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어느 정도 삼국지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알았다. 나는 예형과 닮았다.

 

좆같은 걸 참을 수 없다. 씹스러운 걸 보고 넘길 수 없다. 그렇다고 스스로 어찌하는 건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내가 삼국지를 읽으면서 느낀 예형이란 인물이 그랬다.

 

난세였다. 그야말로 세기말이었다. 한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며 새로운 질서를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세상에 조조같은 놈이 그 가운데 가장 중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고 봐도 괜찮을 것인가?

 

그렇다고 그런 현실을 바꿀 힘따위 자기에게는 없다. 그래도 좋은가 하는 확신 또한 없다.

 

그래서 욕한다. 그래서 조롱한다. 그래서 죽으면 거기까지. 혹시라도 살아남으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개같고 좆같고 씹같고 버러지스러운 모든 것을 경멸하고 혐오하면서도 그런 현실을 두고봐야 하는 자신을 더 환멸한다.

 

그래서 차라리 죽을 수 있기를.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갈고 책임감도 강했으니 차라리 다른 누군가의 손에 죽을 수 있으면 낫겠다.

 

간신의 손에 죽으면 충신이다. 적도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면 열사일 수 있다.

 

누가 자신을 죽여줄까? 조조일까? 유표일까? 아니면 환조일까?

 

그래서 예전 삼국지 관련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닉으로 예형을 선택했을 터다.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다. 그 반대다. 치세에는 능신일 수 있으되 난세에는 미아가 된다.

 

민주당에도 아마 그런 이들이 적지 않을 터다. 문재인이 중심에 있는 동안 의심없이 문재인을 따랐다. 문재인이 사라지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튼 짓거리를 저지르게 된다. 그냥 약하고 무지한 때문이다.

 

자신이 나고 살아온 곳이 바로 위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한의 마지막 영토였다. 아마 유비조차 예형의 눈에는 그저 핏줄을 앞세운 역도이지 않았을까.

 

지식인이란 것이다. 옳은 것을 알고 바른 것을 아는데 현실이 그와 같지 않다. 어찌해야 하는가.

 

다행히 나는 일을 하고 있다. 노동을 하고 있다. 단 하나, 그러나 가장 큰 자부심이다.

 

결론은 예형은 농사를 지어야 했다. 길쌈을 해야 했다. 하다못해 잡부라도 했어야 했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잎새와 가지가 흔들린다. 그게 예형의 한계였을 터다. 그럼에도 그를 동정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술만 쳐마시며 온갖 악담과 독설만 지껄이다가 뒈진 버러지들이.

 

그냥 생각났다. 충신도 열사도 아닌 또다른 선택을. 진중권이나 변희재는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그 고뇌와 고통을.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인데, 사실 동탁이 처음 낙양에 입성할 때까지는 그 세력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었다. 낙양에 입성할 당시 병력이 고작 3천이었고, 그래서 조카사위이였던 이유가 계략을 써서 허장성세까지 보여야 했었다. 그러던 동탁의 세력이 다른 제후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된 것은 낙양에 입성하면서 하진과 이어 정원의 통제 아래 있던 중앙군을 흡수하면서부터였다.

 

아마 삼국지를 읽으면서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동탁에게는 여포가 있었다. 그러면서 이각과 곽사도 있었다. 둘은 서로 영역이 달랐다. 겹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 다른 세력으로 동탁이 죽은 뒤 충돌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각과 곽사를 따르던 이들은 원래 동탁이 거느리던 서량의 군사력일 것이다. 그러면 여포는 무엇으로 동탁의 측근을 자처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어째서 왕윤과 이숙은 여포를 끌어들여 동탁을 죽이려 했는가?

 

이각과 곽사를 우습게 여기던 조조가 서영에게는 아예 껍질까지 벗겨질 정도로 쳐발린 이유인 것이다. 17로 제후군을 상대로 동탁이 동원한 것은 이각과 곽사가 이끄는 서량군이 아니었다. 여포와 서영이 이끌던 낙양군이었다. 여포가 이각과 충돌할 당시도 서영은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함진영이라 불리던 고순의 역량과 충성심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이미 그에 대해 짧게 쓴 바 있었다.

 

이각과 곽사가 두려워할 정도로 동탁이 죽고 난 뒤 여포가 이끌던 중앙군은 서량군의 전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열세를 뒤집은 것이 바로 가후의 지략이었다. 그러고도 여포는 패잔병을 이끌고 천하를 떠돌며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그때 고순이 얻은 별명이 바로 함진영이었다. 정원이 하진에게 불려가 낙양군을 이끌었고 이후 여포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러면 대충 설명이 된다.

 

마초가 난리를 칠 때도 서량군의 전력은 조조가 이끌던 중앙군을 넘어서지 못했었다. 당연한 것이 당시까지는 아직 철갑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이 나타나기 전이었다는 것이다. 경무장한 기병을 상대로 한 한왕조의 전술은 후한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조조와 원소, 그리고 손권과 유비가 이민족들을 쳐바르고 다닌 이유였다. 그런 후한의 중앙군 앞에서 과연 서량군이 얼마나 위협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17로 제후군을 상대하는데 정작 서량군을 지휘하던 이각이나 곽사가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여포와 서영은 원래 중앙군을 지휘하던 지휘관들이었다. 그래서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한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서량군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 동탁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었다. 비장군이라 일컬어지던 여포의 무력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중앙군이 아직 여포를 따른다면 아직 지방군벌에 불과한 제후들이 그를 이기기란 어려울 터아. 당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가운데 하나다. 물론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족들이 자주 중국을 침략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북방 유목민족의 천적이야 말로 역대 중국왕조들이었다 할 수 있었다. 북방 유목민족의 기병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무려 수 천 년 넘게 그들을 상대로 싸우며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이 바로 중원의 한족들이었었다. 북방유목민족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고, 그러므로 그들을 상대하여 이기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통해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대비해 왔던 것이 바로 그들 중국인들이었던 것이다.

