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도 경험한 일이다. 오래전 어느 게시판에서 누군가와 논쟁이 붙었었다. 너무 사정없이 몰아붙인 탓인지 나중에는 논쟁이 아니라 감정을 앞세운 사정처럼 되고 말았다. 그래서 누가 욕을 먹었을까? 논리적인 비판과 감정적인 호소 가운데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내가 더이상 인터넷공간에서 논쟁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된 계기였다. 그냥 내 생각을 써서 알리지 더이상 누군가와 생각을 교환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당연히 약자를 동정하려 한다. 그런데 동정받는 약자란 선량한 약자여야 한다. 그리고 선량하다는 것은 남들처럼 능동적이거나 적극저이거나 집요하거나 영리하거나 계산적이지 않은 어떤 이상적인 순수함이나 순결함 같은 것이다. 한없이 깨끗하고 한 점 부끄러움도 더려움도 없어야 비로소 동정받을 자격을 갖는다. 이를테면 성폭행 피해자를 동정하다가도 피해자의 사소한 문제가 드러나면 그것을 이유로 오히려 비난을 퍼부어대는 심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성폭행당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하면 그마저도 충분히 의심을 살 이유가 된다. 자기가 아는 '순수한' 성폭행 피해자는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순수한' 흑인과 '순수한' 소수성애자와 '순수한' 노동자, 혹은 '순수한' 세입자 같은 것이다.


어째서 단지 법이 그렇게 되어 있을 뿐 리쌍이 부당하게 세입자의 권리를 침해한 경우임에도 세입자에게 더 많은 비난이 쏟아지는가. 전건물주가 편법으로 환산보증금을 5억으로 만든 탓에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건물주와의 구두계약에도 불구하고 무려 수 억에 이르는 손해를 입고 가게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물론 맞다. 그나마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이미지가 직접 이익으로 이어지는 인기인인 때문이다. 아니었다면 저런 식으로 덤비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당하게 이익을 빼앗기고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목숨걸고 덤비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은 결코 선량한 행동이 되지 못할 테니까. 일방적으로 두들겨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그저 주저앉아 울고 있다면 옷이라도 벗어 걸쳐주겠지만 같이 죽자고 계속 덤벼든다면 그 어리석음만을 비웃을 뿐이다.


물론 법적으로 리쌍도 할 만큼 했다고 본다. 법이 그따위인데 굳이 리쌍이라고 법을 넘어서 그 이상으로 해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반드시 다른 한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 모호하고 애매한 경계에 바로 법이 있고 제도가 있다. 혹은 관습이기도 하고 문화이기도 하다. 합쳐서 구조고 환경이고 현실이다. 리쌍이야 해 줄 만큼 해주었다 하더라도 우장창창 입장에서는 여전히 수 억의 손해를 본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어지간히 돈많은 자산가라도 수 억이면 매우 큰 돈이다. 1억만 되어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그냥 바로 '억'소리 나오고 만다. 그래도 물고 늘어질만한 부분도 있고 비집고 들어갈 틈도 있으니 어떻게든 버텨 보는 것이다. 단돈 몇 천 원에도 달동네의 아주머니들은 대낮에 알몸이 되어 길바닥에 뒹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행동이 과연 잘못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차라리 우장창창이 세입자가 아니었으면 그런 비난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수준의 강자였다면 비슷하게 책임과 동정이 나뉘어졌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아무 저항도 않고 리쌍의 건물 앞에서 울고만 있었다면 동정은 받았을 것이다. 울지도 못하고 그저 소주만 먹다가 어디서 사고라도 당했다면 편들어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약자가 순수하지 못했다. 약자가 보통사람들처럼 욕망과 의지를 내보였다. 더구나 강자를 곤란케 할 수 있는 수단들까지 교묘하게 동원하고 있었다. 약점을 물고 빈틈을 헤집으며 사람과 여론을 동원하고 있었다. 이것은 약자가 아니다. 동정받는 약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장창창을 전보다 더, 갑질하는 건물주보다도 더 혐오하게 된 이유였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에서 벗어났다. 선량한 약자는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원래 법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법대로 한다면 리쌍처럼 하는 것도 그리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건물주들보다 양심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법이 정의일 수는 없다. 법보다 중요한 것이 당장 내가 입게 될 손해다. 정의보다 더 절박한 것이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 할 자신의 삶이다. 법을 지키자고 내가 죽을 수는 없다. 법을 바꿔야 한다고 그동안 굶을 수만도 없다.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다. 리쌍을 굳이 비난하지 않지만 우장창창의 사장도 마냥 탓하기 어렵다. 단지 전술이 잘못되었다. 아니 그래도 여론의 비난을 받는 대신 합의를 이끌어냈으니 성공했다 할 수 있다. 역시 대중의 여론보다는 당장 내가 먹고 살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나마 리쌍은 양심적인 건물주였다는 것이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동정할 만큼 나름대로 인정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피눈물을 쏟아내야만 했다. 고작 수 억의 돈이다. 도대체 평범한 월급쟁이들이 몇 년을 일해서 모으면 그 돈을 벌 수 있을까. 중국의 경제제제로 상인들 어려워졌다니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래 남의 돈이라는 게 그렇다. 그나마 다행이다. 좋게 해결됐다니.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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