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어느 독립운동가가 외친다.


"쪽바리들을 조선땅에서 몰아내자."


그러자 어느 선량한 조선인이 말한다.


"그러다가 자칫 무고한 일본인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


그래서 지금 그게 중요한가?


혹은 말한다.


"친일파 놈들을 모두 처단하자."


역시나 항변한다.


"친일파 가운데서도 조선의 백성과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이 많다."


역시나 지엽이다.


구조에 대한 것이다. 과연 백인이 흑인을 차별한다고 했을 때 차별당하는 모든 흑인을 무고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백인 경찰에 의해 폭행당하고 심지어 총격을 당해 사망한 흑인 가운데는 실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도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법대로 원칙대로 집행했을 뿐인데 사회적인 비판에 직면한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더 압도적인 백인의 흑인에 대한 차별행위가 있기에 그런 사소한 예외는 무시당하는 것이다.


과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학대하고 착취하기만 했을까? 멸시하고 차별하기만 했을까? 좋은 일을 한 일본인도 많다. 실제 일본인들로 인해 더 좋아지고 나아진 부분도 아주 없지는 않다. 역시 경향성의 문제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주권을 빼앗고 차별했으며 착취했다. 모욕하고 학대했다. 원래 가해자들의 논리다. 그럼에도 자기들이 잘한 것도 적지 않으므로 그런 일반화된 비난은 부당하다. 그러니까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인 가운데 유대인에 대해 개인적인 선의를 베풀었던 독일인들이 적지 않았다 해도 대체적이고 보편적인 경향성은 당시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차별하고 심지어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어쩌면 전혀 상관없는 지금의 후손들까지 유대인 학살에 대한 부채를 지고 있다.


원래는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글을 쓰려 했었다.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해 나름대로 비판할 것이 있어 써보려 며칠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있었고 각계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크게 이슈가 되며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었다. 잘되었다 생각한다. 그리고 새삼 어째서 여성들이 저토록 민감하게 과격하게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적대적으로 여성주의를 주장하고 있는가 이해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절박하게 그동안 감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수 남성들의 대응은 아니나 다를까였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

"억울한 희생자가 있을 수 있다."


말했듯 구조이고 경향성이다. 과연 남성이 남성을, 혹은 여성이 여성을, 심지어 여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성폭력의 전체 비율의 문제다. 어느쪽이 더 일반적이고 전형적인가. 따라서 어느쪽이 더 구조적으로 심각하고 절박한 문제인가. 어째서 여성들은 그동안 침묵하다가 지금에서야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너도나도 자신의 경험에 대해 털어놓고 있는 것일까. 여성들이 기회주의자라서? 아니면 남성에 대한 악의로? 그냥 관심이 없는 것이다. 성폭력이라는 것이 피해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긴 성폭력 피해자인 남성의 경우는 더 답답하기도 하다. 그나마 여성은 어디 가서 하소연이라도 하지 남성이 자신의 피해를 고백하면 같은 남성으로부터도 거의 공감받기 힘들다.


그냥 남성 자신의 입장에 대입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남성에게 성추행당했다. 성폭행당했다. 어디 가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이라도 구할 수 있겠는가. 경찰에 신고하기라도 했다가는 자칫 언론에 알려져서 사회의 관음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신상이 파헤쳐지고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도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게 된다. 당장 이번 서지현 검사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피해자가 전면에 나서자 남성들 사이에서 피해자에 대한 온갖 진실과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정권에 우호적인 이들 사이에서 서지현 검사의 의도를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괜한 변호인의 배후까지 캐고는 서지현 검사의 진의를 파헤친다. 안태근이 성추행을 저질렀는데 정작 대중의 관심은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에게로 집중된다. 대부분의 성범죄가 그렇다.


많은 포르노물들이 성범죄를 그 소재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성범죄의 피해자라는 것은 그 자체로 뒤틀린 욕망을 자극하는 소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누구이고 어디서 어떻게 당했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피해를 입었는가. 그리고 피해자는 어땠을까. 가해자의 악의보다는 피해자의 당시 상황과 이후의 상태를 자신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피해자들에 대한 2차, 3차, 그 이상의 피해가 이어진다. 하물며 서지현 검사나 최미영 시인의 경우처럼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서는 사회적 구조 자체가 피해자를 억압하는 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성폭력의 피해자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시대가 그리 멀지 않다. 지금도 지구상 어디선가는 그런 야만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고작 그런 일로 잘나가는 누군가의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는가.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가진 누군가의 미래가 발목잡혀서야 되겠는가. 물론 대부분 그 누군가는 사회의 주류에 속한 남성이다. 여성의 피해는 사소하고 남성의 불편은 절대적이다.


