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과장과 계장이 동시에 일을 시키면 일순간 멍해진다. 물론 더 높은 사람이 시킨 일부터 하는 것이다. 아니면 더 급한 일이나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일부터 하거나. 하지만 알면서도 일순 당황하게 되는 것은 내 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정하기까지 잠시 행동은 멈추게 된다.


화재현장에 도착했다. 건물은 타고 있다. 사람들이 건물 안에 갇혀 있다. 커다란 가스탱크가 불타고 있는 건물 옆에 방치되어 있다. 건물 가까이에 불법주정차된 차들까지 많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야 할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당장 우선순위부터 정해야 한다. 한정된 인력과 장비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 일단 건물에 접근해야 하고 구조과정에 혹시 모를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 당장 눈앞에 위험에 처한 사람도 구해야 한다. 


바로 그 시간이다.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다. 3시 53분에 신고를 접수했고 다른 곳에서 고드름제거 작업을 하다가 구조대원들이 합류한 것이 4시 9분이다. 그리고 구조를 요청하는 시민을 구하기 위해 매트리스를 설치하고 있었다. 진압대원들 역시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가스탱크 주변의 화재진압에 먼저 집중하고 있었다. 가스탱크 주위가 안전하고 어느 정도 1층의 화재가 진압되고 나서야 안전하게 생존자의 구조에 나설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을 한 번에 동시에 진행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을 테지만 아다시피 소방인력이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다.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소방관 역시 화재진압과 생존자구조에 있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소방관 자신의 안전이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목숨을 걸고 불을 끄고 생존자를 구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실제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런 훌륭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가질지언정 그러지 않은 것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더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을 막는 것에는 소방관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소방관의 안전이 확보되고, 더이상의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을 통제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진압과 구조도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는 자체가 매우 전문적인 업무다. 서로 사용하는 장비도 다르고 훈련받은 내용도 다르다. 그냥 소방관이니까 아무나 아무렇게나 그저 자기들이 바라는대로 모든 걸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짜증나는 것이다. 유가족이야 그럴 수 있다. 그것은 유가족의 권리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큰 비극을 겪었기에 아무라도 붙잡고 원망하고 하소연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라도 붙잡고 욕하고, 혹시라도 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못했다 소방관을 탓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언론이다. 그런 식의 중계만 하는 것이 원래 언론의 역할이었는가.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감정적일 수 있어도 언론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언론들이 어떤 태도로 임했었는가를. 


그렇게 소방인력 충원과 예산의 증액을 정부와 여당이 관철하려 노력했음에도 그에 부정적이던 야당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비판적 보도조차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오히려 그런 야당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오히려 앞장서서 주장을 더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이제와서 마치 모든 책임이 소방관들에게 있는 양 유가족의 입을 빌어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언론의 기사들만 보면 소방관들은 머리가 셋에 팔은 열 쯤 되는 슈퍼맨들인 것 같다. 그 인력, 그 장비, 그 예산으로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초인들이었을 것이다. 아니니까 인력도 증원하고 예산도 증액하고 새로운 장비를 도입하고 개선하자 주장하는 것이다. 불구덩이에라도 던지지 않으면 안전하다는 말이 불구덩이에서도 안전하다는 말로 바뀌는 건 무슨 의도일까?


소방관들이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물론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혹은 착오나 오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주어진 상황에서 소방관들은 최선을 다해서 불을 끄고 사람을 구했었다. 정작 불을 내고서도 뒤늦게 신고하고, 소방안전설비를 제대로 갖추거나 관리하지 않아 피해를 키운 건물주에 대한 비판은 어느 언론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비판은 불이 난 원인에 대해 돌려져야 하는데 소방관들에게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만 유족들까지 따져묻고 있는 중이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가. 어째서 유가족들과 소방관이 서로 불신하며 적대해야만 하는 것인가. 누가 무슨 자격으로 그것을 부추기는가.


이러니 기레기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방관청의 해명도 들어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한정된 인력과 장비, 예산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바를 최선을 다해 해온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유가족 입장에서 당장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것을 돕는 것이 바로 기자들인 것이다. 더구나 그런 무책임한 중계식 보도에 다른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화재를 핑계로 문재인 정부와 그 지지자를 비난하는 글들이 부쩍 늘고 있다. 진보고 보수고 할 것 없이 이렇게 노골적이면 웃음만 나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고였고 있어서는 안되는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더 철두철미하게 사실을 밝히고 진실을 보도할 수 있는 언론이 필요하다. 혼란과 동요를 최소화하고 회복과 치유를 도울 수 있는 그런 기사들이 필요하다. 싸움을 붙이고 갈등을 키운다. 한국 언론의 처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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