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19세기 정조가 죽고 바로 조선의 왕권은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는 것일까? 어려서 즉위했다고는 하지만 김조순이라는 든든한 후견인도 있고 순조 자신도 그렇게 무능하기까지 한 임금은 아니었다. 물론 왕으로서 무능하다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실제로 현실에 구현할 역량이 부족한 것을 뜻한다. 아무리 영민하고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을 현실로 옮기지 못하면 무능한 것이다. 다른 이야기다.


아무튼 그러나 정작 진실을 이해하자면 먼저 어떻게 숙종의 재위 이후 영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왕들은 그토록 완벽하게 신하들을 통제하고 제압할 수 있었는가. 단종 이후 최초라는 숙종의 정통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단종은 그러면 정통성이 부족해서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까지 당했겠는가. 바로 조선이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보내고 그것을 중단하기까지의 사정과도 연관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당시 조선의 재정수입 가운데 상당부분이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에서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천하에 편입되지 않은 이상 일본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도, 더구나 무역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류큐를 사실상 지배아래 두고 류큐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과 무역을 하기는 했지만 전국이 통일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더욱 커지기 시작한 일본내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머지를 어디선가는 사들여야 했다.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을 일찍부터 중국에 사신을 자주 보내어 적극적으로 조공무역을 해왔거니와, 더구나 청이 건국되고 책문에서 제한적이지만 사무역도 허용되고 있었다. 조선의 주력수출품인 인삼과 쇠가죽 역시 일본에서 무척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이 지불한 것이 바로 은. 유황도 구리도 일본으로부터 사들이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역시 중국에 물품을 구입하고 결제할 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아는 바와 같이 중국이 은본위제를 채택하며 동아시아 무역의 기본결제수단은 은이 되었고, 그리고 멕시코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기까지 무역에 사용된 은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나오고 있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사인들이 일찍부터 일본을 찾았던 이유였다. 그 은이 조선으로도 흘러든 것이었다. 오사카성 여름싸움도 끝나고 일본의 정국이 안정된대다 청과의 전쟁도 끝나서 중국과의 국경도 정상을 찾아가면서 무역량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딱 효종, 그리고 숙종 연간이다. 얼추 조선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그러면 19세기 조선의 왕권이 추락할 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무엇보다 일본의 은광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은으로 결제해야 하는데 일찍부터 은광을 개발하여 채굴해 왔던 탓에 일본의 은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미 은의 부족으로 결제에 사용한 은의 품질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제수단의 부족으로 인해 더이상 조선으로부터 물품을 사들이지 못하며 일본 내부에서 대체품을 생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삼이었다. 조선의 인삼과는 효능이 전혀 달랐음에도 일본에서도 인삼의 재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일본에 대한 가장 주된 수출품은 면화였었다. 팩추얼드라마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면화재배장면을 묘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조선중기에는 일본에 수출한다고 너도나도 면직물염색에 뛰어드느라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워낙 조선의 재정 가운데 전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아무리 전세를 많이 걷어봐야 1할도 안되는 세율로 무려 생산의 절반을 지대로 거둬가는 사대부들을 경제력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역에 대한 세금은 공식적으로 오로지 조정만이 거둘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전세의 비중이 커지면 경제력에서 조정과 왕실이 사대부를 압도하기란 어려워진다. 반대로 전세보다 무역이나 상거래로 인한 세수의 비중이 높아진다면 조정과 왕실의 재정은 사대부의 그것을 앞설 수 있다. 딱 그 상황이었던 것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에서 조선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는 그로 인한 세금만으로 조선조정은 어느때보다 풍족한 안정적인 재정을 꾸릴 수 있었고 이는 곧 조정과 왕실의 힘으로 작용한다. 반대로 무역과 상거래가 위축되고 전세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재정은 악화되며 조정과 왕실의 권위는 그만큼 추락하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모든 힘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고 정치권력이라는 것도 경제력과 비례하기 쉬운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것이 그저 백성들만을 위해 그리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그런 이유로 조선에서도 중상주의자와 중농주의자 사이에 서로 추구하는 정치지향이나 철학이 서로 달랐었다. 중농주의자들이야 당연히 향촌경제를 장악한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자치에 더 무게를 두었었다. 반면 주로 조정이 있는 한양에 거주하고 있던 중상주의자들은 조정과 전제적인 군주가 주도하는 개혁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같은 경향은 갑신정변까지 조선내 개화파의 주된 입장이 된다.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은 지주의 것이지 나라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인이 장사를 해서 거두는 이익은 오로지 나라만이 거둘 수 있다. 부국강병은 상업과 무역에서 비로소 나온다.


그저 드라마에서처럼 국왕, 혹은 세자가 권신과 말싸움 몇 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많은 궁인들에게 녹봉도 주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추가로 도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 대신들에게도 충분한 녹봉이 지급될 수 있어야 한다. 병사들을 굶기고 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일단 먹이고 나야 충성심도 기대할 수 있다. 조선의 재정은 그래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왕이 힘을 쓸 수 없다. 그런 이유다.

