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던가? 뭐 다시 써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예전 글 일부러 찾아읽는 사람도 드물테니.


왕의 후계자란 아주 귀한 신분이다. 너무 귀한 신분이다 보니 아무나와 어울리게 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 주변의 관계가 제약된다. 심지어 부모자식간에도 엄격한 예법 아래 단절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형제는 단지 왕위를 다투는 경쟁자다. 부모형제 이외에는 단지 자신을 받들어 모실 신하 뿐이다. 언젠가 자신의 왕위를 노릴지 모르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왕의 후계자가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가질 리 없다.


그래서 결국 의지하는 것이 부모처럼 형제처럼 친구처럼 자신을 받들어 모시던 환관들이었다. 어차피 환관들은 자식을 낳을 수 없다. 왕이 아니라면 어디 가서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한다. 왕이 있으니 환관도 왕을 등에 업고 행세깨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준다. 그러니 조금 못되게 굴어도 최소한 다른 형제나 신하들보다는 낫겠거니.


비단 환관만이 아니다. 때로 유모이고, 같이 자란 유모의 자식인 젖형제였다. 아니면 어머니이거나 어머니의 친척인 외쳑이었다. 마누라나 마누라의 친척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나마 자기의 친형제들보다는 믿을 수 있다. 결국 왕을 등에업고 전횡을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한 대부분의 권신들은 왕과 소통할 수 있는 측근들이었다. 왕을 대신해서 비난을 듣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었다. 익숙한 사람들이 그래도 일단은 편하다.


전제왕조가 가지는 여러 단점 가운데 하나다. 신분사회의 단점이다. 이렇게 인간관계가 편협하다 보니 정작 신분도 높고 배운 것도 많은데 허황된 소리에 넘어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속임수에도 쉽게 넘어가고는 한다. 그래서 조선의 경우 세자에게 일부러 보다 엄격한 인간관계를 만들어주려 노력하기도 했었다. 세자의 스승들이 그런 경우다. 아무리 왕의 후계자라도 스승들만큼은 어려워해야 했다. 그런 대상이 필요하다. 최소한 대등하거나, 아니면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누군가를. 그래야 편협해지지 않고 외곬로 빠지지 않는다.


어느 공주님이 있었다. 사실 공주님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반신이었기에 어렸을 적부터 감히 세속의 인간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대등한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하들 뿐이었다. 그런 속에서 과연 그 공주님은 제대로 인간의 관계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그런 공주님을 공주라고 떠받드는 신민들까지 있었다.


하다못해 귀족학교에서는 왕족이든 귀족이든 결국 특별한 세계에 사는 구성원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학교 밖으로 나가면 당장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래도 학교 안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대등하고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인간의 관계를 경험해간다. 그렇게 할 정신머리도 없었던 것이다. 그 반쪽짜리 신은. 무당에 홀린 것이 아니다. 인간의 관계에 휘둘린 것이다. 왕조시대의 비극이다. 21세기에.

'손자병법' 군쟁편의 귀절이다. 아침의 기운은 날카롭고 낮의 기운은 느슨하며 저녁의 기운은 흩어진다. 비단 하루의 아침과 낮과 저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정이 길어지면 실패하기 쉬운 이유다. 처음 원정을 시작했을 때는 사기가 충천해 있다. 하지만 조금씩 원정이 길어짐에 따라 병사들은 지치고 흩어지며 마침내는 대장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하기만 한 타지에서 타인을 향한 적의를 끝까지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명분이 중요하다. 동기다. 그럼에도 싸워야 한다.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한다. 병사들을 설득해야 한다.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성공한다면 그나마 조금은 더 오래 지휘관이 의도한대로 전의를 유지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격하는 쪽이 유리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방어하는 쪽이 더 유리해지는 것이다. 남의 땅을 쳐들어가 뺐고자 하는 쪽과 그들로부터 지켜야 하는 쪽 가운데 어느 쪽의 동기가 더 강하고 더 길게 유지될까. 당장 임진왜란만 보더라도 침략자를 이 땅에서 몰아내햐 한다는 한 가지 당위에 조정과 백성이 모두 하나가 되었던 조선에 비해 불과 1년도 채 지나기 전부터 일본군은 어떻게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계산에 바빠지고 있었다. 이기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전쟁이 지지부진해지면 바로 본전생각이 나고 고향생각이 난다. 평화롭고 안락한 고향에서의 생활이 그리워진다. 공격은 그래서 빨라야 하고 방어는 그래서 조금이라도 공격을 늦추는 것으로 성공일 수 있다.


일본 전국시대의 끝물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항복한 다이묘들을 이끌고 호조씨의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을 때도 워낙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오다와라성을 직접 공격하기보다 포위하고 시간만 끌자 탈영이 속출하는 등 군기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마 당시 다테 마사무네가 호조씨가 처음 세운 전략대로 토요토미에 항복하지 않고 후방을 교란하며 보급을 차단했다면 자칫 오다와라성을 포위하다가 자중지란으로 자멸했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토요토미의 힘에 굴복했을 뿐 마음으로부터 충성하지 않던 다이묘들이었기에 조금만 상황이 불리해지면 전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몰랐다.


사실 알아도 정작 실천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심리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과 관계된 것이다. 고향을 떠나와 낯선 타지에서 오랫동안 불편함을 감수해가며 누군가에 대한 적의를 유지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처음에는 승리에 들뜨거나, 혹은 욕망에 이끌리거나, 아니면 감정적인 선동에 동조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욕망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진다. 아무리 큰 원한이나 증오도 당장 내 몸이 불편하고 고단하면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때 어떻게 병사들이 납득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가. 이릉싸움에서 유비가 저지른 가장 큰 패착이었다. 아무리 유비 자신의 오에 대한 복수심이 간절하더라도 병사들까지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관우와 장비의 명성이 높고 인망이 대단해도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며 복수할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유비의 설득에 넘어갔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고 만다.


