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처지다. 아마 한 달에 지하철요금만 6만 원 가까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것 결제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느냐? 아마 대부분 서민들은 그마저도 아깝다 여기지 않을까.

 

요금 많이 나온 만큼 지하철도 많이 탔다는 뜻이다. 주로 출퇴근용이니 일하는 날이 많았다는 의미다. 쉬는 날이 더 많았다면 요금도 더 적게 나왔겠지. 일하느라 피로가 쌓인 상태이기에 약속도 최소한으로 잡으려는 입장에서 요금 많이 나오는 게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하철에 매일 몸을 실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성취감이라. 참 좋겠다. 지하철 정기권 충전하는 것으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니. 그 자체가 고단함의 증거이고 분주함의 증거인 것이다. 누가 성취감 느껴가며 지하철을 타는가. 누가 마니아 되겠다고 지하철을 이용하겠는가. 즉 자신의 일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상의 일부로써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취미의 일환인 셈이다. 그런 것을 언론에서 기사로 써주는 자체가 어이없지 않은가.

 

딱 계급의 차이가 드러나는 언동이란 것이다. 대부분 지하철 이용하는 서민들은 성취감따위 느끼지도 않고 마니아라 여기지도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지하철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심리다.

 

연합뉴스에 대한 국고지원은 당장에라도 중단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중대한 국가적 이슈도 아닌 저따위 헛소리를 기사로 써주는 꼬라지라니. 내가 불쌍해지려 한다. 내일도 일하려면 싫어도 지하철 타야 하는데. 개놈들이다.

예전 이영훈이 식민지근대화론의 근거로써 내세운 근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시대 지주들의 도덕적 지배와 일제강점기 이후의 지주의 사유권 강화의 비교였었다. 얼핏 보기에 조선후기 소작농과 정서적 경제적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도덕적 지배의 형태가 더 옳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주의 배타적 권리를 강화하는 쪽이 근대적으로 더 발전된 형태란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것이 프랑스혁명 이전의 농민들과 도덕적 지배관계에 있던 프랑스의 봉건귀족들과 산업혁명 이전 냉혹하게 농민들을 쫓아내며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했던 영국 지주들의 사례였다. 대대로 농사지으며 살아왔던 농지로부터 내쫓기게 된 농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사유재산과 시민의 권리야 말로 근대의 시작이란 것이다.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조선시대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았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직 여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성이란 어떤 존재이며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는가. 이전까지 교육이란 - 즉 사회화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어떤 제약도 없이 자신의 출신이나 혹은 남성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여성의 실제 사회적 지위가 높았느냐면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이란 남성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더욱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킨 결과가 조선시대 부덕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현명하고 어진 여성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라서 오히려 근대로 올수록 여성의 지위는 더 낮아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여성을 대하는 예의는 더 정교해지고 더 치밀해졌지만 그만큼 여성에 대한 억압도 강해졌다. 그래도 전에는 출신이나 배우자의 신분 등에 의해 여성의 지위가 비례해서 상승하여 자유롭게 권한을 휘두르는 것도 가능했지만 어느새 여성이라는 자체가 제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여성주의라는 것도 생겨났다. 원래 여성주의란 남성으로부터 독립한 여성의 자존이었지 남성에 기대는 여성의 신분상승이 아니었다. 그런데 닮지 않았는가. 그래서 기생페미니즘이라 부르는 것이다. 딱 지금의 여성주의는 남성에 기대는 전근대의 신분상승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 체계는 정교해지고 따라서 그 안에 구분과 구별 역시 치밀해지게 된다. 조선전기에 신분이란 양인과 천인 둘 뿐이었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양반조차 벌열과 향반과 잔반으로 나뉠 정도로 그 구분이 세분화된다. 양반의 신분에 대한 의식이 강화될수록 그 구분은 명확해지고 천인과의 구별은 더 구체화된다. 유럽에서도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고 시민이라고 다 같은 시민이 아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대가 발전할수록 그 구분은 명확해지고 그 경계는 강고해졌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나마 도덕적인 지배로 묶여 있던 시대에는 서로에 대한 온정도 기대해 볼 수 있었지만 서로 자기 영역이 분명해지며 인정에 기댈 수 없게 되었을 때 현재의 구조를 깨뜨리는 방향으로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거기서 사회혁명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해서 그 모순이 심화되고 난 뒤에야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전제를 처음부터 정면으로 부정하며 나선 것이 바로 레닌이었고 마오쩌둥이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기 전에도 선제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 불완전한 혁명은 자본독점적인 독재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모순을 더욱 심화랄 필요가 있다. 내 주장이 아니라 10여 전 전 당시 어울리던 지금은 녹색당을 지지하는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자칭 진보가 일제강점기를 긍정하고 박정희를 긍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진화론을 이 땅에 적용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반도의 사회적 진화의 결과 모순이 극심해지면 비로소 아래위가 뒤집히고 뒤섞이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파업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위원장을 지명수배해서 잡아가두던 보수정권보다 마음대로 파업할 수 있게 해주는 민주정부를 더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현정부가 들어서면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쌍용자동차 노조위원장부터 투쟁하기 더 힘들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명박근혜 때가 기사쓰기 더 좋았다는 것이 한겨레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권력과 자본의 억압이 노골화되고 모순이 첨예화될수록 자신들이 주장하기 더 좋은데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아쉬우나마 타협과 진보가 가능하기에 너무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차라리 수구가 정권을 잡는 쪽이 자기들에게 더 유리하다.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진중권은 전향한 적이 없다. 서민 역시 전향한 적이 없다. 홍세화와 최장집, 강준만, 김규항 무리들은 여전히 한결같다. 정의당은 어떤가. 박용진이 소득세 법인세 감면을 주장하는 것을 보며 새삼 떠오른 생각이다. 박용진의 뿌리가 어디인가. 바로 어제까지 삼성을 못잡아먹어 발악하던 박용진이 어째서 저런 주장들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인가. 어째서 저들은 차라리 수구에 더 온정적이고 친화적인 것일까.

