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아주 오래전에는 하루종일 돌아다녀봐야 한 끼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웠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인류의 모든 생활은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 종속되어 있었다. 심지어 최소한의 휴식조차 없이 산으로 들로 헤매 다니며 아무거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기던 것이 불과 얼마전까지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까지 인간이란 단지 먹기 위해 사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조차 어느 정도 먹을 것이 충분해지면 인간은 나머지 시간을 다음 노동을 위한 휴식과 종의 유지를 위한 번식에 할애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종에게 존재하는 목적이란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복제해서 남기는 것이니 먹는다는 행위 또한 그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최소한의 먹을 것만 확보되면 인간은 노동력과 종의 재생산을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쓰게 된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 필수노동시간이다.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하면 하루종일 산으로 들로 돌아다녀도 충분한 먹을 것을 확보하기 힘들지만 아주 혜택받은 환경에서는 불과 한두시간의 노동이면 하루를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필수노동시간이 인간의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간단히 하루종일 산으로 들로 돌아나니며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모으던 사람에게 하루종일 일하는 대신 보리밥 한 그릇을 준다 하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한두시간만 일하면 마음껏 과일이며 물고기며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하루 네 시간만 일하면 빵과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 말한다. 과연 전자와 후자의 일이 모두 같다면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같을까? 같은 하루를 일해도 풀뿌리와 나무껍질보다야 보리밥이 훨씬 먹기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것이다. 반면 두 배나 더 일해야 하는데 과연 빵과 고기란 것이 물고기와 과일보다 더 가치있게 여겨질 것인가. 따라서 전자의 경우는 보리밥의 양을 더 줄여도 좋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대가를 더 가치있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과거에는 빵 한 덩이 거친 보리밥 한 그릇 먹기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빵과 밥이 없어 굶는 일은 적다. 그런데도 빵과 밥을 주겠다며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려 하면 과연 사람들이 들을 것인가.


문제는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일하게 내버려두면 정작 그들을 부리는 입장에서 이익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동착취다. 딱 네 시간 만큼만 일하면 자기 먹을 것은 벌 수 있다. 그러므로 네 시간 일한 대가로 자기 먹을 만큼의 대가를 지급한다. 하지만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네 시간의 노동으로 생산한 가치는 딱 네 시간의 노동 만큼이다. 이익이 생길 리 없다. 그래서 사용자는 노동자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노동케 하고 그 나머지 만큼을 자신의 이익으로 차지하려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노동가치설 자체가 상당히 오래된 이론이므로 수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필수노동시간 이상을 노동케 해야 사용자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는 근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예노동이란 그같은 노동착취의 극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에 비해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의 가치가 너무 낮다. 다시 말해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팔아서는 생산에 동원된 노동력에 대해 충분한 대가를 지급하기 어렵다. 여기서 충분한 대가란 일정시간을 일했을 때 노동자가 그에 비례해서 기대하게 되는 대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생활하기 필요한 비용과 연동된다. 한 마디로 내가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따라서 그만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해야만 한다. 자기가 일한 것에 비해 대가가 너무 적거나 아예 생활이 안되면 결국 일하는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소금을 아무리 팔아도 그만한 대가를 주기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노동의 가치를 강제로 떨구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가치란 인간가치란 말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간은 보편적인 삶의 규준을 가지게 된다. 자기가 노려야 할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을 다른 인간으로부터 분리한 채 특정한 조건을 강요하고 강제하면 그것이 곧 자신의 보편적인 규준으로 바뀌게 된다. 쉰 밥 한 덩이에 그저 매 안 맞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 더불에 그에 따라 필수노동시간도 바뀌게 된다. 자연상태에서 네 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자기가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 있었던 인간도 노예노동 상태에서는 하루종일 일해야 사용자가 허락한 이상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더 많은 시간을 더 혹독한 조건에서 일하고도 사용자의 작은 배려에도 감격하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부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이를테면 IMF전후해서 모든 언론이 떠들어대던 '과소비'라는 단어도 그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소비할 수 있는 적정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 이상을 소비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의 사치를 하려 해서도 안된다. 자연스럽게 다수 한국인들에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비용의 상한이 정해진다. 그런 식으로 상류층의 사치를 비판하면서 다수 대중의 소비를 억제한 결과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요구하는 임금의 수준 역시 억제되는 결과를 낳는다.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너무 많은 돈을 받는다. 너무 많은 임금을 받아 분에 맞지 않는 사치를 한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생활수준은 이런 정도이고 따라서 노동자가 받아야 할 임금 역시 그런 수준이어야 한다. 최근 최저임금과 관련한 여러 논란들의 기저에도 그런 전제가 깔려 있다 할 수 있다. 건물주가 소상공인으로부터 받아야 할 임대료는 재산권에 대한 보장 차원에서 일정 이상이 되어야 하는 반면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은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많다. 그러므로 임대료를 낮추거나 제한하는 것은 반대하면서 최저임금만큼은 최소한 더 이상 오르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당장 당사자인 자영업자 뿐만 아니라 정작 최저임금의 대상인 저소득층에서마저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다수 노동자에게는 그만한 임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 문제는 그러면 그나마 최저임금이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한 생활임금, 즉 필요임금은 되는가 하는 것이다.


