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에서 내가 한창 열심히 이용중인 문재인 케어 항목을 축소할 것이라 걱정되어 이야기하니 어머니께서는 오히려 좋아하시며 대꾸하셨다.

 

"병원 안 가면 건강하고 좋은 거지 뭘 그러냐?"

 

확실히 어머니도 나이가 드시긴 드셨다. 병원 자주 가는 건 어디 아픈 거니 안 좋은 거고 병원 안 가면 안 아픈 거니까 좋은 거다. 병원 안 가게 되는 게 따라서 더 나은 것이다. 어이없기는 한데 사람이 나이 먹으면 생각하는 것도 둔해지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TV드라마조차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버거워서 잘 안보게 된다고 하는데. 

 

아무튼 어찌되었거나 문재인 정부 들어 근골격계 질환에도 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던 이후로 내 지출에서 의료비의 비중이 늘어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 전까지는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서 병원 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형외과 도수치료는 실손보험이 없으면 아예 엄두조차 못내고, 설사 실손보험이 있더라도 제한된 회수만 적용받을 수 있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추나요법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척추 틀어진 채로 적당히 침이나 맞으면서 지금도 버티고 있었을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내 지출에서 의료비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 과연 문제인 것인가?

 

더구나 척추측만을 발견한 것부터 운동하다가 느낀 위화감에 대해 제대로 진단받기 위해 병원을 찾으면서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심각한 질환이라 여긴 것이 아니라 그냥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병원에서 진찰이나 받아보자 찾아간 것이었다. 당연히 건강보험 믿고 그리 결심한 것이었다. 얼마전에는 나이 먹고 눈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그것도 진찰받아 보겠다고 그냥 병원을 찾기도 했었다. 그래서 갔더니만 아무 이상 없다면서도 의사가 말한다. 나이 먹으면 어찌되었든 1년에 한 번 정도는 병원에서 진찰 받아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 크게 이상이 없어도 혹시나 싶어 병원을 찾아 진찰받느라 병원비 나오는 것이 시민 개인에게 있어 문제일 수 있을 것인가.

 

의사들이 주장하는 의대증원이 의료비지출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가 그런 것이다. 하긴 의사들 스스로가 전부터 주장해오고 있기도 했었다. 의사 수에 비해 환자가 너무 많아서 환자 한 사람 당 진료시간이 너무 짧다. 너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의료비지출도 너무 많으니 따라서 환자들이 더 적게 찾아올 수 있도록 경증에 대한 건강보험보장을 줄이거나 없애자. 실제 어느 커뮤니티에서 의사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받았던 주장이었다. 환자당 받는 돈도 너무 적고 환자도 너무 많아서 일이 힘드니까 꼭 필요한 그리고 능력있는 사람만 병원에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사들의 사고수준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것이다. 어째서 의사들이 자신들에 대한 다른 시민들의 비판적인 시각을 단순히 질투와 열등감에 의한 것이라 여기는가 단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도 엘리트인 내가 돈도 없는 버러지 새끼들 때문에 돈도 못 벌고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 자체가 너무 받아들일 수 없이 불편하다. 아닐 것 같은가.

 

아무튼 그런 주장의 연장에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의사의 수가 늘어나면 병원도 늘어날 테고, 접근성이 좋아지면 당연히 사람들은 더 자주 많이 병원을 찾게 될 것이다. 건강보험지출이 많아진다는 것은 어찌되었거나 병원을 찾은 이유가 심평원에서 인정할만한 사유일 것이고, 진료 역시 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테니 결국은 필요한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질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안 좋은 것인가? 극단적으로 그러면 아예 건강보험 민영화해 버리면 병원비 비싸질테니 나같은 사람은 병원에 가지도 못할 것이므로 의료비지출은 줄어들 테니 그것을 좋아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런 주장들을 떠들면서 의사들이 역시나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경증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라는 것들이 그러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질병은 진짜 숨넘어가기 전까지 가벼운 이상신호만 보낼 뿐이고 그것을 조기에 잡아내기 위해서라도 경증에 대한 보장을 줄여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야 자기들의 일이 줄어들 테니까.

 

결국 의사증원을 반대하는 저들의 논리란 이 한 마디로 귀결이 되는 것이다. 아니 의사증원을 반대하기 전에도 저들은 자신들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건강보험 적용의 축소를 주장하고 있었다. 꼭 필요한 능력이 되는 환자들만 병원을 찾을 수 있도록 경증에 대한 적용을 없애거나 줄여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희소성을 유지하면서도 업무의 부담도 줄일 수 있도록 경제적인 여건이 안되는 시민들의 건강을 포기해야 한다. 결국 이기심이다. 더 편하게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으니 그러는 것이다. 의사라는 사명감에 투철한 의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최소한 대부분 의사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수준이란 이런 정도인 것이다. 그것을 그동안 지켜봐 왔으니 대부분 시민들이 의사들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고. 그동안 의사들이 쌓은 업보라 보면 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진짜 재미있다는 것이 평소 다른 직업이 파업하면 못배운 것들 어쩌고 하던 의사들이 새삼 파업을 시민의 권리라 주장하고 나서는 장면일 것이다. 어째서 진보가 자신들의 파업을 지지해주지 않느냐며 열변을 토하는 인간도 보이던데, 진짜 어이가 없어 웃었다. 누칼협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던 인간이 자기들이 궁지에 몰리니 시민의 권리 운운하며 자신들의 투쟁을 지지해달라 하고 있으니 어찌 웃기지 않겠는가. 누가 칼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대우가 뭣같으면 그만두고 다른 일 하면 되는 거지 왜 그것 가지고 징징거리며 떼를 쓰냐던 것들이 이제 와서 같은 입으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만큼 윤석열 정부가 무서운 것일 게다. 병신 찌질이새끼들. 어디 누가 하는 짓거리와 비슷한 것을 보니 공부만 잘하는 찐따란 어디나 같은 모양이다. 그게 의사라는 것일 테지. 늬들이 뽑은 정부니 늬들이 알아서 하라. 웃기지도 않는다.