 

혁명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세종이나 성종 같은 어질고 현명한 군주들인 것이다. 차라리 연산군 같은 폭군에 암군이면 혁명을 일으키기 쉽다. 더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어야 자칭 진보가 자리잡기 쉽다. 박주민처럼 애매하게 월세를 올려 받을 것이 아니라 주호영처럼 화끈하게 올려받아야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오세훈을 지지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오세훈이 용산참사를 일으켜 주어야 자기들에게 설 자리가 생긴다.

 

그래서 손잡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정권을 잡고 노동자를 탄압해야지만 노동자의 대변자로서 자신들의 입지가 탄탄해진다.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노골화되어야지만 그 대변자로서 자신들에 대한 지지도 높아진다. 한반도에 긴장이 높아져야 평화를 향한 자신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원자력발전소를 지금보다 몇 배 더 짓고 문제도 터져야지만 탈원전이라는 자신들의 아젠다가 인정받을 수 있다. 김학의가 활개쳐야 성인지감수성이 정당성을 갖는 것과 같은 논리인 것이다.

 

수구야 말로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정당한 지배자인 이유인 것이다. 자신들의 역사발전론에 따르면 혁명을 위해서라도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와 자본의 독점과 억압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이야 말로 역사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의 진보라 해봐야 원래 진보의 주류에서 한참 벗어난 비주류들인 것이다. 진짜는 자신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타도해야 할 수구인 것이다. 그래서 참칭이다. 옛날 기억들을 떠올린다. 역시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차라리 이명박근혜가 더 나았다. 노동자를 위해서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도, 소수자들을 위해서도, 진보와 정의를 위해서도. 문재인을 혐오하는 이유다. 변한 게 없다. 그야말로 화석들인 셈이다.

