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 나라의 경제수준을 측정하는 지표로 사용하는 기준의 하나인 1인당 국민소득은 한 나라가 생산한 전체 부가가치를 인구수대로 나눈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나라 구성원 개인이 평균적으로 생산한 부가가치가 바로 1인당 국민소득인 셈이다. 개인이 일정한 가치를 생산했으니 그 만큼이 곧 자신의 소득이 되어야 한다. 물론 항상 이론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리가 그렇다는 것은 최대한 근사치에 가까울 때 그만큼 정의에 더 부합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라면 개인이 그만큼을 생산했다는 뜻이니 소득도 그에 비례해야만 한다.


또한 임금이란 자체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노동자에게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해서 얼마의 가치를 생산할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 아무리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나오고 MBA까지 가지고 있어도 이쑤시개 공장에서 포장하는 일이나 하라 하면 결국 그 정도가 자기가 노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가치의 전부가 되는 것이다. 도저히 못해먹겠다 뛰쳐나오기 전까지는 그동안 수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최고의 인재라 할지라도 광고전단지나 접으라 시키면 그래야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실제 한국사회에서 전부터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어 온 부분이기도 하다. 정규직이라 마음대로 해고시킬 수 없으니까 인사권을 이용해서 한직으로 내몰아 망신을 주고, 실적을 올릴 수 없는 곳으로 보낸 뒤 실적을 이유로 징계를 내리기도 한다. 그래도 사용자가 시키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대부분 노동자의 처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고용계약을 맺을 때 그런 식으로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정하지 않는다.


정확히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시키려는 일과 그에 따른 임금을 제시하면 노동자는 그 임금이 자신에게 타당한가 여부를 따져 동의하거나 거부한다. 즉 자기가 하게 될 일이 아니라 자기가 받아야 할 임금이 고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얼마의 임금을 받고 어떠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러니까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입장이라면 가족이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을 최저임금으로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직장이 서울인데 서울은 아니더라도 근교에는 집을 얻어야 하고, 옷도 남들 만큼은 입어야 하고, 먹고 쓰는 것도 남들 만큼은 해야 하고, 남들 만큼 문화생활도 누려야 한다. 물론 타협할 수는 있다. 자기에게는 지금 그보다 더 급한 사정이 있다. 조금 더 양보하더라도 당장의 일자리를 얻어야겠다. 그런 직장은 임금이나 처우가 낮은 대신 사람들이 가기를 꺼리게 된다. 결국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조건에서 아쉬운 사람들이 많이 지원하고 고용에 동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더 실력있고 경력이 검증된 인재들은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노동자 자신의 가치다. 자신이 만족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이 기업에 요구하는 최저한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최소한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이 정도는 받아야겠다. 만일 그 정도 임금을 제공하지 못하면 고용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괜히 3D업종 얘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쉽고 편하지만은 않은 일인데 그만큼 받는 임금이 충분치 않으니 아무리 실업률이 높아도 가려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한국사회에서 최소한의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얼마인가. 아니 그 전에 그 비용에 있어 직업간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는가. 어차피 한 사회에서 물가는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단지 수입에 따라 더 많이 쓸 수 있고 더 적게 써야만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최저물가 자체는 구성원 모두에게 균등하게 적용된다. 아무리 가장 싼 것만 찾아 먹는다고 먹어서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수준까지 개인의 식료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최소한 남들 보기에 불쾌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을만한 옷은 입어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다. 집값이 싸다고 서울에서 일하면서 춘천에 집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계적으로 가장 싼 물가가 아닌 현실적으로 최소한의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저한의 물가인 셈이다. 그만한 임금은 받아야 불편없이 최소한의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 바로 때만 되면 논란의 중심에 놓이는 생활물가가 바로 그것이다. 최소한 이 정도는 있어야 최저한의 인간다운 삶은 누릴 수 있다. 그저 굶지 않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연명하는 비용이 아니다. 바로 선진국에서 물가가 비싼 이유다. 서비스 비용도 비싸다.