오래전 경제학 교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가 아닌 사회전반의 이슈에 대한 나름의 토론을 할 수 있었던 자유였다. 그때 그 교수님이 처음 이야기를 꺼내면서 무척이나 어려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경제학이라는 게 각자 학파가 있고, 그 학파에 따라 세상을 보는 기준이나 방식, 판단, 결론이 모두 다른데 그런 것을 배제하고 단지 교수라는 직함만 앞세워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였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가 배운 경제학의 학파와 이론, 논리들에 대해 설명하시는데 진짜 경제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유가에서 말하는 중용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중용이라는 게 단지 양 극단의 한가운데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사람을 구하는 구명 사이에 과연 중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성에 대한 존중과 성범죄와의 사이에도 중간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이란 도대체 무엇일 것인가? 그러므로 더 객관적으로 명징한 사실과 적확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따라서 더 확실하고 분명한 정의와 전제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째서 죄악인가? 어째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고 구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더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두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렇게 먼저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 안에서 치우치지 않게 판단해야 한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더 나아가지도 머무르지도 않는 적절한 중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살인이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흥분해서 증오와 원망을 가지거나, 혹은 무심해지거나 관대해지는 건 곤란하다. 그런 전제에 동의했을 때 비로소 이후 이야기는 진행된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이해한다. 나는 이런 기준으로 현실에 대해 사고하고 판단하고 이야기한다. 이미 자신의 기준을 제시했다면 더이상 그는 편향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준 안에서 엄정함을 유지한다면 그는 단지 남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화란, 토론이란 그런 서로 다른 기준을 공유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서로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할 수 있으면 된다. 오래전 어느 역사 전공자가 나만의 역사관을 두고 해 주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로 너무 엉터리같고 어이없는데 그래도 자기만의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니 그 자체는 무척이나 흥미롭더라. 그러니까 어떤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하는가 그 자체가 전공자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바로 그것이 객관화다. 그럼으로써 더욱 엄밀하고 냉정하게 자신과 타인의 주장과 의견을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A가 아니고 B도 아니니 중도적이다. A는 너무 편향적인데 B는 거기까지는 아니니 중도적이다. 흔히들 중도적이라 이야기하는 많은 지식인, 유명인들이 꽤나 보수에 편향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승만부터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과 문재인을 제외한 이후 대통령들까지 한결같이 보수편향에다가 언론까지 그러하니 한국사회의 주류가치란 보수에 편향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수적인 이들은 자기가 보수임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 자기가 보수라고 먼저 전제할 필요 없이 그동안의 상식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진보는 자기가 진보임을 항상 밝혀야만 한다. 진보 가운데 유독 보수의 눈치를 보며 그 입맛에 맞추려 하는 자칭 2찍들이 나오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진보는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밝히므로 편향적인데 보수는 아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건 싫다고 진보인사들은 배척하는 자칭 중도들이 그 중도를 찾아서 오히려 보수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보수가 보수가 아닌데 진보만 진보이니 오죽하면 민주당 정치인들마저 지지자의 목소리가 아닌 진짜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개소리를 늘어놓겠는가. 민주당 지지자들조차 편향되었으니 그렇지 않은 진짜 국민들이 필요하다. 

 

이승만을 미화하는 '건국전쟁'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논쟁들을 지켜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다. 이승만의 공과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김일성에게도 공과가 있다. 히틀러는 물론 스탈린에게도 잘한 것과 못한 것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반드시 나쁘기만 했을까? 한국전쟁이 한국역사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도 분명 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비극이었다 결론내리는 것은 종합적인 판단에서 좋게 판단할 여지보다 그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은 몰랐던 공을, 혹은 자기들은 생각 못했던 해석을 제시하니 그 안에서 다시 중도를 찾겠다. 무지다. 무지성이다. 그런데도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았으니 자신은 지적으로 우월하다. 하긴 대부분 그런 경우 중도를 자처하는 수구인 경우가 많다. 내가 중도라고 하는 분류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중도란 보수편향을 이야기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 기준도 없고 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는 그저 한가운데일 뿐인 중도가 이 사회에서 선택할 방향이란 그것 뿐인 탓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가운데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중도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 광장의 우상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떼거지로 나와 떠들어대니 그것으로 옳은 것이다. 더구나 인터넷처럼 비슷한 놈들끼리 어울려다니는 경우가 많으면 더 그렇다. 민주당 공천이 민주당 주류지지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유도 비슷하다. 지성이란 먼저 자기 자신부터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수신이다.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부터 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위로 시야를 넓힐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인 것이고. 중도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서 중도란 것이 얼마나 의미없고 가치없는 것인가. 대단할 것도 없다. 하지만 뜻밖에 대부분 사람들은 모른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 항상.

지난 대선 당시, 아니 문재인 정부 내내 2030 가운데서도 특히 이공계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토가 높았었다. 문재인 정부가 아닌 민주당 자체에 대한 비토였었다. 오죽하면 윤석열 정부에서 R&D 예산 깎는다니까 이재명을 더했을 것이라며 자위하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겠는가. 문재인만 아니면 된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더구나 정의당과 녹색당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2020년 총선부터 2찍 진보들의 구호는 한결같았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문재인만 아니면 된다. 그래서 민주당이 혹시라도 진보진영에서 표를 더 가져갈까봐 여성주의 정당을 만들어 그를 중심으로 결집하기까지 했었다. 민주당의 표를 조금이라도 깎기 위해 한겨레는 대놓고 오보를 내고, 2찍 진보들은 여성주의 정당을 앞세워 표를 가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2찍 진보들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심상정의 문재인 탄핵 발언과 한겨레의 김학의 출국금지에 대한 문재인 책임론이었다. 그래서 2022년 대선 당시 2찍 진보들은 윤석열과 이재명 가운데 누구를 더 비판하고 더 적대시하고 있었는가.

 

같이 공부하던 졸업생이 구호를 외치다 끌려나가는데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 했던 카이스트의 모습이 그 증거인 것이다. 기껏해야 진보정당이나 기웃거리던 찌그래기따위 끌려나가든 쥐어 터지든 아마 어디 가서 소리소문없이 파묻혔어도 카이스트 학생들은 조용했을 것이다. 그나마 요즘 정의당이 윤석열 눈에 들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중이라 전에없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이다. 혹시라도 정의당이 이번 정부 들어서 윤석열 정부에 이번처럼 적극적으로 적대하는 모션을 취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 사람 이야기해달라. 이렇게 신속하게 반응하는 경우를 문재인 정부 이후 본 적이 없다. 무엇인가? 짜고치는 고스톱이고 아니더라도 당사자가 원래 바라던 현실이란 것이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문재인만 아니면 된다. 이재명만 아니면 된다. 그래서 다수 2찍 진보들은 윤석열 지지를 선택했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관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떠한가. 그나마 벌써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 동안 2찍 진보들은 얼마나 현정부의 반진보적인 발언이나 행보 정책들에 비판의 입장을 취했었는가. 그동안 2찍 진보들은 반진보적인 현정부와 민주당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앞장서서 비난하고 있었는가. 그나마 총선이 다가오니 비례자리 하나, 혹은 지역구 하나 얻어보겠다 저리 지랄인 것이지 아니었다면 녹색정의당 대변인 타이틀 달고 대통령 앞에서 발언할 일도 없었을 것이란 뜻이다. 윤석열 정부가 하는 짓거리는 정말 어이가 없는데 그렇다고 끌려나간 졸업생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고나 할까. 당장 같은 카이스트 졸업생들조차 아무일 없었다는 듯 조용하기만 한데 내가 거기에 뭔 말을 더할까.