 

실제 한무제의 흉노정벌 이래 중국왕조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는 동안에는 고작해야 변경에서 작은 약탈이나 있을 뿐 대대적인 군사적 침략 같은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오히려 역대 중국왕조들이 압도적인 인구와 생산력을 바탕으로 원정에 나서면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아니면 아예 밀려서 근거지를 옮겨야 하는 일도 왕왕 일어났었다. 한무제에게 쫓겨 서로마까지 원정을 떠나야 했던 훈족이 그랬었고, 이후 초원의 지배자가 되어 중국왕조를 위협하다가 역시 떠밀려서 서아시아에 정착하게 된 투르크-돌궐 역시 그런 경우였었다. 어지간히 군주가 무능하거나 국정이 막장에 빠지지 않으면 아예 압도적으로 몰아내지는 못하더라도 쉽게 지지는 않는다. 당시 세계최강이던 몽골군을 상대로 가장 오래 치열하게 싸우며 버텼던 곳 역시 그래서 금에게도 쫓겨서 장강을 건너야 했던 남송조정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남송은 몽골군의 침략을 버텨낸 다른 문명들과 달리 금나라 바로 아래 몽골과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몽골이 세운 원이 약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바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며 손쉽게 몽골군을 패퇴시킬 수 있었던 이유였었다. 몽골군 자체가 약해진 것도 있지만 그만큼 다시금 꺼내든 대유목민족 전술과 기술들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원이야 원래 한족의 땅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천순제가 대도를 버리고 몽골고원으로 도망친 뒤에도 그를 쫓아 장거리 원정을 벌여 철저히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런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황제와 조정이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중국왕조의 군사력이 생산력도 변변찮은 유목민족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단 것이다. 그래서 부패하고 무능했던 명왕조역시 아주 무능한 지휘관만 아니면 국경 정도는 얼마든지 유목민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다. 명의 멸망조차 사실상 부패한 정치에 분노한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에 의한 것이었었고, 청군이 산해관을 넘은 뒤로도 남명조정과의 전투를 전담한 것은 여진족의 팔기군이 아닌 한족 출신의 녹번병이었었다. 청왕조가 건국되고도 준가르를 비롯한 유목민들과의 전투에서 역할을 한 이들 역시 전통적인 여진 출신의 기병이 아닌 한족 특유의 전술을 체득한 중국의 군대였었다. 숭정제가 최소한 선조 정도의 깜냥만 되었어도 청군은 절대 명을 멸망시킬 수 없었다.

 

그러면 중국민족들의 대기병전술이란 무엇인가. 일단 첫째 단기간에 쉽게 숙달시킬 수 있는 노궁을 고도로 개량하여 대량으로 배치한 뒤 주력으로 삼았고, 기병의 충격력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중무장한 병사들과 더불어 수레를 사용하여 기병의 충격력과 기동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바로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팔진도가 이같은 수레와 보병의 방진을 이용한 대기병진이었던 것이었다. 서진시대 마륭이 제갈량의 팔진도를 응용해서 단 3천의 병력만으로 선비족인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 그 목적이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팔진도를 당대에 들어 개량한 것이 이정의 육화진이었고 역시 북송시대까지 대기병전술의 기본으로 정착한다. 아무리 유목민족들의 기마전술이 뛰어나도 상대적으로 인구나 생산력에서 뒤지는 만큼 병력도 무장도 열세일 것이기에 그 점을 우위로 삼아 철저히 물량으로 압도하는 전술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중무장한 기병까지 더해지면 유목민족들로서는 답이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삼국지에서 주변의 유목민족이란 일찌감치 퇴장한 공손찬에게도 썰려나가는 가련한 신세였을까.

 

기병이 그렇게까지 무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만한 비용이 필요하고 또한 어느 정도 희생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워낙 인구가 많았으니까. 전쟁에서 어지간히 죽어나가도 그만큼의 인구가 바로 다시 채워지고는 했었다. 그 이상의 인구도 얼마든지 먹여살릴 수 있을 만큼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도의 기술문명 또한 양자의 차이를 벌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목민들이 농경민족을 이기기란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 중국의 한족이었던 것이고. 결론은 그럼에도 유목민에게 휘둘릴 정도로 역대 중국의 정치가 막장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 그대로였다. 중국인들이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아예 정치에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는다. 청대에 있었던 문자의옥으로 인한 영향도 작지 않을 테지만,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부패하고 무능한, 그래서 왕조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던 역대 조정들에 대한 불신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저놈들 믿느니 우리끼리 알아서 한다. 저 새끼들에 기대느니 그냥 우리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고 본다. 그래서 지금도 유행하는 것이 중국 무협소설이란 것이다. 멀리 황제보다 바로 이웃한 우리동네 짱이 최고다. 중국은 약하지 않았다. 참 슬픈 역사의 진실이다.

아마 조선중후기가 배경일 고전소설 '장화홍련'에서 장화와 홍련 자매가 아버지의 후처인 의붓어머니와 동생 장쇠에게 살해당한 것은 다름아닌 자매의 친어머니가 남긴 적지 않은 재산이 원인이 되고 있었다. 장화와 홍련 자매의 친어머니는 돌아간 부모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었는데, 두 딸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나자 남편이 아닌 두 딸이 상속자가 되어 후처와 자식들과는 상관없는 재산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장화와 홍련이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자매의 자식들에게 물려지게 될 뿐 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 장쇠의 몫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무렵이 하필 재산은 당연하게 아들에게 물려지는 것이란 인식이 자리잡아가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조선중후기라면 '장화홍련전'의 공간적 배경은 조선에서도 변방이었던 함경도였었다. 조선사회의 변화가 가장 늦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이미 조선 중기에 이르면 조선에서도 장자상속이 정착되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장화홍련전의 배경은 거의 조선 후기에 가깝다. 아마 17세기 아니면 18세기 쯤 될 것이다. 거의 후기다. 그러고보면 '흥부전' 역시 형 놀부와 부모로부터 공평하게 재산을 물려받았다가 부당한 강압과 강요에 그 재산을 모두 빼앗긴 동생 흥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는 당시까지 부모로부터 재산을 골고루 물려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결국에 장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며 차남 이하는 원래 자신들이 받을 몫을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 대중의 무의식을 다룬 소설이 아니겠는가. '장화홍련전' 역시 하필 사회적 변화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던 함경도를 배경으로 장자상속과 균분상속이라는 관습의 공존으로 인한 혼란과 비극을 다루고 있었다. 아내의 재산은 곧 남편의 재산이고, 아버지의 재산은 아들이 물려받는다. 어머니의 재산이라고 딸이 물려받아 가져가는 것은 부당하다. 다만 '장화홍련전'의 판본이 전해지는 가운데 장자상속이 완전히 정착되어 버린 결과 그 살해의 동기는 이후 묻히고 말았다.

 

사실 인류역사를 보면 장자상속은 오히려 매우 늦게 나타난 제도였을 것이다. 심지어 프랑크 왕국의 경우는 세 아들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나라 자체가 쪼개지고 있었을 정도로, 굳이 나라까지 쪼개지 않더라도 영토를 나누어 영주로 임명함으로써 일정한 지위와 재산을 보장해주는 경우가 봉건사회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의 장미전쟁도 그래서 공작으로 임명받은 전왕과 전전왕의 형제들이 왕위를 노리고 서로 싸우며 시작된 것이었고, 프랑스 왕실 역시 왕과 피로 이어진 고위귀족들로 인해 항상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하긴 이게 원인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유력 다이묘들이 자식들에게 신분과 재산을 물려주는 방법으로 자기 영향력 아래 있는 가문에 양자로 보내 상속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모리씨의 아들이 깃카와가 되고 고바야카와가 되었던 이유였다. 이미 있는 가문의 영지를 나누면 힘도 약해지고 서로 상속받겠다고 싸우다 망하는 상황까지 벌어질지 모른다. 