육손이 처음 이릉에서 지휘를 맡고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기보다 수비로 일관하며 시간을 끌었던 이유였다. 촉군은 침략자다. 오군은 방어자다. 처음에야 촉과의 동맹을 배반하고 형주를 공격해 관우까지 죽인 오에 대한 분노가 더 강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남는 것은 남의 땅을 쳐들어온 침략자와 그로부터 자신의 땅을 지켜야 하는 방어자라는 단순한 구도만이 남는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도 유비는 군의 사기와 전의를 전처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끈이 살짝 느슨해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면 유비군은 결국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하고 마는 것이다.


그 정도 장기적인 대치에도 불구하고 군의 사기와 전의가 유지되는 경우가 신기한 것이지 싸움조차 않고 시간만 끌고 있으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굳이 유비와 직접 겨루어 만에 하나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유비가 복수가 아닌 다른 명분으로 오로 쳐들어갔다면? 더 절실한 다른 명분으로 병사와 장수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목적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면? 그래서 거꾸로 육손에게 군의 사기와 전의를 유지해야 하는 부담이 지워졌다면. 그래서 제갈량과 조운의 간언이 옳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유비군이 설사 패하더라도 쉽게 흩어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한실부흥이라는 가장 큰 명분을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왕조를 재건하고 백성의 삶을 평화롭던 시절의 그것으로 되돌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유비는 명분을 잃었고 장기전을 치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가지지 못한 채 시작했다. 그런 주제에 전력에서 압도적이지 못하기에 속전속결도 불가능했다. 시간을 끌게 된 순간 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황권도 대치가 길어지자 자기가 먼저 싸움을 걸겠다며 변화를 시도했던 것이었다.


화공에 당해 대부분의 병사를 잃은 와중에도 여전히 병사를 수습해서 퇴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비의 대단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전면퇴각을 하는 와중에 육손의 추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는 상황에서도 병사를 최대한 수습하려 노력한 결과 결국 강주에서 출발한 조운의 구원군에 구함받을 수 있었다. 지는 싸움을 수습하는 것도 지휘관에게 필요한 능력이기는 하다.


늪과 숲을 중심으로 진을 7백리에 걸쳐 길게 펼쳐놨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각개격파당했어도 결국 그 중심은 유비가 주둔하고 있는 중군일 터였다. 중군이 유지되면 어떻게든 조직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다. 그 중군이 무너졌다. 화공에 당한 것은 결국 경계에 실패한 것이다. 군기가 느슨해져 있다는 증거다. 의미없는 싸움에 목숨은 걸 수 없다. 당연한 사실이다.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사실 길게 쓸 것도 없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정의한 바 있었다. 사회상부구조는 사회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하부구조가 바로 경제다. 생산양식에 의해 그 시대의 제도, 문화, 종교, 사상, 이념, 체제 등 모든 것이 결정된다. 원래 정치라는 것은 분배를 위한 기구였다.


다른 많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한반도의 생산양식은 근대 이전까지 농업이었다. 소유한 토지와 노동력에 비례하여 사회적, 정치적 힘을 가지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 토지와 노동력의 소유자는 역사상 거의 교체되지 않았다.


아니, 교체된 적이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는 대개 두 부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대토지를 소유한 권문세족의 후예였으며, 다른 하나는 중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향리출신들이었다. 전자를 대표하는 이들이 이색, 조준, 권근, 후자를 대표하는 이들이 정도전, 정몽주다. 원래는 정도전이나 정몽주 같은 향리 출신들이 당당한 문벌귀족의 자제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파격이라 할 수 있었다. 하물며 이들의 관직이 때로는 문벌귀족 출신의 사대부보다 더 높은 경우도 있었다. 그를 위해 정도전을 비롯한 급진파 사대부들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려 한 것이었다.


고려의 토지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도전의 시도는 바로 그같은 지방의 중소지주인 향리출신의 사대부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이미 강산을 경계로 할 만큼 비대할대로 비대해진 권문세족의 장원들을 혁파하여 그 토지를 다시 합리적으로 재분배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다시 대토지를 소유한 소수 양반들에 대해 중소규모의 지주인 지방의 양반들이 반발하며 사회의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서학에 흥미를 가지거나 동학혁명 당시 혁명군에 동조했던 향반이나 잔반들이 바로 그런 경우들이었다. 근본적인 변화까지는 무리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사회가 바뀌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역시 이민족의 침입으로 아예 토지소유 자체가 붕괴되지 않았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도 특히 강남을 중심으로 전통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소수 신사층들이 향촌사회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이 곧 사대부였고, 관리였으며 명청시대의 지배신분들이었다. 영국의 젠트리나 독일의 융커들 또한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성장한 중소지주들이었다. 젠트리와 융커를 대신할 부르주아는 산업혁명 이후에나 등장하게 된다.


누구나 기술과 능력과 노력만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 돈만 있다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도 손에 넣을 수 있다. 돈이 곧 신분이며 지위였다. 그나마 초기자본주의는 얼마간 초기투자가 필요했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단지 아이디어와 기술만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정보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출신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이고 운이고 노력이다. 사회는 역동적으로 요동친다.


당장 이웃나라인 중국만 하더라도 신흥부자가 거의 상당하다. 일본 역시 매년 새롭게 자기의 운과 능력만으로 돈을 번 젊은 부호들이 탄생한다. 마치 기업이 토지의 역할을 하는 듯하다. 토지처럼 정해진 기업들만이 생산을 담당하며 그 기업을 소유한 경영자들이 그를 독점하여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신흥부자가 나타나지 않은지가 오래다. it쪽에서도 더이상 눈에 띌만한 성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강요한다.