연의는 물론 정사를 읽더라도 주유의 뒤를 이어 손오의 도독이 된 노숙은 바보같을 정도로 유비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도 가장 먼저 강하의 유비를 찾아갔고, 근거 없이 떠돌던 유비가 형주를 빌려달라 할 때도 손권을 설득해서 그러도록 했었으며, 이후 유비가 촉을 차지하고도 형주를 돌려주지 않았을 때도 답답할 정도로 인내하며 말로써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원래 노숙이 유비라는 인물을 존경하고 흠모하여 일부러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정사를 보더라도 노숙은 자신의 주군 손권을 새로운 중국의 황제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손권에게 한왕조의 부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장강유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뒤 조조와 맞서야 한다고 조언했고, 적벽에서 승리한 뒤에도 손권이 직접 말에서 내려 노숙을 맞는 최상의 예우로써 그를 대했을 때도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 수레를 보내 예우해야 비로소 자신의 공적에 보답했다 할 수 있다 대답한 바 있었다. 다시 말해 노숙의 목표는 일개 군벌이 아닌 장차 중국을 둘로 나눈 황조의 황제로 손권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과정에서 손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북을 평정한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며 손권에게 항복을 권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노숙이 앞장서서 유비와의 동맹을 추진했던 것도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 명분상 아직까지 중국의 천하는 한의 천하였다. 한의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였고 조조는 그 황제의 명령을 받드는 승상의 신분이었다. 조조가 항복을 요구했던 것도 자신이 아닌 황제에게 신하로써 순종하라 명령을 전하는 것이었다. 만일 손권이 조조의 항복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손권의 세력은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반역집단이 되어 버린다. 조조의 항복권고를 받고 손오의 진영이 크게 분열했던 진짜 이유였다. 이대로 명분을 거스르면서까지 조조에 대항하며 독립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명분을 쫓아 조조가 아닌 황제에게 항복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을 것인가. 결국 문제는 명분이었다. 명분상 신하인 손권이 황제의 명령을 받드는 한왕실의 승상 조조와 맞서도 괜찮은 것인가.


그래서 유비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일단 유비는 한실의 종친이었다. 촌수가 조금 멀기는 하지만 직접 황제로부터 황숙이라 불리기까지 했던 천하의 명사 가운데 하나였다. 더구나 유비에게는 오래전 동승과 함께 황제로부터 받았던 역적 조조를 토벌하라는 밀조가 있었다. 황실의 종친인 유비가 황제의 밀조를 받아 역적 조조를 토벌하려 한다. 황제라고 하는 결코 거역해서는 안되는 명분을 앞세워 압박해오는 조조에게 오히려 역공까지 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천하에서 단 하나뿐인 수단이 바로 유비 자신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손오가 조조에 대항하는 것은 황제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역적 조조에게 억류되어 있는 황제를 구하기 위한 충심의 발현이다. 장차 노숙의 구상대로 손권이 장강 일대를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조조와 자웅을 겨루려 할 때 자신들의 행도을 정당화시킬 명분 역시 한실의 종친이며 충신인 유비라고 하는 개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노숙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손오가 멸망하기까지 손오의 수많은 인재들 가운데 정작 장강 건너 중원에까지 야심을 품었던 이는 거의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원래 손오라는 세력 자체가 한왕조를 등지고 남하한 토착세력과 손가와의 결합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토착세력의 입장에서는 그저 자신들의 기득권만 보장받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저 더 많은 땅과 백성과 물자만이 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손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유비라는 명분 없이도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조조와 겨루고 자신들의 영토를 지켜내겠다. 손오가 오히려 촉보다 훨씬 많은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고서도 번번히 위와의 전쟁에서 패퇴한 이유였다. 지키는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므로 필사적이지만, 정작 조위의 영토로 공격해 갔을 때는 별다른 명분이 없었다. 그저 남의 땅을 빼앗는 것일 뿐 반드시 그래야 하는 필연도 당위도 없었다. 동기가 부족하면 그만큼 의욕도 줄어든다.


노숙이 죽고 손권이 노숙이 유비와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이유였다. 유비가 없어도 되었다. 유비 없이도 형주와 강동을, 자신들의 영역을 지킬 수 있었다. 장강을 넘어 여러차례 군사적인 시도를 했음에도 번번히 좌절한 것은 자신의 실패이므로 철저히 묻어둔다. 그에 반해 유비라고 하는 명분을 철저히 계승했던 촉한은 제갈량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조위와의 국경을 압박하고 있었다. 심지어 조정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도 강유는 독자적으로 군을 이끌고 여러차례 조위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저들은 한을 배신한 역적이고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한을 계승하고 부흥시킬 충신들이다. 유비와 제갈량의 선정에 감복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싸울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 가장 컸다. 의미없지 않다. 당장 싸우다 죽더라도 가치있게 죽는 것이다. 때로 사람에게는 그런 바보같은 이유들도 필요한 것이다.


실제 기록에도 노숙은 매우 강단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익양대치 당시 보여준 우유부단한 모습과는 배치되는 인상이었다. 당연했다. 그것이야 말로 노숙의 단호한 결단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유비가 필요하기에 양보한다. 손오와 주군 손권을 위해 유비와의 동맹이 필요하기에 불편해도 불쾌해도 과감히 인내한다. 그리고 노숙이 사망하고 인내심이 사라진 손권에 의해 손유동맹이 깨지면서 노숙의 원대한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중원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그저 변두리 군벌의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꿈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를테면 희망이 넘치는 사회라면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얼른 저 사람처럼 잘 살아야겠다."


그러면 거꾸로 희망이란 없는 사회에서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저놈도 나랑 똑같이 못살았으면..."


