두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항상 솔직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필요하다면 아무렇지 않게 자신마저 속이며 그대로 믿어 버리곤 한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말의 이면에 숨은 본심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공공의대 설립을 이유로 파업에 나선 의사들의 본심은 무엇인가?

 

하긴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의사들 사이에서 떠돈다는 '국평오'란 한 마디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 평균 수능 5등급. 자기들은 1등급. 여기서도 아마 어느 의사놈이 수능이라고는 본 적도 없는 내 점수를 멋대로 추측해서 리플을 달았을 것이다. 사실 흥미로운 부분이기는 하다. 대부분의 경우 시위든 파업이든 하려면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우군을 만들려 비굴할 정도로 낮은 자세로 설득에 나서고는 한다. 어떻게든 상대의 언어로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해시키고 납득시키고 동의를 끌어내려 노력도 하고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다르다. 고압적으로 내가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네가 멍청하고 네가 못나고 네가 열등한 때문이다. 왜? 자기들은 수능 1등급이니까.

 

공공의대가 설립되면 어째서 전체 의료의 질이 낮아지는가? 입결이라 하지? 그러니까 3천 명 뽑을 때는 3천 등까지만 의사가 될 수 있었는데 3400명 뽑으면 무려 3400등까지도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등급으로 치면 한 등급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런 놈들과 내가 경쟁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개원의들은 조용한데 전공의며 의대생들, 그리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교수들만 난리인 것이다. 그래도 최고의 엘리트로서 한 등급 차이 나는 놈들과 같이 의사질은 못하겠다. 하긴 그래서 의사들이 간호사며 심지어 환자까지 대놓고 무시하고 하는 것일 게다. 좋은 의사도 분명 많지만 사람 가리는 놈들도 분명 상당하다.

 

문제는 그런 잘난 놈들이니 자기들 무시하고 무언가를 진행하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자기들 말을 듣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자체가 무척이나 싫은 것이다. 의료정책을 그럼 보건복지부가 주관하지 의사들이 주관하나? 정부부처인 보건복지부가 대통령 명령에 따르지 의사들 명령을 따라야 하나? 자기들 말을 들으라. 자기들 하자는 대로 따르라. 그러니까 정부가 아무리 양보하고 국회가 나서서 타협을 시도해도 완전한 항복선언을 받기 전까지 자기들은 절때 어떤 협상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항복문서를 내놓지 않으니 정부도 국회도 믿지 못하겠다며 원점에서 재검토까지 선언했음에도 진료거부를 계속하겠다 하는 것이 아닌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지 의무가 아니다. 의사면허 역시 자신들의 소유이지 국가의 관리대상이 아니다. 자기들 일은 자기가 정한다. 환자도 정부도 오로지 자신들 요구하는대로만 따라야 한다. 요즘 의대 가는 놈들 대부분이 있는 집 자식이라며? 의사 그만둬도 먹고 살 길 만만하니 의사고시도 거부하고 하는 것 아니던가. 그리 잘난 놈들이 공부까지 잘해서 남들 부러워하는 의사까지 되었으니 오죽할까?

 

의사놈들과 이번 일 가지고 논쟁하면서 갈수록 드는 생각이다. 이 새끼들은 지금 나를 설득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굴복시키고 그 위에 군림하고 싶은 것이다. 일반 국민 뿐만 아니라 정부와 국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를 부추기는 게 바로 의대 교수들, 무엇보다 언론과 정치인들이다. 특히 기자새끼들. 생각하는게 완전 똑 닮았다. 한국 교육정책을 근본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 하는 이유다. 공부 잘한다는 새끼들이 왜 지랄들인 것인지.

 

그냥 자기들 잘났다는 것이다. 자기들 잘났으니 못난 국민들 찌그레기들은 자기들 하잔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하면 국민, 아니면 비국민. 아파서 뒈져도 자기 책임. 전공의들 진료거부로 머리깨져서 피 철철 흘리면서도 봉합조차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래도 네가 못난 탓이다. 인국공 논란이 떠오르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빌어먹을 것들이다.

