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평범하다. 적당한 정의감에, 적당한 도덕률에, 적당한 신념에, 적당한 가치에, 적당한 자기희생까지. 정의감에 불타면서도 그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자기의 이익이란 한계가 있고, 또한 자기의 이익을 지키더라도 양보할 수 있는 도덕과 윤리의 선이 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정의를 지키고, 도덕을 지키고, 신념과 가치를 지키고, 자기의 이익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고 그런 평범함조차 더 잘 활용하고 못하는 사람이 나뉘게 된다. 그 적당함을 아는 것이다. 자기의 위치를 알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바를 알고, 그러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바도 자연히 알고 추구할 수 있다. 적당한 속물이란 것이다. 주위에 누가 있는가, 지금 자기의 위치가 어떻고 상황과 여건이 어떤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서는 안되는가. 적당히 상승욕도 있고, 적당히 권력욕도 있고, 적당히 이익도 밝히면서, 적당히 정치인으로서 사명과 지향이란 것도 갖는다. 한 편으로 보잘 것 없는 놈팽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인간도 보기가 매우 어렵다. 이익에 휘둘리면서도 사명을 쫓는다는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민주당이 바뀌었다. 이낙연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게 기민하고 교활하게 여러 사안들에 대응하고 있다. 이낙연의 그림자가 걷히면서부터였다. 대선후보경선에서 이낙연이 전처럼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을 확인하고부터 송영길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했던 것이었다. 송영길은 그저 소소한 속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만 굳건하면 다른 생각 없이 그저 지지자들 하자는대로 쫓을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과 척지는 것이 이익이 되지 않는다 판단한다면 너무나 수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재명을 쫓아 자기가 할 수 있는 바를 한다.

 

원래 치사한 인간이다. 때로 비열하고 때로 비겁하다. 악랄하다 싶을 때도 있다. 점잔만 떨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선을 넘지도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민주당이다. 딱 적당한 속물들에 어울리는 적당한 정치행보다. 문재인이나 노무현과는 다르다. 이재명과도 다르다. 그게 바로 송영길의 장점이다. 다만 지금 상황이 그런 여건을 만든 것이지 송영길의 대단함은 아니라는 것이 소소한 속물의 한계일 것이다. 일단 지금은 잘하고 있으므로.

 

이낙연이 병신인 것인지 송영길이 대단한 것인지. 하지만 송영길이 그다지 대단한 위인이 못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래도 홍영표보다는 나은 결과가 되었다. 어쩌면 우원식보다도 지금의 송영길이 훨씬 나은지도 모르겠다. 잘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릇을 키운다면 그 허튼 야망이 결실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 정치판에 송영길만한 인물도 드물 것이니. 재선 이상 가운데 누가 있을까? 한국 정치의 처참한 현실이기도 하다.

군에서도 새로운 장비를 개발할 때면 다양한 환경에 대한 적응성을 테스트한다. 더 춥고, 더 덥고, 더 습하고, 더 건조하고, 더 거칠고, 더 혹독한 환경에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시험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한계를 드러내며 도태되는 경우도 생겨난다. 얼어서 터지고, 열기에 늘어지고, 습기에 녹슬고, 모래에 마모되고, 그리고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그런데 누군가 말한다.

 

"당신은 지금 기계를 학대하고 있다."

 

원래 불속에서 작동하도록 되어 있는 기계다. 수 백 도 고온엣도 문제없이 작동해야만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장비다. 그런데 뜨거운 불속에 넣었다고 학대라 한다면 어째야 하는가. 얼음을 깨며 나가야 하는 쇄빙선을 시험하기 위해 얼음속에 내던졌다고 학대라 한다면 과연 쇄빙선의 성능은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 것인가. 마찬가지로 넘어져도 알아서 일어날 수 있도록 설계된 로봇을 시험한다고 넘어뜨린 것을 학대라 한다면 로봇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세상에 병신이 많지만 기자만한 병신도 흔치 않다. 하긴 그 기자만도 못한 병신도 있다. 공감능력이라? 생명이 살 수 없는 해저 만 미터 심해로 내려거야 하는 잠수정까지도 공감능력이 없다 떠들 지능인 셈이다. 산소 없는 우주로 우주선을 날려보내는 이유가 무얼까? 하다하다 이런 것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는구나. 막걸리 먹겠다고 뚜껑을 비틀어 땄으니 나도 막걸리병을 학대한 것인가. 지랄도 이쯤 되면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겠다.