조국사태가 터지기 전 20대 남성들은 조국 전장관을 가붕게라 부르며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국 전장관이 트위터를 통해 주장한 개천의 가재, 붕어, 게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자기들은 용이 되고 싶은데. 잉어가 되어 장차 용이 될 꿈을 꾸고 싶은데. 조국이란 인간이 자기들더러 가재, 붕어, 게인 채 그저 현실에 만족하며 살라고 한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특히 20대 이후에서 조국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더 강하게 드러내는 이유일 것이다. 조국 전장관이 실제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다. 반칙을 사용해서도 아니다. 보다시피 이준석의 반칙에 대해 분노하는 20대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 20대가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이 바로 이명박이다. 어떻게 그토록 공정을 중요시하는 20대인데 부도덕과 비리, 범죄의 상징이랄, 심지어 그로 인해 감옥에 간 대통령을 가장 좋아할 수 있는가. 저들이 생각하는 공정이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공정과 전혀 다른 공정인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국 전장관의 저 트위터에 대해 4050은 많이들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굳이 용이 되지 않더라도 미꾸라지나 갯지렁이라도 그저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그것이 평등이고 공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위치에서 최대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최저임금도 올리고, 근로시간도 줄이고, 유급휴일도 늘리려 한다. 그런데 20대들에게는 그런 것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평소 공부도 않고 노력도 않았던 패배자들의 삶까지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지금 이 순간도 더 많은 시간을 노력해서 더 위로 올라가려는 자신들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실제 주 52시간노동에 대해 한 20대 공장노동자는 반대의 이유로 이런 논리를 내세우고 있었다. 내가 적은 시급일망정 주 70시간 80시간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데 정부가 그것을 막아서 나의 기회를 빼앗고 있다. 덜 일하고 여가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하고, 더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게끔 정부에서 보장해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당장 일자리가 아쉬운 사람에게는 더 낮은 시급을 받고서라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최저임금 인상도 반대한다. 나는 더 낮은 시급으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해서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 것이다. 아니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낮은 시급으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며 그것이 공정한 것이다.

 

20대 남성들이 이재용이나 정용진에 대해서는 불공정을 말하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그들의 신분이라면 그러는 것은 옳다. 마찬가지로 이준석 역시 주류 중의 주류인 국민의힘의 대표로써 하버드 졸업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누려 온 반칙과 특권들이 정당화된다. 박덕흠이 국민의힘을 지지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다. 나경원이나 주호영들의 문제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데 딱히 흠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조국을 용서하지 못한다. 자기들도 그렇게 되고 싶은데 그것을 막아서고 있었다. 조국 전장관이 아마 국민의힘 소속이었고 이준석처럼 능력지상주의를 주장했다면 검찰의 수사에 오히려 반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린다. 패자는 더 가혹하고 열악한 형벌로 내몰린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반대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란 징벌이다. 학교 다닐 때 노력 않고 공부 안해서 내몰린 징벌의 현장이다. 정규직은 어렵게 노력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포상이다. 부모가 노력해서 건물주가 되었다면 그 또한 자식에게 물려지는 포상인 것이다. 그래서 보면 이른바 갑질의 가해자 가운데 20대가 적지 않다. 오히려 더 가혹하고 잔인한 경우가 많다. 자신은 승자고 상대는 패자이므로 그 모든 것은 자신의 권리인 때문이다.

 

지금 박성민 청년비서관을 두고 젊은 층 사이에서 불공정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인 것이다. 박성민의 부모가 박덕흠 쯤 되었으면 아예 아무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후계자거나, 혹은 시험 더 잘봐서 서울대 혹은 해외명문대에 재학중이었어도 역시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검찰이었으면 어땠을까? 심지어 자칭 진보 가운데서조차 검찰이라면 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이유인 것이다. 명문대 출신에 어려운 시험 합격해서 검찰까지 되었다. 그러니까 검찰이라면 그래도 된다. 판사라면 그래도 된다. 정치인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놈들은 시험도 치지 않고 그저 인기에 기대 저 자리에 올랐다.

 

과정에서의 공정이지 결과의 공정이 아니다. 결과가 불공정할수록 과정은 공정해진다. 더 가혹하고 더 엄격하고 더 잔혹할수록 과정 또한 공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노력한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승자가 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노력한다. 이준석처럼 되기 위해서. 이명박처럼 되기 위해서. 주호영이나 나경원 배현진처럼 되기 위해서. 당장 정의당 장혜영과 류호정을 보라. 청년정의당의 평소 논평들을 보라. 무언가 이어지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런 20대의 공정이 현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증오와 함께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 바로 코인인 것이다. 코인으로 일확천금을 노리겠다. 일확천금을 노려 신분상승을 이루겠다. 그런데 정부의 입장에서 그대로 방치해 둘 수만 없기에 자꾸만 개입하려 한다. 경계하고 규제하려고 한다. 그래서 현정부와 민주당이 싫다.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아닌 부동산에 대한 규제에 더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정은 내가 승자가 되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다.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처지로 내몰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준석을 선택하고 국민의힘을 선택하고 이명박을 그리워한다.