이른바 보수가 주장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레토릭의 실체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인 것이다. 경제구조마저 안정시킨다. 변화를 억제한다. 그 결과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해야 할 기업들이 가만히 앉아서 썩어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을 중심으로 한 봉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의 경영자들은 봉건영주들이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경제구조가 변화하면 사회구조 역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 변화를 강제로 억누르려 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난다. 조선후기가 그랬다. 새롭게 등장하는 중소지주들을 권력자들이 철저히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었다. 시대는 정체되었고 안에서 무너져가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더 많은 토지와, 그리고 생산기술의 발달에 따른 그보다 더 적은 토지와, 그리고 나중에는 토지에 기대지 않는 자본과 지식과 정보의 시대가 열린다. 역사의 흐름속에 먼 동쪽의 변방에서는 혼자서만 거스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오랜 뒤 느끼는 교훈 같은 것이다. 그러다 망했다. 조선은. 그리고 고려는.

강유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는 대개 둘로 나뉜다. 그리고 그 경계는 거의 평가자의 소속에 따라 정해지고 있었다. 즉 위에 속한 이들은 강유를 호평한 반면 촉에 속한 이들은 강유를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했다. 어째서인가?


이를테면 강유가 끝내 북벌의 의지를 꺾어야 했던 단곡에서의 패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촉군은 1만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말이 1만이지 당시 촉한의 인구가 100만 좀 넘는 정도였으니 인구의 1%가 한 번의 싸움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 한창 일할 나이의 장정들이었을 테니 그로 인한 생산의 손실과 남은 가족과 친인, 지인들의 동요까지 생각하면 나라의 기반이 흔들릴 패전인 것이다. 간단히 지금 대한민국이 전쟁을 벌여 한 번의 싸움에 50만이 죽었다고 가정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단곡에서만 패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승리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아주 희생이 없을 수 없었다. 싸움하는데 들어가는 물자만 해도 상당했다. 쌀이 게임에서처럼 거저 전선에 있는 강유군에게까지 가는 것이 아니다. 무기도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돈이고 백성의 노력이다. 그런데도 정작 얻은 것은 그리 크지 못하다. 아니 어쩌면 제갈량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그동안의 싸움으로 소모한 것들을 대신하지 못했다. 위군의 입장에서야 그저 자신들과 싸우던 강유만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강유는 비의에 의해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자체를 크게 제한받고 있었다. 1만 이상을 동원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에서 무려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촉한의 인구가 100만이라면 거의 10%에 이르는 병력이다. 대한민국 인구로 비교하자면 무려 500만이 병사로 동원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 소모된 물자와 백성의 노동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런데도 동요 한 번 없었다. 제갈량이 북벌을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촉한 내부에서 그로 인한 소요가 일었던 적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될까?


노성에서 제갈량이 사마의에 패하여 1만이 죽었다는 기록을 믿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강유가 단곡에서 잃은 병력이 바로 1만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병사 1만은 그냥 머릿수 1만이 아니다. 노동력이며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고, 지인이다. 사회 내부에서 동요가 없을 수 없다. 아무리 승상이고 만인지상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노성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바로 이듬해 다시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고 있었다. 진짜로 1만의 병력을 잃었는데도 그렇게 쉽게 다시 더 많은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서도 전혀 아무런 내부의 동요나 반발도 없을 수 있었을까? 놀라운 것이다. 결국 5차 북벌에서도 실패하고 죽어서 돌아온 제갈량에 대해서조차 촉한의 백성들은 그를 경모해마지 않았다.


제갈량을 감히 역사상 명재상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관중과 비견하고 심지어 소하보다 윗줄에 놓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5차례의 북벌을 진행하는 동안 제갈량이 동원한 병력이 최소 8만이었다. 인구의 거의 10%를 전쟁에 동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촉의 내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백성들의 삶도 나아지면 나아졌지 못해지지 않았다.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당장 대한민국이 500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수년간에 걸쳐 전쟁을 벌인다 생각해 보라. 그러고서도 아무런 원망도 비난도 듣지 않았다.


더불어 강유와 제갈량은 군지휘관으로서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었는데, 과연 북방출신 답게 강유는 과감한 기동과 기만을 통한 결전에 능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기면 크게 이기고 지켠 또 크게 졌다. 반면 제갈량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전략을 써왔는데 그래서 이겨도 크게 이기는 법이 없는 대신 크게 지지도 않았다. 이위공문대에서 이위공 이정이 이에 대해 평가한 말이 있다. 뛰어난 지휘관은 크게 이기는 지휘관이 아니라 크게 지지 않는 지휘관이다. 언제든 안정적으로 최선의 전투력을 유지하며 전장을 지켜낸다.


제갈량의 군재를 폄하하는 이들은 바로 강유와 같은 군재를 더 높이 살 것이다. 하지만 현대전에서도 군사령관쯤 되면 전술적역량보다 군정의 실력이 더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군을 어떻게 편제하고, 보급 및 운용은 어떻게 하고, 인사는 또 어떻게 하고. 그리고 그런 사령관 아래서 일선지휘관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전투를 지휘하는 것이다. 군을 이끄는 것은 제갈량이지만 실제 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야전지휘관들이다.


최소한 제갈량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오면 위군 가운데 감히 제갈량과 정면으로 싸우려는 이들이 드물었다. 사마의도 그래서 노성에서 제갈량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가 무려 3천에 이르는 수급만을 헌납하고 돌아갔다. 수급이 3천이면 실제 피해는 그 몇 배에 이른다 보는 것이 옳다. 죽인 족족 수급을 베어 얻을 수 있기란 원래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때문이다. 노획한 갑옷만 무려 5천 벌이었다.


아무튼 알면 알수록 어째서 제갈량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상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가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또한 이후 수백년간 중국의 대기병전술의 뿌리가 될 팔진도까지 고안해냈다.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에서 쓰인 검차가 바로 그 영향이다. 사람의 재주가 하늘의 때만 못한 법이다.