당연한 것이다. 국민소득이 2만달러라면 청소부도, 택배기사도, 식당종업원도 모두 그 만큼의 소득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PC방이나 편의점 알바도 자기가 일한 만큼 충분한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만큼의 대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소비자인 자신의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장 나 자신의 소득은 늘어야겠지만 그들로 인한 나의 지출이 늘어서는 안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양극화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당장 공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들이 임금 올려달라고 파업이라도 해보라. 당장 물가 오른다고 그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이웃이거나 지인일 대다수의 시민들이 반대한다. 당장 내가 이용해야 할 PC방 요금이 오를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물건을 사는 대형마트에서 상품가격을 더 올려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주문한 상품을 배송받는데 더 비싼 택배비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그같은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충분한 힘을 가진 주체들만이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줄 수 있다. 하긴 그마저도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너무 높으니 자기만큼 낮추라는 것이 사회 다수 구성원들의 요구이고 보면. 경제가 성장하고 생산은 늘어나는데 서로 발목을 잡으며 임금수준은 정체되거나 심지어 후퇴하고 있다. 그러면 남은 돈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의 임금을 올려서는 안된다며 요구하는 자신들에게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모순과 부조리와 불합리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말했듯 경제가 잘되어 성장하면 사회 전체의 부도 늘어나고 그에 비례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총량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불할 수 있는 수단이 더 많아진 만큼 지불의 대상이 되는 재화의 가치는 높아지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플레이션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물가도 오르고 그만큼 비례해서 소득도 오른다. 소득이 오르면 역시 비례해서 물가도 오르게 된다. 그렇게 전체적인 경제규모도 커지게 된다. 그런데 경제규모는 커지는데 서로가 발목을 잡느라 소득수준은 제자리걸음이다. 경제규모가 커지는만큼 자연스럽게 물가는 오르는데 개인의 소득수준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소비하지 못한다. 개인이 소비하지 못하면서 시장은 위축되고 그에 따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저한의 조건 역시 더 강화되기에 이른다. 어느 정도 사정이 안좋아져도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던 것에서 조금만 상황이 안좋으면 바로 무너지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 소수의 자격을 갖춘 주체들은 살아남아 더 강해지는가 하면 다수의 그렇지 못한 주체들은 몰락하여 사라지게 된다. 실제 IMF당시 많은 자본들이 그렇게 한순간에 휩쓸려 사라지면서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다시 말해 최저임금을 올리고 개인싀 소득을 높이는 것은 IMF 이후 한국사회가 내외적인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미뤄왔던 비정상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한 만큼 개인이 더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더 높은 소득을 얻고 그것을 시장에서 소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내수가 기업을 살린다. 특히 생존을 위한 최저한의 조건 이하에 있던 자본들이 새롭게 살아남아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가계부채도 그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결국 사회가 기대하는 소득수준은 높은데 임금소득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니 무리하게 부동산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가 투기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오로지 임금소득만으로 안정적인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굳이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이유가 없다. 임금소득이 부동산으로 인한 부채를 충분히 갚을 수 있을 만큼이 된다면 더이상 부동산으로 인한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당연히 부동산 가격은 올라간다. 하지만 지불능력을 동반한 상승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정부의 소득주도성장정책에 대해 이미 수 년 전부터 큰 기대와 지지를 보내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경제는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었다. 한국 사회 자체가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었다. 결국은 한국인 자신의 이기심이기도 하다. 아수라지옥이다. 내 월급이 오르지 않아도 네 월급이 올라서는 안된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내가 쓰는 물가가 오르게 될 것이다. 내가 지불하는 택배비, 식당 음식값 모두 오르게 될 것이다. 하긴 식당 음식값은 인건비 때문에만 오르는 것이 아니기는 하다. 내 돈을 쓰게 된다. 내 돈을 쓰게 하지 말고 내 소득만 올리라. 그럴 때 해당되는 것은 몇몇 대기업과 공기업들 뿐이다. 아무리 경기가 침체했어도 정작 한국경제 자체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제대로 정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몇 번 퇴고도 하고 자료도 찾아 근거도 보충하고 하면서 썼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시간도 노력도 너무 소중한 거라서. 너무나 간단한 것이다. 생산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 인간적인 삶을 우리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은 소득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개인이 소비를 할 수 있어야 시장이 건강하게 유지된다. 나의 소득만이 아닌 모두의 소득이 늘어야지만 정상적으로 시장은 돌아간다. 시장이 더 많은 부를, 가치를 사회 전체에 고루 돌아가게 한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모두의 이기심이다. 나는 되지만 너는 안된다. 모두가 안된다. 모든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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