차라리 부자가 더 인정이 많은 이유다. 원래 대대로 귀하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만큼 말이나 행동 생각에서 여유가 드러난다. 어차피 지금보다 더 귀해지나 부유해지나. 자기보다 더 귀하고 부유한 누군가를 보더라도 그보다 못하지만 자신 역시 제법 괜찮지 않은가. 그러면서 어느 정도 거리가 가늠되면 한 번 욕심도 내본다. 나도 저기까지. 나도 거기까지. 그래도 충분한 기반이 자기에게는 있다.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그나마 하루 일을 공치면 하루를 굶어야 한다. 저축도 없고, 아이들 학교도 제대로 마치기 어렵다. 일이라도 오래 열심히 해서 무언가 희망이 보인다면 그것이라도 기대고 살 텐데 아다시피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자리마저도 귀하다. 그런 동네에서 누가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만나 조금이라도 잘 살게 되었다. 그것을 보는 기분이 어떻겠는가.


온갖 소리들이 떠돌아 다닌다. 자기보다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보다 잘살고 자기보다 귀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라도 끌어내려야 한다. 그렇게라도 자신과 같은 위치로 다시 되돌려야만 한다. 아니라면 너무 비참하니까. 자기만 가난한 것은 너무 서러우니까. 내가 부자가 될 수 없으니 부자가 된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인정이란 때로 서로를 끌어내리려는 아귀들의 아우성과도 같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부자였던 이들에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기제다. 저들은 나와 다르니까. 저들은 우리와 근본부터 다른 존재니까. 그러므로써 납득하게 된다. 자기가 부자가 아닌 이유를. 그들이 부자가 된 이유를. 자신들이 부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차라리 부자인 이들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발가락 끝이라도 스쳤으면 자랑거리로 삼는다. 내가 이만큼 부자들과 가까이 있었다.


"너만 힘들어?"

"너만 고생했어?"

"나도 힘들어!"

"나도 너만큼 고생했어!"


노인들처럼 희망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이들도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도 얼마 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기대하기에는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지쳐 있다. 남들을 위해 배려하기보다 당장의 자기만족과 위로를 위해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만큼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들을 보며 자신의 고단한 현실을 잊으려 한다. 자기의 알량한 위세에도 감히 맞서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섣부른 우월감마저 느낀다. 내가 아직은 그만큼 대단한 존재다. 그것이 전부지만 말 그대로 그것이 그들에게 남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들만일까? 타인의 불행을 보며 그들의 불행을 비웃는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그들의 고통을 조롱한다. 타인의 행운을 보면서는 그들의 행운을 질투하고 시기한다.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보상금 많이 받았으니 된 것 아니냐 당당히 꾸짖을 수 있는 자신감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미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그 대가로 얻은 얼마간의 돈이 그리 부럽고 배가 아픈 것이다. 그만큼 이 사회는 아직도 가난하다.


IMF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IMF를 거치며, 그리고 김대중과 노부현 정부 아래 수도 없이 정리해고당하고 계약직으로 전락하여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처지로 몰린 사람들이 그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까지 잃어버린 탓이다. 그래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복수다. 그냥 다 죽어보자. 희망이 아닌 발버둥을 위한 선택이었다.


사실 내가 다음, 아니 그 다음에라도 이 나라를, 이 사회를 이끌 리더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터다. 희망이다. 기대다. 목표다. 바람이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그래서 무엇을 하면 된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그 무엇이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과연 지금 누가 있을까? 국민들 자신도 이미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고 있지는 않을까.


서로에게 독을 건네고, 서로를 칼로 찌르고,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며, 그러면서 오로지 자기만 살려 발버둥친다.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아니 원래 불교의 지옥이란 윤회의 하나였을 터다. 내가 윤회하여 태어난 그곳이 지옥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업이다.


헬조선의 이유다. 희망이 없는 절망의 사회. 희망이란 빛은 어딘가 있기는 한 것인가. 멈출 수 없기에 그저 앞으로 달려가려고만 한다. 슬픔이다.

영화 '부산행'을 보는데 운수회사 상무 용석이 어린 수안에게 노숙자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한다.


"너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사실 용석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흔하게 자주 듣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일가친척, 하다못해 알고 지내는 동네 어른들까지. 


공부 잘해야 잘산다. 공부 열심히 해야 나중에 귀하게 된다. 공부만 잘하면 해달라는대로 뭐든 다 해줄 수 있다. 공부 잘해서 대학에만 가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다 해도 괜찮다. 그러나 공부를 못하면 사람들 앞에 나서서도 안된다. 무언가 바라거나 요구해서도 안된다. 어차피 공부도 못하는 놈들 미래는 뻔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내일은, 아니 지금은 과거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고 대가다.


본전생각이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인생에 가장 소중한 시절들을 밤잠까지 줄여가며 자신을 다그쳐 왔었는가.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나 못하면서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공부만 했었던 것인가.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부자가 되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을 떠올린다. 과연 너희들은 나만큼 고생하며 노력한 적이 있는가. 사회적 지위는, 상대와 자신의 위치는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은 노력을 했던 자신은 상대에게 무엇이든 함부로 할 권리가 있다.