아무런 정치적 의도 없는 순수한 역사글이다. 혹시라도 실제의 어떤 사실과 연관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단지 오해에 불과함을 먼저 인지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정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아무 관심도 없다. 뉴스도 신문도 보지 않는다. 오래 살아야 한다.


원래 거의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중국왕조에서 환관이 발호하여 크게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다름아닌 당시의 황제들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다. 결국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환관들이 어지간히 부정을 저지르고 전횡을 일삼는 것을 설사 알았어도 굳이 벌주기보다 방치해야 하는 더 절박한 이유가 당시의 황제들에게는 있었던 것이었다. 오로지 환관들만이 황제들에게 가장 믿고 기댈 수 있는 측근들이었다.


당장 삼국지의 배경이 되고 있는 후한말만 하더라도 저주라도 받은 것인지 연이어 황제들이 어린나이에 즉위하며 모후인 태후를 끼고 외척들이 득세하게 된 것이 저 유명한 십상시가 등장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영제만이 아니라 이전의 여러 황제들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어려서는 어쩔 수 없이 태후에 이끌려 외척의 발호를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장성하고 나면 환관을 앞세워 이들을 숙청하고 친정에 나선다. 다시 황제가 죽고 어린 황제가 새로 즉위하면 태후를 낀 외척들이 일어났다가, 어느새 황제가 장성하면 황제를 배후에 둔 환관의 공격으로 이들이 물러났다가. 


조위의 황제 조방이 권신 사마소를 죽이겠다며 저택으로 쳐들어갔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따르던 병사들도 거의가 환관들이었다. 무신들이 난을 일으키고 조정을 장악한 채 왕권을 위협했을 때도 고려의 왕들은 내시와 환관을 동원하여 기세등등한 그들을 암살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황제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거의 대부분의 일상을 함께하는 이들이 바로 이들 환관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심지어 태어난 아이의 양육마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야 권위가 사는 것으로 여기는 한심한 인습으로 인해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자란 많은 황실의 아이들이 유모와 환관을 유일한 가족처럼 여기며 깊은 유대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들 어려서 자신을 보살피던 환관들이 이후 이 가운데 황제로 즉위하는 이가 나오면 황제의 측근이 되어 환관들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었다. 환관 왕진으로 인해 토목보에서 치욕을 당하고 황위마저 빼앗겼음에도 여전히 그를 위한 사당을 짓고 추모까지 한 정덕제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들은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 보는 것이 옳다.


부모에게서도 받지 못한 정을 주고받은 사실상 유일한 가족이다.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다. 현실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으니 황제의 자리를 차지해도 물려줄 자식이 없을 것이라는 점과 신체적인 특징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비천한 신분이라는 특성이 황제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기대어야만 한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이들이라면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실제 그렇게 황제의 전위가 되어 황제의 편에서 외척과 싸우고, 권신들을 몰아내고, 그 대가로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약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결과 피해보는 것이 일반 백성이거나 고위관료들이라 해서 황제가 굳이 그런 사실까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앉은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로 자신을 도울 강력한 아군이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신의 신하들이다.


굳이 황제가 직접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어차피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가 있으면 상소 등으로 황제에게 알리려 들 테니 일부러 거부하지 않는 이상 아예 모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알려고 하지 않았거나, 아는 것 자체를 거부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했거나. 마치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친정인 여흥민씨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한 것이 고종과 전혀 무관한 명성황흐 자신만의 의지였다 여기는 것과 같다. 고종의 허락 없이는 이미 몰락하여 한미해진 명성황후의 친정이 일약 국정을 주도하는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을 리 없다. 욕은 명성황후가 먹고 실리는 고종이 챙긴다. 고종을 대신해서 조정에서 고종을 옹위하는 대신 여흥 민씨도 약간의 대가를 누린다.


권력이란 사유물이기 때문이다. 백성에 대한 공적인 책임보다 황제 개인의 입장과 이익이 더 우선한다. 황제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백성의 이익과 안위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우선한다. 백성의 재산을 빼앗고, 백성을 함부로 죽이고, 그로 인해 많은 폐단이 일어나더라도 황제의 자리를 지키는데 도움만 된다면 얼마든지 용서된다. 아니 오히려 권장된다. 황제는 그저 군림할 뿐이다. 아니 존재할 뿐이다. 황제는 황제이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측근들이 나누어갖는다. 황제에게만 잘하면 충신이고 황제에게 소홀하면 역적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환관조차 황제에 최선을 다하면 충신이 되고 권력자가 된다.


어린 시절 가까이 친하게 지냈다. 보호자였다. 보호받는 입장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그래서 그 익숙함에 의지한다. 자기는 그저 황제이기만 하면 된다. 백성들이야 죽어나가든 말든. 물론 한참 오래전 전근대 왕조들이 가지는 분제다. 지금은 절대 그런 일따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저자인 진수가 제갈량더러 임기응변의 지략이 장점이 아니라 한 것은 제갈량이 보인 여러 장점들에 대한 상대적 평가인 것이다. 제갈량이 이만한 뛰어난 장점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매년 군사를 일으키고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그의 군사적 재능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부족한 군사적 재능으로 장합과 왕쌍을 죽이고 노성에서 사마의까지 패퇴시키고 있었다.


제갈량이 무려 8년 동안 5차례에 걸쳐 위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키고서도 정작 한참 미치지 못하는 소국인 촉의 내정이 안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전사자가 적었던 때문이었다. 군에 징집된 병사들도 결국 돌아가면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력이 되고, 한 가족의 가장이거나 누군가의 아들이 된다. 전사자가 나오는 만큼 생산력은 떨어지고 사회는 불안해지고 동요하게 된다. 당이 여러차례 원정에 성공하고 주위의 이민족들을 힘으로 누르며 청 이전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안에서부터 무너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의 손실이 곧 생산의 상실로 이어지고 사회의 동요로 이어지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제갈량은 최대한 병사들을 보존하여 퇴각함으로써 바로 이같은 생산의 손실과 동요를 최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군 전체를 통솔하는 최고지휘관이라면 정치에 대해서도 결코 무심해서는 안된다.