그러고보면 무고죄 논란도 그런 연장에 있을 것이다. 성범죄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고한 남성이 발목을 잡히고 신세를 망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남성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피해자들에 대한 검증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피해자들이 한 점 의혹도 없이 결백함을 입증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남성에 대한 수사와 처벌도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경향성이다. 개별의 고소나 고발이 아닌 현재의 미투운동은 그동안의 일상화된 성폭력과 그것을 은폐해 온 우리 사회에 대한 경향적 반발이며 도전일 터였다. 그런데도 개별 남성의 사정을 고려해서 여성들은 자신의 고백을, 겨우 가지게 된 고백의 기회를 양보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성범죄들이 지금도 저질러지고 있고,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하소연조차 못하고 혼자서만 앓아야 했던 것인지. 그렇게 만든 이유와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들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바로 그들이 그 이유가 되었고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범죄야 개인이 저질러도 그 사실을 신고는 커녕 하소연도 못하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상처에 짓무르며 피해자들이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와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냥 한 마디 하고플 뿐이다. 미투 운동이라는 것이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슴에 맺힌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사회적인 공론 속에서 다시는 이런 일들이 없게 하자는 나름의 하소연이고 발버둥인 것이다. 개별의 피해자가 아닌 그 경향성에 주목한다. 그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회적 현상들에 주목한다. 지금 더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 과정에서 사소한 오류들이 있을 수 있다. 사소하다고만 할 수 없는 억울한 희생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적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의 독립은 조선을 침탈한 일본인을 몰아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선량하고 억울한 피해자라 할지라도 일단 일본인들을 먼저 조선땅에서 몰아내고 난 뒤 그 다음에 일본과 일본인과의 관계도 다시 정립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단계에 왔는가. 내가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 성급할지 모르겠다 판단한 이유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을 마음놓고 비판해도 좋을 정도로 사회가 정상을 찾아가고 있는 것인가. 새삼 이번 미투운동을 통해서 자신부터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이 페미니스트들이 마음놓고 온건해져도 좋을 정도로 조금은 나아진 것인가.


심지어 여성들이 성폭력에 대한 '미투'운동을 전개하면 더이상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협박마저 서슴지 않는 남성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여성들의 고발이 무서워서라도 여성들과 접촉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주도한 질서 아래서 여성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 최미영 시인이 고백한 문단의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남성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아예 문단에서 매장한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남성들의 죄를 폭로한다면 남성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여성들을 응징하고 보복할 것이다. 아직 사회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있으니까. 미투 운동에 동참한 여성들을 향한 남성들의 저열한 보복은 그런 연장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름아닌 자신들 남성을 건드렸다.


역시 경향적 일반적 현상과 상황에 대한 이해다. 그럼에도 개별 남성의 피해가 더 중요한가. 전체 여성의 상처와 고통을 더 주목해야 하는가. 어느것이 지금 이 사회에서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야 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는 성폭력으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것이 그 과정에서의 때로 심각한 부작용보다 더 우선해야 할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보다 크고 중요한 가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일부 남성들에게는 소수의 피해가 더 중요한 가치겠지만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경향적으로 여성이 당하고 있는 성폭력이야 말로 더 중요한 이슈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억울해도 할 수 없다.  원망하려면 그런 일들을 저지른 원인제공자인 소수 아닌 다수 남성들을 욕해야 할 것이다. 그들 다수 남성이 그같은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억울한 피해자들도 당당히 자신의 억울함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문제이고 무엇이 원인인가.


물론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자체도 싫어하며 거부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또 페미니스트들과 말섞는 것을 싫어한다. 맹목적인 증오와 배제에는 어떤 대화도 공존도 있을 수 없다. 그냥 타인으로서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는 것 뿐이다. 과격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을 싫어하는데 그들의 행동을 때로 인정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아이러니다. 참 세상이 뭣같기는 하다. 그래도 아직은 분노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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