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바로 어제 고작 하루만에 다시 방남하겠다 통보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상당히 헷갈려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또 뭐가 문제라서 기껏 협상까지 다 해놓고 남쪽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겠다 어깃장을 놓는 것일까? 확실히 지금 가장 아쉬운 쪽이 누구인가 분명해지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단 하루도 아쉬울 만큼 마음이 급한 쪽은 다름아닌 북한이었다.


그러니까 지난 수 년 간 교류가 단절되면서 마지막 교류가 있던 시점의 기억에 갇혀 있던 것은 북한 당국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에도 겉으로는 강경한 입장을 내세우면서도 뒤로 대화재개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전임자들의 태도가 그같은 오판을 키웠을 것이다. 자기들이 이제라도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화에 응하고 평창올림픽에까지 참가한다면 이전 정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 보두가 자신들을 환대할 것이다. 당장 자신들이 개발한 핵무기 때문에라도 더 낮은 자세로 많은 것들을 양보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 정부를 이용해서 국제적인 고립에서도 벗어나고 당장 아쉬운 것들부터 최대한 받아내 보자.


평창올림픽 참가를 두고 협상하는 동안에도 괜한 트집까지 잡아가며 마치 수위를 조절하듯 한국 협상단에 시비를 걸어댄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상당히 엇박자였다. 한국 대표단에게 항의하는 시점과 문제가 발생한 시점이 맞지 않았다. 대응 수위나 방식도 마치 우리가 이런 것도 한다는 식으로 매우 요식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판을 엎고 다시 돌아가는 수가 있다. 돌아가서 아예 평창올림픽 망하라고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라. 여기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와의 공조는 차질없이 진행된다. 올림픽은 올림픽이고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순간까지 계속 유지된다. 그 와중에도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북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전하고 있었다. 지금의 한국정부는 이전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다른 수단을 사용하기로 한다. 남북한간의 대화가 한국 정부에게 상당한 치적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대화를 제의하면서 마치 무슨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양 거들먹거린 것도 결국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것이 어떤 정치적 이익을 주었는가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북한이 대한민국과의 대화국면을 흔들고 파탄내려 하면 그 정치적 부담 역시 대한민국 정부에게로 고스란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당장의 평창올림픽과 국민의 기대 때문에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더 아쉬운 처지가 되어 낮은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아주 버릇을 잘못 들여놓았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주 자기들이 대단한 상전이나 되는 줄 안다. 그런 점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을 두고 일어나는 논란들은 정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더이상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처럼 북한과의 관계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북한과의 단일팀 때문에 대통령의 지지율까지 하락했다.


누군가에게 협상을 위임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재량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밖에 양보할 수 없다. 이렇게밖에는 허용할 수 없다. 그 이상은 내게 주어진 재량 밖이다. 그것을 상대가 알게 하는 것도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협상을 아예 깰 생각이 아니라면 주어진 재량 안에서 양보도 요구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정부에게 주어진 재량이 어디까지인가? 미국과의 관계를 거스르는 것은 북한도 바라지 않는다. 강경일변도인 미국과 대화하려면 대한민국 정부가 그 다리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미국이 뒤에서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한국 국민들마저 전과 달리 단일팀도 공동입장도 다 필요없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행동에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민주정부로서 주권자인 국민의 반발마저 무릅쓴 결단의 결과라는 것이다. 국민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무엇보다 우선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보이는 성의가 대한민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여기서 선택지가 남는다. 하나는 어차피 더이상 대한민국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대화를 이쯤에서 아예 끝내자. 아니면 그럼에도 진짜 중요한 목적이 있으므로 이쯤에서 자기들이 먼저 양보한다. 그러니까 어제 저녁 북한에서 다시 사전점검단을 보내겠다 통보해 왔을 때 저도 모르게 웃음부터 지어졌던 것이었다. 정작 지금 남북한간의 대화에서 더 급하고 더 아쉬운 것은 어느 쪽인가? 누가 더 약점을 잡힌 상태인가? 트럼프의 말이 맞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가도 옳다. 힘들지 않은 게 아니다. 고통스럽지 않은 게 아니다. 당장이라도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고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 얻을 것을 얻고 끝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니 아무 방법이라도 써봐야 한다. 그래서 그나마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며 온건한 방법을 주장해 온 문재인 대통령의 선의에 기대서 과거 해오던 것처럼 한 번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 결국 성과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북한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지금의 기회마저 놓치면 자칫 진짜 트럼프의 미친 짓을 제대로 맞게 될 지도 모른다. 국내지지도 개판인데 지지율을 위해 트럼프도 못할 짓이 없다.


잘하고 있는 것이다. UAE와의 협상과정에서도 국내의 시끄러운 여론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던 것처럼 정부의 나름 성의를 다한 대응에 대해 호의적이지 안았던 여론 역시 북한에 대한 경고가 되어 주었다. 전처럼 그딴 못된 장난질을 계속하다가는 대한민국 정부도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당장 북한과의 대화와 관계개선에 대한 여론마저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 북한이 무리한 요구라도 한다면 부담 때문에라도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는 손놓고 물러나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북한 입장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면 몰라도 당장 급한 목적이 있다면 알아서 조심해야만 한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미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차지철을 사주해서 국회에서 반대여론을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항상 정치에는 지지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대자가 오히려 지지자보다 더 유용할 수 있다.


결국 그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속내라기보다는 바닥이었다. 그들이 놓인 상황이다. 여유롭지 않다. 아마 전같았으면 한 며칠 시간을 끄며 몽니도 부리고 했을 테지만 그런 여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놓인 현실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급하게 서둘지 않고 원칙을 지키며 버틴 대한민국 정부의 영리함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단일팀 등 최대한의 성의는 보였다. 북한이 지금 믿을 것은 미국도 한국 국민도 아닌 오로지 대한민국 정부, 문재인 대통령의 선의 뿐이다. 누가 열세에 있는지는 이것으로 분명해졌다.


민주주의의 승리다.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와 경쟁이 가져온 성과다. 김정은이 하잔다고 그것이 북한의 의지가 되는 체제와 다르다. 서로 논쟁하고 토론하고 갈등을 빚으면서 최선의 답을 찾아나간다. 그것들이 오히려 정부에 더 큰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반대자들에 고마워해야 한다. 북한도 알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전의 대한민국과 다르다. 이전의 대통령과 정부와도 다르다. 정부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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