제갈량과 흔히 비견되는 남조 소양의 장군 진경지만 하더라도 몇 번이나 북위를 상대로 모험적인 원정을 시도하며 많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만큼 전멸당할 뻔한 위기마저 몇 차례나 겪어야 했었다. 그나마 북위의 대응이 시원치 않았으니 다행이지 제갈량이 상대해야 했던 조진이나 사마의처럼 노련하게 대처했다면 진경지의 승리는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진경지가 이끌던 원정군은 소양이 보유한 군대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크기도 작고 인구도 적었던 촉한에 있어 제갈량이 이끌고 나온 군대는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진경지의 군대가 전멸했어도 치명적이기는 해도 결정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제갈량의 군대가 전멸했다면 촉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저 내가 잘 싸워서 승리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은 일선 지휘관, 최대로 쳐봐야 사단장까지만 허락될 수 있는 것이다. 군사령부 이상이 되면 전장 그 너머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헤아려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제갈량이 진경지가 그랬던 것처럼, 바로 전세대에 조조가 보여준 그것처럼 빠르고 적확한 기동으로 상대의 핵심을 타격하는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촉한이 가진 한계 - 즉 군의 구성에 있었다. 진경지가 북위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비결은 바로 흰 갑옷으로 무장한 3천의 기병에 있었다. 군의 기동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에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는 데 있어 한 발 앞서있다는 것을 뜻한다. 상대보다 더 빨리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 도착하여 유리한 조건에서 싸움을 강요할 수 있다.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은 강유가 매번 북벌을 시도할 때마다 고전하고 끝내 단곡에서 참패하고 만 이유였다. 상대적으로 다수의 기병을 보유하여 기동력에서 우위였던 조위군에 비해 말을 기르기도, 기른 말을 전장까지 수송하기도 어려웠던 촉한군은 보병위주로 속도에서 한참 열세에 있었다. 단곡에서도 그래서 퇴각하는 도중 뒤를 잡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던 것인데,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도망치는 것을 뒤쫓는 것도, 뒤쫓아오는 것을 뿌리치고 도망치는 것도 하나같이 불리하다는 것이다.


제갈량이 조진과 사마의를 상대로 단지 싸움을 걸어오도록 유도할 뿐 먼저 나서서 싸움을 걸지는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몇 차례 조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서도 그 승리를 적극적으로 확대하지 못한 이유 또한 같았다. 말을 기르기도, 기른 말을 험한 잔도를 지나 중원으로 데려오기도 어려웠기에 촉군의 구성은 거의 보병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탁월한 군사운용으로 기병까지 다수 보유한 조위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더라도 퇴각하는 조위군을 쫓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먼저 싸움을 걸려 해도 보병의 기동력으로는 자칫 기동하던 도중 조위군에 포착당해 곤란을 겪을 수 있었다. 그 점을 이용하여 한 차례 기만기동으로 조위군을 유인하려 한 적도 있었지만 그마저 곽회가 간파하면서 실패한 바 있었다. 그저 묵묵히 조위군이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러 싸움을 걸어오면 그것을 부수고 기세를 올려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제갈량이 처한 상황이었다. 그것을 장완도 비의도 알았기에 다른 대안을 찾았고 그마저 불가능하다 여겼을 때는 강유의 북벌을 말리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건 너무 불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사마의는 단 한 번도 제갈량을 상대로 정면으로 승부를 걸려 하지 않았었다. 딱 한 번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사마의는 처참히 패하고 있었다. 노획한 갑옷만 무려 5천 벌에, 수급이 3천이었다. 최소 만 단위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이다. 사마의가 승리한 경우도 있지만 그마저 장합이 전사한 그 뒤에 이어진 추격전에서였다. 널리 알려진대로 이엄의 태업으로 군량보급이 끊기며 급히 퇴각하는 제갈량의 뒤를 쫓은 것인데, 기록대로 1만이 전사했다면 당시 촉군의 규모가 8만도 안되었으니 사실상 괴멸된 것이나 다름없다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작 지휘관인 제갈량은 건재하고 이엄만 정해진대로 처벌받고 있었다. 과연 사마의가 승리했는가 여부도 의심스럽고 설사 승리했더라도 기록된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또한 제갈량과 정면으로 싸운 승리가 아니므로 역시 제갈량의 군재에 대한 평가근거로는 적절치 않다 할 수 있다. 오히려 퇴각도중 추격당해 피해를 입었음에도 군을 유지하며 퇴각하는데 성공했다면 전술적으로도 제갈량의 승리라 보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제갈량이 살아있는 동안 사마의가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지 못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제갈량이 죽고 나서야 겨우 공세에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과연 제갈량의 군재가 사마의에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수준이하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참고로 그러면 어떻게 제갈량은 보병위주의, 그것도 숫적으로 열세인 촉군을 이끌고 위군을 상대로 공세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었는가. 원래 제갈량이 창안했다는 팔진도는 제갈량 혼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팔진도가 만들어진 이유는 바로 북방의 이민족을 상대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기존의 중국의 전술로는 기병위주의 북방 이민족들과 맞서기에 그다지 효율이 좋지 못했다. 이민족들처럼 기병을 늘리거나, 아니면 기존의 병구성으로도 전술을 달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기병이 가지는 압도적인 기동성과 유연성을 상대하기 위해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한 진의 구성과 운용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 결과가 팔진도였고, 그리고 그 팔진도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제갈량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먼저 이동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어렵지만 상대가 공격하기를 기다려 그를 격퇴하는 것은 가능하다. 팔진도는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술에 큰 영향을 주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임기응변이야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어렵더라도 정공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만 하다.