믿기지 않을 테지만 실제로 그렇다. 비정규직이니 파견직이니 파업을 하거나 일인시위라도 하면 항상 따라붙는 말이 '그러길래 학교 다닐 때 남들처럼 열심히 했어야지'다. 자신이든 부모든 학교 다닐 때 열심히 하지 않은 탓에 그 수모 그 고생을 겪는 것이 아닌가.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현실의 부당함과 불공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젊어서 그리 노력을 했는데 나이 먹어 아직 경비원일까? 학교 다닐 때 그리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고작 택배배달원일까? 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갔다면 이런 몸이나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까? 그러므로 그래도 된다. 나는 노력했으니까.


공직자의 부정과 비리에 대해 오히려 관대한 것도 그래서다. 오히려 연에인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것도 연예인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돈을 잘 버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저 타고난 매력과 재능만으로 쉽게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부를 손에 넣는다. 그러므로 비판한다. 노력하지 않는 그들에 대한 공격은 정의다. 반면 공직자는 그만큼 노력해 왔고 결과로써 자신의 노력을 증명한 이들이다.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해서 지금의 위치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만한 비리 쯤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지위도 높기에 더 엄격한 책임을 요구하기보다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부러움과 질시를 보낸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실력주의 경쟁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그렇다고 경쟁의 결과가 오로지 실력과 노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진실은 보려 하지 않는다. 노력해야 성공하는 정의로운 사회여야지만 지금 자신의 노력은 의미를 갖는다. 어찌되었거나 지금 자신이 노력하는 보답을 기대할 수 있다. 당장은 우울하고 힘들더라도 내일의 희망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주위의 환경이야 어쨌든 노력했으니 성공한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처음의 조건이야 어떻든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으니 지금의 처지가 된 것이다. 믿음을 현시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더 밀어붙이기도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의 부당하고 불합리한 핍박에도 한 마디 변명조차 못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자신이 믿는 정의의 증거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단지 강자가 현실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약자가 자신보다 열위에 있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정의여야 한다. 가치판단이 개입한다. 강한 것은 옳다. 약한 것은 그르다. 남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은 항상 옳다. 남들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은 항상 그르다. 노력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노력은 선이다. 노력은 정의다.


어째서 헬조선인가. 그것을 알아버렸으니까.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간 젊은이들이기에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어른들이 말한 정의는 없다. 노력만 하면 잘사는 공정한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최소한 이 나라에는 없다. 노력해도 못살고, 실력이 있어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노력 이전에 타고난 환경과 조건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 과도기다. 비로소 현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천정과 바닥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같은 사회에 살고 있지만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저들이 사는 세계와 자신이 사는 세계가.


그러면서도 결국 굳이 누군가를 차별하려는 것은 그들이 배운 것이 그런 것들인 때문이다. 혹은 외국인이라서, 혹은 여성이라서, 혹은 연예인이라서, 그리고 당연히 그들이 차별받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도 있어야만 한다. 여성은 노력하지 않는다. 여성은 성실하지 않다. 외국인은 한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연예인은 놀고 먹는 족속들이다. 그들의 헬조선은 타인을 증오하고 경멸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인세의 지옥이다.


어째서 유독 한국사회에서 갑질문화가 이토록 지독히 뿌리내리고 있는가. 차라리 중세의 신분사회와도 같다. 그런데 정작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행세할만한 집안인 경우는 그리 없다. 그들이 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도덕적 당위다. 갑질은 정의롭다. 갑질은 당연하다.


뿌리뽑히지 않는 이유다. 이미 한국인의 삶 그 자체다. 갑질 없이는 경쟁한국도 존재할 수 없다. 잘사는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다. 못사는 나라들은 게을러서 못사는 것이다. 우리는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보다 더 잘살아야만 한다.


우울한 초상이다. 비참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이다.

간단히 장사를 하는데 실수로 500원짜리 물건에 5000원짜리 가격표를 붙였다. 누군가 그 가격표를 보고 500원짜리 물건을 사면서 5000원을 지불한다. 그러면 장사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겠는가? 먼 나중은 생각지 않는다.


물에 빠졌다. 가방 하나가 마침 물살에 휩쓸려 바로 앞에까지 떠밀려 와 있다. 가방에는 한 사람만 겨우 매달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친형제가 가방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다. 만일 자신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그때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독일인들은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만든 차의 연비를 그토록 철저히 속이고 있었던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 묻고 싶다. 만일 자신이 그 기업의 경영자이고 임원이고 기술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자신들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겠는가?


당장 아버지가 매를 들고 달려오면 살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의심해서 따져묻는데 거기서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합리와 도덕은 원래 전혀 다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부분이다. 합리를 정의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인과다. 들어온 원인과 나가는 결과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 그 값을 계량한 것이 바로 합리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가. 어떻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익일 것인가. 반드시 자기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직장이나, 혹은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 결국 단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 어떤 계산을 해야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답이 나올 것인가. 


바로 거기에서 20세기 초중만 인류사회를 휩쓸었던 파시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로지 기계적으로 결과에 대해 계산하려고만 할 때 인간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장애인을 굳이 보호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더이상 쓸모가 없는 노인들을 공경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느가. 여성은 그저 아이만 잘 낳아 기르면 나라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는 것이다. 필요없는 것은 배제하고, 효용이 떨어지는 것은 수정하고,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주저없이 그것을 선택한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수용소에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도 고민하지 않는다. 기왕에 죽일 것이면 어떻게 죽일 것인가만을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노력으로 더 쉽게 더 빠르게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더 효율적으로, 더 쉽게, 더 편하게, 더 빠르게, 더 능률적으로, 근대 이후 인류의 문명이 발전해 온 과정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반성은 정확히 이성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합리에 대한 반성이다. 사람들이 이성이라 믿었던 비이성에 대한 반성이다. 세상은 인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과의 한가운데 인간이 있다. 후기구조주의는 바로 그 개별의 인간에 집착한다. 정신분석학마저 일반화된 정신분석이론을 거부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거대한 계산기가 아니다.