 

2찍 진보들이 바라던 세상인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끌려나간 녹색정의당 대변인이라는 졸업생 역시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고 윤석열 지지했거나 그나마 최소한 심상정 지지를 통해 이재명 당선을 막아낸 것을 자촉하고 있었을 것이다. 탈원전은 대통령이 사법처리되어야 할 중대한 범죄라 주장하던 2찍 진보들과 합당한 녹색당 당원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 도한 K-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찰이 무고하다 했으니 김학의는 무고하고 감사원이 문제가 있다 했으니 탈원전은 범죄다. 언론이 문제라 했으면 최저임금인상과 근로시간단축도 지지해서는 안되었다. 한 적도 원래 없었다. 

 

별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다. 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행위이기는 한데 끌려나간 졸업생 스스로도 그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거나 최소한 수긍할 수 있다 여겼던 것 아니었던가. 아직도 2찍 진보를 지지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황은 사실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하긴 그동안 조용하다가 총선 앞두고 그러는 것부터 의심의 눈으로 볼 만한 근거가 되기는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연대하는 학생 하나 없이 모두가 조용했다는 것이 2찍 2030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현정부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흥미를 잃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들이 바란 결과다. 너무도 당연하게. 항상 그들의 승리를 축하해 준다. 참 잘나셨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진화에 있어 형질의 우위란 기껏 100 가운데 1, 혹은 그 이하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돌연변이로 한 번에 특정한 형질이 생태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교체되는 것이 아닌 101과 99, 혹은 100.1과 99.9의 차지가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어 우열이 결정되는 식이다. 다만 1, 혹은 0.1,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차이라도 생존에 더 유리한 점이 있으면 그것이 누적되어 기존의 형질을 대체하고 새로운 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의 진보라는 것도 그와 같다. 하나씩 조금씩 역사의 과정이란 그래서 그같은 아주 작은 도전과 시행착오의 연속인 것이다. 역사를 낙관적으로 보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반동으로 후퇴하더라도 결국에는 더 나은 방향을 찾아 나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바로 유비가 아들 유선에게 유언으로 말했다는 선이 아무리 작다고 행하지 않으려 하지 말고 악이 아무리 작다고 행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말의 진짜 의미일 것이다. 아주 작은 선이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더 큰 선이 되지만 아무리 작은 악이라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또한 더 큰 악이 될 수 있다. 작은 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큰 선이 나타나고 작은 악을 경계할 수 있어야 더 큰 악을 막을 수 있다. 내가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때에 따라 오십보를 도망치는 것과 백 보를 도망치는 것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무엇보다 실제 전장에서 오십 보를 도망친 사람이 아무래도 백 보를 도망친 사람보다 불리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런 차이가 모여서 하나의 전투, 나아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고고하고 순결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차피 오십 보 도망치나 백 보 도망치나 같다. 똥이 묻으나 겨가 묻으나 같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와 같다. 오롯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것으로 악과 같다. 온전히 악이 아니라면 크게 정의롭지 못한 것과 차이가 없다. 그렇게 전쟁에 패할 때마다 장수들을 처형한 결과 명말 요동전선에서는 차라리 질 것 같으면 아예 항복해 버리는 이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기왕에 부정을 저질렀으니 어차피 처벌받을 것 더 큰 부정을 저지르자. 어차피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니 그냥 아예 한바탕 반란이나 일으켜봐야겠다. 작은 선을 작다고 해서 무시하면 그 선마저 자리잡지 못하고, 작은 선과 작은 악을 구분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의 이기란 작은 악을 쫓아 더 큰 악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도 작은 잘못도 용납하지 못하는 엄벌주의에 대해 법이 너무 엄격하면 백성들이 서로 속이게 된다며 경계하고 있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서로 속이고 의심하고 모함하는 일들이 일상으로 벌어지며 오히려 사회 전체가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실제 사례를 지금 미국이 보여주고 있다. 엄벌주의로 어지간하면 감옥에 쳐넣었더니 그냥 아예 포기하고 범죄를 일상으로 저지르는 인간들만 늘어났다.

 

그러나 이상이 너무 고고하기에, 가진 바 신념과 지향이 너무나 순결하고 정의롭기에, 그런 너무 작은 선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기왕에 선을 행하려면 100을 행해야지 어째서 99로 멈추는가. 90에 멈추고 마는가. 80의 선과 70의 선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아가 100이 아니라면 -100의 악과 크게 차이가 없다. 차라리 애매하게 어중간한 80이나 70에서 멈추느니 한 번에 100의 선을 이룰 수 있다면 -100도 나쁘지 않다는 극단적인 사고도 가능해진다. 바로 2찍 진보들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차라리 김영삼 김대중보다 전두환을 더 좋아하고, 노무현 문재인보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더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한겨레 기자 하나도 인증한 바 있다. 차라리 이명박근혜 때가 더 나았다고. 왜냐면 그때는 진보의 목소리가 의미가 있었다. 진보가 주장하는 가치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현실이 진보가 추구하는 정의와 거리가 멀수록 진보의 목소리는 더 사람들에게 의미있게 들리게 된다. 그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게 한다. 이를테면 역사진화론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있었기에 이 땅에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더욱 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진보적 가치에 대한 요구 또한 크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현실이 지속되었다면 어쩌면 혁명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선 이들이 있다.

 

애매하기 때문이다.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대재해법에 대한 정의당과 한겨레의 태도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완전하지 않으니 기권하겠다. 어디 중대재해법 뿐일까? 대체휴무일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에 대해서도, 근로시간 단축에 대해서도, 2찍 진보들은 한결같이 한 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루어주지 못하기에 문재인 정부를 심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윤석열이다. 차라리 문재인 정부의 애매함보다는 윤석열 정부의 극단이 2찍 진보들을 위해서도 더 나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 보니 정작 애매한 민주당과 한 편이 되기 싫어서 반대편의 극단에 있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억울할 수도 있다. 자기들은 그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를 게 없다 보니 민주당의 편을 들기 싫어 입다물고 있을 뿐인데, 아니 때때로 현정부와 여당의 편에 서기도 하는 것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같은 부류로 오해받게 되었다.

 

물론 정의당만 그런 것은 아니다. 녹색당이 이번 정부 들어서 문재인 정부 만큼 정권을 비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었다.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이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이유였다. 진보진영에서 나왔어야 할 당연한 비판들이 오로지 용혜인 의원을 통해서만 들려오고 있었다. 그만큼 정권이 바뀌고 심지어 민주노총마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조용해지고 말았다. 내가 살다살다 민주노총 이렇게 조용한 것 처음 보는 것 같다. 간첩몰이를 당하고 노조 간부가 자살하는 상황에서도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정권타도를 외치며 정권교체에 직간접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었다. 무엇이겠는가. 그런 놈들에게 민주당의 의석을 나누어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자칭 중도들도 흔히 말한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인데 왜 굳이 한 정당을 지지하는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같은데 왜 한 쪽의 잘못은 덮고 한 쪽의 잘못만을 비판하는가? 이 중도들도 심리는 비슷하다. 오롯이 아주 작은 오점조차 없이 정의로워야 정의롭다. 한 점의 오류도 없어야 오롯이 잘한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면 모두가 쓰레기인 것이다. 옥석구분이 없다. 더 잘하고 못하는 게 없다. 그래서 윤석열인 것이다. 작은 잘못을 용납하지 못해서 큰 잘못과 같은 것으로 여기니 결국 큰 잘못만 남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괜히 민주당만을 지지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정치가 현실이 아닌 머릿속에 있다. 하긴 그러니까 여가부 폐지라는 구호에 넘어가서 최저임금과 주휴수당과 근로시간이라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런데도 자기는 중도니까 더 우월하다는 의식이 그런 교조적 선명성에 집착하게 한다.