 

유럽 중세의 초기만 하더라도 유력 영주들 가운데 자식들에게 고루 영지를 나누어주는 경우가 없지 않았었다. 정확히 한 명의 자식에게 - 특히 혼란이 없도록 장자에게 물려주는 제도가 의도적으로 정착되었다기보다 적자생존의 경쟁과정에서 아들들에게 고루 영지를 나누어주던 영주들이 몰락하며 도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천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영지를 아들 셋에게 각각 330명씩 모을 만큼 나누게 되면 결국 각각의 아들들은 600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는 이웃한 약소영주보다도 약해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세대가 지나면서 또 더욱 그 자식들에게 나뉘어지게 되면 더 약해지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문을 위해서라도 가문을 물려받을 장자 이외에는 없는 자식으로 취급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나마 차남은 성직자가 되어 나름대로 가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삼남 이하는 장남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손발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조차도 대를 이어가면 의미를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가문의 힘이 온전히 장남 한 사람에게 물려져 가문이 다른 가문과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을 수 있다.

 

조선후기 양반사회를 정의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문벌이다. 가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조선후기에 이르면 오히려 붕당의 의미는 약해진다. 어떤 당파인가보다 어떤 가문의 소속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원래 조선의 붕당이란 것은 퇴계나 남명, 화담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학맥에서 이어지는 것이었을 텐데, 그래서 숙종대까지 붕당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자손인가 하는 것보다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하는 것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전부터도 그런 경향이 보이긴 했지만 영정조대에 이르면 확실히 사대부들도 가문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 정확히 당시의 왕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일족 단위로 등용하여 쓰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래서 당시부터 양반사회는 붕당이 아닌 왕과의 친소, 물리적인 거리까지 포함한 벌열이나 향반이냐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영남의 유림들이 보리문둥이라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면 과연 이처럼 가문의 힘을 더욱 강하게 키우고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전처럼 출가외인인 딸에게까지 재산을 나누어야 할까? 아들도 하나에게만 물려주어야 할까?

 

우리 할아버지가 종가집에서 머슴 비슷하게 살았던 이유였었다. 종가와 갈라진 것은 그보다 몇 대 위였는데 재산도 무엇도 없이 그냥 성씨만 물려받아 인근에서 살다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는 들어가서 허드렛일이나 도우며 살았던 것이었다. 정확히 양반이 아니었다. 양반이려면 이전 3대 가운데 과거급제자가 있어야 했는데 부쳐먹을 땅도 없는 처지에 과거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럼에도 같은 문중이니 어려서 글공부는 하도록 해주고, 먹고 살 방편도 마련해 주었지만 딱 거기까지였었다. 할머니도 당시 종가에서 중신을 서주어 혼인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 조상이 양반이었다고 자기도 양반이라 말하는 것은 당시 조선사회를 기준으로도 성립하지 않는 말이란 것이다. 오로지 장자만이 집안과 재산을 물려받고 신분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그냥 조상이 같고 성씨가 같은 다른 신분의 일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야 조정에서 벼슬 같은 건 꿈도 못꾸는 시골양반이라도 동네에서나마 신분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장남 이외에는 혹시라도 장남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예비 이외에 그냥 없어도 그만인 잉여에 지나지 않았었다. 귀족이든 양반이든 신분을 물려받지 못하고, 같은 조상을 두었을 뿐 세대가 지나면 그 신분마저 나뉘게 된다. 귀족에게 양반에게 귀족이 아니고 양반이 아닌 이들의 존재란 어떤 의미이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아예 분란의 소지를 없애겠다고 차남 이하에서는 아예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도록 강요하는 경우마저 상당했었다. 괜히 차남을 성직자로 만드는 게 아니란 뜻이다. 불교나 가톨릭에서 성직자는 공식적으로 후계를 이을 자식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가문 안에서는 희망이 없으니 다른 곳에서 길을 찾아 보겠다고 온통 중세사회를 들쑤시고 다니던 골치덩이들이었을 것이다. 막말 일본에서 유명했던 신센구미에도 그래서 차남이나 삼남들이 그리 많았었다. 물론 당시는 거의가 독신이었었다. 지금의 출산률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가문은 의미가 없지만 내 자식이란 의미는 있다. 내 자식이 남들과 경쟁해서 번듯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그런데 지금 사회구조 안에서 모든 자식을 그렇게 키우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부모들이 기대하는 최소한의 삶의 수준이란 것이 있을 텐데 모든 자식들이 그런 수준에 이르도록 기르고 가르치기란 불가능하다. 안정된 직장 없이.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래서 보면 정규직이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결혼률이나 출산률이나 그다지 낮지만 않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매우 높다. 다만 그런 안정된 직장을 가진 이들이, 특히 젊은 세대가 이미 이 사회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세대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도 남들과 경쟁하여 살아남을 만큼 키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포기한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고 의미없는 일이다.

 

그냥 낳아서 기르기만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란 것이다. 남들만큼 먹이고 입히고 무엇보다 가르쳐야 한다.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이미 거의 없으니 상당한 재산과 지위와 신분까지 물려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도 결혼하면 아파트 한 채는 해 주어야 한다. 물려줄 재산도 있어야 한다. 내세울만한 직업과 신분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답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다. 모든 국민이 경쟁할 수 있을 만큼의 신분과 직업과 재산을 가지게 하던가, 아니면 경쟁에 목매지 않는 사회를 만들던가. 그냥 부모가 낳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 부모에게서 받지 않아도 사회로부터, 혹은 자신이 쟁취해서 얼마든지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거의 혁명수준이다. 지금까지의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의식까지 모두 근본부터 바꿔야만 하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목숨 걸고 좋은 직장에 목을 매고 그래서 남들만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자식을 이유로 피를 나눈 형제까지 서로 틀어져 다시 보지 않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다. 남들에 내세울만한 자식이니까. 그보다 못한 부끄러운 내 자식일 테니까.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지금은 출산률이 더 높은 이유이기도 할 테고. 일본보다 개인화가 덜 되었다. 아직은 타인을 의식하며 그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방법을 알면 내가 뭐라도 했겠지. 어렵다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소련 영토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들과 독일 영토에서 저지른 소련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평가가 다른 이유는 하나다. 소련군은 단지 독일군 영토에서 자신들을 침략하여 학살과 강간, 약탈, 파괴를 저질렀던 독일인들에 복수를 했던 것이었다. 반면 나치 독일은 슬라브인에 대한 자신들의 인종적 편견과 차별을 여지없이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이해가 가는가?