나는 원래 조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보다는 관심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전에도 썼지만 난 똑똑하고 말 잘하는 놈들을 아주 싫어한다. 그것도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주장 뿐이라면 혐오에 경멸을 더한다. 그런 놈들이 예전에도 많았었다. 그래도 자기가 꽤 잘난 줄 알기에 잘난만큼 남들에게 주목받을만한 말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믿는 놈들이었다. 특히 데모하던 주위에 적지 않았는데, 평소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온갖 이론을 섭렵해가며 입바른 소리를 떠들다가 정작 모두가 최루탄에 눈물콧물 짜면서 머리 깨지고 있을 때는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나마 술이라도 자기 돈으로 사면 자본주의의 은혜로 고맙기라도 하지 이건 그야말로 얄미움 그 자체다.

 

조국 전장관이 대학을 다니던 것이 마침 그런 시절이기도 해서 섣불리 그리 판단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SNS 등을 통해 입으로만 열심히 떠들었지 실제 위험을 무릅써가며 행동에 나섰던 적이 과연 있기는 했던가. 그래서 조국사태 초기에도 그럴 줄 알았다며 정치인은 한 번 검증의 무대에 올라가 봐야 한다 말한 적도 있었다. 주위에서 조국 전장관을 차기 대선후보로 말할 때도 일단 선출직은 한 번 해 보고 이야기하자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이기도 했었다. 차라리 요즘의 조국 전장관이 그래서 나로서는 더 마음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입바른 소리나 할 줄 아는 썩은 선비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만하면 오히려 전보다 더 정치인으로서 자격이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삼국지에서 관우가 그리 선비를 싫어했다고 한다. 정확히 이름만 앞세우는 썩은 선비들이다. 당시에 선비라 불릴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재산도 있고 주위에 인맥도 상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아무것도 없이 스승과 비싼 책까지 구해서 마음놓고 공부만 한다는 것은 당시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었다. 지역의 유지들 사이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남다른 학식과 교양을 쌓기는 했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태어나면서부터 특권을 누려 온 기득권집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자부심도 강하고 고집도 셌으며 자신의 권리에 매우 민감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이 애써 닦은 학식이란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기득권을 장식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그런 인물들이 적지 않다. 선비로서 명성은 높은데 정작 하는 일은 없다. 선비로서의 학식이란 단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시단에 지나지 않는다. 서민이며 진중권, 권경애 등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대학도 나왔고, 유학에, 박사학위에, 사법고시까지 남다른 자격까지 갖추었다. 대중적으로 인지도도 높아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까지 발휘할 수 있다. 그러면 그에 어울리는 대접을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남들 좋아할 만한 소리들을 떠들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자기들만한 인물들이 박근혜따위를 추종할 수 없으니 그에 비판적인 여론에 편승해서 그를 공격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명성을 쌓았다. 참고로 진중권은 한때 안티조선운동의 첨병으로 조선일보 독자게시판에서 난전을 치르며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진중권이 이제는 조선일보를 금과옥조처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며 그를 따라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왜이겠는가? 당시는 안티조선이 대세였고, 지금은 반문재인이 자신을 알리는데 도움이 된다.

 

지난 정부에서 불의한 권력과 맞서 싸우면서 나름대로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자신들에게도 뭐라도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까. 문제는 진중권이나 서민이나 권경애나 정작 그 활동에 알맹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촛불집회는 그들과 상관없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시작되었고, 그들이 무어라 떠들든 상관없이 시민의 힘에 의해 정권교체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불의한 권력이 탄핵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와중에 그들은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새로운 정부에서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심지어 지난 정부에서와 다르게 자신들이 무어라 입바른 소리를 더들든 이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이니 귀기울이는 사람마저 하나 없었다. 어째야겠는가. 정부와 시민들이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려면 그에 맞는 다른 주장들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유시민 이사장도 언론에 대해 그리 말한 바 있었다. 기자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논쟁하기보다 정부를 향해서 그저 가르치려고만 든다. 경향일보 기자놈이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해 평가할 때도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행보를 걸었던 것을 가장 큰 잘못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자다. 그래도 언론이다. 대한민국의 여론이 바로 자신들에 의해 좌우되는데 어째서 정부와 여당이 자신들이 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 여당 국회의원들도 자기들이 뭐라 하면 바로 눈치보며 따라오려 시늉이라도 하는데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감히 자신들과 정면으로 맞서싸우려 들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대통령 세상을 떠나고 한겨레 편집국에서 환호성이 들렸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란 것이다. 언론이 특히 당시 친노, 지금은 친문그룹을 그토록 혐오하며 적대하는 이유인 것이다. 언론을 개좆밥으로 여긴다. 그래서 정권 바뀌자마자 한겨레 기자놈은 문빠들아 덤벼라를 외치고, 미디어오늘 기자놈까지 호응했던 것 아니던가. 서민도 그런 와중에 정부를 공격하는 위치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뭐나면 자신들은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마땅히 이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말 한 마디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단한 권력이라도 자신들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따르려 노력하는 것이 옳다. 어찌되었거나 자신들이 주장한다면 그만큼 옳고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기꺼이 따르려 노력해야만 한다. 아니면 배신이다. 아니면 모욕이고 능욕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정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야 한다. 그런데 닮지 않았는가? 서민이 의사들의 진료거부를 지지하며 나선 이유인 것이다. 의사들만이 아니다. 임대인들과 갭투자자들과 검찰과 보수정치인들이 모두 포함된다. 자신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이들이므로 자신들이 주장한 바는 모두 이루어져야 하고, 모든 것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아니면 정권이라도 당연히 무너뜨릴 뿐이다.