 

민주당이 생각을 잘해야 한다는 이유다. 그런 20대의 논리를 쫓다 보면 박용진처럼 되어 버리고 만다. 민주당의 정체성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기성세대로써 경륜과 지혜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사실 지금 4050도 젊을 때는 비슷한 생각을 하던 이들이 적지 않다.  4050이 지금처럼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그들이 현실을 통해 보고 듣고 겪으며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젊은 세대들에게 전할 것인가.

 

본능이다. 직관이다. 그냥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유전자가 시키는대로 자신의 이기를 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살고 내가 승자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래서 의사들이 특권을 누리려는 것조차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준석의 생각은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그런 2030의 정의와 닿아 있는 것이다. 이준석이 2030을 배신하고 유리되어 간다는 것은 단지 기성세대의 착각일 뿐. 그래서 영향이 없다. 웃기는 현실이다.

건설현장에서 외국인 대신 내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면 인건비를 지원해 주겠다. 참 반가운 뉴스인데 댓글이 재미있다. 일자리의 질은 신경도 안 쓰는구나. 

 

인류역사에서 오로지 사무직만으로 일자리가 이루어진 사회란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도 공사장 잡부가 있고, 물류센터 분류원이 있으며, 하수도 청소원이 있다. 그런 일자리까지 모두 포함해서 고용률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일 하는 사람까지 모두 포함한 수치가 실업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건설현장에서 내국인 더 많이 쓰라고 정책을 내놨더니만 일자리의 질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뭔 뜻이겠는가?

 

내 월급은 많이 받고 싶다. 그러나 다른 사람 월급 오르는 최저임금인상은 반대한다. 나는 정규직 되고 싶다. 그러나 다른 사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바뀌는 건 반대한다. 나는 더 많이 쉬고 더 많은 권리를 보장받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만은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 젊은 층이 주장하는 공정의 정체다. 이준석 자신이 말하고 있지 않던가. 모든 사회적 보조나 지원을 폐지하고, 해고도 자유롭게 해야 청년층 일자리가 생긴다. 승자독식도 공정이다. 내가 그런 독식의 위치에 서고 싶다. 즉 나머지 일자리는 도태된 이들을 위한 징벌이어야 한다.

 

마르퀴 드 사드가 주장했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 첨예화 극단화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청년세대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욕망의 수준이 높아졌다. 그들의 현실은 실제의 현실에 있지 않다. 그들의 현실은 미디어가 만든 관념 속에 존재한다. 오로지 그것들만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밖의 현실을 부정한다. 현실에 실제 존재하는 일자리들조차 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념을 충족할 일자리를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아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기성세대를 증오하는 실제 이유다.

 

외국인노동자들은 정작 그들과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은 4050의 기성세대다. 사실 건설현장 역시 2030보다는 4050의 지원비율이 더 높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 놓인 기성세대와 아직 미래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는 2030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2030은 더 위를 바라봐야 하고 그들에 자신을 맞춰야만 한다. 그래서 노동소득보다 부동산이나 주식, 가상화폐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들만이 자신을 승자로, 가상세계의 자신에 어울리도록 끌어올려줄 수 있다.

 

현실이란 진흙탕을 허우적거리며 뒹굴기보다 우아한 가상세계속 자신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분노한다. 사실 출산률이나 혼인률도 이와 아주 무관치 않다. 그들이 생각하는 평균적인 삶이란 역시 현실에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기대치는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렇다고 기대치에 맞춰 현실을 바꾸려 하면 그로 인해 자신들이 바라지 않는 징벌의 대상들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간다. 그건 싫다.

 

그래서 이준석인 것이다. 딱 이준석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준석의 논란에도 어째서 20대 남성들은 분노하지 않는가. 부모가 서울대 출신이라지 않은가. 유승민 의원과 친분이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준석 자신이 하버드 출신이다. 언론이 다루어주지 않는다. 그들의 자아는 미디어 속에서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란 오히려 인터렉티브적인 성격 때문에 더욱 첨예화된 가상공간이란 것이다. 인터넷속에서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때로 혼동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면 과연 그런 대단한 자신이 실제 현실의 자신일 것인가.

 

아무튼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댓글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당장 일자리가 없어도 공사장에는 나가지 않겠다. 그러므로 내가 할 만한 편하고 안전하고 깨끗한 일자리를 내놔라. 아니면 인정치 않겠다. 훌륭하다.