 

오래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후손이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미치후사의 머리를 잘라 뱃머리에 걸었던 행동을 두고 너무하다며 비판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오다 노부나가가 자기 처남이기도 했던 아자이 나가마사의 머리를 술잔으로 만들어 연회에서 사용한 사실이 있었다. 그만큼 급박했으니까. 아자이 나가마사가 돌아서며 퇴로까지 끊기고 하마트면 오다 노부나가 자신의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복수다. 그만큼 나를 위험하게 만든 적이었기에 철저한 보복을 통해 그를 되갚아주려 한다.

 

적을 살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더욱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강력한 적을 철저하게 말살하여 미연에 예방하는 행위는 오히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옳은 행위라 할 수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세 척의 일본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키고 수 천에 이르는 일본군을 몰살시켰어도 누구도 그것을 전쟁범죄라 부르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일본의 민간인들이 일본군을 도와 미군을 살해하고 있다면 마땅히 그 민간인들 역시 적으로 간주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 수단 가운데 필요하다면 생명을 빼앗고 생활시설을 파괴하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드레스덴 폭격은 끔찍한 비극이지만 당연히 전쟁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인 것이다. 도쿄대공습이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군인만이 아닌 민간인을 포함한 일본이란 국가 자체가 적이었고 따라서 그 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민간일을 대상으로 한 공격 역시 정당화된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질렀더는 민간인 학살이 나치 독일이나 구 일본제국군의 학살과 다른 성격을 가지는 이유다. 남경에서 일본군은 전혀 자신들에 위협이 되지 않는 중국인 민간을 상대로 그야말로 자신들의 쾌락과 만족을 위한 학살과 약탈을 저지르고 있었다. 남경의 중국인들이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그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살과 강간, 약탈, 파괴라는 행동을 저지른 것이었다. 소련에서 나치 독일이 보인 행동 역시 유사했었다. 차라리 소련군이 자신들과 맞서 인정할만한 성과를 보였다면 그렇게까지 무심한 잔혹함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슬라브인은 열등하다. 러시아인은 자신들 게르만인에 비해 열등한 존재들이다. 차라리 분노다. 혐오고 증오다. 저런 열등한 존재들을 가만 내버려두고 있는 자체가 자신들에게 죄책감마저 들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베트남에서 한국군은 베트콩인지 무고한 일반인진지 구분조차 모호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로 직전까지 무고한 베트남의 일반인이었다가 한 순간에 베트콩의 일원이 되어 한국군을 위협으로 내몬다. 어찌해야 하는가.

 

만에 하나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인들이 더 두려워하고 긴장해야 한다 말하는 이들이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열등한 대상들에 대해 학살을 저질러 왔지만, 한국인들은 적을 말살하기 위해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제거해 왔었다. 적이라 여기면 잔인해진다. 한 번 적이라 여기고 나면 무감각해진다. 가장 원시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인종적인 학살에는 죄책감이 있을 수 있어도 적에 대한 말살은 죄책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광주에 대한 양심선언이 그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던 이유였다. 적을 향한 모든 행위는 가혹할수록 정당하다.

 

적은 죽인다. 적은 말살한다. 적은 파괴하고 배제한다. 대신 적이 아니라 여기면 그때부터는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된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그랬었다. 아군이라 여기면 누구보다 친절하다가 적이라 여기면 누구보다 악독하고 가혹해진다. 인종적인 우월감에 기대 약자에게 더 가혹했던 나치 독일이나 구일본제국군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물론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공산당은 적이다. 공산당에 부역하는 것도 적이다. 적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적은 적이고 오로지 아군만이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할 인간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베트남에서의 학살이나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을 이전의 다른 학살과 구분할 수 있게 된 이유인 것이다. 나치독일과 구일본제국군이 특별한 이유인 것이다. 아니 제국주의 이후 열강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저지른 범죄들이 이전과 다른 이유들인 것이다. 적을 살해하는 것은 정당하다. 적은 철저히 파괴하여 무력화시켜야 내가 안전할 수 있다. 그들은 적인가? 아니면 단지 무력한 약한 존재일 뿐인가. 항상 생각이 깊어지는 이유다.

과연 조선의 왕권은 약했었는가? 언제부터인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만 보면 왕과 맞먹으려는, 심지어 왕의 머리위에서 존재하는 권신들이 당연하게 악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 권신의 존재와 맞서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정의인 것처럼 대부분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실제 역사에서도 신하들이 왕의 머리 위에서 놀고 왕은 그런 신하들의 눈치나 보는 존재였던 것인가.

 

간단히 중국 전한의 선제가 곽광의 일족을 제거하기까지의 과정과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선제가 곽광도 아닌 그 자신들을 제거하는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었다. 이미 대부분 군권까지 곽광의 자식들이 쥐고 있었기에 그를 빼앗고 만에 하나 모를 반격의 여지까지 없애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많은 주의를 기울여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나가야 했었다. 반면 흥선대원군은 어떠했는가. 아니 그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는 과정조차 바로 당일 입궐하려는 흥선대원군을 막아서는 것으로 끝내고 있었다. 왕명이라는 한 마디에 안동 김씨는 조정을 이루는 여러 세력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심지어 전국의 서원마저 철폐될 지경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잘나서? 원래 조선의 왕권이 그만큼 강했던 탓이다.

 

심지어 안동 김씨에 의해 꼭두각시로 세워졌다는 철종조차도 한 번 제대로 화를 내면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마저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째서 철종은 안동 김씨의 전횡을 묵인하며 그들의 꼭두각시 역할만을 해야 했던 것인가. 그것이 권력인 때문이다. 어째서 후한의 황제들은 그토록 환관들을 총애하여 국정을 혼란으로 몰아간 것일까? 환관이 사라지면 외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스스로 명문으로써 상당한 일족을 거느리고 세력을 이룬 외척과 황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환관 가운데 누구를 선택해서 권력을 몰아주어야 하는가는 산수만 할 줄 알아도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아닌 환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고, 일거수일투족까지 아내나 자식이 아닌 환관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권력에 있어서도 환관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을 나누고 부정과 전횡을 묵인하는 대신 오로지 황제 자신에게만 충성하게 만든다. 역대 중국의 황제들에게 어떤 충신보다도 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가 환관이었기에 그것이 권력이 되어 전횡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다.