 

그런 의사들의 속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국평오라는 한 마디일 것이다. 국민 평균 오등급. 아마 여기도 수능점수 어쩌고 잘난 소리 지껄인 인간이 하나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보다 공부를 잘했다. 내가 너희보다 잘났고 많이 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내가 옳고 너희들은 틀렸다. 틀린 소리를 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너희들을 내가 가르치려 한다. 그리고 그런 의사들의 속내는 바로 서민과 진중권등과도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사명감이기도 하다. 지주의 착취가 너무 심해서 못살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소작농들의 무도함을 애써 꾸짖고 깨우치려 하던 당대 선비들의 노력처럼.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면 소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차라리 위진시대 이래 중국을 지배하던 귀족들과 닮아있기도 할 것이다. 그들 역시 지식인이었다. 당연히 그 시대에는 어느 정도 살아야 지식인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서로가 명사로 추켜주며 서로의 논리를 정당화하며 그렇게 그들은 거대한 카르텔로 황제마저 무시하며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누가 황제가 되든 자신들의 기득권은 영원할 것이며 도전하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내쫓고 바꾸면 되는 것이다. 평소 파벌을 이루어 서로 다투다가도 공동의 이익을 지키는데는 항상 함께 한다. 무지렁이 백성들이야 자신들이 정하는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대중의 사고와 판단까지 오로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란 오만이 자신들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에 대한 멸시와 혐오로 나타난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대중을 이끌 수도 있다. 그래야 하는 것이 곧 정의다. 심지어 동의와 지지를 구해야 할 국민을 대상으로도 그들은 그래서 간단히 윽박지를 수 있다. 어리석은 국민들따위. 본질은 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사실 서민이란 인간이 어디서 뭐 하는 인간인지 그다지 관심도 없기에 뭔 소리를 떠들었는가도 얼마전에야 겨우 듣고 알았었다. 아마 머리가 깨지는 사고가 없었다면 벌써 그저께 이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서민과 의사들이 닮았다. 진중권과 미래통합당 국회의원들이 닮아 있다. 권경애와 김경율은 어째서 저토록 검찰과 유착하여 태연히 거짓까지 일삼는 것인가. 그동안 노무현 정부 이래 기득권과 싸워 온 과정들이기도 한 것이다. 늘 그랬었다. 자기들이 주장한 대로 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 망한다. 아, 기재부도 있었지. 자기들 하던 대로 안하면 나라 경제 망한다. 그러니 재난지원금도 주지 말자. 너무 잘나서. 너무 똑똑해서. 그런 자신들을 너무 잘 알기에. 그동안 그렇게 해 왔었기에. 그런데 더이상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으니 더 강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다. 솔직한 속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기득권의 총궐기라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광화문에서 일어났고, 의사들은 병원을 떠났다. 조선일보를 비판하며 진보를 자처하던 이들이 어느새 조선일보가 하나가 되어 그 소리를 하나하나 받아 대신해서 떠든다.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그보다는 진보라는 장식에 가려져 있던 본색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중권이든 서민이든, 권경애든 김경율이든, 정의당이든 한겨레든 경향일보든, 홍세화든 뭐든 결국 그 본질은 기득권이고 단지 그 기득권에게 주어진 한 역할로서 진보라는 타이틀이 붙었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가면을 벗어던진 그 본모습은 단지 기득권이며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너무 뻔해서 크게 의미도 없다. 