한겨레가 저 꼬라지가 된 이유는 별 것 없다. 조선일보가 부럽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발행부수도 부럽고, 조선일보의 영향력도 부럽고, 무엇보다 지들 꼴리는대로 기사를 써도 오히려 주위에서 굽신거리는 그 권력이 부럽다. 한겨레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신뢰하는 언론이 그래서 바로 조선일보다.

 

기억을 되돌려보라. 노동문제나, 역사문제, 사회문제, 소수자문제 등 다양한 이슈에서 조선일보가 자신들과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고 한겨레가 그를 정면으로 반박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그런 때면 꼳 애먼 민주당이나 민주정부를 끌어들여 마치 그들의 탓인 양 준엄하게 꾸짖기 일쑤였었다. 최저임금을 올리자면서 정작 최저임금인상의 부작용으로 소상공인들 어렵다고 조선일보가 프레임 만드니까 바로 1면에 소상공인의 어려움을 다룬 기사를 올리던 놈들이 한겨레였다는 것이다. 정의연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취재까지 다 끝난 사안을 오로지 조선일보가 그리 보도하니까 따라서 보도할 뿐이다. 한겨레 젊은 기자들이 선배들 들이받은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조선일보 쫓아서 기사쓰게 해달라는 것 아닌가.

 

아마 이번 조선일보의 막나가는 행태에 대해서도 오히려 어째서 자기들은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한탄하면 한탄했지 문제삼으려는 기자놈들은 한겨레에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긴 한겨레 뿐인가. 그래서 조선일보의 기사만으로 언론 전체를 욕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가장 신뢰하고 가장 영향력있다 여기는 가장 본받고 싶어하는 언론이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가 망해야 하는 이유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심지어 공중파와 진보언론에까지 미치고 있다. 한겨레가 그동안 해 온 짓거리 보면 과연 지금 조선일보 하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이상 진보언론 어쩌고 하는 개소리로 언론개혁을 막아서는 개새끼가 없어야 한다는 이유인 것이다. 조선일보만 보이고 한겨레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경향일보나 오마이일보나 자칭 진보란 새끼들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한결같았었다. 그나마 자칭 진보에서 가장 정상적인 인간이 진중권이란 것이다. 벌레는 벌레다. 더러운 해충들이다.

마약 상습투약도 구형이 징역 2년 6개월이구나. 그런데 징역 4년이면 표창장 위조가 얼마나 중범죄란 거야?

 

미친 검판레기새끼들. 그리고 기레기 새끼들.

 

아무튼 또 기레기 새끼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을 것 같다.

 

늘 그랬거든. 항상 소수가 양심이니 언론의 사명이니 떠들고 그리고 욕먹고 찌그러졌다. 책상 치우려나?

 

징벌적 손해배상정도가 가축사료 및 비료에 대한 법률로 바꿔 정해야 한다.

 

곱게 갈아서... 아, 닭 돼지는 또 무슨 죄? 사막에 뿌리면 조금 지력에 도움이 되려나?

 

기레기 새끼들은 사람새끼들이 아니다. 기자인 척 하는 기레기가 가장 악질 기레기다.

재작년 기자들이 밤늦게 조국 전장관 딸이 사는 오피스텔 문을 두드리더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기자년들이 그러더라. 기자라면 그럴 수 있다. 10시 넘어서, 건장한 남성들이, 젊은 여성 혼자 사는 집 문을 두드려도 기자니까 그럴 수 있다. 성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 하나 가지고 그 생지랄 떨던 기자년들이 지껄인 개소리다.

 

검찰이 무혐의로 처분했으니 김학의는 무고한 일반인이었고, 출국여부를 정부부처에서 살피거나 출국금지를 시켜서는 안되었다는 것이 또한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자칭 진보들의 논리다. 실제 김학의를 강제로 수사하고 출국금지까지 시켰다는 이유로 검찰이 이성윤 이제는 고검장을 기소했더니 기소당한 사람을 승진시켰다고 지랄하던 것이 바로 정의당이었다. 한 마디로 김학의는 강제수사를 해서도, 출국금지를 시켜서도 안되었다는 것이 정의당과 한겨레의 논리인 것이다.