 

권력이란 절대 혼자 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협력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한으로 여겼던 주원장이 정작 명을 건국하는 과정에서는 지주들을 위한 정책을 앞세워야 했던 이유였다. 덕분에 당시 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강남의 지주들이 주원장의 편을 들어 명의 건국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건문제를 동정하던 강남의 세력이 아닌 자신을 지지하는 하북의 유력자들을 택해서 영락제는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옮겼던 것이었다. 조선도 여전히 고려왕조를 지지하며 새로운 왕조에 반감을 가진 개경을 떠나 한양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했던 것이 아닌가. 권력과 이해를 공유하는 기반이 되는 세력이 있어야 권력 역시 안정되게 권력을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런 친위세력의 도움 없이는 숭정제처럼 스스로 목을 매달거나 단종처럼 왕위에서 내쫓기고 죽임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권력을 가진 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권력을 지켜 줄 우군부터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지켜 줄 우군이 없었기에 임기 내내 고립되어 온갖 공격에 시달리다 오욕속에 죽어갔던 노무현 전대통령과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을 비교해 보라. 낙하산이네 뭐네 해도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행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여러 자리에 여권의 인사들을 임명한 행위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전리품을 나누지 않으면 누구도 함께 힘써 싸우려 하지 않는다. 이익이 없다면 충성도 연대도 없다. 공동운명체가 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정동영이 그 전리품을 나누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직접 나누었다. 이낙연이 불만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가 민주당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상황이 이래서야 앞으로도 문재인 그늘에 가려 있을 뿐이다. 그런 불만에서 나온 오판이 아니었을까. 사면론은. 문재인 대통령의 편에 서 있는 동안에는 자리도 있고 이익도 있다. 그러므로 민주당 정치인들도 모두가 문재인 대통령의 편에 선다. 그래서 참여정부 당시에도 정동영의 뒤에 정치인들은 줄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숙종이 몇 번이나 환국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숙청한 것이었다. 소론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경종이 노론을 숙청한 이유이기도 했었다. 선조는 너무나 비대해진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서인과 손잡고 정여립의 모반을 이용하여 기축옥사를 일으켰었다. 다만 광해군은 선조에 의해 불안해진 자신의 입지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소수파에 불과한 대북에만 의지했다가 결국 서인과 남인의 연합에 왕위를 잃고야 말았다. 태종부터 세종까지 양성된 실무관료들은 서로 분열하여 단종을 지키지 못했고, 절치부심한 종친과 공신의 후예들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영정조에 의해 사실상 당파가 사라지고 왕을 중심으로 사대부의 줄세우기가 끝난 세도정치 시기 왕들에게 선택지란 무엇이 있었을까? 왕과 가까운 한양의 벌열들만이 사실상 관직과 권력을 독점하는 가운데 소수 가문들의 문벌화가 이루어지면 선택지란 결국 그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세력이 큰 안동 김씨를 등뒤에 세우면 감히 다른 누구도 자신에게 도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라고 정조가 김조순을 순조의 장인으로 삼고 고명을 맡겼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철종과 안동 김씨의 관계는 중국 전한 선제와 곽광의 관계와 비슷하다 봐야 할 것이다. 전한 선제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곽광의 선택 덕분이었다. 곽광이 소제의 뒤를 이어 황제로 추대된 창읍왕의 행실을 문제삼아 그를 쫓아내고 선제를 차기 황제로 선택했기에 그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당대 곽광의 권세는 감히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었었고, 그런 곽광의 선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선제 역시 절대적으로 곽광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곽광을 부정하는 순간 자신의 즉위마저 부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곽광이 죽고 그 일족을 모두 주살한 뒤에도 곽광 만큼은 신원하여 제사까지 지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대에 안동 김씨와 견줄만한 세도가가 없고, 바로 그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오른 만큼 안동 김씨의 권력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안동 김씨와의 공존은 필수다. 다만 그렇더라도 철종이란 존재가 사라지면 안동 김씨의 권세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실제 고종이 즉위하고 그렇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안동 김씨를 몰아내는 과정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안동 김씨를 대신할 세력으로 흥선대원군이 선택한 것이 바로 종친과 풍양 조씨였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안동 김씨의 상당수를 여전히 조정에 남겨두고 있었다. 즉 종친인 전주 이씨와 대비 조씨의 가문인 풍양 조씨에 기존의 안동 김씨의 신파, 여기에 더해 중전 민씨의 친정인 여흥 민씨까지가 모여 조정을 이루고 고종의 왕권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 정도 힘이 있으니 안동 김씨도 몰아내고 고종의 권력기반도 단단히 다잡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신하가 감히 왕의 눈을 똑바로 보고 심지어 막말까지 하는 드라마의 상황 같은 건 실제 역사에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의 역대 황제들보다는 못했다 뿐이지 조선의 왕권은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왕권이 약하다 하려면 왕이 언제든 내쫓길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데 왕권이 가장 약했다는 철종조차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시작한 것인지 아주 드라마 볼 때마다 짜증나는 이유인 것이다.

 

영정조의 개혁이 오히려 조선을 약화시키고 쇄망의 길로 이르게 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당쟁이 사라지고 결국 왕을 중심으로 줄세워진 문벌만이 남게 되자 결국 왕과 특정 문벌과의 결탁이 세도정치로 이어지며 조선을 지탱해 온 국가의 근본까지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세도정치의 시작을 연 안동 김씨의 김조순조차 정조가 어린 세자 순조를 위해 안배한 것이었으니. 당쟁이 문제가 아닌 당쟁이 사라진 이후가 문제였던 것이다. 상식과 달리.

뭣도 모르던 시절에는 진짜 심각하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 민족에게는 창세신화가 없는 것일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한민족만의 서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한때 환단고기에 이끌리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원래 우리 민족에게도 창세신화가 있었는데 유교화의 과정에서 망실되었고 일부 지역의 무가에 그 흔적이 남아 전해지게 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은 신화든 역사는 인류적인 관점에서 넓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유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논쟁이 이루어진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물성동이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성이 서로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과 대비되는 물物이라는 것이 사람 이외의 다른 동물이나 사물 정도가 아닌 문명화된 중화 이외의 다른 이민족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중화를 이루었다면 사람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사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중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야만족인 만주족 역시 사람이 아니기에 과연 그들에게도 사람과 같은 성이 있는가를 진짜 쓸데없이 심각하게 논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만주족이 지배하는 중국도 중화로 여겨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아닌 만주족이 지배하므로 중화는 이제부터 조선만 남게 된 것인가? 

 

그러면 과연 조선만 그랬을까? 19세기 교황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바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당시까지도 아메리카 원주민은 교회 입장에서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교회 입장에서도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백인들의 학살과 약탈과 강간은 범죄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이 아닌 것들로부터 신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소중한 권리를 되찾는 숭고한 행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다고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는 벌써 오래전에 개종을 했음에도 여전히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집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학살인데 집시는 학살조차 아니다. 오만가지로 욕을 들어먹는 히틀러와 나치지만 그러나 집시학살을 가지고 욕하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 정도다.