 

농담인 줄 알았다. 설마 진짜 이런 게 언론에서 기사로 나왔을 줄이야.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버러지새끼가, 그것도 대학까지 나왔다는 놈들 가운데 있었을 줄이야. 저딴 것을과 같은 호모 사피에스 사피에스란 사실만으로도 부끄러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따위 기사를 써제끼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윤석열따위의 똥꼬나 빨아제끼는 자칭진보란 것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아침부터 욕만 나온다.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부의 재정정책이다. 재정을 확대해서 개인의 경제까지 보장하는가, 아니면 재정을 축소하고 개인을 자유의 영역에 맡기는가.

 

코로나19로 많은 개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상황에 재정을 풀어 이들의 삶을 보조해야 하는가, 그런 와중에도 재정을 아끼며 그들의 삶을 시장에만 맡겨야 하는가. 심상정은 말한다. 재정을 아끼고 각자 재량에 맡기자.

 

하긴 작년 광화문집회에 대해서도 정의당은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정부는 더 이상 개인의 방역에 개입하지 말라. 방역은 개인에게 맡기고 정부는 가만히 있으라. 진보일까?

 

이런 년과 단일화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어이가 없는 것이다. 민주당이 보수라면 정의당은 극우다. 재정을 확대해야 한다는 민주당이 보수인데 재정을 긴축해야 한다는 정의당이 진보일 리 있는가.

 

오히려 더 과감한 재정정책을 주문해야 했다. 100만원이 아니라 200, 300, 그 이상을 주장했어야 옳다. 그래도 과연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모두 메울 수 있을까. 그런데 말한다. 돈 주지 마라. 나라 곳간 빈다.

 

신문만 보며 정치하기 때문이다. 엘리트들 하는 소리만 들으며 정치하기 때문이다. 진보의 정치는 현실에 있지 않다. 엘리트의 말에 있다. 자신들도 엘리트이고자 하니.

 

이제 민주당이 진보정당이라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왼쪽이 치워졌다. 진보가 사라졌다. 하긴 원래 진보란 없었다. 진보라 자처하는 버러지들만 있었을 뿐. 심상정이 자백했다. 대한민국에 진보는 없다. 쌍년. 좆까는 년이다.

정권 초부터 한겨레는 주장해 왔었다. 지금 정부는 언론을 홀대하고 탄압하는 부정한 정부다. 도덕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파탄상태인 무능한 정부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더 나았다. 한겨레 기자가 직접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니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한겨레도 박근혜 정부 때가 더 나았었다. 그래서 국민의힘과 손잡았던 것이었다.

 

그동안 한겨레의 보도논조는 일관됐었다. 국민의힘의 문제는 큰 것도 축소하고, 민주당의 문제는 없는 것도 키워 보도한다. 그래서 월성원전과 김학의 수사가 정권차원의 불법이 되었던 것이었다. 역시 한겨레가 유튜브채널을 통해 당당히 떠든 내용이다. 검찰이 이미 무혐의 결론을 낸 김학의를 재수사한 자체가 정권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심지어 퇴임 이후 문재인 대통령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김학의를 수사했다는 이유로 이성윤 지검장의 고검장 승진까지 정의당이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이유야 다른 것 없었다. 그래야지만 문재인 정부가 망하고 다시 자신들이 좋았었던 국민의힘 정부가 들어설 테니까.

 

그래서 자기들이 직접 취재하고서도 정의연 논란 당시 한겨레가 조중동만 쫓아서 기사를 냈었던 것이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취재한 내용은 뒤에 사족처럼 붙이고 조중동이 퍼뜨린 의혹들이 기정사실인 양 추궁하는 기사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차라리 박근혜 정권의 위안부협상이 정의연의 위안부운동보다 피해자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지 않았는가. 이전의 이명박이나 김영삼이 일본과 합의하여 내놓으려 했던 방안들에 대한 재평가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런 연장에서 윤석열과 오세훈을 구하기 위한 자발적 오보의 총대까지 한겨레가 직접 맸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윤석열의 경우 모르고 오보를 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르고 낸 오보라면 한겨레의 성격 상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의도적으로 낸 오보이기에 사과조차 유례없이 굴욕적인 모습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의 오체투지에 가까운데, 과연 한겨레가 그동안 오보를 냈다고 그렇게 대대적인 사과를 내놓은 적이 있었는가 돌아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 위기에 몰렸던 윤석열이 다시 자기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세훈 역시 내곡동 투기의혹의 당사자로 곤란에 처하자 한겨레가 인터뷰 내용을 왜곡해서 내보냄으로써 반격의 빌미까지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마 한겨레의 오보가 아니었다면 어렵사리 증언에 나선 시민이 거의 모든 언론에 의해 매도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 한겨레가 오세훈을 사소하게나마 비판했다면 당사자로서 기분이 어떻겠는가.

