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다니던 직장이 망했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역시 중요한 건 한창 돈 벌릴 때 투자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곳은 잘된다며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그 수준까지 끌어올리려 투자하는 데는 항상 인색했었다. 그러고서는 하는 소리가 늬들이 열심히 해라. 늬들이 열심히하면 따라잡는다. 그러니까 기본 설비며 체계부터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이익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가져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경영자라고 놀며 돈 받는 것이 아니다. 경영자의 선택과 판단에 따라 기업의 이익이 달라진다. 명운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실 기업이 투자하고 혁신하는데 노동자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투자 좀 하자. 이런 것 좀 바꾸자.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삽질하는 것 망하는 것 뻔히 알면서 아무말도 안했었다. 말해도 안들어먹는 건 말해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오르지 않았으므로 임금도 올라서는 안된다. 사실 이 말은 19세기 유행했던 노동가치설에 기초한 것이다. 마르크스도 이 주장에 근거해서 잉여가치론이라는 것을 만들었었다. 생산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다.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의 총합이 곧 생산의 가치가 된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가 생산의 가치를 결정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하는 것이다. 노동을 하는 것은 노동자들만인가. 사용자는 노동 안하나? 대학시절 선배들과 결정적으로 충돌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경영자들도 노동자로 간주했었다. 사용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회사의 이익과 명운이 달라진다. 그러면 현대기업에서 기업의 이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자인가? 아니면 사용자인가? 어째서 이건희는 삼성의 이익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가져가는 것인가?


노동생산성을 이야기하려면 어째서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분배받는가에 대한 대답부터 내놓아야 한다. 노동생산성이 오로지 노동자만의 몫이라면 어째서 사용자가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는가에 대한 대답부터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 나오는 말은 그만큼 사용자들이 노동자보다 가치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에 있어서도 그들의 책임이 더 크다. 지급 기업들의 경영상태가 안좋은 이유가 노동자 때문인가? 아니면 사용자 때문인가? 좋았던 시절 남아도는 이익을 기술개발에 투자하기보다 개인의 이익으로 사치를 누리는데만 쓰고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고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투자하기보다 현상유지만을 하며 노동자들의 임금만을 억눌러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은 이익은 사용자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데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의 책임인가?


선진국 기업들의 노동생산성이 후진국보다 높은 이유는 결국 한 가지다. 그만큼 그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의 부가가치가 우리보다 높기 때문이다. 후진국은 인건비가 싸다. 선진국은 부가가치가 높다. 그러면 선진국 수준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려 노력을 해야 하는데 후진국 수준으로 임금만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 삼성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사회는 아직 후진국과 인건비 경쟁이나 하고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나태다. 방기다. 그러라고 경영자가 있는 것인가. 그러라고 경영자에게 그토록 많은 자원과 이익과 권한을 분배한 것인가. 


항상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부가가치를 이야기하고 그 부가가치를 결정하는 사용자에 대해 이야기하라. 기업가들이 나라경제를 먹여살린다. 나라경제를 먹여살릴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한다. 그렇다는 것은 기업가들이 생산성도 결정한다. 그런데 꼭 이런 이야기에서만 노동자의 책임을 이야기하는가. 그저 시키는대로 주어진 일만을 해왔을 뿐인 사람들에게. 뭐라도 말하면 들어먹기는 하는가?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알 것이다. 사장이라는 것들 도무지 뭐라도 건의하면 들어쳐먹지 않는다. 임원이라고 자리차지하고 있으면 자기가 과거 성공했던 방식만을 고집스럽게 답습할 뿐이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머릿속은 8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러고서도 회사가 유지되는 게 기적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러니까 인건비라도 깎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뀐 시대에 이전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말고 방법이 없다.


여전히 최저임금과 관련해서 나오는 말이 노동생산성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노동으로 많은 것을 생산하지 못한다. 카이스트 박사를 데려다 봉제인형 만들라 하면 딱 그 만큼의 부가가치만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MBA를 가진 사람에게 환경미화를 시키면 딱 그 만큼의 가치만을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에게 무슨 일을 시킬 것인가. 그러나 항상 권리만 누리던 그들은 책임 앞에서는 한없이 비겁하고 나약하기만 하다.


화가 나는 것이다. 기자라는 것들도 자기들이 월급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인데. 진실을 눈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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