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성폭행의 형량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여성계에서 나온 적이 있었다. 성폭행의 형량이 너무 높아서 판사들이 유죄판결을 내리는데 소극적이 된다. 한 마디로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기가 너무 어렵다.


어제 뉴스로도 보도되었다. 유엔에서 한국의 성범죄 관련 법령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오래전부터 국내에서 주로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어 온 문제이기도 했었다. 성범죄의 입증이 너무 어렵다.


한국에서 성범죄란 여성의 정조에 대한 범죄다. 그래서 남성에 대한 성범죄는 따로 처벌하기가 어렵다. 남성의 성이란 자체가 법으로 보호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남성들 자신이 분노해야 할 문제다.


여성의 정조에 대한 범죄이다 보니 바로 그 정조에 대한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피해여성이 정숙했으며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혹시라도 빌미를 주었거나 자신의 정조를 지키는데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지킬 가치가 없는 정조는 지키지 않는다는 판례가 쌍팔년도 고래짝 군내나는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판사의 입에서 나왔던 이야기다. 바늘이 흔들리는데 실을 꿸 수 있겠는가.


여성이 성폭행으로 고발했는데 무죄가 나온 사례들을 보면 기가막힌 것이 한둘이 아니다. 같은 과 친구라서 자취방에 초대했는데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진 것이 되었다. 성폭행범이 바로 옆에 있어서 경찰을 보고도 겁이 나서 신고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문제삼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과 개인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사실입증이 쉽지 않은데 그나마 겨우 사실을 재구성해놔도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하지도 않은 합의를 했다며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형량을 줄여서라도 피해자가 억울하지 않게 유죄판결을 늘려달라.


한 번은 형사재판으로는 무죄가 났는데 민사재판으로 손해배상을 받아낸 경우마저 있었다. 민사재판에서는 가해자의 강제성이 일부 인정되었는데 그 만큼은 피해자가 배상으로 받아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부의 강제성이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강제면 강제지 일부는 무언가. 일부의 강제성을 인정했으면서 어째서 형사재판에서는 무죄로 판결했는가. 성범죄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범죄가 아닌 단지 여성의 정조에 대한 범죄로 여기는데서 비롯된 문제라는 것이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개인의 존엄을 침해했다면 범죄로 여겨야 할 텐데 그마저 자신의 행위로 비롯된 부분이 있으니 무죄로 판단해야 한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다. 때리는데 최대한 저항하지 않았으니 맞을 만했다. 말이 된다 여기는가.


여성단체등에서 성범죄에 대한 무고죄를 폐지하자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정확히는 성범죄를 수사하면서 무고여부도 함께 수사해야 하는 현재의 지침을 수정하자는 것이다. 성범죄를 신고하는 순간 거꾸로 고소당하며 무고죄의 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성범죄의 입증이 어려운데 무고죄의 피의자가 되어 곤란을 겪어야 한다. 무고죄에 대한 두려움과 수사과정에서의 번거로움이 피해자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자신이 당한 피해를 입증하는 것을 꺼리도록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가해자로부터 성범죄 피해사실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2차피해에 노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인데 그나마 신고하고도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로서 수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원래 기독교의 미투가 훨씬 앞섰었다. 훨씬 전에 기독교 내부에서 성범죄 피해자들의 고발이 쏟아져 나오며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을 무력화한 것이 바로 명예훼손과 무고를 통한 역공이었다. 대부분 오래된 일인데다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라 사실입증도 어려운데 정작 피해자들이 명예훼손과 무고로 곤란을 겪으며 오히려 더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명예훼손과 무고를 이유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피해자들에 대한 비난만 더 높아졌다. 몇 년 전 있었던 문학계의 미투운동 역시 그런 식으로 가해자들의 명예훼손과 무고죄 고소에 동력을 잃은 바 있었었다. 어쩔 수 없이 검찰의 수사라는 압박에 피해자들이 소를 취소하면 그것이 곧 꽃뱀이라는 빌미가 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빌미가 되고 있었다. 내가 법정에서 무죄고 판결나고 심지어 명예훼손과 무고로 처벌받는 것을 보면서도 그다지 그 결과에 신뢰를 가지지 않는 이유다. 최소한 대한민국 법은 성폭행 피해자의 편에 있지 않다.


굳이 다수 남성들이 성폭행 무고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아도 입증도 어려운 성범죄가 입증이 힘들어지는 순간 무고의 수사로 바로 이어진다. 성폭행 고소를 받는 순간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하면 성폭행 수사와 무고죄 수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혹시라도 무고의 피해자일 수 있는 남성을 지켜주게 된다. 굳이 남성이 자기가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입증할 필요가 없다. 피해자인 여성이 자신의 정조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지키려 했었는가 먼저 입증해야 남성의 성범죄는 입증된다. 어차피 무고죄를 강화하지 않아도 여성이 자신의 성범죄 피해를 법정에서 인정받고 유죄판결을 받아내기란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다. 하긴 그래서 진짜 성범죄 피해자들은 신고도 잘 안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자신의 성을 지키겠다고 가해자에게 저항하다가 성범죄가 아닌 살인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마저 생긴다. 그냥 성폭행을 당하라. 그리고 신고하라. 그러고보면 몇 년 전 판례도 있었을 것이다. 성폭행하려는 가해자에게 AIDS를 우려해서 콘돔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는데 유죄로 판결되었다. 당연히 미국이니 유죄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림도 없다. 그만큼 한국의 법정은 성범죄에 대해 보수적이다. 그러니까 신고라도 마음놓고 할 수 있도록 무고죄를 없애거나 개정해달라 요구하는 경우도 생겨나는 것이다. 더이상 성폭행 피해자가 무고죄의 피의자가 되어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도록.