 

지난 보궐선거내내 한겨레의 입장은 확고했었다. 민주당의 패배야 말로 정의의 구현이다. 아니 지난 총선에서도 입장은 한결같았다. 민주당의 패배야 말로 민주주의의 승리이고 정의의 실현이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라. 그 말은 곧 당시 자칭진보의 공통된 입장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민주당의 잘못은 없는 것도 부풀리고 오세훈의 문제들은 철저히 은폐축소왜곡해 보도했었다. 심지어 그를 전후해서 한겨레에는 민주당지지자들이야 말로 운동권기득권이라는 일베와 상통하는 내용의 칼럼까지 실렸을 것이었다. 이 놈들이 언론을 죽이고 한겨레를 죽인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구현을 위해서라도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이기고 정권까지 잡아야 한다. 말하자면 동맹이었다. 처음부터 한 편이었다기에는 그동안 걸어온 길이 달랐으니 동맹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자칭 진보와 수구는 손을 잡는다. 그런데 그런 한겨레가 오세훈을 비판하고 나섰으니 당사자로서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다수 언론들이 오세훈의 한겨레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에 대해 침묵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서 있었던 거의 모든 언론들이 탄압이라 부르던 어떤 행위들보다도 강력한 탄압일 테지만 그러나 어떤 언론도 한겨레의 편에 서려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것은 언론과 권력간의 문제가 아니라 동맹 내부의 신의문제인 것이다. 동맹을 맺었으면 신의를 지켜야 하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한겨레가 그 신의를 어기고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응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언론들도 이를 언론탄압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 마디로 한겨레가 자초한 상황이란 것이다. 비유하자면 박근혜 정부에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날아간 상황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논조를 견지해 왔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잘못한 건 무조건 밝히고 욕한다는 애초의 입장을 지켜왔다면 오히려 더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는 그런 중립과 객관이라는 언론의 본분을 저버리고 진보라는 가치마저 저버린 채 국민의힘의 편에서 기사를 써 왔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최저임금 올려서 중소자영업자 어려워졌다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받아 중소자영업자의 어려움을 취재한 기사를 1면에 싣던 정권 초반의 한겨레를. 1면의 제목부터 비슷했었다. 그래서 최저임금인상이 잘못되었다는 뜻인가. 이전까지 최저임금 올려야 한다던 주장과 배치되지만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다. 그런 기사를 수도 없이 써왔던 한겨레였기에 갑작스런 오세훈 비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동맹으로서 신의를 배신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한겨레를 같은 편으로 여겼던 지지자들의 심정과 비슷하다 보면 될 것이다. 차라리 조중동이야 원래 그런 놈들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한겨레는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더 악랄하게 등에 칼을 꽂고 비틀기까지 하고 있었다. 노무현더러 죽으라고 등떠미는 칼럼을 쓰고, 죽고 난 다음에는 놈현관장사라는 막말까지 써가며 조롱했다. 물론 이제는 한겨레가 뭔 기사를 내든 배신감에 치를 떨 지지자따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놈들이다. 원래 한겨레는 조중동과 한 몸이었다. 돈없는 조중동이 한경오란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조중동이 되고 싶은 한경오라는 말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세훈의 행동에도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도 진실도 보도하지 않는 언론 아닌 언론의 같은 편에 대한 공격은 응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차피 편들어 줘봐야 나는 4050기득권으로 한겨레 입장에서 타도의 대상일 뿐이란 것이다. 한겨레 기자들 스스로 그런 예전 독자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입장을 동정하기에는 한겨레 자신의 에고가 너무 강하다. 더구나 조금만 숙이고 원래의 동맹을 회복하면 문제없이 전과 같이 광고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민주당이 존재하는 한 자칭진보와 수구의 동맹이 사라질 일은 없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오세훈에게 용서를 빌까 그것만 궁금할 뿐이다. 옷이라도 벗고 등에 채찍질하며 그 앞에 무릎꿇고 빌까?

 

지금도 자칭 진보들은 주장한다. 민주당이 언론을 탄압한다. 문재인 정부가 언론을 탄압한다. 국민의힘이 기자를 고소하고 고발하고 기자회견장에서 쫓아내도 그것은 언론탄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명박근혜 때가 언론 입장에서 더 좋았다. 더 자유로웠고 더 대우도 받았다. 그래서 자칭 진보들도 오세훈의 광고중단에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다. 그래서 오세훈의 탄압도 기꺼이 용인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한겨레의 입장도 비슷하지 않을까. 신의를 저버린 한겨레의 잘못이지 언론에 대한 탄압은 아니다. 그런 놈들이란 얘기다. 우습지도 않다.