혼자 살려면 변두리에 싼 월세에서 산다는 전제로 어떻게든 최저임금으로 먹고는 산다. 그러나 부양가족이 한 사람만 있어도 최저임금으로는 어림도 없다. 출산률이 기록적으로 낮다는데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들 다 하는 문화생활을 포기할까? 최소한 컴퓨터는 쓸 수 있어야 하고 스마트폰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만 한 달에 한두번 극장에도 가고, 평소 응원하던 팀이 있으면 프로스포츠 경기 직관도 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 몇 잔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하긴 세월호 참사 당시 사망한 학생의 이혼한 아버지가 국궁을 취미로 가지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내던 것이 바로 한국 언론이었다. 그런 비판에 동조하던 것이 바로 다수 한국의 대중들이었다. 어딜 노동자가 감히. 그러니까 노동자는 최저임금조차 안되는 돈을 받으면서 그저 먹고 자고 숨만 쉬면서 최저 이하의 생활만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이 그토록 자식들을 공장에 보내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는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같은 더럽고 비천한 존재가 아니다. 최저임금과 관련한 논란의 한 축이다. 노동자란 그만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인가. 노동자에게는 과연 그만한 수준의 임금이 필요한가. 불과 몇 년 전 어느 국회의원이 황제의 식단이라며 자신의 체험기를 올려 빈축을 샀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결국 한 마디로 한국의 노동자가 일정 시간을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임금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그를 통해서 과연 어느 정도의 삶을 누릴 수 있는가. 대한민국 구성원 일반의 평균적의 삶의 수준과 비교한다. 대한민국 국민 일반이 기대하는 평균적인 삶의 수준과 비교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동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떠한가. 존엄과도 관계가 있다. 노동의 가치는 인간의 가치다. 대한민국 사회는 노동자에게 어디까지 그들의 존엄과 삶을 허락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대한민국 사회가 나서서 분노하고 반대하는 이유인 것이다. 자기가 최저임금을 받아도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임금이 지금보다 더 올라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 사회의 당위고 도덕이고 정의다. 노동자의 노동이 가지는 가치란 겨우 이런 정도다.


어째서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것을 반대하는가.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보다 더 우선해서 지켜야 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정작 저임금노동자들마저 건물주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을 우선해서 지키려 하고 있다. 노동자가 노동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이란 그런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주제넘는 것이다. 대한민국 노동자의 노동의 가치이며 노동자의 가치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노동자는 결국 그런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다. 하필 언론마다 노동생산성에 대한 기사를 심심하면 쏟아내는 이유인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하루종일 산으로 들로 뛰어다녀야 겨우 푸성귀나 얻을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들에 나가 허리가 부러져랴 밭일을 해야 하던 시절도 오래전에 지났다. 사회는 풍요롭고 그보다 더 적은 시간만 더 적은 강도로 일해도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당장 눈앞에 넘쳐난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차라리 낮은 가능성에 기대어 그런 일자리를 쫓지 괜히 더 힘들고 대가도 적은 일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다고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최소한 만족할만한 자신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당장 이 사회의 경제는 날이 갈수록 발전해가는데 사람의 의식인 여전이 오래전 그때에 머물러 있다. 힘들더라도 당장 아무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라. 돈을 번다고 생활이 되는가.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같은 일을 해도 베트남과 중국과 미국의 노동자가 받는 임금수준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한다고 한국과 독일과 러시아의 노동자의 동기와 목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과거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도 다르다. 그러니까 필수노동시간이고 필요임금이다. 그래서 나오게 되는 개념이 적정노동이다. 적정노동이란 그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다. 그러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요구되는 것은 과연 어떤 수준인가. 어째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을 포기하고, 출산과 육아 같은 노동의 재생산마저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그 모든 문제들이 하나로 이어진다.


과연 최저임금 1만원이 대한민국 노동자들에게 너무 과분한가. 대한민국 노동자가 일하는 것보다 너무 지나친가. 그 전에 최저임금 1만원으로 대한민국 노동자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수준이란 어느 정도인가. 그것은 대한민국 평균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인가. 물론 최저임금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만으로 소득주도성장은 어림도 없다. 다만 시작이다. 모든 논의의 시작이다. 다시 말하지만 노동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다. 그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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