법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째서 성범죄에 대해서만큼은 특히 남성들의 법원에 대한 믿음이 그토록 투철한가 하는 것이다. 하긴 성범죄 피해자들을 뒤에서 모욕주고 조롱할 때 흔히 쓰이는 논리들이기도 하다. 어떤 행동들이 빌미가 되었다. 피해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다. 결국에 자기가 좋아서 한 것 아니던가. 이번 오달수의 경우도 '연애감정'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 남성들이 흔히 하던 '여자는 그저 한 번 꾹 눌러주면'과 같은 저급한 성의식에 대한 것이다. 정조만 빼앗으면 여자를 소유할 수 있다. 당장은 범죄라도 결국은 모두가 좋아질 것이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판사가 재판정에서 성폭행 가해자와 피해자를 결혼시키고 자랑하던 것이. 가족들이 말이 새나가지 않도록 가해자와 피해자를 억지로 결혼시키던 것이. 아 몇 년 전에 그와 관련한 사건들이 있었던가.


그러니까 이제와서 미투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야 했으니까. 피해자인데 오히려 죄인이 되어야 했었다. 책임을 물었다. 잘못을 따졌다. 아예 피해자 자신이 자신의 잘못을, 아니 죄를 스스로 다그치도록 만들었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평생 말도 못하고 속앓이나 하며 견뎌야 했었다. 그 사실을 여성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제 뉴스룸에서 배우 김태리도 이야기하더라. 자기라도 같은 상황이었으면 제대로 저항도, 당하고 나서도 한 마디 고발도 고백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에 살고 있다. 그나마 모두가 나서니 이제라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수 남성들은 아직까지도 피해자의 잘못을 먼저 들추고 있다. 오달수에 대한 변호를 보면 눈물겨울 정도다. 어떻게든 오달수는 무죄가 되어야 하고 오히려 그를 고발한 피해자와 언론인 뉴스룸이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 아마 앞으로도 상당기간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을까.


현실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어째서 여성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성범죄 피해자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가. 결과가 잘못되었어도 그 동기에 있어서의 선의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가.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성범죄와 관련한 여러 사례들을 어쩔 수 없이 보고 듣게 되면서 경찰의 수사도 법원의 판결도 믿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피해 자체를 인정받기도 힘들고 어려운데 아무도 자기를 믿어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외롭고 서러울까. 다만 직접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비겁함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나는 용기있지 못하다.


하여튼 재미있는 것이다. 신고하면 모두 처벌받는 줄 아는 모양이다. 피해자가 바로 그 자리에서 신고하면 - 아니 바로 피해를 당하고 신고한다는 자체도 피해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그 사실이 알려질까 그 자체를 더 두려워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무시하고 문제가 되는 것들만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사실 실제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여성들 다수는 피해를 당해도 신고도 않고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범죄의 피해에 더욱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경우마저 적지 않다.


어쨌거나 정말이지 성범죄 피해자들에게도 이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논리는 없을 것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된다. 아흔아홉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성범죄를 입증하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의 법과 판례들 때문에라도 사실을 입증하고도 범죄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고죄 아닌 무고죄가 되어야 한다. 정작 범죄의 피해를 입었는데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판단해서 합의에 의한 행위였다고 멋대로 결론내리고 만다. 성폭행 피해자가 오히려 현행 법령과 지침으로 인해 무고죄의 가해자가 되어 억울하게 처벌받아야 한다. 단 한 사람의 억울한 피해자도 없어야 한다는 논리 그대로 그래서 성범죄에 대한 법령과 지침을 고치거나 아니면 무고죄에 대해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억울함이 남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완결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남의 사정이니 굳이 알 필요도 이해할 필요도 없다. 어째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는가. 실제 성폭행을 당했다면 어째서 법정에서 무죄판결이 나왔는가. 그러니 무고죄 아닌가. 꽃뱀 아닌가. 현실을 알고 모르는 차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십 년도 넘은 지금에 와서야 어차피 법으로 처벌도 할 수 없는 자신의 피해사실을 털어놓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무언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의도와 음모가 숨어있을 수 있다. 김어준은 참 똑똑하다. 그같은 남성들의 의심에 확실한 동기를 부여한다. 현정부의 승리를 위해서라도 미투운동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미투운동 자체가 그들에게 상식밖의 존재다.


그냥 미투운동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성범죄에 대한 신고와 수사, 처벌의 현실에 대한 이해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래서 차라리 피해자가 도망치고 숨어도 그 위에 가해자로 법적인 처벌이 가해지는 경우 또한 현실에서는 얼마나 흔한지. 그래서 사소한 실수나 문제가 있어도 그들의 편에 선 사람을 함부로 미워할 수는 없다. 그 차이는 거의 절대적이다.


원래는 여성운동을 비판하려 했었는데. 하지만 역시 지금 남성들 하는 것 보니 그러기에는 이른 모양이다. 그냥 핑계가 없으니 대세에 거스르지 않으려 속내를 꼭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투와 함께 봇물처럼 그 감춰왔던 속내가 터져나온다. 남자인 내가 다 부끄럽다. 혐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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