 

아무튼 그런 맥락인 것이다. 유대인의 유일신인 야훼는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창조주인 것인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 북유럽 등 세계의 수많은 창세신화에서 창조주들은 이 세계와 함께 모든 인간들을 함께 창조했던 것인가? 유대인들이 여리고성을 함각할 당시 대항하던 성민들에 대해 했던 행동들을 보면 최소한 유일신 야훼에게 있어 여리고의 성민들은 최소한의 연민이나 동정조차 가질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인류를 자신이 창조했다면 여리고의 성민들도 자신의 창조물일 텐데 어째서 그런 것일까? 어째서 자신의 창조물일 블레셋 등 다른 이민족에 대해서는 그토록 적대적이고 잔혹하기만 했던 것일까? 그래서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래서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하느님이라고.

 

그러니까 모세와 약속하며 전한 십계명에서도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짜 신이 아니다. 신을 참칭한 존재가 아니다. 분명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이라 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아들들밖에 없었을 텐데,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났을 때 야훼는 그런 카인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주고자 했었다. 야훼는 단지 유대인만의 신이었고, 더구나 유대인이 섬기던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였었다면 이 모든 의문은 한 방에 해결이 된다. 즉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러 민족들과 수많은 정복전쟁을 치러야 했던 유대인들이 필요에 의해 군신이던 야훼를 선택하여 유일신으로 받들기 시작했다면 이 모든 모순들이 설명되는 것이다. 오로지 전쟁에서의 승리가 필요했기에 군신이던 야훼를 선택했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몰아주었으며, 그러므로 야훼는 단지 유대인의 신이었다. 야훼에게도 유대인만이 자신의 창조물이며 자신의 백성이었다. 그러니까 이민족들에 대해 그리 잔혹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야훼의 백성도 창조물도 아닌 그냥 이물이었으니까.

 

세계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렇다. 아니 신화 이전에 대부분 사람들에게 세계에 대한 인식이란 자체가 그랬었다. 서울을 벗어나면 모두 시골이라는 서울촌놈들처럼 자기들 이외에는 사람도 아니었고 문명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사람이었고 자신들이 이룬 것만이 문명이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들의 창조주가 예정한 것이고 허락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정복하고 학살하고 약탈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 주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유럽의 백인들처럼.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수도 없이 학살과 약탈과 방화와 강간이 저질러졌지만 유럽의 백인들은 그것을 죄악이라 여기지 않았었다. 오히려 원래 자신들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마저 느끼고 있었다. 과연 고대라고 달랐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 그 세계가 좁고 세계에 대한 인식도 얕았던 당시라면 더 나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비천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들이다. 설사 자신들보다 앞선 문명을 이루고 있어도 자신들의 신이 예정한 바에 따라 곧 자신들의 지배 아래 들어올 하찮은 존재들이란 것이다. 그런 존재들까지 신이 자신들처럼 공을 들여 창조했을까? 저들의 신이 창조했을 것이고, 설사 신이 창조했어도 들판의 사슴이나 말처럼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같은 것이었을 터다. 그래서 유대인의 신은 사람을 창조한 것이었다. 유대인에게 유일한 사람일 유대인을 유대인의 신인 야훼가 창조했던 것이었다. 구약은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다. 유대인의 신인 야훼가 유대인을 창조하고 유대인에게 시련과 영광을 준 뒤 영원을 약속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그래서 유대인의 율법이고, 구약의 약속 또한 유대인을 위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등장한 것이었다. 야훼가 아닌 데우스라는 이름으로, 유대인만의 신이 아닌 모든 인류의 신으로써. 

 

복음서에 나오는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귀절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이미 당시 예수의 세계는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넘어서 로마가 정복한 모든 세계와 심지어 그와 맞서는 파르티아에까지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차별받던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예루살렘과 대성전마저 로마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단지 작은 주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영광스러워하는 솔로몬의 제국보다도 더 거대한 세계가 아시아였고, 그 아시아마저 정복한 로마는 그보다 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파르티아와 그와 군사적으로 대결하던 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신 역시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과연 자신들의 신이 이 모든 세계와 인류를 창조했다면 신이 예정한대로 이 세계의 일부를 지배하는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신을 배반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즉 예수의 신약이란 유대인의 신이 유대인과 약속한 구약을 벗어난 세계의 신이 세계의 인류와 맺은 새로운 약속이란 의미인 것이다. 비로소 유대인의 신은 유대인을 벗어나 세계의 모든 신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신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신은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어야만 했었다. 유대인의 신이 유대인의 왕과 유대인의 제사장에 의해 독점되었던 것과 달리 유대인을 벗어난 세계의 모든 인류, 대중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었다. 초기 교회가 다시 구약을 불러들인 이유였었다. 새로운 종교지도자들인 주교들을 위해서도 필요했었고, 무엇보다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게 될 황제를 위해서도 필요했었다. 사실 그래서 영지주의도 기독교를 전혀 엉뚱하게 이해한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소수에게 독점되는 비밀스런 것이 아닌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것이었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사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말 한 마디에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성직자에게 복종하라거나 교회에 충성하라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예수의 하느님은 세계의 하느님이고 전인류의 하느님인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예수 스스로 그렇게 실천하고자 했으니까. 이슬람의 하느님이 그런 것처럼 그렇게 유대인에게서 시작된 신은 세계로 나와 세계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런데 오히려 여전히 유대인의 구약시대에 갇혀서 설교하는 목사들은 뭐하는 존재들인 것인가. 유대인의 율법을 강조하며, 유대의 역사를 자기 역사처럼 배운다. 배척과 증오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를. 과연 지금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유대의 율법인가, 아니면 신약의 가르침인가. 예수의 것인가, 유대인의 것인가? 아이러니한 것이다.

 

결론은 단군신화에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한 가지란 것이다. 이미 단군신화가 만들어질 무렵 조선인들은 국경 너머의 중국문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자신들과 다르지만 결코 그렇다고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문명과 그 문명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이웃해 있었다. 그렇기에 하늘의 선택을 받은 존재로써 자신들을 그들과 구분지으려 했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신들의 군주는 자신들만을 위한 존재였다. 홍익인간도 결국은 세계 보편의 인간이 아닌 자신들의 인지가 미치는 영역 내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다. 인류를 이해하기란 아직 인간의 인식이 미천했다.