 

오래전 자칭 진보들이 오히려 김영삼이나 김대중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더 좋아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라 끄적여 보는 것이다. 2찍 진보들이 선택한 정권이 이승만의 신원을 위해 저리 열심이다. 이승만 뿐인가? 박정희와 전두환도 다시 포장되려 한다. 그렇다고 2찍 진보들이 그에 대해 어떤 비판의 말이라도 내놓느냐면 차라리 민주화세대를 더 욕하는 것이 원래 그놈들이었다는 것이다. 민주화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 정의당이나, 민주화세대의 배제를 주장한 한겨레가 그 대표일 터다. 어째서 2찍 진보들은 윤석열을, 그리고 국민의힘을 선택한 것인가. 차라리 간첩으로 몰리더라도 그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그들의 세계가 그렇다.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다. 너무나 한심하게도.

추미애 전장관 아들 논란 당시 2찍 진보들도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떻게 감히 병사따위가 휴가가서 전화로 휴가를 연장할 수 있는가?"

 

그런데 90년대에도 하려면 가능했었거든? 아니 휴가 가기 전에 중대장이며 인사계가 그리 당부하기도 했었다. 휴가 가서 무슨 일 있으면 일단 전화부터 해라. 전화만 하면 어떻게든 부대에서 해결해 주겠다. 하지만 21세기 2찍 진보들이 생각하는 군대란 당장 죽을 것 같아도 복귀해서야 다시 휴가를 연장할 수 있는 곳이었지.

 

이재명 대표가 대선 당시 아내의 부상으로 연차를 쓰자 진중권은 또 그리 떠들었었다.

 

"아니 어떻게 직장인들 따위가 아내가 다쳤다고 연차를 쓸 수 있는가?"

 

술먹고 도저히 출근할 컨디션이 아니어서 오늘 못나가겠다 전화하면 그냥 연차처리 된다. 아예 너무 늦게 일어나서 출근하지 못할 것 같으면 전화로 연차처리하고 나가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그냥 무단결근했는데 알아서 연차로 대체해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인사고과에는 영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다쳤다지 않은가.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된다. 

 

"스타벅스가 서민들이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다. 아주 오래전이었는데 꽤나 공부 잘한다는 어느 학생을 언론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마 여학생이었을 텐데 그런 말을 해서 꽤나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공부 열심히 해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많이 도와주고 싶다."

 

아니 니가 왜 나를 돕느냐고? 나는 나대로 살거든? 없이 사는 사람도 없는대로 어떻게든 알아서 잘들 살아간다. 가난하다고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시각 자체가 가난한 이들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우월감이다. 나같이 잘난 사람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꽤나 나이를 먹고 나서 어느 사회복지과 공무원이 그리 고백하더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싶어 지금 일을 선택했는데 실제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니 환상이 깨졌다."

 

가난한 사람은 이럴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란 이런 이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많이 배우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신이 그런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내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근세와 근대 구시대의 기족과 부르주아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베풀던 자선이 그런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나와 동등한, 같은 세계에서 공존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보다 열등한 이들을 위한 일방적인 시혜로써다. 그래서 그러한 자신들의 기대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였을 때 그들은 오히려 실망해서 분노하고 증오와 혐오을 드러내기도 한다. 위에 말한 사회복지과 공무원의 말도 그런 맥락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딱히 더 선량하거나 더 도덕적이지는 않더라.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회의가 생겼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도 사람이라니까?

 

그보다 좀 더 가까운 오래전 과거에 어느 커뮤니티에서 잠시 논쟁이 있기도 했었다. 사는 곳이 달동네였다. 달동네에서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돕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말이 거칠었다. 원래 그쪽 동네 말이 꽤나 거칠다. 내가 이재명 대표의 여러 문제가 되는 발언들에 대해 그다지 아무 생각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도 그래서 말이 꽤 거친 편이다. 그런데 어째서 말을 그리 거칠게 하느냐고 타박을 놓는다. 정중한 표현으로 특정한 대상을 단정짓고 판단하던 이에 대해서는 그 정중한 표현을 존중하면서도 그에 대해 반발한 그 사람의 거친 표현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다. 살던 환경이 어찌되었든 표현은 자신들의 기준대로 해야만 한다.

 

상대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일반의 상식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차별이고 혐오라는 이유일 것이다. 원래 그렇게 살았던 사람에게 자신들만의 방식을 강요하며 그렇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겠다 말한다. 의도하여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내 기준에 맞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면 인정하지 못하겠다 떠들어댄다. 노동운동도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게, 여성운동도 남성들의 요구에 맞게, 성소수자들도 이성애자들에 거슬리지 않도록, 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평소 그렇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한다던 놈들이 그렇게 기회가 되자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느끼던 바였다. 어째서 2찍 진보들은 윤석열을 지지했고 한동훈에 열광하는가. 논쟁하던 도중 상대가 지방대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그것을 알려 같이 조롱하던 것이 21세기 초의 2찍 진보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만나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읽고 알고 있는가 자랑하는데만 여념이 없었다. 현실의 여성을 이야기하니 왜 그렇게 사느냐며 오히려 정색을 한다. 공부만 잘한 찐따 찌질이 새끼들인 탓이다. 그런 우월감에서 괜히 진보인 연 했던 것이지 진짜 진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2찍 진보들이 민주당을 혐오하는 진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들은 엘리트다. 누구보다 우월하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가치는 그를 입증하는 증거들이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진보적인 가치를 보다 선명하게 순수하게 고결한 가치로써 추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별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순수한 보수를 선택할지언정 오염되고 타락한 현실적인 노선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절개를 지키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죽음까지 기꺼이 맞았던 조선시대 선비들과 비슷할 것이다. 실제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장하기 위해 주장을 한다. 그게 중요하다. 내가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며 실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민주당을 혐오하면서 기꺼이 보다 순수한 보수의 가치를 주장한다 여기는 보수정당과 협력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김건희 여사의 말이 옳았다. 윤석열 정권은 분명 좌파 정권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말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언론이 경향과 한겨레였다. 대선 당시에도 외곽에서 김건희 여사와 처가에 대한 모든 검증시도를 차단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정의당이기도 했다. 서로 같은 부류들이구나. 서민은 스타벅스도 가지 못한다. 직장인은 아내가 다쳐도 연차를 쓰지 못한다. 군인은 당장 죽을 것 같아도 복귀부터 하고 휴가를 연장해야 한다. 아마 2찍 진보들도 현역 갔다온 놈들이 얼마 안 될 것이다. 저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것으로 보아서.