즉 도덕에서 말하는 이성과 합리에서 말하는 이성은 전혀 별개라는 것이다. 도덕에서 말하는 이성은 선험적인 판단하는 이성이다. 합리에서 말하는 이성은 단지 기계적인 계산하는 지능에 불과하다. 조직폭력배가 이익을 위해 무고한 개인을 협박하고 갈취하는 것은 분명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그러나 조직폭력배 개인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러는 쪽이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된다.


사람들은 때로 말한다. 그러는 것이 모두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굳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 손해보는 선택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혜왕이 물었다. 과연 당신이 이 나라에 와서 무슨 큰 이익이 되겠는가. 맹자가 대답했다. 오로지 인의가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는, 그리고 바로 여기 우리들이라는 편협함을 버렸을 때 당장의 손해가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역시 도덕과 합리의 차이를 가장 잘 갈파한 한 마디라 할 수 있다.


도덕의 이성은 보편의 세계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에 굳이 구분을 두지 않고 모든 시간과 공간에 두루 존재한다. 그렇게 여긴다. 그것을 느끼는 감수성이다. 그에 비해 합리의 이성은 개별적 존재에 귀속된다. 당장 나의 처지. 우리의 형편. 모두의 이익. 단지 그 범위가 합리의 범위를 정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서 그래서 때로 도덕과 합리는 만날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옳다. 원래 인간의 이성이 정의를 추구한 것은 그를 위한 것이었으니.


도덕적인 인간은 합리적인가? 의외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반대로 부도덕한데 합리적이라 하면 반발하게 된다. 합리적인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말하면 이상하게 여긴다. 도덕이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안다. 자신에게 도움되는 것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인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의외로 모든 경우 매우 합리적이다. 인풋과 아웃풋을 맞추는 본능적인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사회가 유지된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와 상관없이. 그리고 무한의 시간 속에서 평가받는다. 먼 훗날의 평가도 자신들의 선택은 합리적이었는가. 역사의 무서움이다. 인간의 무서움이다.

원래 근대 이전까지 국민이란 - 아니 국민이라는 말도 근대의 산물일 테니 백성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 백성이란 단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 뿐 나라와 지배자 자신의 운명을 믿고 맡길만한 동반자나 심지어 동지는 결코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징집이라는 자체도 근대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라 할 수 있었다. 백성을 징집해서 군대를 꾸리기보다 자신으로부터 직접 급여를 받는 용병을 더 선호했다. 내가 급여를 지급하는 한 용병은 언제나 자신의 군대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국민국가의 개념이 깊이 뿌리내리면서 많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징집된 병사들이란 더이상 믿을 수 없는 감시와 통제의 대상에 불과한 백성이 아니었다. 국가와 공동운명체였고, 국가의 운명을 함께 책임져야 하는 동반자였다. 더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징집된 병사들이란 국민이었으며 국가의 주권자였다. 굳이 가두고 감시하고 통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 나설 것을 전제하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의 국가란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지키려 애쓰는 국가다. 그렇게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설득해야만 한다.


구일본제국은 출발부터 강제와 억압을 통해 뿔뿔이 흩어진 각 번의 백성들을 통합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천황의 존재 역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상 독립국가의 연합체와 같은 상태였었다. 그것을 억지로 일본과 천황이라는 개념을 주입시켜 일본의 신민으로 만든 것이었다. 정작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고위층이 천황의 충실한 신민인 일본인들을 믿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오로지 강제와 억압으로만, 폭력과 형벌로만 유지되는 군이란 바로 여기서 출발하고 있었다. 억지로 때려서라도 군인을 만들어야 한다. 온갖 폭행과 욕설과 모욕과 가혹행위들로 철저히 길들여 제대로 된 군인을 만들어야 한다. 제대로 된 군인이란 상급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줄 아는 군인이다.


똑똑한 군인을 싫어했다. 많이 배우고, 또 보고 들은 것도 많은 도시출신들을 싫어했다. 그 전통은 한국군에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불과 90년대까지도 한국군 지휘관 가운데는 대학출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똑똑해서 말만 많고 시키는대로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오로지 높은 곳에 있는 정부의 고위관료와 군의 지휘관들이 도맡아 한다. 일선의 사병들은 그저 시키는대로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2차세계대전 당시, 아니 그 전부터도 일본군 가운데 지휘체계가 와해될 경우 덩달아 군기는 물론 인성마저 와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군의 사병들에 대한 - 아니 장교들에 대해서까지 억압과 폭력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게 되었다.


그런 구일본제국군을 계승한 것이 바로 해방이후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부 가운데 상당수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던 이들이었다. 1948년 수립된 정부의 수뇌부와 그들의 손발이었던 경찰들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인민들을 배신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었던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지배층과 지휘층이 조선의 일반대중과 유리되어 있었다.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 억악하고 강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살인과 방화, 학살, 약탈 역시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수단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조선놈들은 그저 패야 말을 듣는다고. 나라를 다스리다 보면 한두사람 쯤 죽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그것이 최근까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였다.