그래도 버스타고 나가면 진료거부에 참여하지 않은 병원이 있어서 CT 찍고 스태플러로 고정하고 왔다. 뭔 일이 있었는가는 어제글 참고. 다행히 뇌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더라. 당연하다. 그동안 운동으로 단련한 승모근이 있고 무엇보다 재빠르게 먼저 부딪히며 아직도 아픈 오른쪽 팔꿈치가 있다. 단지 하필 부딪힌 부위가 재수없게 날카로워서 보기에 심하게 찢긴 상처가 났던 것 뿐이다. 의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아마 여기서도 썼는가 모르겠는데 나 역시 몇 년 전부터 의료수가 현실화를 주장해 온 사람 가운데 하나였었다. 노력한 만큼 돈을 번다. 실력 만큼 대가를 받는다. 공공을 위해 기여한 만큼 대우를 누린다.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만큼 의사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고, 또한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의사를 길러내기 위해 들어가는 돈과 시간과 노력들을 생각해 보라.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첫관문인 공항의 보안검색부터 뚫리면 어쩌려고?

 

아무튼 그래서 의사들이 실수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의료수가를 올려달라 주장했다면 당장 나부터 차라리 건강보험료를 올리더라도 그리해야 한다 동의해 주었을 것이다. 힘들고 어렵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기피하는 과목일수록 더 높은 수가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면 역시 그러는 것이 옳다며 적극 지지해 주었을 것이다. 지방으로 가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으니 그만큼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주장했다면 역시 타당하다 지지했을 것이다. 더불어 한의학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기에 그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면 역시 동조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환자를 볼모로 진료거부까지 하는 것은 바로 지금처럼 언제고 환자가 될 수 있는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차라리 의사를 위해서 내가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더라도 의사가 환자를 버리고 진료거부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문제는 얼마든지 명분을 가지고 대중의 지지까지 등에 업어가며 정부와 싸울 수 있었음에도 정작 전혀 엉뚱한 사안을 앞세워 심지어 환자를 볼모로 잡는 행동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러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대중이 아닌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고 있다. 어떻게 이해해 주어야 하는가. 그래서 멍청하다는 것이다. 저것들이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머리좋고 공부도 잘한다는 인간들이 맞기는 한가 싶을 정도다. 물론 이해한다. 정부가 바로 받을 수 있는 사안으로 진료거부의 명분을 삼으려 했다면 벌써 정부가 양보하여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을 것이다. 정부를 공산주의라며 공격하는 이미지를 본 적이 있는가? 바로 의사란 것들이 많들어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처음 양보의사를 밝혔을 때 의협의 발언을 기억한다. 정부를 믿을 수 없으니 정부의 유보안도 받을 수 없다.

 

처음부터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사실 의대정원 증원이나 공공의대 설립 자체는 정작 저들에게 그렇게 크게 절박한 이슈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실제 지금 파업을 지지하는 의사나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난 정부에서 공공의대의 설립과 의대정원의 증원을 주장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면서까지 그렇게 절박하게 반대하며 정부와 싸우려 하고 있는가. 그게 목적이다. 정부와 싸우는 것. 정부를 꺾는 것. 그래서 의사란 것들 입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독재니 전체주의니 하는 정치적 수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끝까지 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양보해서는 안되며, 설사 정부가 양보해도 자신들은 끝까지 버티며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유보도 아니고 협의도 아니고 무조건 철회다. 그러면 그동안 협의해 온 다른 주체들은? 의사만 국민인가?

 

그래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지지를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이야 MBC 정도를 빼고 주류언론은 모두가 정부의 반대편에 서 있다.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만들어서라도 공격하고 거꾸러뜨리려는 놈들이 바로 언론이란 것들이다. 그런 언론을 등에 업고, 정부와 여당에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는 야당의 지원을 받고, 무엇보다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40% 남짓한 국민들이 그들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려 한다. 처음부터 계산된 행동인 것이다. 이렇게 의사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절반이 힘을 모으면 정부를 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진료거부를 결정했고, 진료거부를 행동으로 옮길만한 명분을 찾았다. 아니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의료의 질도 떨어지고 의료비용도 늘어날 거라는데 그러면 의대정원 줄이면 의료의 질도 높아지고 비용도 줄어든다는 것인가.