가정에서 마속이 패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크게 패한 적이 없었고, 패하더라도 병사를 많이 잃지 않았으며, 직접 지휘하며 나선 전투에서는 한 번도 패하지 않았었다. 사마의마저 압도적인 우세에도 공세를 펼치기보다 수세로 일관했고, 단지 현실의 한계로 인해 더이상 나가지 못하고 진중에서 명이 다한 것 뿐이다. 제갈량의 기만에 사마의가 넘어왔으면 되는 것을 하필 곽회가 알아챈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다. 임기응변에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조건이 되지 못했다. 그랬음에도 압도적인 우위에도 조위는 오히려 북벌 내내 제갈량에 끌려다녀야만 했다. 제갈량이 전쟁을 주도했다.


원래 당시나 그 전이나 그 뒤나 중국에서 지휘관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얼마나 많이 크게 이겼는가의 여부가 아니다. 조운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도 바로 기산에서 패한 뒤 퇴각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진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때문이었다. 항상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싸워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승리는 그 다음에 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면. 그렇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단지 개인이 싸움을 잘한다고 난세에 군웅의 하나로 대우받기란 어렵다. 하북을 장악한 원소마저 이각에게 패해 도망쳐 온 여포를 제거하기 위해 고심을 해야 했었고, 서주학살소식을 듣고 조조를 배반하기로 결심한 장막과 진궁 역시 다시 원소에게서도 도망친 여포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고작 조표가 내응했을 뿐임에도 서주자사를 물려받은 유비도 하비를 차지한 여포에 맞서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어째서?


주군 여포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기꺼이 죽음을 맞았던 고순에게 어쩌면 그 단서가 있지 않을까. 고순은 여포에게 한결같은 충성심을 보였지만 그러나 정작 여포는 그런 고순을 그다지 탐탁치않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고순이 이끌던 부하들이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한다 해서 함진영이라 불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여포는 어떻게 정원을 배반하고 동탁의 심복이 될 수 있었으며 나중에 동탁마저 배반하게 되었을까.


원래 황제를 멋대로 바꾸려는 동탁에 저항하다 죽임을 당한 정원은 도성을 수비하는 중앙군인 북군의 수장인 집금오의 관직에 있었다. 대장군 하진이 살해당하고 사실상 낙양의 중앙군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십상시를 주살하고 황제를 보호하며 낙양으로 입성한 군벌 동탁에게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정원이 지휘하던 낙양의 북군을 포함한 중앙군은 이후 정원이 여포에게 살해당하며 모두 동탁에게 귀속된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단지 수장인 정원이 살해당했다고 중앙군이 온전히 동탁에 항복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정원 살해 이후 동탁휘하에서 여포의 위치나 호로관에서 17로 제후군과 싸운 사실들을 살펴 보면 결국 정원 사후 중앙군의 지휘권은 모두 정원의 휘하이던 여포에게 귀속되었다 보는 것이 옳다. 아마도 정원의 심복이면서 북군의 상층부에 있었을 여포였던 만큼 정원이 죽임을 당하고 난 뒤 북군의 지휘권은 당연히 여포에게 돌아갔을 테고, 동탁의 지원까지 받아 북군을 장악한 여포가 그의 심복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낙양의 중앙군은 동탁에게 모두 귀속되게 되었다. 지난번에도 썼던 17로 제후군을 상대로 일개 지방군벌에 불과한 동탁이 힘으로 맞설 수 있었던 이유였다.


문제는 결국 호로관에서 17로 제후군의 힘에 밀려 낙양까지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하면서부터였다. 병주자사를 역임했지만 원래 동탁의 근거지는 양주, 달리 서량이었다. 장안은 당연히 서량과 가깝다. 그런데 여포가 이끄는 중앙군의 근거지는 자신들이 버리고 온 낙양에 있었다. 서량과 가까워지며 원래 동탁을 따르던 그의 가신들은 더욱 힘을 얻었고, 근거지를 불태우고 도망쳐 온 여포와 중앙군의 위세는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호로관에서 밀려난 것까지 더해지며 동탁의 여포와 중앙군에 대한 신임 역시 전과 같지 않았다. 이전에 비해 여포가 이끄는 중앙군의 가치가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다. 만일 누군가 그 사이에 불씨 하나만 던져주면 제법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은가. 아무리 근거지가 가까운 서량군의 위세가 대단해도 어디까지나 도성을 수비하는 것은 중앙군인 북군의 역할이었다. 여포가 그들보다 동탁과 한 발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동탁을 살해하고 난 뒤 이각의 군사들과 싸우다 장안에서 쫓겨났을 때 여포 혼자서만 도망쳤을까 하는 것이다.


잠시 원소에게 의탁했을 때도 여포에게는 자신만의 사병이 함께하고 있었다. 친구인 장양에게 의탁했을 때도, 이후 장막의 요청을 받고 연주에서 조조와 싸웠을 때도, 그리고 마침내 하비에서 조표의 도움으로 서주를 차지하고 유비를 내쫓았을 때도 그의 주위에는 장료와 고순, 위속, 송헌 등등 심복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다. 죽음까지 함께했을 정도로 고지식하게 여포에게 충성을 바친 고순에 비해 여포는 고순을 그다지 신뢰하지도 신임하지도 않고 있었다. 오히려 다른 부하들과 비교해 홀대하며 그가 이끌던 병력들마저 인척인 위속의 휘하에 들어가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당시 고순이 이끌던 병력이 대략 700명 정도였다는데 그 출신이 어느 정도 짐작가지 않는가. 여포를 자신의 주군으로 여기지만 여포 자신은 그들을 자신의 부하로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장료는 원래 동향사람, 위속은 인척이었다. 진궁도 그래서 여포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었다. 그러면서도 여포를 주군으로 여기며 평생을 따르고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 고순의 정체야 말로 여포가 난세에 군웅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던 이유를 알게 한다. 어쩌면 후한 마지막 중앙군 지휘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비에서 여포가 패망하며 후한의 중앙군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고순의 충정이란 원래 죽을 곳을 지키지 못한 데 따른 보상심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고순이 원래 죽어야 했던 곳은 하비가 아니었을 테니.