군이 사병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다. 군에 있어 사병들이란 스스로 나라를 지킬 의지도 용기도 없는 타자들이다. 주권자로서 나라에 대한 어떤 책임도 사명감도 가지지 못하는 외인에 불과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 뿐이다. 나라를 지키려 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들 뿐이다. 자신들의 나라만이 나라다. 군사독재의 전통은 유구하도록 그렇게 군을 통해 계승되어 왔다. 사병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보다 아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충분히 고민하고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 또한 주지 않는다. 굴리고 다그친다. 때리고 윽박지른다. 그래야 군은 제대로 돌아간다.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은 단지 자신들이 결정한대로 시키는대로 따르기만 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군이라는 특성상 물론 어느 정토 억압과 통제는 필수적이다. 군의 단합을 위해서라도 일정기간 병영에 머물며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일과가 끝난 뒤에도 모든 일상들마저 지휘관의 통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정해진 일과가 없는 날에조차 모든 일상의 행위들을 지휘관의 명령에 의해 결정한다. 자신의 나라다. 단지 그들의 나라일 뿐이다. 한국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애국심이라 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관념적으로는 나라를 위하는데 실제 자기가 손해보면서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려는 의식은 부족하다. 아니 국가라고 하는 인식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다. 국가와 자신과의 관계를 단지 정권과, 혹은 권력자와 자신과의 일대일 인정의 관계로 인식한다. 국가라는 보편적인 세계가 아닌, 국민이라는 보편적인 관계가 아닌, 특수한 인정의 관계로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명령에는 복종하는 대신 자신의 부당한 이익 역시 정당화한다. 나라에 해를 끼치면서도 정작 위에서 아뭇소리 없으면 그것으로도 옳다.


국가가 먼저 국민을 존중해야 한다. 군이 먼저 병사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 스스로가 나라와 군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굳이 억지로 다그치고 몰아세우지 않더라도 스스로 나서서 나라와 군을 지키려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그다지 필요없는 비용이다.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억지로 휴일까지 병영에 잡아두고 무언가를 강요하기 위한 비용이란 오히려 낭비에 가깝다. 해소되지 않은 불만과 동요가 결국 수많은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며 군에 대한 인식은 물론 군의 사기와 전투력마저 떨어뜨리고 있다. 그것을 또 관리하겠다고 비용과 노력을 낭비한다. 


차라리 모병제가 나을 수 있다 여기는 이유다. 최소한 200만원 300만원 월급을 주며 부린다면 사람 중한 줄은 알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병이 부족해서 인력난에 허덕인다면 더이상 병사들에 지불해야 할 비용을 아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비용을 들이면서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길 것이다. 병사는 공짜가 아니다. 국민 역시 공짜가 아니다. 공짜가 아닌데 공짜로 부리려 하니 그를 위해 또 엉뚱한 비용이 소모된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병영내 징집된 병사들에 대한 인간적인 예우와 환경의 개선. 충분히 대가를 치루고 대우하면서 소중하게 그들을 대해야 한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재량을 허용하며 그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을 믿지 못하는 국가가 어찌 유지될 수 있을까? 병사들을 믿지 못하면서 어찌 군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가장 크게 낭비되는 부분이다. 국민을 믿지 못한다. 병사들을 믿지 않는다. 아예 않으려 한다. 한심하다.

사실 진심어린 조언이란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저 툭 한 마디 내뱉고 돌아서는 것은 걱정도 충고도 아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왜 그런 번거로운 짓들을 사람들은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거라도 실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이 대단 존재라 여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나로 인해 상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고 어떻게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만으로 자신은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악플을 다는 심리도 그와 비슷하다. 아니 대부분 오로지 상대를 걱정하고 사회의 정의와 미래를 생각해서 굳이 그런 리플들을 달려는 것이니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상대가 반박못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즐긴다. 어쩔 줄 몰라하며 위축되는 모습을 즐긴다. 우월감이다. 그만큼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 곤란해하는 것은 당사자만이 아니다. 그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 가운데 상대의 주위를 이용해서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된다. 걱정해서가 아니다. 함께 고민해주는 것도 아니다. 가학성이다. 그 순간 만큼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된다.


과연 명절이라고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조언을 들려주는 사람들치고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있던가. 다만 얼마라도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던가, 아니면 취업에 도움이 되도록 자기가 먼저 발벗고 힘써주던가, 재미있는 건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굳이 말로 이래라 저래라 다그치는 경우가 그리 없다는 점이다. 정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럴 능력이 된다면 나서서 도와줄 뿐 되도 않는 말로 위세를 떨려 하지 않는다. 말 많은 것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해 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리어 탓을 한다. 너 때문이다. 네가 문제다. 명분쌓기이기도 하다. 내가 그렇게 걱정해주었는데. 내가 그렇게 진심으로 조언도 해주었는데. 그러므로 더이상 내가 너를 도울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것이다.


어설프게 아는 친척들이 그래서 더 짜증나고 불쾌하다.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거나. 진짜 가까운 사이라면 말 한 마디도 쉽게 내뱉지 않으려 한다. 명절이라고 어중이떠중이 다 모이는 탓이다. 오지랖의 이유다.

조선의 경제가 무려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크게 발전하지 못한 첫째 이유로 나의 경우 노비를 꼽는다. 이미 같은 시대 명과 일본에는 인신이 구속된 채 공짜로 부려지는 노예와 같은 존재는 공식적으로 사라진 뒤였다. 신분적으로는 예속되었지만 기본적인 급여 정도는 지급받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예속인을 부려 누리는 지배층의 사치는 곧 예속된 하층민들의 경제활동을 의미했다.