 

그러니까 결국 가짜뉴스까지 퍼뜨려가며 정부를 의도적으로 흠집내려 발악하고 있는 것일 게다. 과연 의사것들이 정부를 공격하며 퍼뜨리는 내용 가운데 사실인 것이 몇이나 되던가. 하다하다 조국 전장관이며 그 딸에 대한 가짜뉴스까지 퍼뜨리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이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전쟁이고 그 첨병에 의사들이 있는 것이다. 어제 피투성이가 되어 찾아간 병원 응급실에서 봉합할 수 있는 의사가 없어 곤란하다는 말에 지금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의사들이 정당하면 굳이 의사가 직접 나설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결국에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손잡은 집단들을 보라. 그런데도 저들의 정치적 행위를 용납해야 하는 것일까?

 

언론도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 민주노총이며 철도노조가 파업했을 당시 언론은 무엇이라 떠들었던가. 정치적 파업은 안된다 단언하지 않았던가. 이런게 바로 정치적인 진료거부인 것이다. 하긴 그런 언론들부터가 하나같이 정치적인 것들이니. 한국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안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의사들이 어째서 저리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이번 진료거부에 동참하고 있다. 바로 현정부에서, 아니 다음정부에서까지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 자체인 것이다.

 

오늘 나를 치료해 준 의사는 정말 고맙다. 항상 의사들에게는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간호사들에게도 그래서 혹시라도 결례를 범하지 않는가 말이며 행동을 조심하는 편이다. 그러고보면 이것도 문제다. 환자를 의사 혼자 치료하는가. 코로나19 방역에 가장 많이 가장 열심히 기여한 이들 가운데는 간호사도 적지 않다. 머릿가죽을 스태플러로 찍은 채로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한 마디 해 본다. 좋은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 상식이고 정의다.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자 어느 지식인이 그에 대해 반발한 바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얼마나 많고 다양한데 어째서 기독교라는 한 가지 가르침만을 강요하려 하는가. 그 말을 들은 로마의 관리는 그러나 이 한 마디 말로 가볍게 그 반발을 잠재웠었다. 이미 우리는 단 하나의 진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허튼 소리 따위 다 쓸데없을 뿐이다.

 

대충 아주 오래전 읽은 내용을 떠오르는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대략 이 비슷한 대화였을 것이다. 진리의 다양성을 강조하던 로마의 전통적 지식인이 기독교라는 하나의 진리를 따르기 시작한 새로운 로마의 관리에게 무시당하며 비웃음을 사던 장면이다. 당시 로마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했었다.

 

로마가 지배하던 지중해세계는 다양하고 복잡하기만 했다. 정복지를 늘려갈 때마다 로마에 새로운 신전 또한 늘어나고 있었고, 거기에 스스로 신이라 칭하던 로마황제까지 더하면 뭐 하나 통일되는 것 없이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황제가 스스로 즉위하며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까지 황제였던 것 같은데 저녁이 되니 어느새 암살당했다며 새로운 얼굴이 황제랍시고 로마 시민들 앞에 나서고 있었다. 그나마 로마 시민들은 황제의 즉위를 실시간으로 듣기라도 하지 거리가 좀 떨어진 속주의 시민들은 새로운 황제의 이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황제의 이름을 전해들어야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정치적으로 황제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니 사상적으로도 구심점 없이 로마사회 전체가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런 모두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진리란 당시 로마의 시민들에게 숙원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무엇으로 그 답을 삼을 것인가.

 

원래 최초로 하나의 신만을 섬기려 했던 시도는 바로 이집트에서 파라오 아크나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다. 바로 각각의 신을 섬기는 성직자와 그들과 결탁한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라오가 성속의 권력 모두를 아우르고자 하는 목적에서였었다. 하나의 신을 섬긴다면 그 신을 대리하는 파라오야 말로 모든 사제와 귀족의 위에 서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황제를 하늘의 아들인 천자라 일컬었던 것 아니던가. 하늘 자체를 신으로 섬기던 중국에서 하늘의 아들이란 곧 신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일본의 텐노도 현인신의 지위에 있었다. 단 하나의 신성인 유일신과 그를 대신하는 절대권력의 존재란 권력자에게 있어 얼마나 유혹적인 선택일 것인가.

