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사가 거리를 걷다가 문득 허름한 옷을 입고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배고프니? 이 돈으로 빵이라도 사먹으렴."

그러자 그런 행동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비판한다.


"배고픈 아이가 그 아이 뿐인가?"

"다른 더 많은 어쩌면 더 배고픈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외면하는가?"

"위선이다."

"모순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 돈으로 고작 빵 한 덩이만 사먹을 수 있을 텐데 그것으로 되겠는가."

"입고 있는 옷만으로도 며칠 빵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갑에 아직 상당한 돈이 있던데 그 돈이면 며칠은 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값싼 동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값싼 동정이면 안되는 것일까?


동물권을 주장하거나 혹은 생물권을 주장하는 식단 - 이른바 채식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흔히 비난하며 쓰이는 논리들일 것이다.


개만 동물이 아니다. 개가 아니더라도 고기나 혹은 가죽을 얻기 위해 도살당하는 동물이 지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소는 안된다면서 어째서 닭은 된다 하는가. 닭고기는 안먹으면서 어째서 물고기는 먹으려 하는가. 식물도 고통을 느낄 줄 안다.


원천봉쇄의 오류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다.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없다면 누구도 도와서는 안된다. 모든 재산을 헐어 도우려는 것이 아니면 아예 도와서는 안된다. 모두가 아닌 상태에서 돕는 것은 단지 위선이고 모순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 가운데 유독 마음에 쓰이는 한 사람을 도와도 누군가를 돕는다는 자체는 성립하는 것이다. 수천억의 재산을 가지고 단지 천 원 짜리 한 장 적선했을 뿐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자기의 돈을 썼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만큼이라도 누구를 도와 본 적 있는 것인가.


하긴 그러고 보면 저와 같이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과격하게 반응하는 대부분은 그러한 주장과 행동이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 여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남을 돕지 않았으니까. 내가 남을 돕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남을 도우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행동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저처럼 직접적으로 반응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해도 대부분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러니까 동물을 죽여 고기를 먹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동물을 죽여 가죽이나 부산물들을 얻으려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아마 불교에서는 섭생과 살생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던 기왕이면 큰 짐승을 잡아 여럿이서 버리는 것 없이 나누어 먹는다.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죽여 그 고기를 먹더라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 이상의 불필요한 살생은 삼간다. 그러니까 타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베지테리언이 여러 단계로 나뉘는 이유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물을 죽이더라도 개나 고양이 만큼은 죽이고 싶지 않다. 그래도 같은 포유동물만큼은 죽여 먹고 싶지 않다. 물고기는 그래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심한 경우가 식물이라도 상처를 입히고 생명을 빼앗는 것은 절대 피하려 한다. 과일도 자연적으로 떨어진 낙과만 먹고, 재생가능한 식물의 일부만을 섭취하려 한다. 바로 동물권 주장을 비난하면서 인용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생명운동가들일 것이다. 그로부터 자기가 생각하는 불필요한 살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반드시 필요한 살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러니까 내가 허용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살생이란 어디서부터인가.


유비가 아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백 가운데 하나가 선해도 선이고 하나가 악해도 악이다. 그러니까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가운데서도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아끼는 마음이 더 선한 마음인 것이다. 인도 신화에서 인드라가 아수라에게 이기고 오히려 아수라의 딸을 겁탈하고도 선신으로 여겨진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새둥지를 지키기 위해 전차를 돌려 아수라에 맞선 행위가 오히려 정의의 신인 아수라보다 더 선한 신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다른 모든 동물들도 생명들도 인간을 위해 희생하니까. 그렇지만 다만 하나라도, 다만 한 종류라도, 다만 한 마리라도 그로부터 구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과연 그런 행동들이 비난과 조롱을 받을 일인가.


나 역시 고기를 좋아한다. 운동을 하면서 고기를 전보다 더 많이 먹게 되었다. 그렇다고 육식을 줄이자는 생명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가면, 다만 나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지키고자 애쓰고 있을 뿐이다. 최소한 먹을 것을 남기거나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든 딱 먹을 만큼만 사서 알뜰히 버리지 않고 다 먹음으로써 낭비를 최소화한다. 그러면 최소한 나로 인해 다만 한 마리라도 불필요하게 도살되는 동물은 줄어들지 않을까.


저마다 자기만의 생명을 아끼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못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인 것이다. 다만 전체 가운데 일부라도. 모두 가운데 단 하나라도. 그것이 선이고 그것이 인간의 양심인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양심은 지금껏 계속 확장되어 왔다. 전보다 더 여유로워진 만큼 반드시 필요한 살생의 범위도 축소되어 왔다. 굳이 더이상 전처럼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다. 아직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굳이 생명권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의 근거일 테고. 


아니 차라리 그런 수준이라도 되면 모르겠는데 소나 돼지의 희생이 안타까우니 그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고 소나 돼지의 희생이 안타까우므로 개나 고양이도 함께 도살하자. 닭과 오리 역시 사람을 위해 도살되고 있으므로 퓨마도 고래도 모두 사람을 위해 죽이자.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전체를 살릴 수 없으니 차라리 전체를 죽이자. 과연 이런 것을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다만 하나라도 다만 일부라도 살리기 위한 노력을 살리지 못한 나머지를 이유로 무시하며 모두를 죽이자 말한다. 아주 비열한 말꼬리잡기다. 그런 것을 자신들은 논리라 착각한다.


과연 저 신사의 행동은 잘못되었는가. 모든 불쌍한 이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으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내어 도우려 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동물을 살리려 하지 않으니 일부의 동물을 살리려는 행동은 과연 잘못인가. 무시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도 의미가 있다. 전체가 아니라 다만 하나일지라도 가치가 있다. 인터넷에서 텍스트로만 사고하는 사람은 모르는 현실의 실재하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이상한 놈들의 기만 살려주었다. 갈수록 인터넷이 우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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