 

2찍은 진보다. 진보는 2찍이다. 그냥 외워두면 된다. 2찍과 진보는 둘이 아니다. 최소한 검찰정권 아래에서는 그렇다. 서울대지 않은가. 사법시험도 합격했고. 그러니 자신들과 급이 같다. 상고나온 노무현이나 경희대 출신인 문재인이나 검정고시 봐서 대학 들어간 이재명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순혈 엘리트다. 그래서 2찍 진보다. 확인한다.

2020년 선거 직전 상황을 돌이켜보자. 경향일보는 민주당만 빼고라는 칼럼으로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토록해야 한다는 내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었다. 그리고 경향일보의 이러한 솔직한 고백에 다수 2찍 진보들이 호응하고 있기도 했었다. 정의당 역시 심상정 자신이 탄핵까지 언급하면서 오로지 민주당 비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국 이후 모든 선거들에서 2찍 진보들이 민주당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국민의힘의 승리를 도우고 있었다는 상황과 이어질 것이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민주당만 지게 만들면 된다. 그런 놈들이 이제 와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한다? 그 의도가 너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자신들은 좌파라는 김건희의 주장 그대로 윤석열 정권의 탄생에 큰 지분을 가지는 것이 바로 2찍 진보들이라는 것이다. 정당과 언론 그리고 지식인을 막론하는 대통령이 좋아하는 진보 카르텔이 지금의 윤석열 정권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모든 선거마다 앞장서서 민주당의 표를 깎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오로지 모든 비판은 민주당을 향해서만 집중되었다.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한다는데 과연 그 당시 코로나 방역까지 공격하던 2찍 진보들 가운데 정부가 바뀌고 그 정도 수위로 비판이라도 하는 놈들이 얼마나 되는가 보자. 심지어 한동훈이 주장하는 운동권청산부터가 원래 한겨레가 주장하던 것이었다. 4050 운동권들을 대한민국에서 몰아내자. 발붙이지 못하게 하자. 정의당도 호응해서 자기들은 더이상 민주화역사와 상관없다고 선을 긋기도 했었다. 그런 놈들이 연동형비례대표제로 비례연합정당을 만들어 국회에 진출한다고 과연 현정부에 비판적인 어떤 행동을 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동안 여러 중요한 사안에서 2찍 진보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에서도 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나마 선거 가까워지니까 민주당과 손잡는 시늉이라도 하지 그 전에는 민주당 2중대 싫다던 2찍 정의당조차 국민의힘 전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민주노총이 빨갱이몰이 당하는 상황에서조차 그동안 손잡아왔던 동지였을 텐데도 철저히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 내가 살면서 민주노총 이렇게 조용한 걸 아마 처음 보는 것 같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어떨까? 문재인 정부에서는 뭐만 하면 성명내고 시위하던 놈들이 정권 바뀌니까 한결같이 입에 자물쇠를 걸었다. 그런 놈들이 국회 가서 현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한다? 가능할 것이라 보는가?

 

윤석열 정권 창출에 앞장섰던 경향일보와 한겨레부터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주장하고 나서는 것에서 그 의도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검찰정권에 협조적이던 민주당내 이른바 수박들이 앞장서서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그 솔직한 의도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용혜인이 보였던 속시원한 행보 역시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고 싶은 정치적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과연 용혜인이 국회에서 의미있는 행보를 보인 것이 있기는 하던가. 결국에 민주당과 지지자가 믿을 것은 민주당 하나 밖에 없다는 현실만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만 아니면 되고 민주당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이 싫고 민주당 지지자들을 이 사회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놈들이 주장하는 연동형비례대표제라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전에도 썼지만 2찍 진보는 결국 한동훈의 2찍 버전인 것이다. 사고방식이 거의 유사하다. 대놓고 상대방의 학력이나 학벌을 빌미삼아 집단으로 조롱하는 것이 저놈들 수준이라는 것이다. 사실을 가지고 논쟁하다가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을 아주 일상으로 하는 놈들이다. 대개는 학벌이 좋다. 그리고 집안까지 잘사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라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딱 그대로다. 그래서 코드가 맞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용혜인은 무고할 수 있어도 그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놈들이 그런 놈들이다. 연동형비례대표제는 결국 윤석열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반대해야 하는 이유다. 찬성하는 놈들이 바로 그 증거일 터다. 말이 필요없다. 

사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가 싹을 틔운 토양 자체는 서로 다르지 않았었다. 여전한 신분제와 그보다 지독하고 악랄한 계급적 질서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그를 해소할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둘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차이라면 사회주의는 그러한 구조의 근본적인 해결을, 그리고 전체주의는 감정적인 해소를 추구한 것이 서로 다를 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조선의 신분제에 따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신분제 자체를 타파할 것이냐 그런 모순을 야기한 소수를 응징하고 끝낼 것이냐 하는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에 의해 모든 사회질서가 뒤집히면 그나마 알량하게 바라고 기대던 희망과 기대마저 함께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반상제가 남아 있어야 나도 양반이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반상제가 사라지면 역시 나도 양반이 될 일은 전혀 없는 것이다. 더불어 국가가 가지는 영광과 명예를 함께 누릴 일도 없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당시 국제주의를 추구하던 사회주의자들마저 국가라는 이름에 호응해서 전장으로 달려갔던 이유였다. 국가가 유지되고 사회가 유지되어야 그나마 그동안 누리던 것도 누리고 꾸었던 꿈들도 계속해서 꿀 수 있다. 어쨌거나 자신도 대영제국의, 대독일제국의, 대프랑스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싶다. 그래서 아예 사회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사회주의에 비해 전체주의는 오히려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만 배제하려는 시도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 외국인과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들이 선택된 것이었다.