조선이 노비제를 폐지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노동력이 유일한 수단이던 전근대사회에서 지배신분이 사치를 누리려 하면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사실 그것은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그래서 농노가 있었다. 엄격히 주거와 직업, 여행의 자유가 통제되는 영민들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소유하고 그를 이용해 부를 만들고 일상의 사치를 유지하는가, 그것이 바로 가진 바 권력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전근대 일본사회에서 봉건영주가 누리는 권력을 측정하는 단위인 석고(고쿠)도 그것을 뜻했다. 고쿠란 자신이 소유한 영지에서 나오는 생산량이고, 생산량은 곧 그에 해당하는 노동력을 뜻한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이만한 사람들이 복종하며 일하고 있다.


조선과 이들 나라들과의 차이는 단 하나다. 일정한 영지를 항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가, 아닌가. 중세의 유럽, 혹은 근세의 동유럽의 농노들이나 일본의 농민들은 사람이 아닌 땅에 예속되었다. 오다의 소유가 아니라 오와리 영주의 소유였다. 누군가 사이토를 몰아내고 기후성을 차지한다면 마찬가지로 미노의 농민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곧 토지에 예속된 노동력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모든 토지를 국왕의 소유로 간주했던 조선에서 지배층의 토지소유란 매우 불안정한 한시적 권리에 불과했다. 특히 조선초기 과전법은 지배층의 토지소유를 한정시키고 있었다. 더욱 노동력을 직접 자기 개인에게 귀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토지의 소유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노비는 언제나 지배층 가문의 소유여야 했다.


문제는 그런 결과 생산에 종사해야 할 노동력을 따로 불러 부리는 것을 비용으로 인식했던 다른 문화권에 비해 직접적으로 예속된 노동력을 공짜로 여기는 인식이 강해졌다는 것일 게다. 노동력은 영지에 속해 있으니 따라서 농사가 아닌 다른 일로 그들을 불러 부리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그것부터 생산의 감소라는 비용으로 지불된다. 그에 비해 사람만을 소유한다. 사람만을 직접적으로 소유하고 부린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신분에 따른 일방적인 권력관계와 명령 뿐이다. 더이상의 어떤 대가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


노동력을 동원하면서 그에 따른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고 않고의 차이는 매우 컸다. 어째서 조선은 후기까지 제대로 화폐도 유통되지 않고 상공업 역시 정체되어 있었는가. 돈을 벌고 쓰는 주체들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상공업이 그나마 발달한 조선후기만 해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유민들이 임금노동자로 편입되며 도시경제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일을 해서 임금을 받고 다시 그 임금을 생활을 위한 소비에 쓴다. 임금노동자들이 쓰는 그 돈을 바라고 새로운 노동력이 유입되며 다양한 직업이 생겨나고 물자의 유통 역시 활발해진다.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나온다. 바로 그런 변화가 이미 한참 더 전에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귀족의 시중을 드는 하녀나 하인들마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임금노동자였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마저 얼마간의 대가를 받고서 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번 돈은 바로 시장에서 쓰여졌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과정에 그들이 번 돈이 쓰여지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 음식을 팔고, 혹은 옷을 팔고, 혹은 노동력을 제공하며 또다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많은 노비들은 조선경제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생산에는 종사했다. 양반들의 땅을 경장하여 생산을 하기는 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조선의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재화를 주고받을 일 자체가 드문데 화폐를 유통하려 한다고 실제 그것을 가져다 쓸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도시화란 결국 임금노동자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귀한 신분들이 많이 살아서 화려한 건물이 빼곡하다고 도시화가 잘되었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시화란 시장화다. 시장이란 실제 재화가 유통되는 공간이다. 자신이 노동의 대가로 받은 재화를 필요한 물품으로 바꾸어가는 공간이다. 수입이 있어야 한다. 수입이 없는데 소비란 있을 수 없다. 자급자족이란 생산을 있는 그대로 소모하는 원시경제와 같은 말이다.


아마 조선의 노비제와 경제에 대해 비판할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서 노동력을 사용하는 법을 몰랐다. 노동력은 단지 지배층 개인의 목적을 위해 일방적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노동력이 생산으로 경제활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다분히 의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을까? 소득이 없이는 소비도 없다. 너무나 당연한 전제이며 결론인 것을.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어려서 들었던 속담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남의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


그런데 감이든 배든 원래 제사상에 올라가는 것 아니었던가. 역시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홍동백서 좌포우혜 두동미서 조율시이...


그 진짜 뜻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원래 제사에는 감이든 배든 대추든 올리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인근에서 제철에 나는 것들 가운데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거나 모두가 맛있거나 혹은 귀하다 여기는 것들로 정성껏 조리해서 제사상에 올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방마다 집안마다 제사지내는 방식도 달랐다. 올리는 제수들도 달랐다. 그래서 가가례다. 집안마다 다르다 해서 가가례인 것이다. 그런데 남의 집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감놔라 배놔라 했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즉 지금 제사상은 이렇게 차려야 한다 따지는 자체가 '남의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짓 그 자체라는 뜻이다. 피자도 안되고, 바나나도 안되고, 그런데 정작 산적에는 햄이며 맛살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는가 말이다. 무슨 상관인가.