가장 완벽한 완전한 자유란 어떤 것일까?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어린 딸을 강간해도 상관없다. 남의 집 어린 딸을 데려다가 강간하고, 남의 아내를 유인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심지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책임감도 죄의식도 가질 필요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

 

'오징어게임'에서도 나왔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면서도 그것이 신의 뜻이라 말하던 어느 성직자가. 새벽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지영의 생부의 직업 또한 목사였었다. 어려서부터 지영을 상습적으로 강간하고 아내마저 때려죽인 그는 신에게 용서를 구했고 용서받았다 말하고 있었다. 신의 뜻이므로. 신이 예정한 것이므로. 신이 용서했을 것이므로. 그러니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신이 대신해서 다 책임지고 용서해 준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범죄들은 거의 종교의 이름 아래 저질러지고 있었다. 사람을 고문하고, 학대하고, 강간하고, 가장 잔인한 수단으로 살해하면서, 그 재산까지 약탈하는 모든 행위가 신의 이름 아래 정당화되고 용서되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신의 존재 아래 인간은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살인할 자유, 강간할 자유, 약탈할 자유, 고문할 자유 등등등... 대신 그만큼 사람들은 더욱 신에게 간절히 복종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가장 인간과 거리가 먼 이들이 가장 신에게 투철했었다. 신에게 철저할수록 인간과의 거리는 멀어졌었다. 그냥 인류사의 보편적 법칙이라 보면 된다.

 

과연 자유란 것이 인간에게 그저 좋기만 한 것인가. 그 대표적인 예로 흔히 드는 역사상의 사례일 것이다. 미국에서 노예를 해방시켰더니 정작 노예였던 흑인들이 옛주인을 찾아가서 쫓아내지 말라 하소연하더라. 노예로 있을 때는 그저 주인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굶지 않고 몸을 누일 집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민이 되고 나니 그 모든 것을 자기 능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무엇보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 지 스스로 고민해서 선택해야만 했다. 과연 그것은 그들에게 자유로 여겨졌을 것인가.

 

이명박근혜 때는 좋았다. 전두환노태우때는 더 좋았다. KBS가 굳이 노태우에게 전대통령이란 호칭을 붙여 쓰는 이유인 것이다. 그때는 굳이 머리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발로 뛰어 취재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뉴스가 나갈지는 안기부에서 결정했다. 어떤 뉴스를 보도해도 되는지 역시 정부에서 알아서 판단해서 결정해 주었다.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정부에 있다. 자기들 책임이 아니다. 가짜뉴스가 방송을 타는 것도,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이 생기는 것도 역시 당시 정부의 잘못이지 자기들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세월호참사도 박근혜 정부의 잘못이지 언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팩트체크란 예전엔 없던 것이었다. 그냥 언론이 보도하면 팩트다. 닭과 소가 교미해서 고양이가 태어났다 기사를 써도 언론이 보도햇으니 팩트여야 했다. 언론이 보도했으니 검찰이 증거를 찾았든 못찾았든 이재명은 배임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감히 언론이 보도한 내용에 대해 대중이 검증하며 나서기 시작한다. 사실이냐? 진짜냐?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되는가? 외신과 비교하며 비판하는 이들마저 생겨났다. 오죽하면 한겨레 기자가 자백하고 있었겠는가. 이명박근혜시절이 자기들에게도 더 나았다.

 

윤석열이 아예 대놓고 언론을 무시하고 억압함에도 오히려 언론이 미쳐 날뛰며 지지하는 이유인 것이다. 홍준표가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를 비판할 때 동조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언론의 자유란 누군가 시키는대로 가짜뉴스도 마음대로 퍼뜨릴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언론의 보도에 대해 언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책임지는 자유인 것이다. 그 자유의 대가란 굴종이며 순종이다. 권력의 개가 되었을 때 언론은 비로소 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신이 되어야 한다. 무오류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오히려 국민의힘처럼 다양한 억압수단을 동원해서 언론을 통제하려 하면 언론은 비로소 기뻐하게 된다. 자신들의 주인이 여기 있다. 오세훈을 신나게 비판하다가 광고로 억압하려 드니 한겨레가 찌그러드는 이유다. 민주당이었으면 어림도 없다. 국민의힘이니 가능하다. 민주당은 그저 고발만 해도 지랄인데 국민의힘은 그 고발을 몇 번을 반복해도 그저 순응할 따름이다. 나를 개로 만들어달라. 버러지로 다뤄달라. 민주당이 잘못한 것이다. 언론인들이 바라는 언론의 자유란 그런 자유가 아니었을 텐데.