실제 고조선이 요하 유역에 세워진 것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 무렵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패하며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기게 된다. 이어 기원전 2세기를 경계로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준왕은 남하해서 마한을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준왕이 아니더라도 고조선의 권력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많은 지배층이 이탈하여 남하하며 한반도 남부에서 정치세력을 이루었을 것이다. 고조선 세력을 한민족의 주류라 한다면 한민족의 주류가 한반도 남쪽까지 남하해서 정치세력을 이룬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들이 내려오기 전 한반도 남쪽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부정하거나 혹은 의문을 갖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던 왜의 세력과 그를 증명하는 듯한 고분군 등의 유적들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이다. 어째서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와 더 가까운데도 일본인들이 사는 일본의 영토로 남아 있는가. 한 마디로 한국인의 주류가 만주와 요동을 거쳐 남하하기 전 한반도 남쪽에는 바다를 통해 건너온 일본의 주류와 같은 왜라 불리우던 이들이 살고 있었으며, 바로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인의 주류가 이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밀려나 아예 한반도에서 내쫓기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아직 과도기이던 삼국시대 후기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던 왜의 세력과 일본 열도의 왜는 서로 교류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백제 왕실과도 소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백제계라 전해지는 당시 일본의 권력자들 가운데는 백제와 연관이 있을 뿐 민족적으로는 오히려 일본의 주류와 같았을 이들 또한 상당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마도가 거리상으로 한반도와 더 가까운데도 지금까지 일본인이 사는 일본의 영토로 남은 이유는 북쪽으로부터 남하한 한국인의 선조가 한반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미처 바다건너 대마도까지 관심이 미치지 않은 결과란 것이다. 바다를 건너 정복한다는 자체도 많은 시간과 비용과 수고가 들어가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대마도는 그다지 탐나는 땅이 아니었다. 지금도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있다는 것 말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어업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난한 지역이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대마도로 관광을 많이 가서 조금 형편이 피었을 뿐 역사상 항상 가난했고 그래서 또한 한반도의 해안가를 약탈하는 해적들의 소굴이 되고는 했었다. 태종이 한 번 토벌군을 보내고 나서 굳이 더이상 조공이나 받고 제한된 무역만을 허락할 뿐 군사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던 것도 그만큼 실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한국인의 남하는 한반도 해안가에서 멈췄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본서기의 기록들도 영산강 유역에 남은 흔적들도 모두 납득이 간다. 어째서 백제와 가야까지 참여하는 임나의 존재가 역사서에는 등장하는가. 그 먼 바다를 건너서 왜는 무려 수 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해서 광개토대왕의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과연 기원 2세기, 3세기 일본은 역시 바다건너 신라까지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영산강 유역에서 동해안과 가까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육지로 이동하기보다 바다를 통하는 편이 더 쉽고 빠르다. 여기서 혹시나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백제의 중심지는 호남이 아닌 호서 - 즉 지금의 충청도였다는 사실이다. 원래는 한강유역인 서울 인근이었다가 장수왕에게 박살나고 지금은 충청남도 여군에 속한 사비까지 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전, 그리고 이후로도 백제 왕들과 긴장관계를 이루던 이 일대의 지배세력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냥 한민족이란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고 처음부터 한반도에 살았었다는 민족주의의 신화만 지우면 쉽게 도달하게 되는 결론인 것이다. 최초로 한반도에 정착했던 초기인류들 역시 결국은 이주민들이었다. 중국을 지나서든, 혹은 바다를 통해서든, 만주를 거쳐 북에서 내려오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동해 온 이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며 차례로 한반도의 주인이 되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땅으로 남하해 온 것이 아니란 것이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도,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도, 가야의 건국왕인 김수로 역시.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이땅에는 주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럴 경우 자칫 한반도 자체가 일본인들에게 회복해야 할 고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쫓겨나고 수백년 뒤에나 일어난 일인 것이다. 원래 한반도는 한국인의 땅이었고, 한국인이 한반도의 주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반도의 주인들을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역사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문제다. 하필 그 대상이 일본이기도 해서.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역사의 한가운데 고대의 일까지 끼워넣기란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지우고 나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 처음 한국인들은 선주민인 일본인을 이기고 그들을 내쫓은 뒤 한반도의 주인이 되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내가 안철수라는 정치인에 대해 의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사실 별 것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라는 인물을 다시 발견했다는 '무릎팍도사' 출연분을 통해서였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아마 그동안 내가 정치인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보았다면 얼추 눈치챘을 것이다. 어차피 옷차림이나 몸가짐이야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글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판단을 빌리라고 따로 참모도 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하는 것 만큼은 어쩔 수 없이 길게 숨기거나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에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세심하게 세밀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적확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는가. 그만큼 듣는 상대를 배려하면서 최대한 자신의 의사를 오해없이 전달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다양한 풍부한 어휘와 정교한 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박근혜가 공주라는 이유다. 아마 정치를 하기 전까지 박근혜는 말도 거의 몇 마디 하지 않으며 대부분 혼자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나경원이 제멋대로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며 뻔한 거짓말과 말돌리기를 일상으로 하는 이유 역시 상대가 자신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교안 역시 그렇게 사려깊게 어휘를 선택하고 사용하는 타입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역시나 그리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다. 알아서 듣고 알아서 들어야 하는 타입이라 할 수 있다. 

 

언어란 습관이다. 그리고 그 습관은 주위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누구와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말하는가. 그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여기고 있는가. 그래서 말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도 알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평소 주위와의 관계에 대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한 편으로 언어란 한 사회, 혹은 한 문명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고도로 거대화되고 복잡화된 사회에서는 그만큼 정교하고 체계적인 언어라 필요하게 된다. 의미를 세분화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키며 전혀 이해가 없는 타인과도 소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각각 라틴어와 중국의 한자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중해세계에서 로마는 가장 크고 강하고 가장 고도화된 문명을 가진 제국이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중국의 여러 왕조들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그들이 이룬 고도의 문명은 남아 다른 민족 다른 문명에게 전해졌다. 굳이 대상을 표현할 어휘를 찾기도 전에 먼저 어휘가 전해지고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일어났다. 유럽과 동아시아의 문명은 그같은 라틴어와 한자어의 토대 위에 지금까지 발전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닌 미국의 영어가 라틴어와 한자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중이다. 차라리 영어의 표현을 빌리는 것이 자기 언어에서 새로운 표현을 만드는 것보다 빠르고 쉽다. 전달하기도 이해하기도 더 편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명의 발달정도에 따라 영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표현들이 언어마다 존재한다.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는가. 얼마나 정교하고 세밀하게 의미의 차이를 이해하고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가. 얼마나 의미는 적확하게 오해없이 전달될 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 원시사회에서는 그렇게 고도로 발달한 언어체계 같은 것은 그다지 필요치 않을 때가 많다. 세계가 좁고 관계가 단순할 때는 그냥 '그것'이라 말해도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충 두엇이라 말해도, 얼추 자작하다 표현해도 그 의미를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도화된 사회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은 명확해야 하고, 둘인지 셋인지, 물은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적시되어야 한다. 선명과 분명과 또렷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명징 역시 굳이 풀어서 쓰는 이상의 의미를 단어 그 자체로서 가진다. 몰라도 상관없지만 알게 되면 더 다양한 상황에서도 더 많은 구체적인 의미들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문명의 고도화이며 언어의 진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성의 발달이다.

