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의 군략가 손무는 자신의 저서 '손자병법'에서 군략에 대해 이 한 마디로 간명히 정의한 바 있었다.


"兵者詭道也"


무릇 싸움이란 서로를 속이는 것이다. 싸우려면 싸우지 않을 것처럼, 싸우지 않으려면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능력이 없으면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면 오히려 능력이 없는 것처럼. 먼 것은 가깝게, 가까운 것은 멀게, 이익은 손해가 되고, 손해는 이익이 되고, 그럼으로써 상대의 오판을 유도하여 빈틈을 찔러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 


협상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무리 우호적인 협상이라도 결국 누군가 이익을 본다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한다. 모두가 이익을 보면 좋지만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한다면 내가 아닌 상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가 더 많은 부담을 지게끔 기술을 사용하게 된다. 적당히 불리한 내용은 감추고, 유리한 내용은 부풀리고, 때로 상대를 도발하거나, 아니면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서 호의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교묘한 말로 속여서 함정에 빠뜨리는 것도, 아예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상대의 책임으로 돌리고 판 자체를 뒤집고 부수는 것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협상을 끌고 가기 위한 기술에 포함된다. 총칼이 아닌 말로써 하는 싸움이지만 그래서 협상은 어느 싸움보다 치열하고 집요하고 흉험하다. 한 마디로 누군가, 더구나 적대적인 상대와 협상을 하면서 상대의 기술에 뻔히 눈뜨고 당했다면 미리 대비하지 못한 방심과 나태, 무엇보다 어리석음에 탓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쓰는 말이 '놀아났다'는 것이다. 상대의 의도에 철저히 말려 상대가 바라는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자유한국당이 민주당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다 아는 사실이다. 더구나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권을 빼앗긴데다 지지율마저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이라 어떻게든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까지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실패하고 민주당이 망해야지만 등돌렸던 지지자들도 다시 돌아오고 정권을 되찾을 희망도 생긴다. 무엇보다 당장 낮은 지지율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당을 결집시킬 수 있는 동기와 계기가 필요하다. 특히 친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자유한국당에서 결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게 우호적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그래서 대부분 국민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자유한국당이 자진해서 자신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추경이 원만히 통과되도록 협력할 것이라 믿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인가. 아무래도 뭔가 뒤에 알지 못하는 다른 수작이 감춰져 있을 것이라 의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을까? 실제 그동안도 야당과 몇 번이나 강경대치하며 합의가 뒤집히고 인사청문회마저 파행으로 얼룩졌던 경험이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당장은 선의로 믿어주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뒤로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이번 추경안 통과와 관련해서 추경을 파행으로 만들고자 비열하게 수작을 부린 자유한국당에 비해 그에 놀아난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더 강한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인 것이다. 그럴 줄 몰랐는가. 자유한국당이 설마 그렇게까지 할 것이라고 진정 생각지 못했던 것인가. 어차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알고, 특히 정권이 바뀌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도 알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 아예 추경심사조차 받지 못하겠다며 어깃장을 놓던 것이 바로 자유한국당이었다.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의심하지 않더라도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어야 한다. 결국 더불어민주당이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던 탓에 정작 추경에 반대하며 퇴장했던 자유한국당만 추경을 통과한 공까지 모두 가져가 버렸다. 그나마 자유한국당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추경은 통과될 수 없었을 것이다. 추경에 합의하고 찬성표를 던진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에도 할 말이 생겼다. 자기들은 최선을 다해서 추경이 통과될 수 있도록 도왔다. 오히려 추경이 무산될 뻔한 상황을 만든 것은 더불어민주당 자신이다. 누구때문인가? 더불어민주당의 방심과 나태, 무엇보다 어리석음과 무능이다. 도대체 뭘보고 자유한국당이 한 말을 철석같이 믿고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협상을 주도했던 원내대표 우원식에게 돌아간다. 당과 정부의 이익보다 개인의 선의만을 우선시했다. 국회의장 정세균도 아주 자유로울 수 없다.


원래 그러라는 협상이다. 그것을 달리 정치력이라 부르기도 한다. 적당히 속이고, 적당히 유인하고, 그래서 상대의 오판을 유도하고, 그렇게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추경이 통과된 순간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괜히 정우택 원내대표를 향해 박수를 보낸 것이 아니다. 추경을 파행으로 몰고간 책임까지 벗으면서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의 무능을 부각시켰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무능은 곧 정부의 무능이고, 그것은 다시 야당으로서 가장 강력한 대안집단인 자유한국당에 대한 기대와 지지로 이어진다. 최소한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다. 심지어 정부가 그토록 바라던 추경마저 반대입장이었음에도 정족수부족으로 무산될 위기에서 구해내어 통과되는데 일조하지 않았는가. 박근혜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가 꽤나 올랐을 법한 아주 그럴싸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몰라서 당했다면 멍청한 것이고 알면서 당했다면 더 멍청한 것이다. 알면서도 당해준 것이라면 사악한 것이다. 당해준 의도가 내가 생각한 그것이라면 우원식은 정치인은 커녕 인간의 자격조차 없다.


아무튼 웃기는 것이다. 서로 속고 속이는 협상에서 상대가 속임수를 썼다고 바로 당했다며 징징거리는 원내대표라니. 상대가 어떤 수로 자신을 유혹하고 농락하든 미리 대비하고 있다가 오히려 역공도 노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협상의 당사자 아닌가. 상대가 속여서 당했다. 상대가 속일 것을 전혀 알지 않았다. 상대가 속일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그것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내가 멍청했다. 내가 무능했다. 더 짜증나는 것은 원내대표 우원식의 무능함이 곧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무능으로, 문재인 정부의 무능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까지 야당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그같은 빌미를 우원식이 야당을 위해 던져주었다. 차라리 희생정신이라 생각하는 쪽이 그나마 열불이 덜 난다. 이런 인간이 더불어민주당의 무려 원내대표다.


어쩌면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정당이 가지는 근본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롭게 수혈된 인재들을 보면서 더불어민주당도 물갈이가 많이 되었다. 믿을만한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수혈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원내대표라는 자체가 국회의원들이 투표로 뽑는 자리라는 것이다. 아직 더불어민주당 내부에는 우원식과 같은 무능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더 좋아라하는 국회의원들이 더 많다는 뜻이다. 우원식의 무능은 바로 그들의 무능이다. 우원식의 미심쩍음은 바로 우원식에 투표한 그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의 미심쩍음이다. 아직 나는 더불어민주당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다. 열린우리당부터 새정치민주연합까지 그때 사람들이 모두 바뀐 것은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였다. 하지만 더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자유한국당에 철저히 농락당하고 난 뒤 보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우원식의 반응과 태도였다. 그럴 줄 몰랐다. 그렇게까지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진짜 멍청하거나, 멍청할 정도로 착하거나, 누구도 눈치 못챌 만큼 사악하거나. 자기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원내대표란 어떤 자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감투가 급했던 것일까? 자기의 뒤에 누가 있는지, 자기의 어깨에 어떤 짐들이 지워져 있는지. 개인으로서는 선량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에게 눈물이란 경솔함이며 무능이다.


하여튼 저런 인간이 무려 공당의 원내대표라는 것이다. 원내 1당인 여당의 원내대표로 다수 국회의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호러다. 그래서 내가 민주당 쪽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던 것인다. 새삼 확인한다. 어떤 쓰레기는 재활용도 불가능하다.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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