 

지금 당장이라도 기자들 목에 개목걸이 채우고 코에 뚜레를 걸어 끌고 다니면 좋아라 질질 쌀 놈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기자란 사람이 아닌 때문이다. 사람이란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존엄을 가지기에 사람일 텐데 저놈들은 그냥 버러지새끼들이다.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취급해줬으니 보복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이 말도 몇 번 째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심상정 씨발년이 또 어디서 지 똥파먹는 소리 지껄였던데, 뭐라더라? 민주당과 대선후보단일화는 없다고? 이 년이 이제 미쳤나? 당장 어디 가서 이재명이 홍준표와 단일화 추진한다 말해보라. 바로 정신병원 데려간다. 미쳤다고. 그동안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추진한 정책과 법안 가운데 정의당이 동의한 것이 과연 몇 개나 있는가 보란 말이다. 어떤 정책이든 법안이든 민주당이 내놓은 것은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봤었다. 그러면서 거의 대부분 국민의힘과 행보를 같이 하고 있었다. 정의당이 보기에 국민의힘이야 말로 노동존중의 정당이면서 여성존중의 정당이지 않았는가.

 

그동안 정의당이 보여 온 행보가 그랬다는 것이다. 정의당과 민주당은 가는 길이 다르다. 오히려 국민의힘과 가는 길이 같다. 심지어 당대표 경선을 하면서는 반민주당이야 말로 정의당의 정체성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모든 사안에서 민주당에 반대하고 국민의힘 편에 서 왔었다. 민주당에 대해서는 사소한 꼬투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국민의힘에 대해서는 어지간한 잘못도 그냥 침묵으로 넘어간다. 아예 앞장서서 옹호에 나서기도 했었다.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서로 정체성이나 노선이 유사하다 여겨서 그러는 것일 텐데, 과연 현재 민주당과 정의당 사이에 그만한 관계가 존재하긴 하는가. 당장 민주당 지지자들부터 정의당이라면 이를 가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고, 정의당 역시 그동안 정의당의 반민주당 행보에 동의하며 남은 이들이 대부분일 텐데 이제와서 단일화한다고 시너지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나부터도 그럴 경우 과연 민주당 후보에 투표해야 하나 망설이게 될 것이다. 정의당과 단일화한 후보라고?

 

염치를 모르는 것이다. 그동안 자기들이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어떻게 해왔는가 자각이 없다. 아직도 민주당과 자신들이 한 묶음으로 여겨질 수 있다 여기는 것이다. 하긴 지령이었을 것이다. 언론이 지령을 내렸다. 선거가 다가온다. 그동안 국민의힘과 손잡고 반민주당을 정체성으로 삼아 온 시간들을 지우고 민주당과 한 묶음이 되어 민주당을 욕먹이는데 최선을 다하라. 중도표가 소중해지는 대선에서 극단적인 진보논리로 민주당을 오염시켜 중도층을 이탈케 만들어라. 언제부터 자칭 진보가 자기 머리로 생각했다고?

 

아무튼 버러지년이 지 생긴대로 똥파먹는 소리를 주제도 모르고 지껄이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정의당이, 특히 심상정이 보인 행보들을 모두가 기억한다. 정의당은 국민의힘과 한 묶음이다. 용산참사의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있고,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한 전정부의 행위는 무혐의이며, 김학의를 재수사한 것은 정권차원의 범죄다. 심지어 김학의를 출국금지시킨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이후에도 책임을 져야만 할 중대한 사안이다. 모든 법안은 국민의힘 동의 아래 통과시켜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일관되다. 욕을 빼고는 쓸 수 없는 쌍년인 것이다. 정의당 같은 년.

