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 다른 것 생각할 여유따위는 없다. 그냥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다. 그냥 팔다리가 알아서 움직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물위에 떠있기 위해서. 아무거라도 잡고 버틸 것을 찾기 위해서. 눈으로 보고 찾으면 늦다. 손에 닿는 대로 바로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텨야만 한다. 때로 사람을 구하려다가 덩달아 물속으로 끌려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두운 밤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팔을 잡아끈다. 손에 칼이 들렸으면 일단 휘두르고 보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인데 역시 자신과 함께 며칠 굶은 이웃이 한 줌 먹을 것을 장만해 왔다. 그래도 남의 것이니까. 자기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일단 내가 먹고 살아야 한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않는 사람이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원래 정의도 윤리도 도덕도 배부른 사람들이나 따지는 한가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남혐과 여혐 논란의 근본원인이다. 일단 여성들은 남성들의 폭력이라는 직접적인 위협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길에서도 낯선 그림자만 보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한다. 일상적인 자리에서도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눈과 입과 손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부조리의 원인이 누구로부터 비롯되는가.


남성 역시 그렇지 않아도 현실을 살아가기가 고달프다. 그래도 남자라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거의 세뇌되다시피 주입받으며 자랐다.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번듯한 직장을 잡아야 한다. 여성들과 경쟁해야 한다. 자신들의 절박한 처지를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다. 다 여성을 위해 그러는 것인데. 억울하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이 처한 열악하고 절박한 처지는 여성의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줄세우기를 강요당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남들과 같아지기를 강제당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어렵더라도 힘들더라도 한심하더라도 그래도 자신은 살아간다. 자신을 살아갈 수 있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남들과 같아야 하니까. 남들보다 나아야 하니까. 여성들이 남성으로부터 느끼는 공포가 보다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라면 남성이 여서에 대해 느끼는 원망과 분노는 그보다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남성이기에 지워진 사회적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에 부합하지 못한 현실의 좌절과 절망, 무엇보다 그같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로서 길러진 자존감이다. 누군가에 탓을 돌리기라도 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모두 여성들 때문인데 여성이 자격을 잃어버렸다.


여성해방은 그래서 남성해방이기도 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또한 남성주의이기도 하다. 굳이 남성이 더이상 필요이상의 사회적 책임감을 독점하려 해서는 안된다. 진정 남녀평등이란 그냥 알아서 자기들끼리 사는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남성이기 이전에. 여성이기 이전에. 내 삶이고 나의 판단이며 선택이고 내 책임이다. 여성과 자신은 분리한다. 사회와 타인과 자신을 분리한다. 오롯한 자신의 삶이다.


날선 말들로 서로를 상처입힌다. 그리고 스스로 상처입고 만다. 다른 사람만 일방적으로 상처입힐 수 있는 말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옥 가시를 드러낸다. 사납게 벼려진 상처가 더욱 상대를 헤집으려 한다. 내가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내가 살려 한다. 필사적인 발버둥이고 비명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인지 자신도 모르기에 막연히 쏟아내는 울음소리다. 서로가 가해자고 서로가 피해자다. 진짜 가해자는 다른 곳에 있다.


누군가를 원망해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거의 드물다. 그래도 위로는 된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할 수 있다. 차라리 미워하기라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이지는 않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으로 자신을 속이고 만다. 그렇게밖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체념이고 절망이다. 자포자기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도 좋다.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끝낸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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