 

사회를 아예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더라도 저들만 배제한다면 내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사회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저들의 존재가 나쁜 것이다. 저들의 존재가 남아 있는 한 여전히 자신들의 현실은 나쁜 채로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를 위해서라도 더 강한 국가와 권력을 중심으로 단합해야만 한다. 그래서 20세기 초반 많은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체주의를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전체주의를 통해 소수의 희생양만 던져주면 더이상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권력과 결탁해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독일에서도 히틀러의 가장 큰 후원자는 지방의 지주들인 융커들과 도시의 부르주아들이었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과 교황청이 그의 집권을 지지한 바 있었는데 또한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니까 기존의 사회구조는 유지하면서 단지 불만 가득한 대중을 그 증오와 혐오의 대상을 배제할 목적으로 집단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누리던 알량한 자존감과 영광을 위해서라도 대중은 국가에 더욱 충성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너 자신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다. 보다 구조적인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더 낮은 임금과 그런 낮은 임금으로 더 오랜 시간을 힘들게 일해야 하는 현실과 그러다가 사고를 당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현실이 너무 힘들고 버겁다. 언제 그만두게 될지 고용도 불안하고, 당장 내년에 어디서 뭘 하며 살아야 할 지 확신도 없다. 지금 무엇을 해야 내 삶이 나아질 것인지 기대조차 갖기 힘들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니 여성이 문제다. 외국인 노동자가 문제다. 중국인이 문제다. 북한이 문제다. 말한 것처럼 회사에서 하는 짓거리에 불만이 그리들 많으면서 여가부 해체한다니 그쪽에 투표한 인간들이 그리 많더라는 것이다. 월급 적다, 사람이 너무 적어 일하는 시간도 길고 더 힘들기도 하다. 심지어 기간제는 언제 그만두게 될지 매일매일이 불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가부가 더 문제고 중국과 북한이 더 문제이기에 최저임금도 낮추고 일하는 시간도 늘리고 고용도 더 악화시켜야 한다.

 

이른바 인국공논란도 출발을 같을 터였다.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취직해서 일을 하는데 고용도 불안한 계약직보다는 정년까지 보장되는 무기직이 더 낫지 않겠는가. 급여가 더 오르지 않더라도 고용의 안정성이나 더 나은 근무환경을 위해서도 정규직으로 고용해서 일하게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자신 또한 노동자이니 그에 공감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기대는 자신보다 못한 저학력자에 대한 2030 스스로의 혐오와 경멸에 의해 오히려 역효과를 보고 말았다. 저런 놈들이 정규직이 되면 오히려 나 자신의 삶을 위협받게 될 것이다. 자격도 안되는 놈들이 급여와 고용과 복지까지 보장받으면 나 자신이 누리던 그동안의 기득권이 흔들리고 말 것이다. 학력도 학벌도 안되고 능력도 안되는 저들을 차별하는 것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다.

 

조국이 2030 남성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였다. 아직도 2030 남성들이 사법시험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가 사법시험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사법시험이라는 제도가 남아 있어야 자신들에게도 그를 통해 판검사라는 기득권이 될 가능성이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개천에서 가재붕어게로 잘사는 것이 아닌 당장이 힘들더라도 용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어야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재붕어게에 불과한 노동자를 위한 정책이 아닌 집주인을 위한, 기업인들을 위한, 자산가들을 위한 정책이 오히려 자신들을 위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되도록 해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 그렇지 못한 채 잘살게 해주는 건 의미가 없다. 차라리 그를 위해서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여성과 외국인, 적대적인 외국이라는 대상들을 배제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그를 주장하고 요구했는데 들어주지 않았으니 저들이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혐오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할 것이다.

 

세월호 특별법에 이어 이태원 특별법에 대한 2030 남성들의 반발도 바로 이러한 정서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유가족들은 감히 자신들의 억울함을 정부를 향해 호소하고 있는 것인가. 놀러 나갔다가 죽은 것 아닌가. 심지어 죽지도 않았는데 무슨 피해자인가?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그로 인해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어도 알아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던가. 그보다 더 가치있는 문제들이 있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을 터다. 유가족의 자격을 따지고 피해자의 자격을 따지고 그러면서 정부가 하자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왜 따져묻느냐 오히려 비난하고 조롱한다. 물론 문재인 정부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여성을 배제하고 외국인을 배제하고 증오하는 적국과 적대해야 할 정부이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억울함이 있어도 국가가 요구하는대로 피해자든 유가족이든 인내하고 희생해야 한다. 노동자들도 임금을 스스로 깎고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고용을 양보해야 한다.

 

웃기는 것이다. 당장 받는 월급이 너무 적다면서도 한 달에 30만원 이상 깎이는데도 주휴수당 폐지가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당장 몇 달 뒤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기간제 주제에 철밥통이라며 정규직을 줄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자기 몸이 안 좋아서 오래 일하기 힘들다면서 더 오랜 시간 일하는 것도 괜찮다 말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과 중국이다. 여성가족부다. 그런데 감히 그런 정부를 향해 유가족이랍시고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 같은 2030 세대들이 그토록 많이 죽고 다쳤었음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비난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아무튼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진상규명의 무용론을 설파하는 2030들을 보면서 저 새끼들에게는 뭔가를 해 줄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이준석을 혐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이준석 말하는 꼬라지가 히틀러의 열화버전이기도 하다. 4050 남성들만 때려잡으면 2030 남성들에게 더 좋을 것이다. 거기에 호응하던 정의당이며 한겨레는 진짜 뭐하는 것들이었는지. 이유는 알겠지만 선택이 너무 혐오스럽다. 기득권의 책임이기도 할 것이다. 그 부모세대가 아마 나와 같은 세대들일 테니. 남탓 할 게 아니다. 위험하기도 할 것이다.

정치적인 지지란 자신의 정치적 지향에 따른 기대의 결과다. 즉 내가 어떠한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있으니 그를 이루어 줄 수 있는 대리인으로서 그와 가장 가까운 정치인을 선택하여 동지로써 응원하고 힘을 실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지간해서 자신의 정치적 지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거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 사소한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인으로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목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적이나 혹은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사소한 문제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일관되게 드러내 보이는 정치적인 목적과 지향성인 것이다. 여전히 그에 대한 공감대와 기대가 있는 이상 정치적 지지를 쉽게 거두지 않는다. 물론 더 나은 대안이 있다면 당연히 갈아타야 할 것이다. 이낙연에서 이재명으로 옮겨갔던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선택이 그러했다. 이낙연이 더이상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대신해서 이루어줄 수 없을 듯하자 그와 가장 가까운 대안으로서 이재명을 선택한다. 당연하게 반대편에서는 그에 맞는 정치적 지향에 따라 자신의 지지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자신과 더 가까운가.

 

그에 비해 언론 등을 통해 보도되는 개별적인 사안에 일일이 반응하는 경우란 대개는 그같은 정치적인 지향이 없는 경우들일 것이다.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뚜렷한 방향성이 없기에 개별의 사안들에 대해 순간적으로 반응하고 그에 매몰되게 된다. 한두가지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전체가 되고 결국에 특정인에 대한 부정과 아직 그런 사실들이 드러나지 않은 신인들에 대한 환호로 이어진다. 이른바 정치인은 단지 도구고 수단이라는 주장이 안철수부터 윤석열까지 정치신인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지는 구조인 것이다. 마음에 안들면 쓰다 버리면 그만이기에 아직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신제품에만 - 그것도 언론이 제공한 이미지만 가지고 무지성적으로 달려든다. 그래서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지지하는 지지자들을 비웃는 자칭 중도들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었다.