벌써 2000년대 초반부터 지적되어 온 부분이다. 선진국형 경제일수록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말하는 서비스업이란 다양한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형 서비스업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의 서비스업은 소비일변도다. 식당이나 술집이나 아니면 카페처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그로부터 수익을 얻기보다 기존의 소비시장 안에서 경쟁을 통해 자기만의 이익을 늘려간다. 문제는 어떻게 해도 전체 시장의 소비규모는 일정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닭갈비가 맛있어도 닭갈비로 인해 전체 소비규모가 커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새로운 가치를 통해 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밖에서 사먹던 금액 안에서 오늘은 매운탕 먹던 것을 내일은 닭갈비 먹는 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 한정된 시장 안에서 사업자만 제한없이 늘어나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한국의 기형적인 서비스업 구조에 대한 우려가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결국 제로섬게임이다. 누군가 이익을 보면 한정된 시장 안에서 누군가는 이익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그냥 이익만 얻지 못하면 끝인가. 고정비용이 있다. 다달이 벌어야 하는 최소금액이 있는데 그조차도 벌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손해가 누적되는 것이다. 심지어 참여자가 너무 많은 경우 한정된 시간을 참여자 모두가 나눠야 하다 보니 기대할 수 있는 이익 자체가 감소하는 상황마저 벌어진다. 소수의 승자를 제외한 대부분이 도태되어 사라진다. 한국 자영업 평균존속기간이 몇 년이었더라?

 

그래서 변호사들도 변호사시험 합격자수를 제한하자 주장하는 것이다. 의사들도 의사 수 늘리겠다니 아예 국민들 목숨까지 볼모잡고 저항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변호사든 의사든 지금보다 더 늘어나면 자기들 밥그릇이 줄어든다. 택시업종이 어려운 것도 과거 택시면허증을 너무 많이 발급한 부작용이란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더 어렵게 창업도 했는데 시행착오도 겪어 볼 수 있게끔 일정한 기회를 줘 보자. 그러니까 최소한의 이익과 그를 통한 존속을 제도적으로 꾀해보자. 그 가운데 하나가 음식점 총량제일 수 있는 것이다.

 

이재명의 음식점 총량자 발언에 그럴싸하다 생각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이유인 것이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지금 이대로는 무분별한 음식점 창업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자들만 이익을 볼 뿐이란 사실을. 하고 싶어 창업하는 것이 아니다. 확고한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닌 그냥 뭐라도 해보겠다고 무작정 시작하고 보는 것이 바로 음식점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음식점 사업자들은 전문성조차 갖추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요리로 만들 줄 모르고, 당연히 요리를 맛볼 줄도 모르고, 서비스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또한 결여되어 있다. 그것들을 채워주는 것이 그래서 프랜차이즈인 것이고, 따라서 그런 모든 걱정과 고민과 궁리를 대신하는 만큼 막대한 돈을 사업자들로부터 받아간다. 그래서 프랜차이즈의 지원을 등에 업었다고 그들 모두가 성공하는가? 자기 요리가 아니다. 자기 서비스가 아니다. 결국 프랜차이즈의 흥망에 개인의 운명까지 걸리고 만다. 그런 지금 상황이 과연 정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야당에서 말하는 시장의 자유란 망할 자유인 것이다. 한정된 시장 안에 너도나도 무분별하게 뛰어들어 다같이 망해서 죽자는 자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한 피해는 또한 소비자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어제까지 잘 다니던 단골가게가 사라진다. 이익이 나지 않아 식재료며 서비스며 비용을 낮추느라 질적으로 하락한 서비스를 같은 비용을 주고 구매해야 하는 경우마저 생길 수 있다. 흔히 하는 말이다. 음식 맛이 떨어졌다. 양이 줄었다. 서비스가 부실해졌다. 왜? 그럴만큼 이익이 보장되고 있지 않으니까. 지금 과연 음식점 창업에 뛰어들어서 돈을 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 돈으로 겨우 일가족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나마 성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바꾸자는 것이다. 차라리 서비스업으로 창업하려면 다른 보다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을 모색해보자. 물론 정부와 지자체의 노력과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단차원적으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오죽하면 요식업계에서조차 논의해 볼만하다는 반응이 나왔겠는가. 아마 음식점 창업하려는 사람들 역시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이대로는 다 같이 죽을 뿐이다. 그게 20년도 더 전에 나온 이야기인데 아직까지 그저 시장의 자유만을 떠들고 있는 것이다. 변호사와 의사를 생각해 보라. 왜 변호사와 의사의 수에는 제한을 두는가. 그러면 어째서 음식점은 제한을 둬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당장 집근처를 돌아보자. 술안주 시켜먹으려 검색해 보니 전 집만 골목 하나에 셋인 듯하고, 닭갈비집도 그 비슷, 족발집은 5분 거리마다 한 서너개 되는 듯하다. 족발 먹는 사람이 설마 한 동네에 그리 많겠는가. 그래서 비싸지고, 그럼에도 어느날 보면 망해서 사라져 있는 것이다. 기자새끼들은 장난이나 칠 줄 안다. 버러지새끼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조선시대 노비나 백정이 왕이 되었다 생각해 보자. 혹은 변방으로만 떠돌던 야전의 무인이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자기와 마음이 맞는 가까운 사람들을 측근에 두려 한다.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노비와 가까우면 노비일 것이고, 백정과 마음이 맞으면 백정일 것이고, 야전군인이 좋다면 역시 야전군인일 터다. 그런 사람에게 과연 정승이니 판서니 관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는 것이 타당할 것인가. 