실제 여포에게 적토마와 방천화극이란 원래 정원이 이끌던 후한의 중앙군인 북군이었을 게다. 체계적으로 훈련되고 조직된 중앙군의 존재는 막 난잡하게 일어나 징집되어 동원되었던 군벌들의 사병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것이 여포가 가진 힘의 정체였다. 혼자힘으로 원소마저 두렵게 만들고 조조를 위기로 몰았으며 유비를 아래로 볼 수 있었다. 장수로서의 강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권력의지란 결핍에 대한 보상이다. 하지 못하고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마침내 이루기 위한 간절한 바람이다. 가난을 이기고자. 패배를 설욕하고자. 굴욕을 되갚아주고자. 부귀와 명예를 얻고자.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것들이 주어져 있었다면 어떻게 할까?


대부분 창업군주들은 남다르게 권력의지가 강했던 이들이었다. 반드시 권력을 손에 넣겠다. 어떻게든 권좌에 오르겠다.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동기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을 손에 넣으면 자기가 간절히 바랐던 일들을 하나씩 이루고자 시도한다. 역시 많은 왕조에서 창업군주에 의해 가장 적극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전 왕조에서 있었던 모순들을 바로잡는 것은 시대의 정신이기도 했을 터다.


그런데 창업군주로부터 왕조를 물려받은 후계자들은 그 상황이 전혀 다르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은 군주의 후계자였다. 장차 당연하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될 이들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주어져 있었다. 권력이란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저 권력이 그곳에 있기에 가지려 한다. 권력이 이미 자기 손에 쥐어져 있기에 지키려 한다. 권력을 객관화한다.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권력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아예 궁리도 하지 않는다. 그냥 당연하게 권력을 물려받고 그 권력을 사용한다.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이미 자기 손에 들어온 자기의 소유다.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간절히 해야만 하는 일도 없으니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느다. 대신 권력을 빼앗고 지키는 일 만큼은 누구보다 열심이다. 사람은 잘 죽인다. 대신 나라를 지킬 사람까지 모두 죽인다. 누구 이야기일까? 역사는 반복된다.

중국 역사상 많은 이들이 최고라 여기던 지휘관은 다름아닌 한고조 유방의 공신 한신이었다. 그야말로 상승불패의 명장으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고조 유방이 항우와 상대하는 사이 천하를 평정하여 마침내 한왕조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한신조차 팽성에서는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한 채 항우군에 패주하고 있었고, 해하에서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싸움을 벌여 초전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공회와 진하가 좌우측면을 공격하여 초군을 혼란케 만든 다음에야 공격하여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30만이 넘는 대군의 포위를 뚫고 항우가 탈출하면서 빛이 바래고 만다. 항우가 해하변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더 어려운 싸움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원래 사기를 보더라도 항우 생전에 유리한 조건에서 싸움을 벌여 승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거록전부터 시작해서 대부분 병력이 열세인 상태에서 전투를 치렀고,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 항우 개인의 능력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해하전투 직전에 치러진 고릉전투에서도 10개월 이상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대치하면서 병사들이 굶주리고 지친데다, 더구나 퇴각하던 도중 뒤를 추격당해 벌어진 전투였음에도 3만의 초군은 이번에도 10만의 한군을 상대로 거의 절반을 괴멸시키는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해하전투에서 한이 동원한 군사의 규모는 무려 30만 이상, 계포의 구원군이 있었다고 하지만 초군의 규모는 10만이 채 못되는 정도였다. 불리한 조건은 처음과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우의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한다면 한신의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역사상 최고 명장의 자리는 승자인 한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항우가 인간을 넘어선 힘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역발산기개세라는 말 그대로 그냥 힘만 센 바보가 되었던 것이다. 문제라면 그 힘만 센 바보 하나에 수도 없이 패하고 쫓겨야 했던 유방이었다. 유방 역시 그렇게 범용한 인물은 아니었다. 최소한 한신의 평가만 보더라도 10만 정도는 문제없이 지휘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한신이 합류하기 전에는 유방 자신이 직접 군을 지휘하여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한고조 유방 역시 덕만 있고 능력은 없는 군주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저 힘이 전부인 항우에게 매번 패하면서도 뛰어난 덕망으로 천하의 인재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마침내 승리를 거둔 이상적인 군주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한신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게 싸움을 잘했는데 어떻게 항우는 유방에게 패하고 죽어서도 갈갈이 찢겨 전리품이 되는 신세로 전락했는가. 항우가 유방을 상대하는 동안 천하를 누비며 제후들을 항복시키고 한군의 영역을 넓힌 것이 바로 한신의 역할이었다. 항우는 싸우고 승리하면 끝이지만 한군은 싸워서 이기면 그곳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오히려 싸우고 나면 그만큼 지치고 힘이 빠지는 초군에 비해 싸우면 싸울수록 한군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릉전투나 해하전투에서도 그래서 한군은 더 우세한 병력으로 초군을 압박하여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다. 30만의 병력으로 10만의 초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그것이 한군의 힘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방이 있었다. 역시 한 나라를 세우려면 싸움도 정치의 영역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다.