 

이번에 조선일보에서 성매매와 관련한 이미지로 조국 전장관 딸의 사진을 그림으로 바꾸어 인용했을 때 과연 분노한 자칭 진보 자칭 여성주의자가 있었을까 정말 궁금해진다. 그야말로 성희롱 아닌가. 여성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아주 악질적인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 한겨레과 정의당은 언론의 자유로 포장하며 응원할 것이다. 그보다 그런 이미지를 자기들은 쓰지 못한 사실을 안타까워할지도. 그래서 묻는다. 저들에게 인권이란, 인간의 존엄이란, 일반인의 성인지감수성이란 어떤 의미일 것인가.

 

김학의를 옹호하는 순간 이미 저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기다 단지 조국 전장관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옹호해야 할 인권과 존엄, 성인지감수성의 예외로 인정해 버렸다. 여성주의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존엄만을 보호한다. 물론 그 보호할 가치가 있는 대상에는 김학의의 피해자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정의당을 지지하고 한겨레를 보는 놈들마저 쓰레기로 여겨지는 이유인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저것들을 여전히 진보라며 떠받들고 지지까지 하고 있다. 그래서 김학의가 무고한가? 단지 누군가의 딸이라는 이유로 위협과 모독을 당해하는 상황이 정당한가? 자칭 진보는 사람새끼들도 아니란 이유다. 버러지새끼들이다.

그냥 간단히 지금 민주당의 당헌당규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표시절 틀을 잡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민주당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다. 그런데 그런 당헌당규를 특정인의 입맛에 맞게 매번 바꾼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그래야만 하는 필요를 절감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특정인을 위해 당원과 지지자들로부터 온갖 욕받이를 해야 했던 이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돌려주려면 지금의 당헌당규 아래서는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민주당의 체계 자체를 뒤흔들겠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민주당을 이전의 민주당으로 돌려놓겠다는 것이다. 누구의 수작인지 알 것 같다. 이낙연은 그냥 바지사장이다. 이낙연의 뒤에는 브레인이랍시고 양정철이 있었다. 민주당을 엉망으로 휘저어 놓고 지지율을 떨어뜰인 뒤 국민의힘과 연정하자. 이낙연이 경선을 연기하자 지랄하는 또 하나 이유다. 민주당의 지지율 자체가 떨어지면 그를 기반으로 국민의힘과 연대할 여지가 생기지 않겠는가. 그럴 경우 가장 보수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자기가 더 유리하다.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도 민주당에서 자기 혼자 추진중이다.

 

그냥 개새끼인 것이다. 여기 부화뇌동하는 놈들은 원래 지난 총선에서 이낙연과 양정철의 도움으로 배지를 달았다 여기거나 아니면 성향 자체가 그런 놈들일 것이고. 송영길이 전에 없이 강하게 나가는 이유인 것이다. 정치력의 시험대다. 이번 고비를 넘기면 송영길의 급은 지금보다 몇 단계 올라간다. 똥파리 새끼들은 잘 하고 있는 송영길 욕하지 못해 발악하고 있더만. 잘하는 중이다. 씨발, 경선연기는 민주당 망하는 길이다. 비리머글 낙연이새끼.

작년 가을 이후 찾아오기 시작한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알고 있을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갑작스레 백수가 되며 취직하겠다고 거의 석 달 가까이 발악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들로 실제 구직활동에 나섰던 시간은 두 어 달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매일같이 거의 대부분의 구인사이트를 즐겨찾기 해놓고 시간단위로 새로운 구인광고를 찾아 헤매던 시간들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그때마다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고 초조했었는지. 그런 자신에게 구인광고에 적힌 지원자격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왔었는지.

 

당연하게 구인광고란 자신들이 필요로 하고 혹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적절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조건이 맞지 않거나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이 실수로 지원해서 서로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자신들이 구하고자 하는 조건과 자격을 명시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는 몇 살 이상부터 몇 살 이내까지, 학력과 경력은 어느 정도면 적당하고, 필요한 자격은 이런 것들이 있다. 바로 여기서 일차로 걸러지는 것이다. 대충 봐서 한두 살 까지는 어떻게 연락해서 지원이 가능한지 여부를 물어 볼 수 있지만 그 이상 차이가 벌어지면 그냥 다른 구인광고부터 찾아보게 된다. 어차피 연락해봐야 의미가 없다. 서로 괜히 시간과 노력만 허비할 뿐이다. 하물며 사기업의 구인광고도 아닌 정부에서 세금을 사용해서 지원하는 사업이란 것이다.