 

하지만 태생이 완족이고 사족들로부터 교육받고 친분을 다져왔다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여종을 강간했어도 선비일 것이고, 농민의 재산을 강탈했어도 대부일 것이며, 뇌물 좀 받았다고 양반의 신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왕이 파견한 어사에 의해 비위가 드러나 파직당한 인물이 다시 복귀한 뒤 오히려 더 출세길에 올라 자신을 파직한 어사에게 보복한 예도 적지 않았다. 파직과 유배 정도야 죽지만 않으면 사대부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에 걸맞는 장식일 수 있는 것이다.

 

박형준과 오세훈의 인사에 대해서만 철저히 침묵하는, 아니 이전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도 인사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 온 언론이 이번 정부 들어서만, 민주당 계열 인사들에 대해서만 유독 엄격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민주당 쪽 인사는 국정을 맡기기에 적합한 인사들이 아니다. 신분에서도 실력에서도 경력에서도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민주당 쪽 인사는 항상 부적절할 수밖에 없고, 국민의힘 인사는 어지간한 흠결이 없는 한 문제삼을 것이 없다.

 

문제는 민주당 쪽 인사들마저 비슷한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정권을 잡으면 알아서 보수쪽 인사들을 찾아가고, 인사하고 안면을 트며, 양보함으로써 상대의 인정을 받겠다는 병신들이 오히려 많아지는 이유다. 박병식이 그 대표적인 예다. 유인태도 다르지 않다. 보수로부터 인정받아야 자격이 생기고 가치가 생긴다. 위청같은 놈들이다. 내가 태생이 비천했으니 고귀한 이들의 눈에 잘 보여야 그 비천함을 지울 수 있다. 

 

아무튼 박형준이 이번에 아주 재미있는 인사를 했던데 언론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박형준 정도면 일개 지자체장 정도가 아닌 전국구 인물일 텐데도 그렇다. 오세훈은 어떨까? 그에 반해 이재명은 시장 시절 사기죄로 재판받던 공사사장을 경질했다는 의혹으로 오만 욕을 듣고 있는 중이다. 어째서 민주당 20년 집권이 필요한 것인가. 두 번도 부족하다. 세 번, 네 번, 아니 10번은 더 정권을 잡아야 이 꼬라지를 잡을 수 있다. 욕만 나온다.

바로 언론이 생각하는 검찰의 이미지인 것이다. 언론이 검찰개혁에 목숨걸고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론이 배임이라면 배임으로 증거도 내놓고 기소도 해 준다. KBS는 요즘 정말 눈물이 핑 돌 정도다. 얼마나 애처롭게 부르짖는지 검찰놈들이 참 못된 놈들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언론이 배임이라는데 배임이라는 증거 하나 못 찾고, 기소도 못하고 있고, 이게 나라냐? 정의냐? 법이냐? 검찰이냐?

 

어쩌면 그래서 더 윤석열을 지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석열 검찰 시절에는 언론이 원하는대로 검찰이 제깍제깍 증거도 조작해서 내놓고, 조작할 증거가 없으면 아무거라도 물어뜯을 건수를 찾아내고, 기소는 기본에, 법원과 손잡고 구속과 유죄판결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준다. 그런 윤석열 검찰이기에 KBS를 비롯한 언론은 혀가 걸레가 되도록 똥꼬를 빨아제꼈던 것이었다.

 

다른 나라 해군이나 해양경찰은 해적도 잘만 잡는데 우리는 아닌가? 해적이 없으니 못잡는 것 아니던가? 없는 해적을 만들어서 잡을까? 도둑맞은 집이 없는데 경찰이니 당연히 도둑을 잡아야 한다면 경찰이 직접 도둑질 해야겠네?

 

증거가 없어서 못찾았다니까 검찰이 무능하단다. 부실수사란다. 그러니까 증거가 없어서 특검하자. KBS에 기대갖는 놈들이 다시 없는 병신들일 것이다. 하긴 다른 언론은 뭐가 다를까. 자칭 진보란 버러지새끼들은 어떻고?

 

검찰이 증거도 만들고 기소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 언론은 정의롭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게다. 그러니까 언론이 쓰면 검찰은 반드시 없는 범죄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언론과 검찰의 현주소다. 민주당이 개혁해야 하는 이유다.