가장 바보같은 짓거리일 터다. 제사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 제사상은 이렇게 차려야 한다. 근본이 없으니 남이 하는 것만 열심히 살펴서 따르려 한다.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이니까. 예란 원래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제사가 중요한 것은 당시에는 조상을 공경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각자의 처지나 사정에 따라 그에 맞게 격식을 갖추고 예를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원래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근대가 왜곡되어 버린 탓이다. 원래는 우리 스스로 극복했어야 하는 전근대였는데 일제가 중간에 끼어들며 전근대란 민족을 뜻하게 되고 말았다. 만들어진 전통을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한다. 여전히. 아직까지도.


감이든 배든 자기들 사정에 따라 놓는 것이다. 오지랖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

확실히 최근 메갈을 핑계로 여성과 관련한 어떤 주장도 의견도 실제 사례도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주장을 하려 하면 바로 메갈이라는 낙인부터 찍는다. 메갈리아와 관계있을 것이기 때문에 네 말을 듣지 않겠다. 원래 이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여성의 권리신장이란 남성들의 암묵적 동의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실 바로 이 지점이 메갈리아에 우호적인 강경한 여성주의자들과 남성들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고 양보해 줬기에 여성들의 권리와 지위가 지금처럼 높아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과연 그것이 남성들이 진정으로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동의했기에 그리했던 것인가 묻고 싶은 것이다. 사실상 아직까지 여성의 사회적 지휘와 권리의 신장은 남성의 허락 아래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가 납득하지도 동의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래야 하니까. 그러는 것이 옳다니까. 아니면 틀리다 말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강요당하는 것이 있었다. 선진국은 그렇게 한다니까 어쩐지 그래야만 대한민국도 선진국이 되는 것 같다. 똑똑하고 많이 배운 지식인들은 그같은 주장들에 동의하고 있다고 하니 자신도 마치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약간은 허영심이다.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는 소심함도 있다. 하지만 불만은 남는다. 어째서 자신의 권리를 나누어 여성들에게 주는 것인가.


하지만 분위기가 그렇고 현실이 그러니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한 마디 말이라도 잘못했다가는 집중공격을 당할 수 있었다. 무지하고 무식한 구닥다리로 매도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해 이해하는 것처럼.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해 동의하는 것처럼. 하지만 어째서 여성과 여성주의는 내가 바라는대로가 아닌 것일까. 나는 여성을 이해하고 여성주의에 동의하는데 어째서 내가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일까. 


그리고 사단이 일어났다. 일부 과격한 여성주의자들이 메갈과 워마드 같은 극단적인 여성사이트와 결합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명분을 잃었다.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그것은 그들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틈이었다. 여성주의는 별 것 없다. 여성도 별 것 없다.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진다. 그동안의 불만들이 쏟아져 나온다. 여성들이, 여성주의자들이 잘못되었다. 진짜 여성주의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자신들이 바라는 여성주의다.


여성주의에는 이런 여성주의도 저런 여성주의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공산주의라고 하나가 아니다. 자본주의 역시 하나가 아니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이론과 논리가 존재하고 항상 첨예하게 대립하며 갈등하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도 없던 여성주의다. 현실에 실재하는 여성주의가 아닌 관념으로 이상화한 여성주의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남성이 이야기하는 남성을 위한 여성주의여야 한다. 여성주의마저 자신들이 소유하려 한다.


문제는 뭐냐면 그동안 사회적으로 남성에 대한 충분한 설득과 합의의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어째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노력해야 하는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대학만 좋은 곳에 가면 된다.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여자친구도 마음대로 골라 사귈 수 있다. 부모들부터 문제다. 여성을 마치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처럼 이야기해 놨으니 제대로 된 여성관이 자리잡을 리 만무하다. 자신을 위한 보상이며 대상이다. 그리고 사회는 남성들과 상관없이 멋대로 여성주의를 현실로 옮겨 놓고 있었다. 남성들이 소외되고 있었다.


남성의 소외는 남녀평등과 별개의 문제다. 사회적인 평등과 별개로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성들보다 높지만, 남녀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분노와 불만은 누적된다. 기회를 보아 터져나온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한 세대도 아직 다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의 지위는 빠르게 신장되었지만 그러나 남성의 의식까지 함께 성장하고 있었는가는 의문이다. 그 부조리가 메갈리아라는 틈을 비집고 현실로 터져 나온다. 남성에게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이면 마치 발작이라도 하듯 거부반응을 보인다. 더이상은 그대로 당하지 않겠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정작 사회적으로 대화와 합의를 주도하고 이끌어야 할 지식인들, 정치인들, 언론인들의 무관심과 방기가 만들어낸 반동에 가까운 것이다. 여성들 자신조차 남녀평등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적도 토론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여성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것이 과연 여성주의인가 고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자신의 분노부터 다스려야 한다. 분노가 지나치면 증오가 된다. 증오는 답이 없다. 증오는 오로지 증오만을 생산한다.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냉정과 이성을 찾아야 한다. 물론 개소리다. 사람은 그렇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한참 더 싸우고 알아서 시들해질 때 쯤 진지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더 싸우고 질리도록 싸우고 나서야 힘이 빠지면 차근히 현실을 돌아볼 여유도 생길 것이다. 지금은 그냥 지나간다. 바람에 거스르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가끔 내가 왜 이 짓거리 하는가 의문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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