 

문재인은 이래서 싫다, 이재명은 이래서 안된다, 그래서 정치인으로서 아무것도 보여 준 것이 없는 신인을 단지 이미지만으로 소비한다. 사실 도구나 수단이라 하지만 그것도 다 손에 맞는 것이 있다. 하다못해 볼펜도 오래 쓰는 사람은 자기 손에 맞는 것을 써야 한다. 망치도 손에 맞지 않으면 자칫 다칠 수 있다. 손에 잘 쥐이고 무게중심도 맞고 무엇보다 나에게 익숙해야 한다. 믹스커피 먹던 시절 항상 물을 끓일 때면 양은 냄비에 끓여 타먹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쪽이 내 입맛에 맞다. 비싼 칼인데 영 맞지 않으면 오히려 아예 칼질도 잘 않게 된다. 그런데 그것도 많이 해 본 사람이나 그런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좋다는대로 오히려 자기가 맞춰서 쓰게 된다. 그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가.

 

정치인에 대해 항상 모든 면에서 만족할 수는 없다. 정치인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그런 자칭 중도들이야 말로 정치인을 이상화 신격화하는지도 모르겠다. 완전무결한 무오한 인간만을 추구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제사용 인형처럼 내던지고 짓밟바 버리니. 그래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신인들만을 쫓는다. 아마 그래서 그런 다수가 이준석을 따라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준석이야 말로 아직까지 보여준 것 하나 없이 그런 자칭 중도 2찍 남성들의 지지만으로 지금 자리에 오른 인물을 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준석처럼 언론이 잘 포장해주는 정치인도 없다. 아니 언론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지는 정치인이 없다.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는 한겨레마저 이준석의 발언에 대해 검증하고 비판하기보다 그저 옮겨적기에 바쁘다. 그래서 사실상 말 뿐이다. 드러난 것 없이 말만 많은 정치인이기에 그 말만으로 저들은 정치적 지지를 선택한다. 이준석을 한심하게 보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욕하면서도 민주당 지지자들이 흠결 많은 이재명을 지지한다고 욕하는 그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정치인은 초인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인간적이고 개인적이고 지엽적인 오류와 잘못들에도 여전히 일관된 지향성을 확인하는 한 지지를 이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 때문에 과도하게 반발하여 다른 대상을 찾는 태도야 말로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를 바라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런 선택의 결과가 윤석열이고 이준석이라면. 아니 심지어 이준석을 믿고 윤석열을 지지했다는 놈이 그따위 소리를 하고 있으면 그를 어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아무튼 자기는 정치적 지지가 없다고 지지자를 비웃는 자칭 중도들 보고 있으면 한숨부터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지지하지 않기에 선택한 것이 윤석열이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아서 이준석을 보고 윤석열을 찍었다. 지금은 이준석만한 정치인이 없다며 빨아주느라 열심이다. 그것을 자신은 합리라 중도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병신들이라는 것이고. 2찍은 정신병이다.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중도란 더 치열하게 자신의 지향을 추구하는 것이지 그저 중간에서 잘난 척 심판자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었는가. 바로 네놈들 때문이다. 환멸을 느낀다.

오래전 '뿌리깊은 나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아마 거의 유일하게 정기준의 주장을 옹호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성은 현명해짐으로써 오히려 어리석어진다. 백성이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으면 오히려 기득권에 더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원래는 교활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파렴치할 정도로 충동적이었던 백성이 이타를 배우고 이성을 배움으로써 지배자들의 입맛대로 통제될 수 있게 된다.

 

그때 그 예로써 들었던 것이 바로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이었다. 일본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농민들의 반란은 거의 일상이었다. 자기들끼리 전쟁한다고 다이묘들이 아예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뜯어가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의 대부분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농민들 자신도 자기가 살아야 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문명화된 구일본제국 시절에는 일본 국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죽을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알아서 세금을 바치고 노동력을 바치고 심지어 죽는 것마저 영광으로 여겼었다. 국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국가를 이루는 한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고 죽는 것보다 국가의 이익과 영광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회사에 평소 불평불만이 그리 많았던 인간이 하나 있다. 나이도 좀 되는데 하여튼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혹시나 지난 대선에서 최소한 윤석열은 안 찍었겠지. 시절이 이러니 자백하더라. 자기 윤석열 찍었다고. 이유는 여가부폐지와 통일부폐지. 아니 돈 많이 안 주고, 사람 많이 안 쓰고, 대우도 좆같다고 그리 욕하더니만. 그러고는 임금이 줄어서 알아서 그만두는 사람 나오면 적당히 정리도 되니 회사를 위해서도 좋다고 떠들어댄다. 이제 20대인 젊은 친구는 아예 말할 것도 없다. 친중친북이 싫어서 윤석열 찍었다. 지금도 오르지 않은 임금과 기간제라 언제 잘릴 지 모르는 신분과 병가조차 못쓰는 열악한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정작 그보다 여가부와 친중친북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말해 주었다. 원래 거대서사는 쉽게 사람을 속인다.

 

솔직히 두 사람 모두 여가부가 있든 말든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친북이 뭐고 친중이 뭐고 실제 사는데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시피 할 것이다. 그보다는 고용안정과 급여와 회사로부터의 처우가 더 일상에서 와닿을 것이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국가단위에서 움직이는 거대서사에 개인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진 무언가가 있는 양 쉽게 현혹되고 마는 것이다. 그저 내가 사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데 더 높은 가치를 위해서 자신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차라리 같이 일하는 사람들 좀 내보냈으면 좋겠다. 대충 보면 알겠지만 평소 불평불만도 가장 많고 일도 너무 못해서 가장 먼저 잘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당연히 아직 기간제라면 말할 것도 없다. 자르면 기간제부터 자르지 정규직부터 자르겠는가. 그런데도 나 자신의 일상과 이익을 위해 투표한 것을 비웃는 심리를 보고 있으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어설프게 배우고 익힌 부작용이다. 괜히 쏟아져나오는 주장과 논리에 현혹되고 만 결과라 할 것이다. 그냥 모른 체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다. 그러고보면 평소 불만 많고 아는 척 말만 많았던 사람들이 대개 2찍을 선택했었다. 너무나 이상이 고결해서 민주당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윤석열을 지지하고 그것을 합리화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논리로 자기는 중도층이니까 한 번은 한 쪽을 한 번은 다른 한 쪽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 과연 그것이 자기 생각일 것인가.

 

듣자하니 태양광사업을 하는 회사들에서도 태양광을 악마화하는 보수여당과 후보를 지지한 인간들이 적지 않았다 한다. 뻔히 예산 줄이고 지원 줄이고 환경도 안좋아질 것이 예상됨에도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편의점 알바가 주휴수당 줄인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페미 때문에 잔업하느라 죽겠다는 IT 종사자들이 120시간 일하게 해달라 대통령에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이 탈중국을 선언한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어째서 이런 모순들이 나오는가. 자기 땅이 철원에 있으니 남북화해가 더 유리할 텐데도 북한에 적대해야 한다며 2찍을 선택하는 것도 같은 논리다. 민주당이 진보적이지 못하니 민주당을 응징하기 위해 그나마 이룬 진보를 모두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는 2찍 진보들 또한 다르지 않을 터다. 저들의 정의가 저들이 놓인, 그리고 추구하는 현실을 넘어선다.