 

실제 한 10여 년 전, 그러니까 이준석이 병역특례 도중 정부지원사업에 지원하단 당시 고용노동부에서 진행하는 직업교육프로그램에 지원했던 적이 있었다. 벌써 몇 년 째 단기일자리만 전전하던 무렵이라 차라리 정부가 지원하는 직업교육과정을 통해 자격증이라도 따 볼까 지원했었는데 상담 도중 그냥 일어나야 했었다.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해야 했기에 주말에만 파트타임으로 하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일마저 그만두고 완전한 백수가 되고 나서야 교육과정에 등록할 수 있다. 공무원들 일하는 방식이란 게 그렇다. 고작 주말에만 전혀 교육프로그램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알량한 돈을 버는 정도였지만 그조차도 안된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는 것이다. 원래 산업기능요원 역시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단지 병역을 대신할 분인 노동자 신분이거든.

 

이준석이나 당시 멘토였다는 인간이나 해명이랍시고 하는 말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정부의 정식 공고에는 분명 고등학교나 대학교, 혹은 대학원 재학생이라고 나와 있었다. 졸업생도 서류전형을 통과한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현업에 종사중인 사람은 안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해놓은 상태였었다. 이준석에게 산업기능요원이란 현업이 아니었던 것일까? 자기 전공이고 자기 특기고 자기 지망이라 해당 분야에서 병역을 대신해서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하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법이 정한대로 노동자 신분으로 해당 회사에서 그동안 열심히 월급 받은 만큼 일하고 있었다면 자기가 현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다는 인식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일하고 있었는데? 이미 회사에서 노동자로서 맡은 업무가 있었을 텐데도 거의 놓아주듯 자유로운 외출을 허락한 부분도 그래서 납득이 되지 않는다. 회사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빠지고 나서 나중에 시간만 채워 벌충하는 게 가능한 수준이었단 것인가.

 

더구나 정부에서 그렇게 공고를 냈는데 뒤에서 전혀 다른 내용의 내부지침이 있어서 별개로 적용되었다면 그 자체로 이미 공정과는 거리가 먼 행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온라인게임에서 운영자만 아는 비밀스런 조건을 충족했을 경우 다른 유저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 훨씬 유리한 직업과 스킬과 아이템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게임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같은 조건을 충족할 경우 같은 직업과 스킬과 아이템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몇몇 사람에게만 한정해서 그런 이점을 독점케 한다. 내가 일부 게임소설들을 그냥 첫머리만 읽고 덮어버린 이유다. 그런 식으로 게임 운영하면 사람들 다 떠나간다. 마찬가지다. 구인광고에는 이렇게 써놨는데 정작 채용된 것은 그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다. 48세 미만은 지원할 수 없다고 해놓고서 채용한 사람을 보니 60세도 훨씬 넘었다. 알고 보니 지원만 했으면 나도 가능했을 내부 규정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건 사람 가지고 노는 것이다. 사기업도 그런데 하물며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의 사업이야 말할 것도 없다.

 

혹시라도 10여 년 전 내가 도중에 일어나야 했던 이유인 주말 단기 일자리는 커녕 현재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도 교육프로그램의 대상으로 선정된 이가 있었다면, 알고 보니 내가 알지 못한 다른 내부 방침으로 인해 그리 결정된 것이라면 절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내 사정이 절박했으니까. 아마 당시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에 지원했던 350여 명의 사람들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지원 아래에서 교육도 받고 실력도 키우고 장차 취업과 창업의 기회까지 얻을 수 있다. 집에 돈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당장 졸업하면 앞이 막막한 처지에서는 마지막 동아줄처럼 여겨졌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역시나 병역특례중이었기에, 누군가는 정규직은 아니지만 단기일자리라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이미 졸업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고 믿어 지원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전화로 사실을 알게 된 단 한 사람만 그에 해당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공정이란 기준을 적용해서 어떻게 하면 납득할만한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그럴 수 있다 여기는 병신들은 도대체 어디의 누구란 것인가.

 

지원서류에 첨부한 증명사진 역시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이력서에 붙이겠다고 무인촬영기에서 다시 촬영하면서 쓴 돈만 적지 않은 액수다. 덕분에 아직도 사진관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첫인상이 좋게 보이도록 편집을 해 준다. 최소한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흠잡히지 않을 정도로는 단정하게 자신을 꾸며 사진을 찍으려 한다. 악세사리가 그렇게 이상해 보인다면 아예 장난하듯 찍은 사진은 어떻게 보일까?