언론이 주장하는 부동산공급확대란 한 마디로 재건축, 재개발이다. 자칭 공정론자들이 정부의 부동산정책을 비판하며 말하는 공급확대정책도 같다. 왜 자기 집으로 자기가 돈벌겠다는데 정부가 막아서는가? 재건축에 대한 규제와 제한을 풀라. 그 말은 뭔가? 주호영이 산 은마아파트가 그 몇 배의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아파트 소유주들이 재건축을 바라는 이유는 한 가지다. 10층짜리가 20층 되고, 100세대 짜리가 200세대 된다. 여기에 구축이 신축으로 바뀌니 건설사와 나눠먹어도 남는 돈이 몇 배인 것이다. 그러면 건설사와 재건축조합이 재건축으로 얻는 이익은 지자체장에게 배임일까, 아닐까? 그렇게 재건축으로 최대 몇 천 억을 넘는 이익을 소수가 나눠가졌다면 배임이 되는가, 아닌가? 그러면 말할 것이다. 그 만큼 이익을 환수하면 되지 않는가. 그래서 반대한다. 시장질서에 위배된다.

 

한 방송사 뉴스에서 시간차로 나온 내용이다. 화천대유가 수 천 억 이익을 봤으니 대장동 개발은 배임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 공공개을 위주로 하고, 민간이익을 환수하려 하면 부동산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기사가 버젓이 보도되었다. 그러니까 과도한 민간이익을 환수하는 것은 부동산경기를 위축시키는 반시장정책인데, 민간이익을 더 환수하지 않았으니 이재명은 배임을 저지른 것이다.

 

더 어이가 없는 그보다 더 악랄했던 용산개발에 대한 언론의 태도란 것이다. 자칭 진보의 이중성도 여기서 드러난다. 오세훈이 용산참사는 철거민들 잘못이라 말했을 때 그를 비판한 자칭진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진짜 눈씻고 찾아봐도 진보를 자처하는 개인이나 단체 가운데 그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용산참사가 왜 일어났는가? 보상을 최소로 하여 개발사업자의 이익을 극대화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소수의 개발주체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찰까지 나서서 철거민을 강제로 내쫓으려 한 결과였었다.

 

그나마 경찰이 나서면 다행인 것이다. 수많은 재개발 현장에서 철거민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대상은 대부분 경찰조차 우습게 여기는 용역깡패들이었다. 사인들이 경찰을 대신해서 무고한 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저항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이 나서서 대신 응징해 주었다. 그런 현실에 대해 정면으로 나서서 비판한 언론이... 그나마 MBC가 있었구나. 대부분 언론들은 저항하는 철거민들을 폭도로 몰아가기 일쑤였었다. 자칭진보도 있기는 했지만 오세훈의 발언을 통해 그들이 이미 자기부정에 나섰음을 확인했으므로 그 기억을 지운다. 그러던 언론이 재개발지역 주민들이 오른 땅값을 다 받지 못한 것을 걱정해주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홍준표가 말했다. 언론자유지수 세계 42위가 부끄럽다. 그래서 KBS도 민영화해야겠다. 그런 홍준표를, 나아가 국민의힘을 언론은 맹목적으로 지지한다. 한겨레조차 말한다. 이명박근혜 시절이 언론들에게는 더 좋았다. 저런 비판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저런 취재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정부가 부르는대로 받아쓰고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기만 하면 자기들은 욕을 먹지 않았다. 원래 보도하지 않던 걸 보도하려니 자기부정이 자연스러워지는 모순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냥 국민의힘이 권력 잡고 자기들이 지금 짊어진 책임만 대신 가져가면 된다.

 

아무튼 웃기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개발업자와 부동산소유주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면서, 한 쪽에서는 그것을 배임이라 주장한다. KBS를 민영화해야 하는 이유다. 공영방송으로서 가치가 없다. 노태우 전대통령? 아주 지랄을 싸세요. 내가 선견지명이라 지금도 자랑하는 것이 KBS 파업에 코웃음쳤던 일이다. KBS 나부랭이가. 

 

그냥 대장동 뉴스 말고 다른 부동산 뉴스까지 하나로 엮어서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앞과 뒤가 다르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르다. 그야말로 노완동이 썼다는 쌍수호박 그 자체다.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와 싸운다. 한겨레와 조선이 서로 싸우는 듯 민주당만 공격하는 것과 같다. 이런 걸 미친놈 발광이라 부른다. 버러지새끼들이란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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