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파주 일대에는 태극단이라는 반공지하결사가 있었다. 그냥 공산당에 반대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의기넘치는 젊은이들이 무어라도 해보겠다고 모인 자생적 결사체였다. 그리고 국군이 진군해오기 전에 북한군에 그 존재가 드러나며 다수 구성원들이 희생되고 말았었다. 외삼촌이 바로 그 태극단에 몸담았다 희생당한 한 사람이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북한 공산군에 대항해서 일어났다가 희생된 이들이었다. 나라의 이념이 반공이라면 이보다 더 애국자로서 훌륭한 이들도 드물었을 터였다. 하지만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유가족들이 수도 없이 청와대며 국방부며 보훈처며 청원도 넣고 했었지만 그나마 겨우 유공자로 인정받게 된 것이 김영삼 정부 때였었다. 기념식이라도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던 것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였었다. 그러면 그동안 반공을 앞세워 국민들의 기본권마저 마음대로 유린했던 군사독재정권에서는 어땠을까? 그러니까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이 김영삼 정부에서였다는 것이다.


내가 현충일을 싫어한 이유였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린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숭고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그래서 현충일만 되면 특히 북한공산당과 맞서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귀한 희생을 했었는가 강조하는 내용들이 온갖 미디어들을 가득 채운다. 누구는 꽃다운 나이에 북한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고, 누구는 북한공산군에 협조하지 않으려다 억울하게 희생당했었고, 그리고 누군가는 정부와 국군에 협력해서 북한군에 크게 타격을 입히는 것을 도왔었고. 그런데 그 다음이 빠져있다. 그래서 이후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가. 당장 우리집만 해도 장손이자 외아들인 외삼촌이 그렇게 북한군에 끌려가면서 거의 집안이 풍비박산나다시피 되었었다. 그러면 그에 대해 얼마나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졌었는가.


현충일추념식이라고 해봐야 결국 대통령이나 정부 각료들, 혹은 국회의원과 각계의 유력인사들이 모여서 자기자랑이나 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을 찍어서 사진으로 영상으로 미디어를 통해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를 위한 현충일이고 누구를 위한 추념식인가. 누구를 위한 애국이고 누구를 위한 희생이고 헌신인가. 억지로 끌려간 군대 그나마 억울하게 다치고 죽는 일이 있어도 제대로 진실을 밝히거나 보상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군대 갔다온 사람은 오히려 더 잘 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 말하면서 정작, 더구나 군인들이 징집된 시민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사병출신은 국가유공자조차 아니다. 법적으로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현충일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여전히 아무 보상도 대가도 없이 알아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 내놓으라. 그러니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서?


확실히 올해 현충일은 달랐다. 진짜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현충일이야 그냥 현충일이지 싶었었다. 지금까지 해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단지 대통령 문재인의 연설만 다를 뿐인 추념식이 될 것이라고. 아주 편하게 늦잠을 잤다. 모처럼 휴일이라 하주 허리가 부러지도록 고양이랑 뒤엉켜 하루를 보냈다. 깨어나 보니 진짜 완전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현충원 입장을 국가유공자들과 함께 하고, 대통령 옆자리에도 국가유공자들을 앉히고, 보훈병원에 들러서 환자들을 위문하고. 무엇보다 작년 지뢰를 밟아 발목을 다친 김경렬 상병을 대통령이 직접 유공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청계천에서 손목이 빠지도록 일하던 여공들도, 간호사로 광부로 먼 외국으로 나가야 했던 이들까지도 모두가 애국자다. 김을 매던 농부도, 물고기를 잡던 어부도, 전신주에 오르던 기사들도 모두가 애국자이며 보답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도 애국자다.


저들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비로소 현충일이 나 자신의 기념일이 되었던 것이었다. 나의 선조와 나의 일가친척과 나의 이웃과 어쩌면 아무 관계도 없을 수많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기억하는 날이어야 했다. 내가 기념식의 주인공이었다. 어쩌면 덕분에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국가가 그들의 공로를, 그들의 희생과 기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최대한 보상하려 노력하고 있다.


비단 돈 얼마가 주머니에 들어와서가 아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있어서도 아니다. 희망이다. 기대다. 그리고 신뢰다. 국가는 국민을 저버리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이들을 버리지 않는다. 사실 이런 게 진짜 보수일 텐데도. 국가도 국민도 민족도 부정하는 진보라면야 다 부질없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야 이런 당연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눈만 감았다 뜨면 세상이 달라진다. 잠시 눈돌리고 다른 짓 하다 보면 어느새 뒤쳐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는 벌써 오래전이 이루어졌어야 할 일들이었다. 그나마 이 시대를 살고 있기에 그래도 달라진 세상을 직접 보고 겪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자식을 잃고서 평생을 한 번 아무런 보상도 대우도 받지 못하고 가신 분들도 적지 않으니. 문재인이라서 다행이다. 내가 선택했어서 정말 다행이다. 다행스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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