전근대사회에서 -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가장 필수적인 생산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인력을 보유하고 바로 동원할 수 있는가에 따라 생산할 수 있는 가치 역시 결정되고 있었다. 더 많은 인력을 보유하고 동원할 수 있다면 당연히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할 수 있다. 생산은 곧 부이고 힘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부와 힘을 자기 혼자 독점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아직 생산기술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더욱 인간의 노동력에 기대어 생산이란 걸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소유한다. 노동력을 소유한다. 굳이 노예제가 아니더라도 고대의 정치제도란 전제적인 군주나 소수의 지배신분이 보다 다수의 생산에 종사할 수 있는 노동력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대 크레타에서는 그래서 아예 군주의 명령 아래 모든 백성들이 노동에 종사하고 생산한 것을 바친 다음 나누어받는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세금이라는 것도 피지배신분의 필요나 요구와는 상관없이 지배신분의 일방적인 입장에 의해 결정되고 강요되는 것으로 아주 최근까지도 단지 지배신분의 사유재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백성이란 다름아닌 군주를 위해 일하고 생산하며 세금을 바치는 수단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계기가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한 생산의 증가였다. 인간보다는 그 인간을 투입할 사업장 - 곧 농경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언제라도 필요한 노동력을 바로 생산에 투입할 수 있도록 노동력을 토지에 묶어두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뜻밖에 노예의 해방과 봉건질서의 확장은 거의 일치하는 경향을 갖는다.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토지를 기반으로 한 지방권력의 강화와 권력의 분화는 생산수단으로서 개인에 예속된 노예보다 농지에 예속된 농노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농노란 토지를 소유한 지방의 영주에게 자신이 소유한 유력한 수단이자 자원이 된다. 자신이 지배하는 작은 나라의 백성이기도 하다.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철저히 토지에 예속된 채 생산을 위한, 유사시에는 무력으로도 동원되는 수단으로서만 그들은 존재했다. 그것이 확장된 것이 바로 근대 국민국가라고 하는 개념이다.


농노들이 토지에 예속되었다면 국민들은 국가에 귀속된다. 국경이 경계가 되어 개인의 이동과 행동을 제약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아무리 축구를 잘해서 국적을 브라질로만 바꾸면 바로 대표팀이 되어 월드컵 우승을 바라볼 수 있다 하더라도 태어난 나라가 한국이면 한국 대표팀에서 뛰어야 한다. 아무리 일본문화를 동경해서 일본에서 살려고 해도 하다못해 사는 곳을 바꾸는 것만도 상당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과정들을 필요로 한다. 더 나은 조건에서 살고 싶은데 그러나 당장 자신의 국적이 걸린다. 자신이 속한 나라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하며, 군인으로 동원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것만으로 국부에 영향을 준다. 어떻게든 출산율을 높여서 인구를 늘리려는 각국의 시도는 노예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번식을 강요하던 전근대의 노예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 역시 중요한 수단이다. 생산수단이 다양해진 만큼 국가에 속한 여러 생산수단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국민이라고 하는 노동력 자체다. 대신 국가라는 틀 안에서 개인은 나름대로 안전을 보장받으며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기도 하다. 농노들도 영주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영주의 보호를 받으며 최대한 자신들의 관습대로 자유를 누릴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조선사회에서는 개인에 인신을 예속하는 노비제가 아주 늦게까지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었는가. 첫째는 농업생산성이 너무 떨어졌다. 농사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다. 기후가 온난한 것도 아니고, 사시사철 비가 충분히 내리는 것도 아니고, 땅이 특별히 비옥한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너무 일찍 중앙집권이 완료되고 있었다. 고려시대 이미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였고 지방 호족들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고려든 조선이든 호족의 토지소유를 제한한 제도 아래서 지배신분이 충분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다수의 노동력을 소유하여 토지경작을 독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사유재산이 일반화된 조선후기에 이르면 소유주 개인이 아닌 토지에 예속된 외거노비가 크게 늘어나고 있기도 했었다. 충분히 토지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면 굳이 노비를 자신의 소유로 같은 집에 두고 함께 살기보다 떨어뜨려놓고 소유한 농지에서 일하도록 시키는 쪽이 더 유리하다. 나중 가면 소작농과 외거노비의 구분조차 모호해진다. 조선후기 증가한 전호들은 사실상 다수의 소작농을 거느린 봉건영주에 가까웠다.


다시 말히 인신의 예속방식의 차이였던 것이다. 소유주 개인에게 예속시키는가. 아니면 생산수단인 토지에 예속시키는가. 그리고 나아가 국가에 예속시키는가. 광종과 태종의 노비해방 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생산수단인 노비를 사대부가 아닌 국가가 소유한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국가의 권력독점에 저항하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비의 개인예속을 긍정한다. 사대부들이 노비소유를 필수로 여긴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노비를 소유해야만 사대부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노비를 잃으면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수단을 잃게 된다. 


정치제도의 변화는 따라서 인신의 예속방식의 변화로 단순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산수단인 개인을 예속시킬 것인가에 따라 이념이 나뉘고 체제가 갈린다. 바로 그것이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정의한다는 마르크스 명제의 진짜 뜻일 것이다. 생산양식의 변화가 인신의 예속방식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결국 정치제도와 이념 사상까지 변화시키게 된다. 인권이란 개념마저 사실은 역사의 경험적 결과일 뿐 선험적 가치는 아닌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결국 생산의 가치와 동일시된다. 한 개인이 생산하는 가치의 양과 질이 어떤가에 따라 개인의 가치 역시 결정된다. 개인이 생산할 수 있는 가치가 보잘 것 없을 때 개인을 상실할 경우의 손실 역시 그만큼 작을 수밖에 없다. 개인을 잃는 것이 자신에게도 큰 타격이 될 때 개인을 대하는데 더 조심스러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사회는 결국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것들만 달라졌을 뿐이다. 역사가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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