 

그래서 기독교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 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는 로마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체계로써 정립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로마의 황제는 곧 교회의 보호자이자 신의 대리인 그 자체였었다. 로마 황제가 보는 앞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그래서 대부분 교리들도 정리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토론은 성직자들이 하되 결론은 로마 황제가 내린다. 그 로마 황제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바로 교황이며 교황이 지배하던 가톨릭의 조직이란 로마의 행정조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이야 말로 로마제국의 진정한 후신일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이 곧 로마다. 단 하나의 신과 단 하나의 교리와 그 절대의 권위를 대신하는 단 한 사람의 황제, 그리고 그 황제마저 사라진 뒤에도 로마는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여 천 년 넘는 세월을 이어진다.

 

어째서 기독교는 그토록 맹목적인가. 오로지 기독교에 대한 믿음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인가. 원래 출발부터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로마에 의해 포섭되어 국교가 되는 순간 그리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다. 황제에게 충성하든 신에게 복종해야 하며, 황제에게 복종하든 신의 가르침을 철저히 믿고 따라야만 한다. 아니면 배신이다. 아니면 이단이다. 그러니까 아예 성경도 읽지 말라. 요즘 개신교회 가운데도 신자들에게 성경을 혼자서 읽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믿고 복종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성경의 가르침을 빈 성직자의 말인 것이다. 그 말을 정의한 교회인 것이다. 황제고 교황이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는 당시 가톨릭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코로나로 모두가 경계하고 조심하는 와중에도 오로지 믿음만을 외치며 제멋대로 구는 현재의 개신교 교회들을 바로 이해하게 된다. 원래 그런 종교였던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현실의 이유와 필요가 어느새 그렇게 종교를 바꾸어 버렸다. 세월이 흘러도 원래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저 믿으라. 그저 믿으라. 그저 믿고 따르라. 코로나고 뭐고 상관없이 그저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자식을 감염시키고, 어린 손주들까지 감염시키고, 이웃이며 가까운 이들을 모조리 감염시키면서도 어째서 저들은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일반의 자연스런 감정과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럼에도 일부러 감염시키려는 듯 자기가 간 곳을 숨기고, 자기가 한 행동을 속이고, 그러면서 더욱 주변과 가까이 접촉하려 애쓰는 듯한 모습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결국 무지와 맹목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더 나아지고 좋아질 수 있다.

 

종교가 왜 위험한가. 아편도 사실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편은 원래 한의학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약재 가운데 하나였었다. 현대의학에서도 마약류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약물일 것이다. 정도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위험해진다. 주변에 개신교신자가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된다. 위험하다.

목욕탕에서 자빠졌다. 하필이면 문턱을 뒤로 하고 넘어지며 모서리에 머리가 찍힌 바람에 크게 찢어지고 피까지 적잖이 흘렸다. 동네 의원 갔더니 너무 심하게 찢어져서 여기서는 봉합이 안된다더라. 그러니 큰 병원 응급실 가라. 아, 씨발.

 

욕부터 튀어나오는 이유는 아무래도 다급한 마음에 전공의 진료거부에 대해 전혀 생각지 않고 바로 근처 대학병원부터 달려갔던 때문이다. 기껏 인터넷 검색해서 위치 확인하고 버스타고 달려가 접수를 하렸더니 간호사가 그런다.

 

"지금 봉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병원 응급실에 찢어진 상처 꿰맬 수 있는 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소리다. 그나마 그냥 넘어지면서 찢어진 정도라 다행이지 상태가 더 심각했다면 어땠을까? 머리가 어지럽거나, 구토가 나온다거나, 눈이 돌아갔다거나, 하긴 그랬으면 혼자 병원도 못 갔겠지. 

 

결론은 전공의 새끼들 개새끼들이란 것이다. 명분이나 그럴싸하면 또 몰라. 의대 정원 늘리고 공공의대 세우는 것이 그렇게 파업까지 해가며 반대해야만 하는 중대한 일이었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머리에 난 상처이고, 하룻동안 꿰매지도 못하고 지혈만 한 채 내버려두어야 하는 불안이다. 내일 오전에 외래는 어떻게 받아주겠지.

 

응급실에서 머리 찢어져 찾아온 사람에게 기본적인 처치밖에 해 줄 수 없다는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응급실 비용이 자기부담만도 만만치 않을 텐데도. 아주 개같은 하루였다. 씨발 의사 좆같은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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