 

아버지가 유승민과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더라도 문제가 되는 이유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상식에서 내가 병역특례로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중인데 현엽이 아니라며 재학생을 선발하는 프로그렘에 지원하는 자체도, 그를 공개되지 않는 내부지침에 따라 선발하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르겠다. 그런 기준 하나에도 절망하고 좌절하며 희비가 교차하던 진짜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면 공감하지 못할지도. 만일 그렇다면, 진짜 그런 2030이 있다면 현실이 어렵다며 분노하는 근거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현실이 쉬웠던가? 편했던가?

 

김용민 의원이 제대로 짚어 주었다. 그래서 황대산이던가? 괜히 지원하겠다고 나섰던 당시 멘토도 당황해서 물러서는 것이 보인다. 본질은 그런 게 아니다. 공정이란 기준에 따른 사안의 본질은 과연 그 모든 과정들이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규정대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황대산 스스로 증명한 꼴이 되었다. 정부의 공고는 위장이고 거짓이었다. 수많은 지레 지원을 포기한 이들을 속이고 만 것이었다. 모르면 병신이고 알았으면 파렴치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공정을 떠드는 저놈들의 수준이다. 역겨운 것이다.

어제도 썼지만 그래도 상대당 대표인데다 그것도 이제 막 선출된 젊은 정치인을 당차원에서 나서서 저격한다는 것은 그리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 더구나 상대당에서 당의 이름으로 요청을 해 왔다면 또한 무작정 거부하기도 명분상 곤란하다. 집권여당으로서 마냥 야당과 적대할 수만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소속 의원 개인의 이름으로 계속 문제제기는 하더라도 당차원에서는 상대의 요청도 있으니 공식적으로 나서지 않겠다.

 

이를테면 신사협정이란 것이다. 아무리 당대당으로 서로 경쟁하며 때로 적대하는 사이더라도 일정한 선 만큼은 넘지 말자. 그래서 선의로 요청에 따라 동영상을 내려준 것인데 바로 그것을 이준석이 언론플레이에 이용해 버렸다. 민주당이 잘못된 내용임을 알고 동영상을 내렸다. 선의를 악의로 받아친 것이다. 이준석이 아마추어란 이유인 것이다. 그럴 거면 아예 처음부터 국민의힘 이름으로 요청을 하지 말던가, 요청을 했으면 그 부분 만큼은 민주당을 존중하며 넘어가던가, 당의 이름으로 요청하고 그것을 역공에 이용하며 상처를 입히려 한다. 

 

원래 이준석의 토론방식이 이렇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 상대의 사고나 논리에 대한 최소한의 인정이 없다. 오로지 상대를 상처입히겠다는 기술적인 목적만이 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한 번 상대의 선의를 이용하고 나면 다시 상대의 선의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같은 호인이면 몰라도 송영길은 그런 호인과 한참 거리가 먼 인물이다. 김용민이 사실을 적시하며 반격에 나선 것도 그런 의중이 크게 담겨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김남국이 이준석 저격에 나선 것도 그런 당내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저 새끼는 봐줄 필요가 없다. 다만 당차원에서 나서기 곤란하니 이대로 조져 버리자.

 

김용민 최고위원이 사실을 적시하며 반격에 나선 이유도 이준석의 국민의힘에 더이상 선의따위 없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동안 당 대 당으로 지켜지던 최소한의 선마저 무시하고 부정한 이상 민주당도 더이상 그것을 지켜 줄 필요가 없게 되어 버렸다. 현실정치의 치열함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마추어의 치기라고나 할까. 지금 국민의힘에서도 중진 가운데 곤란해 하는 인간이 제법 될 것이다. 민주당이 양보해주지 않으면 벌써 곤란한 일들이 적지 않다.

 

민주당이 왜 동영상을 내려주었는가 탓할 필요가 없다. 단지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동안 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서 물밑에서 서로 그런 요청들이 무수히 오갔을 것이다. 김성태처럼 아예 대놓고 좀 사정을 봐달라는 경우도 있었을 테지만, 그보다는 물밑에서 서로 거래를 통해 많은 것들을 주고받으며 공존해 왔을 것이었다. 그것을 신임 대표가 일시에 부정해 버린 것이다. 그 후폭풍은 어디에까지 미치게 될까. 병신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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