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최소한의 비용이 있다. 일단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병이 나면 치료받아야 하고, 안좋은 일을 당하면 당연히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며, 부당한 압력이나 강제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위해서 문화생활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쨌거나 수입 가운데 반드시 쓰여야 하는 돈이다. 그리고 대부분 복지란 바로 이런 부분들을 대상으로 한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기능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공업무는 바로 이런 부분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어떻게하면 국민들이 안전하게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며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어차피 정부에서 나서서 지출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알아서 지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비용들이다.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그같은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소득을 누릴 수 없기에, 소득이 충분하더라도 그럴 수 없는 다른 사정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기에 그 부분 만큼 사회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돈을 모아서 함께 지출하도록 한다.


그래서 실제 많은 복지정책들이 공공보험의 성격을 띄고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당장 국민연금만 해도 그렇다. 건강보험은 말할 것도 없다. 노인요양보험은 아마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일정한 보험금을 내도록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금으로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복지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국적도 민족도 인종도 다른 외국에서까지 그토록 안타까워하며 깊이 추모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처음에는 동정도 하고 연민도 하다가 유가족들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해 듣는 순간 태도가 완전히 돌변해 버렸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기 아닌 남이 무언가 혜택을 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생떼같은 자식이 죽었어도 그 보상을 생각하면 오히려 경멸과 혐오마저 대단한 아량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런데 함께 돈을 모아 함께 쓰자는 복지가 그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의미있게 받아들여지겠는가.


복지가 지출이라는 주장에 대한 가장 큰 반론이다. 정부의 재정으로만 본다면 분명 복지는 지출이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본다면 복지란 어차피 생존을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할 최소한의 비용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서는 반드시 지출되어야 하는 돈이다. 그것을 단지 정부가 중간에서 중개하며 대신하는 것이다. 개인의 역할을 정부에서 나누어 편의성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굳이 개인이 수고하며 염려하지 않아도 되도록. 문재인이 주장한 공공부문의 일자리도 그런 관점에서 봐야만 한다. 이미 어떤 형태로든 지출되고 있는 비용들을 정부에서 일괄하여 효율화한다. 그 과정에서 고용되는 개인들은 결국 원래라면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부분을 대신하는 존재들이다. 어차피 옷이 필요하다고 직접 실을 잣고 천을 짜서 옷을 지어입는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딱히 이익이 남는 일도 아니고 남겨서도 안되는 일이기에 비영리기구인 정부에서 모든 것을 대신한다.


역시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복지가 안된다는 이야기다. 공공부문 일자리라는 것이 이렇게 크게 논란을 불러오는 이유다. 제갈량이 자신의 병서인 '병법 24편'에서 동이족에 대해 그리 말한 바 있었다. 가만 냅두면 자기들끼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여 끝내 다투다 알아서 멸망할 것이다. 단지 정부에 의해 고용되어 안정된 일자리를 얻게 될 사람들만을 질투한다. 그 돈이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만을 아까워한다. 결국 자기도 누리게 될 서비스임에도 당장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누리게 될 혜택에 분노한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각자 알아서 자기 살 길 찾아 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세월호는 확실히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큰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한국사람들을 그저 이상적으로만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사실 분기다. 과연 한국사회가 공동체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단지 개인의 집단으로 남을 것인가. 공공부문의 강화는 공동체의 강화다. 공공의 이익과 책임에 대한 개념의 강화다. 강한 정부란 강한 공동체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다. 서로를 위한 양보와 희생이다. 정부가 아니다. 국가가 아니다. 개인들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전체를 통해 여전히 개인들이 하나가 된다. 공공의 지출을 인정하는가 아닌가. 용납하는가 용납하지 못하는가. 그다지 기대는 없다. 나에게 직접 피해만 주지 않으면 박근혜도 최순실도 상관없다. 그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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