 

아무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원래 국민교육이라는 자체가 국민 개개인의 능력계발을 위한 것이 아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국민교육도 거대서사가 더 중요했다. 국가와 민족이 개인의 앞에 있었다. 오죽하면 국제주의를 주창하던 사회주의자들마저 국가간 전쟁이 벌어지자 자원입대해서 알아서 죽어나갔겠는가. 그 정점에 파시즘이 있었을 것이다. 이념이라는 거대서사를 위해 개인을 말살하던 냉전시대도 다르지 않다. 어설프게 배워서 더 위험하다. 그 위험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 사회는 여전할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다. 

아주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도 말씀하셨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

 

그래서 어느 학교 어느 교실에나 공부만 잘하는 찐따가 최소 하나는 있었다. 공부만 할 줄 알지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른다. 대부분이 아는 일반적인 상식은 물론 최소한의 사교를 위한 기술도 노력도 아예 무지하다. 괜히 예전 사법시험 준비하다가 뒤늦게 군대 온 선임이 사법시험 공부하는 놈치고 멀쩡한 놈이 없다 말한 것이 아니다. 

 

최근 짤로 꽤나 화제가 되고 있는 만화가 시마모토 카즈히코도 그래서 자기 만화에서 이런 명대사를 남기고 있었다.

 

"골방에 쳐박혀서 만화면 그리던 새끼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었을 리 있겠나!"

 

선천전 소시오패스가 아닌 후천적 소시오패스인 것이다. 비슷한 부류로 오타쿠가 있을 것이다. 오타쿠 역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건 비슷하니. 주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하려 하기보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래도 되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가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만화라거나, 영화라거나, 특정한 캐릭터라거나. 그래서 전혀 주위를 신경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만 행동하며 그것을 스스로 납득하고 마는 것이다. 하물며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도 선생님도 모두 칭찬만 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전근대 왕조국가들이 오래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다. 왕의 핏줄이라고, 더구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라고 제대로 쓴소리를 들려줄 사람이 드물다. 뭐라 해도 다 들어주고 어떻게 해도 다 용인해준다. 그런데 아예 궁궐 안에서 보던 사람만 매일 보며 살아야 한다. 그런 놈이 왕이 된다고 제대로 된 왕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암군, 혼군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도대체 뭐라 해도 들어 쳐먹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엉뚱한 소리만 내뱉는다. 그런 놈이 심지어 영감소리 듣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어떻게 되겠는가?

 

사법시험 폐지되어 다행이라 여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래도 로스쿨이라도 다니면서 다른 사람도 만나고 해야지 사법시험 공부한다고 골방에 쳐박혀서 법전만 보고 있으면 멀쩡한 사람도 쓰레기가 되기 쉽다는 이유다. 사법시험 출신들이 맹하거나 독하거나 둘 중 하나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물정을 모르면 맹하고 그런데도 독기를 가지고 공부만 해댔을 테니 독하다. 그런데 그 방향이 어딘가 틀어져 있다. 다만 같은 이유로 방황도 했었고 현실의 어려움도 몸으로 겪어 알고 있는 이들은 그래서 꽤나 외골수로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경향도 보인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같을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주위를 보지 못한다. 자기만의 정의감과 선의에 사로잡혀 정작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고개만 파묻고 있으면 상대가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하니 상대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언론 정도일 것이다. 이전에는 기무사나 국정원이 검찰을 제대로 견제하면서 때로 농락도 했지만 민주정부를 통해 무력화된 지금은 검찰을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주체라고는 겨우 언론 하나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언론이 검찰이 원하는대로 그냥 받아써주기만 한다. 아니 언론 자체가 검찰과 비슷한 놈들로 이루어져 있다. 역시나 언론고시라는 것이다. 언론이라는 권력을 바라고 공부만 해서 스펙만 좋은 놈들이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검찰과 어울리려 한다. 그렇게 비슷한 부류끼리 서로 주고받으며 자가발전을 한다. 절차탁마가 아니다. 자가발전이다. 검찰은 언론을 띄우고 언론도 검찰을 띄우고. 그러니 뭘 해도 포장되고 뭘 해도 미화된다. 조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너무나 뻔한 내부갈등쇼를 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다. 대부분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에 불만을 가진 지지자들이나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뿐 중도층에서까지 어차피 선거용 쇼일 것이라며 콧방귀나 뀌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화재가 난 현장에 갔으면 피해자들도 만나고 위로도 하고 돌아와야 할 것 아닌가. 만나서 화해쇼 한 번 하고 그냥 돌아온다. 그래도 통할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나경원이 그랬었던 것일까? 나경원이 국쌍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듣는 사람을 바보로 여기는 언행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짜 저 말을 믿으라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뱉는 것인가? 그런데 진짜였다.

 

하긴 그동안 한동훈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뱉는 언행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나 2030 남성들이 좋아한 것이기도 했다. 딱 공부 잘하는 모범생의 말투다. 다만 나와 같은 부류들의 기준으로는 그냥 공부만 잘하는 찐따다. 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모지리들이 학교에서도 딱 저런 말투를 썼었다. 이준석도 비슷한 과다. 참고로 2찍 진보들 가운데서도 저런 말투 쓰는 놈들이 꽤 된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인터넷에서 키배 뜨면서 책으로만 세상을 아는 놈들이 참 많구나 진지하게 깨닫는 계기가 되어 주었던 놈들이다. 2찍 진보가 괜히 윤석열 정부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사과할 발언이라도 했던 김경률에 비해 문재인 정부에서 그리 말많던 자칭 진보 가운데 그 정도라도 발언하는 놈들을 본 적이 있는가. 

 

현정부의 수준이자 언론의 수준인 것이다. 사실상 현정부와 언론은 한 몸이라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성과다. 여성주의에 여와 야가 없는 것처럼 언론에도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이고 언론은 그냥 언론이다. 언론인인 연 하는 지식인들은 그냥 언론의 찌그레기들이다. 박노자가 소중한 이유다. 진보를 자처하는 인사들 가운데 멀쩡한 지식인은 박노자 하나 뿐이다. 아무튼 어째서 현 정부가 이지경까지 왔는가. 이런 지경까지 보여주고 있는가. 새삼 기억도 가물한 오래전 교실풍경을 떠올리고 마는 이유다. 그때도 그런 놈들이 있었다.

 

부모들 잘못이다.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 그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된다. 사법시험 잘봐서 판검사만 될 수 있으면 된다. 혹은 의대 가서 의사만 될 수 있으면 된다. 판검사와 의사 가운데 멀쩡한 인간이 드문 이유다. 좋은 대학 나와서 지식인인 연 하는 놈들도 비슷하다. 우리 세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지금 2030이 저모양이지. 미안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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