 

과연 그렇게까지 고도화된 어휘와 표현들이 필요한가. 물론 필요치 않다. 말한대로 좁은 관계 안에서 관습적으로 대화할 때는 대충 의미만 통하면 알아서 이해하게 된다. 그런 때는 굳이 어휘를 고르고 걸러서 표현하는 자체가 의미없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서도 더 구체적이고 더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추상적인 의미들까지 더 적확하게 오해없이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은 더 다양한 더 풍부한 어휘들이 필요하다. 그런 표현들을 찾고 혹은 만들기 위해서 개인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사유하며 궁리해야만 한다. 그래서 또한 언어란 개인의 관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지성까지도 낱낱이 보여준다. 얼마나 많이 아는가 하는 지성이 아닌 그를 위해 노력해 온 과정들인 것이다. 얼마나 일상에서도 사려깊게 대상을 구체화하여 인식하고 전달하려 노력하는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거시기면 거시기다. 머시기면 머시기다. 그것이면 그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단어들을 써가며 표현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런 단어들이 있기에 의미는 더 명확히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 힘든 그 단어만이 가지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호적인 선명함을 위해서 반드시 그 단어를 써야 할 필요가 있다.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러면 배우면 된다. 설마 그 글을 쓴 사람은 그 단어를 어디 인던에서 용이라도 잡고서 얻었겠는가. 그래서 있는 것이 사전이고, 굳이 사전이 아니더라도 주위에 물어 그 뜻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단어를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면 다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명징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은 몰라도 대충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이 이리 많다는 사실에 놀라고, 직조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것을 넘어 아예 그런 단어를 쓰는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또 놀란다. 물론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아예 알려고도 않고 그런 단어를 쓰는 자체를 비난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당장 나만 해도 글 하나를 쓰며 가장 자주 많이 하는 행동이 포털을 띄우고 사전을 뒤져 내가 쓰고자 하는 단어의 정의를 찾아보는 것이다. 과연 지금 내가 쓰고자 하는 이 내용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이 적절한가. 혹시 의미전달에 오해가 있지는 않을까. 굳이 두꺼운 사전을 일일이 뒤지지 않아도 클릭 한 번으로 대부분 단어의 뜻을 찾아볼 수 있는 시대란 것이다. 반지성주의라 불러야 할까? 모르는 것을 넘어 아예 아는 자체를 거부하고 혐오하고 증오한다.

 

사회가 퇴화되고 있는 증거일 것이다. 그보다는 한국사회의 계급화가 상당히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인지 모르겠다. 그런 고도화된 정교한 표현과 단어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었다.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아예 거부한다. 지금 자신들이 쓰는 언어로도 충분하다. 언어의 벽이 생긴다. 더 고도의 언어를 필요로 하고 실제 사용하고 있는 이들과 아예 그를 거부하는 이들 사이의. 너무 쉽게 소통하는 인터넷의 폐해일까. 문장만 조금 길어져도 읽기를 거부하는 쉬운 글쓰기와 읽기의 부작용일까. 설마 이런 논쟁이 벌어질 줄이야.

 

아무튼 중요한 것은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당연하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고 싶은 충동이고 욕구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지성이다. 교육과정의 문제일까. 일방적으로 주입은 시켜도 스스로 알기 위한 노력을 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 알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배워야 하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인지. 내가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지성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어쨌거나 그래도 한 나라에서 엘리트라 불리우는 이들의 언어사용을 보면서도 절망은 깊어진다. 무려 전직 판사들이다.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전직 검사였을 것이다. 언론인도 있다. 말하는 것이 직업이었던 이들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들이 선택한 어휘들의 천박함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냥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어떤 논쟁에 대한 감상일 것이다. 그런 것치고 너무 거창해졌다. 나도 평소에 흔하지는 않더라도 가끔 쓰던 단어가 명징과 직조였을 텐데. 아무튼 재미있다. 인터넷은 확실히 넓다.

 

아주 오래전 초기기독교에 있어 가장 큰 적이라면 - 아니 오히려 가톨릭보다도 더 기독교의 주류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란 것이었다. 다른 말로 비의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상징과 숨겨진 뜻이 있고 그것을 소수의 사제들만이 알고 선택된 이들에게만 그 진실한 의미를 전한다. 그런데 이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 아닌가.

그래서 가톨릭이다. 보편적인 교리란 이들 영지주의 사제들이 저마다 독점하며 설파하던 제각각의 비의에 대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교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숨겨진 비유나 상징같은 것 없이 오로지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내용 그대로 믿고 받들며 따라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성경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당시 로마 황제의 정치적 목적에 충실하게 황제가 주재하는 주교회의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초기교회란 로마 황제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조직이었고 이는 로마교회가 동로마황제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교황청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바로 이같은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황청 중심의 성경해석에 반발하며 나타난 것이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었다.

문제는 교황청의 성경해석 독점에 반발해서 독립해 나오는 과정에서 역시나 종교개혁을 이끈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해석이 더해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저마다 종교지도자들마저 새로운 종파를 만들 때마다 새로운 해석을 더하게 되었으니 기독교에는 다시 서로 다른 수많은 해석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 수많은 해석들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이며 성경의 내용에 부합하는 것인가. 그런 가운데서 심지어 자기가 신에게서 계시를 받았다며 성경의 숨겨진 의미와 진실한 해석을 자기가 알고 있음을 주장하는 이들마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프로테스탄트라는 자체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것이란 주장마저 나오고 있겠는가.

내가 성경을 안다. 내가 진실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 그러므로 나를 믿어야 한다. 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개신교 목사들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여전히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이고, 그래서 악마숭배라며 비판할 때도 흔히 근거로 드는 것이 이들 영지주의와의 연관관계였다. 그런데도 자신만이 진실한 신의 뜻을, 성경의 의미를 알고 있다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보다, 예수보다, 어쩌면 여호와보다 목사인 자신을 더 믿으라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겠는가.

어째서 초기기독교의 주교들이 그토록 영지주의를 증오했고 아예 기독교의 역사에서 지우고자 노력했는가 최근 더욱 깨닫게 된다. 교리를 독점하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고대 지중해세계에서 유행했다던 비의주의의 기괴한 의식들까지 떠올려보면 그래서 당시 가톨릭의 사제들은 그렇게 영지주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있었구나. 신의 뜻은 모조리 성경에 그대로 들어 있는데 또다시 신과 만나겠다고 자신을 학대하고, 혹은 정상을 벗어난 행위를 하는 것은 과연 신을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신을 배반하는 것인가.

성경도 예수도 여호와도 아닌 목사를 쫓으려는 최근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 자신의 신을 대신하려는 최근 개신교의 모습들을 보면서. 심지어 아파트단지보다도 더 커 보이는 거대한 교회란 현대의 바벨탑은 아닌가.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사단인가. 무엇이 선이고 악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원래 기독교가 가고자 했던 길은 무엇일까. 어째서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었는가. 목사들과 오로지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다수의 신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깨달음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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